흥남철수의 주역: 玄鳳學과 알몬드 군단장
“닥터의 말은 알아들었다. 나(알몬드 제10군단장)는 피난민 문제와 관련한 닥터의 말에 전면적으로 찬성한다. 다만 적은 興南(흥남) 남쪽 원산으로 急進(급진)하고 있다. 지금 단계에서 무엇 하나 확약할 수는 없지만….”
영화 <국제시장>의 첫 장면에 등장하는 興南(흥남)철수 작전의 모습은 매우 감동적이다. 그 다급한 상황에서도 자유를 찾는 피난민들을 선박으로 南下(남하)시켰던 일은 미국으로서도 두고두고 자랑스러운 일일 것이다.
그런데 흥남철수 때, 북한 피난민 9만8000명을 미군 LST에 실어 남하시키기 위해 미 제10군단장 알몬드 少將을 설득했던 인물이 누구인지는 영화 <국제시장>에서는 자세히 밝히지 않았다. 그가 바로 玄鳳學(현봉학)이라는 이름의 함흥 태생의 의사이다. 영화 <국제시장>에는 알몬드 군단장 옆에 서서 뭔가 간절히 호소하는 듯한 한국인 얼굴의 인물이 등장하지만, 그의 이름과 경력 등은 모두 생략되었다. 세브란스 醫專(연세대 의대의 前身) 출신 의사로, 미국 유학 후에 귀국해 국내 최초로 임상병리실을 개설했던 현봉학은 기묘한 인연으로 미 제10군단에 근무하게 된다. 그 사연은 매우 운명적이었다. 1950년 6월28일 서울 함락 때, 그는 歸家(귀가)할 여유조차 없어 그냥 피난민 대열에 섞여들었다. 그는 피난지 부산에서 해군에 입대했다. 미국 유학에서 귀국한 지 3개월, 그는 의사로서 보다도 고급 영어를 하는 통역관으로 重用(중용)되었다. 같은 해 10월 중순, 현봉학 통역관은 미 제10군단장 에드워드 M. 알몬드와 처음 만났다. 알몬드가 마침 38선 북쪽 금강산 남쪽인 동해안의 高城(고성)에 주둔했던 우리 해병대사령부를 방문, 申鉉俊(신현준) 해병대사령관과 회담할 때 현봉학이 통역으로 배석했다. 그때 해병대는 해군참모총장의 지휘 하에 있었다.
현봉학은 알몬드의 이름을 알고 있었지만, 맥아더의 심복이라는 정도의 인식 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 무렵 알몬드는 仁川(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키고, 이어 西海(서해) → 南海(남해)를 빙 돌아서, 동해안에 상륙한 다음 북한군을 추격하던 시기였던 만큼 그 위엄이 하늘에 닿아 있었다.
맥아더는 한국 전선을 둘로 나눠 서부 전선을 워커 중장에게, 동부전선은 알몬드 소장에게 맡겼다. 개성이 다른 2人을 통괄해 북진통일을 이룩하겠다는 맥아더 構想(구상)은 ‘1개 戰線(전선), 2인의 지휘관’이라는 兵法上(병법상)의 과오를 범했음을 앞서 지적한 바 있다.
그야 아무튼 申鉉俊 해병대사령관과의 회담이 끝나자, 알몬드의 화제는 玄鳳學 통역관을 향했다. 영어를 제대로 말하는 한국인이 그리 많지 않았던 시대였던 만큼 당연한 관심이었다.
“貴君(귀군)의 고급영어에 깜짝 놀랐다. 어디서 배웠는가?” 현봉학은 이때 28세. 알몬드는 그 두 배의 연령이었다. “貴國(귀국)의 버지니아州 리치몬드에서 배웠습니다.” 현봉학은 세브란스 의전에서 病理學(병리학)을 배운 후 미국에 2년간 유학했다고 말했다. 그러자 알몬드는 이렇게 말했다. “놀랄 일이네. 나는 루레이(Luray) 출신, 같은 버지니아州이지. 州都(주도) 리치몬드로부터 그리 멀지 않아. 유명한 鍾乳(종유·탄산칼슘 성분이 흘러내려 만들어내는 형체)동굴이 있는 곳이야.” “루레이의 종유동, 저도 그 곳을 알고 있습니다.” “굉장하다! 수만리 떨어진 한국 땅에서 내 출신 州의 대학에서 공부한 청년이 있다니… 그럼, 貴君(귀군)은 버지니아州立大 의대에 다녔겠군.” “그렇습니다.” 참모부장 에드워드 포니 大領(1965년 別世)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흥남철수 때 포니 대령은 ‘搭載(탑재)참모’를 겸했는데, ‘한국의 쉰들러’ 현봉학을 친절하게 도와주는 역사적 인물이 되었다. 후일, 탑재참모로서 그는 ‘피난민 탑재를 위한 기술적 代案(대안)’을 작성해 알몬드 군단장을 설득했다. “貴君의 출신지는?” “함경남도 咸興(함흥)입니다.” “뭐라고? 우리는 영어를 잘 하면서 함경도를 잘 아는 사람을 찾고 있어. 貴君이 딱이야!” 함흥에 사령부를 설치할 계획인 미 제10군단은 영어를 하는 현지인이 없어 몹시 난처해 하던 참이었다. 알몬드 군단장에게 현봉학의 등장은 안성맞춤이었다. 알몬드는 신현준 사령관에게 강청해, 현봉학을 미 10군단의 民事部 顧問(민사부 고문)으로 스카웃했다. 당시, 알몬드는 陣中(진중)에서 매우 사치스러웠던 것으로 알려졌다. 심지어 물 마시는 컵도 極上品(극상품)이었다. 삼시세끼도 고급 레스토랑 수준이었다. 누가 이런 호화스러운 食器(식기)와 寢具(침구)를 가져다주었는지, 알몬드의 私物(사물)을 운반하는 데만 1∼2소대가 동원되었다고 한다. 검소한 목사 가정에서 자란 현봉학은 씀씀이의 차원이 다른 미국 장성의 모습에 아마도 문화적 쇼크를 느꼈을 것이다.
故 현봉학 씨
현봉학은 1922년 함흥에서 현원국 목사의 네 아들 중 차남으로 출생, 함흥고보를 졸업했다. 함흥은 함경남도의 도청 소재지이며, 당시 북한에서는 평양에 이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西洋風(서양풍)의 도시라는 점에서는 평양을 오히려 능가했다. 그는 1941년 세브란스 醫專을 졸업했으며, 그의 부모 형제는 함흥이 공산 치하에 들어간 직후에 서울로 도피해 왔다. 그의 4형제 중 맏형은 이화여대 문리대 학장을 지낸 신학자 故 玄永學(현영학) 교수, 두 동생은 在美 소설가 피터 玄과 故 玄時學(현시학) 해군 제독이다.
평소, 그는 어린 시절의 소꼽동무와 高普 동창을 다시 만나는 꿈을 꾸어 왔다. 그 꿈은 이루어졌다. 현봉학은 미 제10군단과 함흥의 민간단체와 사이에 중개역할을 정력적으로 수행했다. 그의 전공분야인 병원뿐 아니라 학교, 기독교 교회와도 깊이 교제를 했다. 국군과 유엔군이 북진, 북한군을 압록강과 두만강 너머로 몰아내기 직전의 유엔군 앞을 중공군이 막아섰다. 비교적 북진이 순조롭던 동부전선에서도 의심스런 양상이 전개되었다. 미 제10군단 사령부에는 이런 얘기가 나돌았다.
“맥아더 유엔군사령관으로부터 후퇴명령이 내려왔다. 지금, 서부전선에서는 중공군의 공세로 退路(퇴로)가 끊겨 전멸의 위기에 처해 있다.” “알몬드에게 直訴하는 수밖에 없다!” 현봉학은 미 10군단 사령부 내에서 돌고 있는 얘기를 듣고 자기 귀를 의심했다. 유엔군이 떠난 후 공산군이 들어오면 누가 유엔군에게 협력했는가를 철저히 조사할 것이다. 그러면 그의 친지와 친구들은 몰살당할 것이 뻔했다. 그 순간 그는 미 제10군단의 민사부 고문으로 활동한 것을 후회했다. 우선, 현봉학은 민사 부문의 직속 上官인 무어 대령과 만났다.
“대령, 내 말을 반드시 들어 주시오. 이미 함흥의 남쪽은 공산군의 세력 하에 있는 만큼 함흥 시민에게는 도피할 길이 없어요. 유엔군이 떠나고 난 후 공산군은 유엔군 협력자를 색출해 고문·살육할 겁니다. 유엔군이 협력자들을 버리고 간 것이 세계에 전해지면 미국에 큰 치욕이 될 것이오. 대령, 어떻게 하든 함흥 시민을 살려 주시오!”
무어 대령은 이렇게 답했다. “닥터, 이건 전쟁이오. 전쟁에서는 軍이 우선입니다. 안 됐지만, 흥남항의 설비는 너무 빈약합니다. 나는 지금 우리 제10군단 예하 장병 전원이 탈출할 수 있을까, 어떨까를 고민하고 있어요. 닥터의 입장은 이해하지만,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면 안 됩니다.” 무어 대령은 자기 임무에 엄정한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한 번 안 된다고 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봉학은 물러서지 않았다. “이제는 알몬드에게 直訴(직소·절차를 밟지 않고 윗사람에게 직접 호소함)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알몬드 군단장은 매우 바빠 면담의 기회를 잡을 수 없었다. “왜 그래, 닥터? 우울한 얼굴을 하고….”
우연히, 포니 대령과 마주쳤다 현봉학은 함흥 시민의 위기를 호소했다. 1950년 11월30일, 포니 대령이 알몬드 군단장과의 면담을 주선했다. 현봉학은 함흥 시민의 어려운 형편을 설명했다. 알몬드 군단장은 갑작스런 패배의 충격을 견뎌내며 처리해야 할 일이 너무 많은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일개 통역의 호소를 끝까지 경청했다. “닥터의 말은 알아들었다. 나는 貴君의 말에 전면적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지금 무엇 하나 확약할 수 없다. 敵(적)은 함흥을 우회하여 남쪽의 元山 방면으로 急進(급진)하고 있다. 우리 7개 사단, 10만 장병을 우선 탈출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더욱이 시간이 제한되어 있다. 피란민 문제는 앞으로 포니 대령과 상의하라.”
알몬드는 이렇게 대답한 후 대화가 끝났다는 몸짓을 했다. 현봉학은 순간 ‘한 번 더 호소할까’하고 머뭇머뭇 했다. 그때 포니 대령이 현봉학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禮를 표시하고 退室(퇴실)해야만 했다. “닥터, 알몬드 군단장은 東京(맥아더사령부)의 양해를 얻지 않으면 할 수 없는 큰일에 부딪친 거야. 그러나 이만큼 호의적으로 대답했으니 너무 걱정하진 말게.” 포니 대령의 위로에 현봉학은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로부터 2주일간, 현봉학의 마음은 절망과 희망 사이로 오락가락했다. “피난민 10만 명을 군함으로 철수시킨 것은 세계사 최초의 쾌거”
1950년 12월4일, 미 제10군단은 사령부를 咸興(함흥)에서 동남방 16km의 항구 흥남으로 옮겼다. 12월14일 오후, 현봉학은 “군단장이 소집하는 회의가 열렸다. 닥터도 참석하라”는 무어 대령의 연락을 받고 함께 알몬드 군단장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이미 포니 대령 등 많은 고급장교들이 참석해 있었다. 그 가운데는 국군 제1군단장 金白一(김백일) 장군과 2명의 국군장교도 자리를 함께 하고 있었다. 金白一 장군도 북한시민들의 피난을 위해 身命(신명)을 걸었던 군인이었다. 김백일 장군은 “함흥 피난민들을 LST(대형 양륙함)에 승선시키지 않으면, 국군 제1군단은 피난민들과 함께 陸路(육로)로 철수하겠다”고 極言(극언)을 했다는 것이다. 회의에서 알몬드는 다음의 要點(요점)만을 말하고 곧 해산을 선언했다.
“후방인 元山(원산)은 이미 적의 手中(수중)에 떨어졌다. 이제 陸路(육로)에 의한 탈출은 불가능하다. 탈출로는 海路(해로)뿐이다. 함흥에서 흥남으로 운행되는 深夜(심야) 기차에 약간의 餘力(여력)이 있다. 4000~5000여 명의 함흥시민을 이곳 흥남으로 운송하도록 한다. 조속히 수배하도록! 상황은 한없이 나쁘지만, 최악은 아니다.” 朗報(낭보)였다. 꽉 막혔던 가슴이 금세 풀렸다. 현봉학은 16km 거리의 함흥으로 달려가 이 吉報(길보)를 여러 민간단체들과 기독교인들에게 알렸다. 전달을 끝내고 함흥驛(역)에 나가 보았더니, 이미 5만을 넘는 인파가 驛前(역전) 광장에 모여 있었다. 혹한기인데도 미군 헌병은 몰려드는 인파 정리에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결국, 기차에 탑승한 것은 우익인사와 기독교도 등이었고, 나머지 인파는 흥남으로 향하는 길을 걷기 시작했다.
놀란 미군 헌병이 길을 가로막아 보았지만, 파도처럼 몰려오는 인파를 되돌리지 못했다. 군용 차량의 흐름에 지장을 주는 것 이외에 피난민들 속에 공산당 스파이가 섞일 우려가 매우 컸다. 그래도 인파는 미군 헌병의 저지를 뿌리치고 산길을 걸었다.
흥남항 부두는 피난민들로 흘러넘쳤다. 함흥 시민뿐 아니라 함경북도 방면으로부터 내려온 피난민들도 가세해, 그 수는 대번에 10여 만 명에 달했다. 미 제10군단은 자기들뿐만 아니라 피난민 10만 명의 식량과 숙소 문제에 직면했다. 그 중에는 친지의 가정 및 학교 내에 숙박할 수 있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지만, 태반은 난방도 식수도 취사시설도 없이 주먹밥과 毛布(모포)만으로 영하 10도의 강추위를 견뎌내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