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정치.사회/朴正熙 照明

수출 100억불 달성

淸山에 2009. 8. 29. 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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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출 100억불 달성 


 
5. 16 전 상황

“쓰레기통에서 과연 장미꽃이 피는가”
1955년 10월 8일 UN 한국재건위원회(UNKRA)에서 인도 대표 [메논]이 한 말이다.


한국을 돕기 위해 UN에서 파견된 특별조사단의 단장인 메논이 일주일동안 방문후 보고한 내용이다. 그는 한국 땅에서 경제 재건을 기대한다는 것은 마치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피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고 결론지었다. 당시의 사회는 혼란과 가난, 그 자체였다. 6.25이후 한국은 생산시설 파괴로 인해 외국의 원조로 생존할 정도의 어려운 시기였다. 1960년말 경제 사정을 보면 일인당 GNP는 단돈 87달러였고, 외환보유고는 2천3백만 달러에 불과했다. 무역규모는 대만, 필리핀에도 훨씬 못 미쳤다.

5.16후 정권을 잡은 박정희의 경제에 대한 의지가 남달랐다.


박정희 대통령은 가난과 낙후한 시골의 빈농 출신으로서 어려서부터 가난과 굶주림을 겪고 보아왔다. 그래서 그에게 있어서 가난과 낙후성은 경멸과 기피의 대상이었다. 따라서 박정희의 주도하에 이루어진 경제개발의 집념은 그가 자라온 환경에 비추어 설명할 수 있다.

 

개발계획, 준비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경제개발에 대한 준비를 시작했다. 우선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에 중점을 두었다. 그 당시 60년대의 한국 경제 상황은 4.19와 5.16의 정치적?사회적 변혁이 있었고, 미국의 경제원조가 급격히 감소하며 원조의 조건도 까다로워졌다. 게다가 한국의 경제라인은 기존의 미국에서 일본으로 서서히 전이되는 과정에 있었다.


한국이 이런 변화에 적응해 가기 위해서는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가 최우선 과제였다. 그래서 그들은 한일 국교 정상화를 서둘렀고, 경제개발의 목표를 위한 투지를 불태웠다.

 

박정희는 농업부문을 경제계획의 첫 번째 목표로 삼고 ‘농어촌 고리채 정리’, ’농산물 가격안정‘등 일련의 중농정책을 펼쳐나간다. 이때 박정희는 자원의 빈곤에서 경제부흥을 위해서는 인력개발을 통한 수출만이 경제개발의 관건이라고 결심하고 수출진흥에 역점을 두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준비한다.

 

진행공업화에 중점을 둔 그들은 1961년 7월 22일, ‘종합 경제 5개년 계획’을 발표하고, 이에 약간의 수정을 가한 다음 1962년 1월 13일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한다. 이는 민간인의 창의를 존중하되, 정부의 지도아래 산업의 근대화와 국민소득의 증대를 구현하고자 한 것이었다.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1962년부터 66년까지를 기간으로, 前정권이 해결하지 못한 무능과 가난을 타파하려고 했다. 그들은 ‘모든 사회 경제적 악순환을 과감히 시정하고 자립경제의 달성을 위한 기반을 구축한다’는 목표를 내걸고, 에너지 공급원의 확보 등 주요역점 사업을 발표했다. 그 결과 국민총생산에 있어서 성장을 경험했고, 2차산업의 성장이 두드러졌다. 또한 경제발전의 기반을 구축하였고, 차츰 공업국의 입지를 다지기 시작했다.

 

제 2차 경제개발은 산업구조의 고도화와 수출증대에 주력하였고, 농촌문제에 관심을 갖고 ‘산업구조의 근대화와 자립경제의 확립을 촉진’한다는 목표를 내세웠다.


제2차 경제개발계획은 당초계획을 상회하는 대폭적인 경제성장을 기록했다. 공업부문의 빠른 성장으로 인해 67년의 8.9%의 성장률을 보이며 고도성장의 발판을 닦은 뒤 69년에는 15.5%라는 성장률을 보여 사상 최고의 고도성장을 이룩했다. 이 시기에 본격적으로 공업화가 추진되었던 것이다.


제 2차경제 개발 계획의 성공으로 그들은 3차계획(1972~76)을 발표하기에 이르른다. 이 기간에 그들은 연평균 10.2%라는 고도 성장을 이룩했고, 수출 액수도 거의 배수 이상으로 성장했다.
박정희는 제 3차 5개년 계획의 중점목표로 ‘농어촌 경제의 혁신적 개발, 수출의 획기적 증대
및 중화학 공업의 건설’을 정하고, 이러한 노력으로 새마을 운동을 벌이게 된다.

 

그러는 도중, 경제발전을 위한 박정희의 의지는 중화학공업화 정책을 추진하기에 이르렀고, 1973년 이 계획을 발표한다. 중화학공업화 정책은 60년대의 제 1,2, 5개년 계획이 성공을 거두자 실시해도 좋겠다는 판단아래 제3차 계획의 착수연도인 71년도에 시작해서 72년 말에 성안된 정책이었다. 그 당시의 목표는 ‘수출 100억불’, ‘1인당 GNP100불’이었다. 한국경제의 산업발전 단계상 경공업위주에서 중화학공업으로의 전환이 요구되었고, 자주국방을 위한 방위산업의 육성이 시급했었다.

 

그렇기 때문에 80년대의 미래상으로 제시되었던 수출 100억불의
목표가 어렵다는 생각하에 중화학공업화 정책의 수반이 불가피했던 것이다.

박정희는 정책적으로 육성해야 할 업종만을 골라 선별적으로 개발하도록 지시하고, 6대 업종을 선정하여 1973년부터 1981년까지 9년간 구체적 연차계획을 수립토록 하였다. 또한 규모에 맞는 경제개념을 도입하고, 공업구조의 고도화를 추진하였고, 국토종합개발계획에 근거를 두고 산업기지를 설정하는 등 주도면밀하게 계획을 세우고 그들은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1977년 11월 30일 제 13회 수출의 날 행사가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렸다. 오전 10시 박대통령의 입장과 더불어 기념식이 시작되었다.


“국민 여러분 오늘은 우리 민족의 역사에 영원히 기록될 날이 될 것입니다. 누가 우릴 못사는 민족이라 했습니까. ” 박대통령의 목소리가 외쳐지자 식장에 모인 모든 사람들의 얼굴에는 어느새 눈물이 흘러내렸다. 1973년부터 1981년까지의 9년을 계획 기간으로 하여 추진된 중화학 공업화 정책은 박대통령의 서거로 끝을 맺지는 못하였지만, 계획했던 목표보다 앞당겨 77년에 수출 100억불이라는

대과업을 이루게 되었다.


이러한 수출진흥 정책의 성공으로 고도산업국가 건설의 기반을 조기에 완성하였고, 80년대 초 경제 미래상을 제시하기도 했다. 또한 공업구조를 개선하였고, 공업의 자립과 중소기업을 육성하였다.
방위산업을 확립한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생산시설의 국제화를 추진하기도 하였다.

 

수출 주도형 개발전략과 공업구조 고도화를 위한 중화학 공업화정책의 추진으로 이루어진 과감한 경제개발계획의 추진의 성과로 60년대의 농업국가의 이미지는 벗어날 수 있었고, 70년대를 지나는 동안 우리나라 경제는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여 국력이 크게 신장되었다. 또한 우리가 시급히 요구되었던 자주국방에도 큰 진전이 있었고, 국민생활도 현저히 윤택해졌다.

 

 

의의 및 평가

 

제 1,2,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박대통령의 적극적이고 신념에 찬 주도로 한국의 국민 경제는 드디어 일어서기 시작했고, 우리 나라의 경제를 한 단계 끌어 올렸다. 그리고 박대통령의 통치기반을 통하여 지속적인 경제성장의 기반을 마련하여 자생적인 경제성장이 가능하게 되었다.


또한 1970년대에 추진한 중화학 공업화 정책은 한국경제의 성장의 토대가 되었으며, 고도산업경제를 결성하고 복지사회를 실현하기 위한 밑거름이 되었다. 또한 공업화의 발전만이 아닌 농업부문의

발전을 끌어들이기도 했다.

 

박대통령의 철학기조인 경제성장, 우리는 그로 인해 경제성장의 발전을 경험

했다. 무모하게만 여겨졌던 중화학 공업화 정책의 성공으로 우리는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얻었고,

이 시기의 경제발전을 토대로 우리 나라는 고도의 발전을 이룰 수 있게 되어 공업국 한국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