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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리듬과 朴正熙의 한국 근대화

淸山에 2009. 8. 29. 06:19
 
 
 

 

 
 

 

 
역사의 리듬과 朴正熙의 한국 근대화 <전문>
[ 조이제(趙利濟)·East-West Center 수석고문 ]

 

 

만 여년의 인류문명의 역사를 보면 야생식물 재배와 동물을 기르는 것도 포함해 농업기술이든 무기의 발달이든 기술적으로 우수한 민족이나 국가들이 약한 민족이나 국가를 정복하고, 지배하고, 멸종시켜 왔습니다. 이를 입증하는 선례와 사실적 증거들은 너무 풍부합니다. 최근 베스트셀러인 제레드 다이아몬드(Jared Diamond)의 『총, 병균, 쇠 Guns, Germs and Steel』에 의하면 자연적이며 지리적인 장벽으로 인한 몇몇 예외(파푸아 뉴기니)를 제외하고는 약자들이 홀로 남게 되는 경우는

거의 드뭅니다.
 
한 예로 스페인의 남미 정복을 들 수 있습니다. 당시 남미는 유럽과 아시아대륙과 격리되어 폐쇄된 대륙이었습니다. 1532년 스페인의 정복자(Conquistador)인
프란시스코 피사로(Fransisco Pizzarro)가 168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8만 명의
군대의 호위를 받고 있던 잉카의 황제 아타우알파(Atahuallpa)와 오늘의 페루
Peru)에서 대면하게 되었습니다.
 
피사로는 소총과 말의 기동력으로 순식간에 황제를 체포하고 5만명이나 되는 잉카 군대를 섬멸(殲滅)하였고, 이로써 잉카문명은 종지부를 찍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잉카제국은 말도, 총도 없었다고 합니다. 황제를 석방해 달라고 22톤의 금을 피사로에게 공납했으나 황제는 처형당했습니다. 한편 잉카제국 인구의 90%가 스페인 사람들이 가져온 질병 천연두(smallpox)로 인해 전멸되다시피 했습니다.
 
 
경제적, 사회적 기본시설 면에서 일본 식민지 통치 유산에 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기술적, 경제적 발전의 측면에서 돌이켜보면 36년간의 일본통치가 한국에게 전적으로 불이익만 주었던 것은 아닙니다. 제국주의적 팽창과 식민지 행정을 통하여 일본은 한반도에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양 측면에서 사회기본시설을 건설하고 남겨주었습니다. 한 예로 부산에서 서울을 거쳐 신의주까지 한반도를 관통하는 주요 간선철도는 중국과의 국경선을 넘어 만주의 주요도시와 전략적 링크를 제공했습니다. 한국의 동북을 통하여 서울로부터 나진(羅津)까지 이어지는 철도를

시베리아 횡단철도(橫斷鐵道)와 연결시켰습니다.
 
일제하 한반도의 경제발전은 현저한 것이었습니다. 일본은 한반도에 대한 지배권을 상실할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않고 내선일체(內鮮一體)정책을 시행하였습니다.


일본이 한반도에서 손을 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다면, 그와 같이 집중적인 사회간접자본을 투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1945년 일본인들은 식민지 한국을 떠나면서 그들이 소유했던 자산을 고스란히 남겨 두고 떠나게 되었습니다. 당시 남한내 총자산의 70~80%를 차지하고 있던 막대한 자산을 가지고 갈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러일전쟁은 러시아의 남만주 지배권과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지배권을상호인정하자는 일본의 제안을 러시아가 거부함으로써 발생한 것입니다. 만일 러시아가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다면 한반도가 독립과 주권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요? 다수의 구소련과 러시아의 역사전문가들은 이에 대해 대체로 부정적으로 답하고 있습니다. 러일전쟁 당시 일본의 정황을 감안해 볼 때, 이를 허무맹랑(虛無孟浪)한 가정(假定)이라고만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당시의 일본은 경제규모의 한계로 인해 전쟁에 필요한 군수품을 계속적으로 공급할 수 없었고, 결국 군수보급(軍需補給)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러일전쟁 당시 부산과 시모노세끼 (下關)사이를 오가는화물선을 텅 비운 채, 전략적으로만 왕래시킬 정도였다고 합니다.
 
한편 러시아에서는 볼셰비키혁명(Bolshevik Revolution)이 고개를 들기 시작하여 러시아 국내 사정이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때 일본은 미국 대통령 테오도르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에게 러일전쟁이 조속히 끝날 수 있도록 중재(仲裁)해 줄 것을 간청했습니다. 당시 러시아보다 일본에 우호적이었던 미국은 일본의 한반도 이권의 인정을 포함한 별개의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러일전쟁을

종식(終熄)시켰습니다.


이 공로로 루즈벨트는 대통령으로서는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기까지도 했으니 실로 역사의 아이러니(irony)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러시아의 영토소유에 대한 집착(執着)과 욕구(慾求)는 대단합니다. 그런 러시아가 승리했다면 만주와 한반도를 자신의 영향권에서 벗어나게 했을 리가 만무하다고 중국전문가들은 말합니다. 그랬다면 한반도는 1992년 소련의 붕괴 이후에야 해방될 수 있었을 것이고 거의 1세기 동안 서구와 북미의 교육, 기술, 과학, 개발자본, 경제 발전의 노하우에는 접근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소련은 부산, 원산, 인천 등과 같은 부동항(不凍港)의 점령을 염원하고 있었고, 이 항구도시를 군사적, 경제적 목적을 위해 소련인이 거주하는 포령(包領, enclave)으로 발전시켰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경제적인 인프라(infra)와 인력자원의 개발 차원에서 볼 때도 한반도의 근대적인
경제발전은 소련 치하에서는 3, 4세대 즉, 100년 정도 뒤떨어졌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2차대전과 특히 한국전쟁 이후 매우 어려운 시기에 미국의 막대한 규모의 원조가 있었기에 한국은 국가로서의 결속력을 유지할 수 있었고, 대대적인 기아와 경제적 파멸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AID통계에 의하면 1945년부터 1983년까지 한국에 대한 외국원조의 총 규모는 약 260억 달러에 이르렀습니다. 1961년 당시 한국의 GNP가 26억불이었으니 엄청난 규모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1953년 한미상호방위조약(韓美相互防衛條約)에 따라 한국은 안전보장, 군사 및 경제원조, 직·간접적인 기술이전뿐 아니라 문화적·제도적 영향의 혜택도 받았습니다. 이와 같이 미국은 한국의 전쟁피해복구와 경제회복을 위해 결정적 역할을 하였으며 1960년대 이후 한국 경제발전의 기반을 마련하는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한국이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미국과 긴밀한 동맹관계를 최대한 활용한 것이 급속한 경제발전에 큰 도움이 된 것입니다.


朴正熙 시대의 경제발전은 주어진 여건을 최대한으로 활용함과 동시에 필요한 여건을 창출하여 가장 실용적이며 효율적인 접근방식과 전략으로 궁극적인 국가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국민적 에너지를 집결하여 경이적인 경제성장을 이룩함으로써 자립경제와 자주국방의 목표를 달성하여 1980년대 후반에 이르러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신흥공업국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5. 결론 : 朴正熙의 도전과 역사적 조명
 
朴正熙 정권으로부터 시작된 국가발전은 역사의 리듬과 타이밍이 잘 맞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급속한 경제발전을 이룩하여 약 20 년간의 통치기간에 국민소득을 87달러에서 1,644달러로 약19배나 끌어올렸습니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한국경제 기적의 주역으로 인정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저는 몇 년 전 케네디와 존슨대통령의 안보보좌관직을 지낸 저명한 경제학자인 월트 로스토우(Walt Rostow)교수와의 대화를 통해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케네디 행정부의 각료 대다수가 그 당시 한국의 경제적인 잠재력과 능력에 대하여 강한 의심을 표명했지만, 로스토우 교수는 케네디(John F. Kennedy)를 설득하여 朴正熙의 신정부와 협력하도록 했다고 합니다. 당시 로스토우는 한국 방문을 통해 한국이 경제적 도약단계에 필요한 대부분의 필요충분조건들을 갖추고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는 朴正熙가 한국경제의 도약과 근대적인 공업국가로의 변혁이라는 과제를 성공적으로 주도했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둘째, 朴正熙 정권은 새마을운동 같은 제도개혁을 통하여 빈궁한 농촌사회의 기근을 극복하고 지니(Gini)계수상 도시·농촌간의 소득과 생활수준의 격차를 최소화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인구정책을 성공시켰고 또한 사회보장과 의료보험제도를 시작하였습니다.
 
셋째, 뉴욕타임즈의 저명한 논설위원, 니콜라스 크리스토프(Nicholas Kristof)에
의하면 朴正熙 정권은 비록 민주화운동을 억압하였지만 경제발전을 통해서 오늘날 한국의 다원주의의 근간이 되는 중산층을 창출함으로써 역설적으로 한국 민주주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고 했습니다.
 
넷째, 주한미군의 철수를 가능케 할 수도 있는 닉슨 독트린(Nixon Doctrine)에
직면하여 朴正熙 정권은 경제발전 능력에 의존하여, 능란한 외교활동과 군사력의 강화를 통하여 북한의 도발과 위협에 대처할 수 있었습니다.
 
다섯째, 朴正熙 정권은 농촌과 지방정부를 위시하여 중앙정부 기구와 기업에 이르기까지 긍지와 자부심, 협동정신을 고취시킴으로써 국민정신을 함양하고 강화하였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다음 세대에게 경제뿐만 아니라 사회, 문화, 과학, 스포츠 등 각 분야에서도 국민적 자신감과 긍지(矜持)를 갖도록 하는데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여섯째, 정치와 정부의 부패에 관한 기록들을 돌이켜 보면, 다른 어느 정권 특히
朴正熙 사후 그를 계승한 정권들에 비하여, 朴正熙 정권은 그 부패(腐敗)의 정도가 상대적으로 훨씬 덜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朴正熙는 한편으로 혁명적인 철학을 갖추고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유교적인 가치관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의 유교적 도덕성은 일본사범학교와 군관학교 교육에 의하여 강화되었습니다. 자신이 가난에 찌든 농촌출신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가족과 친척의 금전적 이익에 관심을 쏟지 않았습니다.
 
』태평양의 세기 The Pacific Century』라는 책에서 프랭크 기브니(Frank
Gibney)는 세 사람의 지도자가 경제적 기적을 만들어냈다고 썼습니다. 이러한 미덕과 기적을 상징하는 세 사람은 바로 朴正熙와 대만 총통직(總統職)을 물려받은 장경국(張經國), 그리고 싱가포르의 이광요(李光耀) 수상입니다. 이 명단에는 중국을 개방한 등소평도 포함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들 네 지도자는 배경이 매우 다르나 각각 분명한 정치노선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광요는 영국 캠브리지에서 서구식 교육을 받은 법률가였습니다. 朴正熙는 군사 지도자였습니다. 장경국은 소련(蘇聯)에서 10년간 군사학교 교육을 받았고 총통직을 물려받은 인물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등소평은 탁월한 공산당 간부였고, 중국 인민해방군의 지도자였으며 수년간 프랑스에서 유학을 했습니다. 이들 네 사람 모두 동아시아 출신으로서 몇 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첫째로 유교적 가치관입니다.


이 가치관은 형태는 달랐지만 본질적으로 대다수 국민들에게 경제적 복지와 유익을 목적으로 둔 선의의 권위주의적 통치의 기반(基盤)이 되었습니다. 둘째로 이들 지도자들은 각기 인생의 어느 시기에 사회주의적 성향과 사고를 가졌지만, 궁극적으로는 경제발전에서 시장경제의 역할을 중시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세 번째는 장기적인 국가목표를 달성함에 있어서 실용주의를 채택했다는 점입니다. 네 번째, 이들은 검소한 생활방식을 유지했고 공사가 분명하여 개인이나 가족의 이해관계에 개의치 않았습니다. 이들은 허례허식, 부패 또는 개인적인 축재(蓄財)를 한 일이 없습니다.
 
저명한 정치사회학자 모리스 쟈노비츠(Morris Janowitz)에 의하면 朴正熙와
등소평은 가장 큰 국가조직인 군에서 습득한 지도자의 특성을 가졌는데, 이것이
경제발전을 통한 사회변혁을 효과적으로 운영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고 말했습니다.
장경국은 준군사적인 배경을 지님으로써 1988년까지 계엄령(戒嚴令) 하에 있었던 대만이 급속한 경제발전을 이룩하는데 군의 긍정적 역할을 제공한 것으로 인정됩니다.
 
완벽한 보석은 없습니다. 朴正熙의 리더십은 한국의 경제발전과 근대화의 역사적 달성을 가능케 하였지만, 그의 리더십에서 주요한 결점은 리더십 구조와 권력계승을 제도화하지 못하여 개혁과 정책의 계속성(繼續性)을 확보하지 못한 것입니다. 또한 인간관계 중심적 네트워크에 기초를 둔 전통적 통치스타일에 크게 의존했다는 점입니다.


혁명가, 그리고 군인으로서 朴대통령은 측근 군부인맥(軍部人脈)으로부터 스스로를 완전히 해방시키지는 못했습니다. 특히 말년으로 가면서 자기를 과신하게 되었고, 통치그룹의 핵심을 형성하고 있던 군동료나 부하들과 함께 있을 때에 더욱 편안함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는 그의 가장 측근에게 배신당했으며, 그의 정권은 정해진 후계자도 없었고 원만한 권력이양(權力移讓)을 가져올 적절한 제도적 장치도 없었습니다.
 
 
여기서 영웅의 마지막의 아쉬움을 그리는 두보의 시 한 구절이 생각납니다.
 
  「杜甫의 蜀相」
 
  三顧頻煩天下計 兩朝開濟老臣心
  出師未捷身先死 長使英雄淚滿襟
  삼고초려 후 천하를 도모하고
  두 조정을 깨우친 노신의 마음
  출사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몸이 먼저 죽었으니
  자고로 영웅은 옷깃에 눈물을 가득 젖게 하노라.
 
朴대통령은 그 시대의 역사, 문화, 그리고 사회적, 제도적 영향의 산물이었으며,
따라서 그의 체질화된 기질과 성향 그리고 사고방식은 짧은 시간에 없어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성공적으로 일했던 젊은 시절에는 유능한 민간 정치인과 인재들을 통치 그룹 내에 포용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통치스타일에 영향을 끼친 문화적 타성은 그의 마지막 통치시기에 결정적으로 작용하게 되었습니다.

 
한국 ‘자본주의발전국가’의 성공은 자체 내에 이미 슘페터(Joseph Schumpeter)
가 말한 ‘파괴의 씨앗’을 배태(胚胎)하고 있었습니다. 즉, 기업인들과 업계의 지도자들은 미래에 대한 비전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에너지를 젊은 세대 지도자들을 양성하는데 투자하지 않고 주로 기업이나 개인적 이익을 확장하는데 소비했습니다. 결국 그들 자신의 기본바탕을 침식하고 파괴하는 추세에 편승함으로써 朴正熙 시대에 시작된 생산적 패러다임을 지속시키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국민의 의식구조라는 것은 하루아침에 바뀔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영국과 미국의 성숙한 민주주의는 여러 세기에 걸친 제도적 실험과 축적(蓄積)의 결과이며, 그들의 민주주의는 제도적인 역사의 유산(遺産)으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지속적으로 진정한 민주주의가 가능한 곳은 영국, 다음으로 미국이고 독일, 프랑스, 일본 등에는 아직도 물음표를 붙이고 있는 전문가도 많습니다. 영국의 경우에는 프랑스 혁명을 역사적으로 조명한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의 『프랑스 혁명에 관한 고찰Reflections on the
Revolution in France』에서, 미국의 경우에는 토커빌(Alexis De Toqueville)
의 『미국에서의 민주주의 Democracy in America』를 통해서 자유민주주의의 깊은문화, 제도적 역사를 알 수 있습니다. 이에 비해 독일과 일본에서의 경제발전상의 따라잡기는 불과 몇 십 년에 이루어졌습니다. 한국과 다른 신흥공업국가들은 후발주자로서 발전상의 간격을

단기간에 좁힐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하였습니다.
 
 
역사의 리듬과 朴正熙의 한국 근대화 <전문>
[ 조이제(趙利濟)·East-West Center 수석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