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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박정희, 김대중: 누가 진짜 민주주의자인가?

淸山에 2009. 8. 29. 07:10
 
 

 

 
 
 


이승만, 박정희, 김대중: 누가 진짜 민주주의자인가?
 
 
 아래 자료로 판단해보자!
 趙甲濟   
 


 朴正熙 서거 30주년, 역사적 再評價 메모
 
  1. 박정희는 민주주의 건설자이다. 북한노동당 정권과 남한의 守舊세력을 상대로 국가를 근대화하고 민주주의를 키우고 자본주의 체제를 싸워서 지켜낸 진정한 민주투사이다.
 
  2. 박정희는 애국자이고 열린 국가주의자였다. 민주주의를 목표가 아닌 수단으로 본 이다. 국가와 民主의 가치가 충돌하면 國益을 선택한다. 이게 右派정신이다.
 
  -김대중은 國益과 私益이 충돌할 때 민주주의를 빙자하여 國益을 희생시켰다. 법치를 무시하였다. 진정한 민주주의자가 아니다. 일본인 납치범(신광수)을 일본이 아니라 북한으로 보낸 사람이었다.
  -박정희는 國權이 있어야 人權이 유지된다고 봤다. 배고픔을 해결하는 것이 가장 큰 인권 신장이라고 생각하였다.
  -박정희는 군사문화를 건설과 개방, 근대화로 연결시켜 승화시킨 尙武정신의 수호자였다.
 
  3. 박정희는 진정한 여성해방운동가였다. 여성을 농촌에서 도시로, 집안에서 일터로, 그리고 새마을 지도자로 만들었다. 한국의 고달픈 여성들에게 부엌 개량으로 건강을, 연료 개량으로 가스 중독으로부터의 해방을 선물한 사람이다.
 
  4. 박정희는 최고의 知性人이고 교양인이었다. 知行合一을 이룬 사람이다.
 
  5. 박정희는 고독하였다. 당대의 지식인들이 박정희의 수준에 이르지 못하여 비난만 하였다. 그는 지식인을 설득하지 못하였다. 유신체제에 참여한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썼다. 함병춘 같은 소수 先覺者들의 참여가 있었을 뿐이다. 어용지식인과 반발지식인만 발호할 뿐, 생산적, 건설적 지식인의 참여가 적었다. 그런 점에서 박정희는 권력을 잡았으나 고향에서 핍박 받은 先知者이다.
  6. 박정희를 死後에 살려 낸 것은 생활인이었다. 학자들이 뒤늦게, 좌익들은 요사이 무슨 대단한 발견이나 한 것처럼, 그의 위대성에 놀란다.
 
  7. 박정희는 大戰略家였다. 自助정신-自立경제-自主국방 건설의 3自 전략을 기초로 하여 先경제건설-後민주 및 後통일 정책을 폈다.
  8. 그는 역사와 전통의 힘을 믿는 溫故知新의 보수적 개혁파였다.
  9. 관중-등소평-이광요와 맥을 같이 하는 동양적 실용주의자였다.
 
  10. 그는 자주적 관점을 안보뿐 아니라 경제개발계획과 민족문화 진흥 등 每事에 투영하는 진정한 주체사상 실천가였다. 김일성은 가짜 주체사상가이고 실상은 사대주의자이다.
  11. 그는 정신력과 말의 힘을 믿는 이였다.
  12. 그는 말년에 부인을 잃고, 측근 관리에 실패하였다.
 
  13. 그는 전임자와 후임자를 잘 둔 이다. 자신의 한국적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정치세력화엔 실패하였다.
  14. 그는 민족사의 10大 지도자 중 한 사람이다. 김춘추, 김유신, 문무왕, 이승만, 박정희, 왕건, 이성계, 이순신, 세종대왕 등. 20세기 세계 10대 지도자의 班列에 들 사람이다.
  15. 그는 회고록을 경멸하였다. 대한민국이 자신의 기록이고 회고록이라고 보았다.
 
  16. 그는 이승만과 함께 생산과 건설, 그리고 진정한 진보세력의 챔피언이었다. 김대중, 노무현은 김일성 김정일과 함께, 깽판, 건달, 위선, 반역, 守舊세력으로 한 묶음이 될지 모른다.
  17. 朴正熙를 읽고 전하는 것은 開發年代의 傳說과 神話를 가꾸는 일이다. 다행히 많은 분들(오원철, 김정렴, 고병우, 서영택, 남덕우)이 회고록을 썼다. 박정희 관련 책들을 학교, 도서관 등에 보내서 미래 세대가 읽게 해야 한다. 박정희의 傳說 속에 溫故知新할 유산들이 많다.
  18. 박정희가 남긴 遺産-열린 자주, 전통의 발전적 수용, 실용정신, 군사문화의 생산적 이용, 국가주의와 국제주의의 조화, 시스템 관리-등을 건설적으로, 비판적으로 계승하면 자유통일과 一流국가로 가는 길을 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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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의 민주주의觀 
    
  "제주도 밀감나무를 서울의 영하 20도가 되는 데다 그냥 갖다 놓았다면

당장 다 얼어 죽을 것입니다." 
    
  * 아래 글은 1975년1월14일 朴正熙 대통령의 연두기자회견 내용중 일부이다. 朴 대통령은 민주주의의 장점을 인정하면서도 민주주의가 기능하도록 만들려면 반드시 그 토양을 먼저 다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朴 대통령은 경제력, 제도, 국민 수준을 그런 토양으로 인식했다. 자신의 역사적 역할은 민주주의의 토대를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박정희를 요사이는 '자유주의 지향적 권위주의자'(Liberal Authoritarian)라고 분류한다.
 
  <무슨 외국 언론 기관에, 미국 국회 의원들한테, 어느 학자들한테, 무슨 정치인들한테…, 그것도 사실을 사실대로 써서 보내면 좋겠는데 전혀 허위 날조된 그런 사실을 가지고 우리 정부가 마치 무슨 인권을 크게 침해하는 것처럼 이렇게 선전을 해서 외국에서 어떤 세력을 끌어들여 가지고 우리 정부에다가 압력을 넣어서 그 사람들을 석방시키겠다 하는, 그런 운동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는데 대해서 나는 지극히 불쾌하게 생각합니다. 솔직이 말하면 이것은 사대주의 근성입니다.


  민주주의도 좋고 자유도 좋지만, 우리 나라가 하나의 자주 독립 국가로서 앞으로 이 지구상에서 뻗어 나가자면, 우선 우리 조상 때부터 내려오는 뿌리 깊은 사대주의 근성을 뽑아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민주주의 얘기가 나왔으니까 또 몇 마디 언급을 하겠습니다만, 여러분들이 잘 아시다시피 2차 대전 후 이 지구상에는 신생 민주주의 국가가 많이 생겼습니다. 내가 알기에도 한국 전쟁 당시 유엔 회원국이 한 50여 개 국이었는데 지금 현재는130여 개 국으로 늘어났습니다.


  그런데, 이들 국가 중에 공산주의 국가를 빼놓고 기타 서방 진영에 속하는 국가들은 거의 대부분 서구 민주주의를 자기 나라에 받아들여서 시행을 해 보았는데…, 솔직히 말해서 그것을 직수입해서 성공해 가지고 지금 잘 해 나가는 나라가 이 지구상에 몇 개나 되느냐, 여러분들 한 번 꼽아 보셔요.

지도를 내놓고 보십시오.
 
  동남 아시아든지 중남미라든지 아프리카라든지…, 내가 알기로는 거의 한 번씩 다 홍역을 치르고

중병을 앓았어요.


  지금도 민주주의 소화 불량증에 걸려서 신음하고 있는 나라가 한두 나라가 아닙니다.
  그래도, 그 중에서 조금 잘 해 나가는 나라는 서구 민주주의를 받아들이되, 자기 나라의 실정을 감안해서 가급적 실정에 알맞게끔 이것을 잘 조화해 나간 나라는 비교적 잘 하고, 그렇지 않고 무비판적으로 직수입을 한 나라는 열이면 열 전부 다 민주주의 병에 한 번씩 걸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역사적인 엄연한 사실이 아닙니까. 민주주의 제도라고 하는 것도 민주주의가 그 나라에서 자랄 수 있는 토양과 풍토가 조성되어야만 자라나는 것이지, 그런 것 없이 그냥 갖다 심어 가지고는 잘 자라나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같은 우리 한국 내에 있지만 제주도에 있는 밀감나무를 서울 근처에 심어 보아도 살지 못하지 않습니까? 같은 국내라도, 서울에 갖다 놓고 밀감나무가 자라나게 하려면 특별히 防風을 잘 한다든지, 온실을 만든다든지… 무언가 제주도하고 비슷한 토양이나 기후나 이런 조건을 갖추어 주어야지, 서울의 영하 20도가 되는 데다 그냥 갖다 놓았다면 당장 다 얼어 죽을 것입니다.


  음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맛이 좋은 음식이라도 자기 체질에 맞지 않으면

 소화가 안 되는 것입니다.


  좀 쑥스러운 얘기입니다마는, 나는 지금도 목장 우유라든지 끓이지 않은 우유를 먹지 못합니다. 왜냐? 체질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릴 때 깡보리밥에 깍두기를 먹고 자란 뱃속이 되어서 그런지 목장 우유라든지 생 우유는 맞지 않아 먹으면 배탈이 나고 설사가 납니다. 그러나, 우리집 아이들은 잘 먹습니다. 어릴 때부터 먹어서 훈련을 시켰으니까….


  민주주의라고 하는 것도 역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나라에도 해방 후에 서구 민주주의를 받아들여 가지고 이렇게도 해 보고 저렇게도 해 보고

별별 것을 다해 보았습니다.


  자유당 때 헌법, 민주당 때 헌법, 또 5·16후에 민정 이후 제3공화국 헌법, 다해 보았지만 우리 나라의 특수 여건을 감안하지 않고 우리의 풍토에 잘 맞도록 조정을 하지 않으면 여기에서 자라날 수 없다는 결론을 우리는 얻지 않았습니까?
 
  일부에서 유신 헌법을 철폐하고 옛날 헌법으로 다시 환원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과연 옛날 상태로 돌아가서 나라가 잘 되고 국민들이 모두 행복스럽게 잘 살 수 있겠느냐…, 몇몇 정치인들은 좋아할 것입니다. 옛날 그런 헌법 체제로 돌아가면 정치인 만능 시대가 되고 그들이 활개를 치고, 여러 가지 좋은 점이 많을는지는 모르지만, 과연 그것이 국민 전체의 행복이 되고 국가 전체에 이익이

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요즈음 그 사람들은 우리 나라 건국 이후에 어느 헌법이 제일 좋았느냐, 이렇게 물으면 제2공화국 헌법이 제일 좋았다고 그래요, 즉 민주당 때의 헌법이지요.


  그것이 자유 황금 시대라 그 말이에요. 그런데, 요즈음 여러분들이 그 시대의 기록을 보십시오. 내가 본 어떤 기록에는, 어떤 날은 하루에 전국에서 데모가 1천 여 건이나 일어났어요.


  국민 학교 아동들까지도 거리에 나와서 데모를 하고, 이러한 무질서, 자유를 빙자한 방종, 혼란, 비능률, 또 선거 때만 하더라도 과거의 그 선거 제도를 우리가 다 여러 번 겪은 것 아닙니까. 얼마나 거기에서 많은 돈이 낭비되고, 사회적인 혼란, 국민 도의의 타락, 또 그 병폐라는 것은 일일이 우리가 열거할 수 없지 않습니까. 그런 상태로 우리가 다시 돌아가고 지금 체제를 철폐해 버리고 그런 낭비와

혼란을 되풀이하면서도 자주 국방도 잘 되고, 자립 경제도 잘 되고,

민주주의도 잘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병폐를 깨끗이 일소하고 국민의 모든 능력을 한 곳에 집중해서 국력의 가속화를 해 보자는 것이 유신 체제입니다. 그렇게 해야만 우리 나라의 민주주의도 서서히, 착실히 이 땅에 뿌리를 내리고 우리도 남부럽지 않게 자유와 번영을 누릴 수 있는 날이 멀지 않아 올 것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현행 헌법은 고쳐서는 안 되겠다, 유신 헌법을 철폐하고 옛날 헌법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은 솔직히 말하면 나라 망하는 길이다, 나는 이렇게 단언하여 얘기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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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정한 여성해방운동가는 李承晩, 朴正熙


 -정치, 교육, 경제활동에서 男女차별을 철폐하고

여성들을 새 역사 창조의 主役으로 끌어들인 두 분이다.
 趙甲濟
 
  우리 민족사에서 여성들에게 암흑과 같은 시기가 있었으니 두 번의 朝鮮시대이다. 교조적인 朱子學을 통치이데올로기로 삼은 조선조는 과부의 재혼을 금하는 등 여성들을 극도로 차별하였다. 新羅는 세 사람의 女王을 남겼다. 그만큼 사회가 자유로웠다는 이야기이다. 그런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것은 의미가 있다. 신라는 여성들의 사회참여를 장려하였으니, 動員力이 큰 나라가 된 것이다. 전쟁에선 인구수도 중요하지만 동원력이 큰 나라가 이긴다.
 
  이른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3代에 걸친 세습을 기도하는 사실상의 金氏조선으로서 여성들을 고생시키고 있다. 형식상은 여성을 평등하게 대우해주는 척하면서 사실에 있어선 조선조의 봉건적 차별을 계속함으로써 여성들이 억압되고 희생되도록 하였다. 식량난의 가장 큰 짐을 지고 굶어죽고 얼어죽어간 이들이 아내, 어머니, 할머니들이었다.
 
  우리 민족사에서 여성들의 人權을 가장 크게 향상시킨 사람은 두 대통령이다. 李承晩 초대 대통령은 자유민주주의에 기초한 헌법을 만들고 그 위에 대한민국을 세웠다. 여성들에게도 자유와 民主(평등)의 혜택을 주었다. 한국은 建國 때부터 여성들에게도 참정권을 부여하는 등 일체의 南女차별을 철폐하였다. 민주주의의 역사가 짧은 유럽에서도 여성들에게 참정권을 준 것은 1920년대 이후였다.
 
  李 대통령은 초등학교 교육을 국민의 의무로 규정하는 등 남자와 여자를 가리지 않고 학교에 보낼 것을 권장하였다. 아무리 참정권을 여성들에게 주어도 교육의 권리가 보장되지 않으면 진정한 여성해방은 불가능하다. 李 대통령은 이 장벽을 깨부수었다.
 
  朴正熙 대통령은 정치, 교육의 男女평등을 확장시켜 경제활동에서도 여성人力이 참여하도록 길을 터주었다. 1960년대 여성人力이 공장으로 몰렸다. 女工시대가 열렸다. 봉제공장, 섬유공장, 신발공장 근로자들의 반 이상이 젊고 어린 女工들이었다. 이들이 경제개발의 선봉에 섰다. 여성이 비로소 한국의 새 역사 창조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물론 女工哀史라는 말이 나올 만큼 이들의 근무환경은 고된 것이었다. 이 점을 강조하여 박정희 대통령을 욕하는 인간들이 많다. 이들은 그 박정희가 산업체에서 일하는 女工들을 위하여 특별학교를 만들어주고 시간만 나면 공장을 찾아가 女工들을 위로하고 1977년 7월1일부터는 의료보험을 시작하여 돈이 없으면 병원에 가 보지도 못하고 죽어가는

비극에 종지부를 찍은 사실은 애써 숨긴다.
 
  박정희 대통령은 시골에서 자라난 때문인지, 부엌일로 여성들이 고생하지 않도록 부엌개량 사업을 추진하였다. 1970년대에 가면 여성들이 부엌에서 서서 일할 수 있게 된다. 꼬부랑 할머니를 보기 어렵게 된 이유중의 하나이다. 딸들과 아내와 어머니들이, 연탄가스에 중독되어 김치국물을 먹고 살아나는 희비극도 도시가스 시대가 열리면서 사라졌다.
 
  1960년대부터 박정희 정부가 추진한 産兒제한 정책 또한 여성의 사회적 위치를 드높였다. 지금은 그 정책이 너무 성공하여 오히려 多출산 정책을 펴기 시작하였는데, 오늘날 눈부신 한국 여성들의 사회진출은 어머니가 아이들을 여섯, 여덟 명씩 낳고는 불가능하였다는 점을 잊어선 안 된다.
 
  박정희, 이승만은 한번도 자신들이 여성해방운동을 했다고 자랑하지 않았다. 좌파적 관점에서 여성人權 운동을 벌이는 이들에겐 이 두 대통령의 업적이 보이지 않을 것이다.
 
  男女평등의 참정권 보장, 男女평등의 교육권 보장, 男女평등의 경제활동 보장, 이것이 여성해방의 기초였고 이 기초를 만든 이가 좌익들이 가장 미워하는 李, 朴 대통령이었다.
 
  1970년대 농촌지역을 획기적으로 발전시킨 새마을 운동은 마을마다 헌신적인 지도자들이 있었기에 성공하였다. 여성들이 새마을 지도자를 맡는 경우가 많았다. 여성들이 남자들을 지휘하여 다리를 놓고, 길을 닦고, 마을을 가꾸었다. 여성 上位 시대의 개막이었다.
 
  두 대통령이 여성人權 향상에 가장 큰 기여를 했다는 의미는 바로 人權향상에 가장 큰 공을 세웠다는 이야기이다. 인간의 반은 여성이니까. 그렇다면 남자의 인권향상을 별도로 설명할 필요도 없이 한국 역사상 가장 큰 인권伸張者(신장자)는 이승만, 박정희이다. 나의 주장에 대한 反論을 기대한다.
 
 [ 2009-06-03, 16: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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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金大中 前대통령의 死後평가 
    
  그의 生涯(생애)를 평가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서는 6·15선언이 될 것이다.
 趙甲濟
 
  오늘 他界(타계)한 金大中 前대통령(만 86)은 파란만장한 生涯(생애)를 살았다. 그의 생애는 4期로 나눌 수 있다. 1. 좌익활동가 시절(해방 직후) 2. 야당정치인 3. 대통령 4. 전직 대통령.
 
  그의 활동을 네 가지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1. 좌익 활동가 2. 야당투사 3. 대통령 4. 6·15선언자. 그의 생애는 2000년 6·15선언 前後로 크게 나뉘어진다. 6·15선언 이전의 故 김대중씨는 민주투사로 불렸다. 6·15선언 이후의 김대중씨는 지지자에 의하여서는 평화의 使徒(사도), 반대자에 의하여서는 反헌법·反국가적 행위자로 불리게 되었다. 그의 생애를 평가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서는 6·15선언이 될 것이다.
 
  1. 6·15선언이 한반도에 평화를 가져왔는가, 아니면 핵폭탄을 가져왔는가.
  2. 6·15선언이 한민족의 통합을 가져왔는가, 분열을 가져왔는가.
  3. 6·15선언이 자유민주 체제를 강화시켰는가, 약화시켰는가.
  4. 6·15선언이 韓美(한미)동맹을 강화시켰는가, 약화시켰는가.
  5. 6·15선언이 북한 동포·국군포로의 인권을 향상시켰는가, 약화시켰는가.
  6. 6·15선언이 헌법의 敵(적)을 강화시켰는가, 약화시켰는가.
  7. 6·15선언이 국민의 안전과 행복을 증진시켰는가, 후퇴시켰는가.
 
  이상 일곱 개의 평가기준을 적용하면 故 김대중씨의 역사적 位相(위상)이 대충 설정될 것이다.
 
  故人은 朴正熙·全斗煥 정권에 맨주먹으로 맞섰던 사람이다. 박정희 정권에 의하여 납치·투옥되었다. 전두환 정권에 의해선 사형선고를 받고 연금도 당했다.
 
  그는 그런 불굴의 용기를 稀代(희대)의 학살자 김정일 앞에서는 보여주지 못했다. 그는 700만 인명의 학살에 책임이 있는 김정일과 손을 잡고 연합제·연방제 혼합 통일 방안에 합의함으로써 한반도의 유일한 合法 정통국가인 대한민국을 反(반)국가단체인 북한 정권과 同格(동격)으로 놓는 치명적 과오를 범하였다. 그리하여 노벨평화상 수상자가 희대의 학살 독재자와 同格으로 평가받거나 동격으로 이미지 메이킹되는(특히 영상을 통하여) 사태를 自招(자초)하고 말았다. 그는 박정희에 의한 유신선포 직후 일본에서 망명생활을 하면서 북한 정권의 조종을 받는 在日(재일)인사들과 손잡고 反(반)국가단체인 韓民統(한민통)을 만들었다. 그가 사형선고를 받은 이유는 이 때문이었다.
 
  故 김대중씨는 李承晩(이승만)과 함께 大衆(대중)을 권력의 기초로 보았던 대중정치인이다. 이승만은 대중을 계몽·교육함으로써 한민족의 역사를 바꿀 수 있다고 믿었다. 김대중씨는 계몽보다는 선동적 설득을 더 앞세웠다는 비판이 강하다.
 
  김대중씨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그가 추구했던 민주주의가 어떤 민주주의였냐에 의하여 대충 결정될 것이다. 그는 대통령이 된 이후, 그리고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이후 촛불난동과 같은 법치파괴, 6·15선언과 같은 헌법파괴까지도 민주주의란 이름으로 설명하곤 하였다. 권력을 잡은 이후의 이러한 그의 민주주의觀(관) 때문에 민주투사로서의 그의 역할까지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다.
 
  오늘 내가 만난 한 전직 미국고관은 "국제사회에서 김대중 씨의 영향력을 능가하는 한국 사람은 이승만·박정희뿐일 것"이라 평했다. 그의 죽음은 한국 현대사의 한 章(장)이 넘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다음 장의 역사에서 그는 어떻게 기록될 것인가.
 
 [ 2009-08-18, 15: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