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운을 좌우한 위대한 선택
이근미 (자유기고가)
GNP 82달러의 세계최빈국 수입대체냐 수출주도냐, 60년대 초 우리나라는 두 카드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서 있었다. 언뜻 보기에 크게 차이가 날 것 같지 않은 두 정책, 그러나 이중 하나에는 한 국가의 명암을 가르는 중요한 열쇠가 포함되어 있었다. 어떤 열쇠를 쥐어야 문이 열릴 것인가? 그 선택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수출주도 정책은 한 마디로 위대한 선택이었으며 결코 놓쳐서는 안될 귀중한 카드였다. 우리나라는 귀중한 카드를 쥐기 위한 위대한 선택을 했고 그로 인해 지금 선진국문턱까지 왔다.
61년, 5.16 주체세력들이 빈곤타파를 최우선 정책으로 내세웠을 때만해도 그것은 아득한 환상처럼 느껴졌다. 당시 상황은 1인당 GNP 82달러, 수출 4천1백만 달러로 아시아 지역에서도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였다.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생각한 외국 자본들이 점점 철수를 하고 5.16 세력에 불만이 많던 미국마저 원조를 중단하겠다고 선언, AID(미국 국제개발국)가 지원하는 각종 미국측 원조자금이 급격한 감소추세를 보이던 시기였다.
혁명정부의 선택은 단 하나였다. 우선 국민으로 하여금 굶주림을 면하게 하자는 것. 원조에 의존하지 말고 우리 힘으로 일어서 보자는 것. 그래서 수립한 것이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었다.
60년대 상공부 장관과 재무부 장관을 지낸 김정렴씨는 제1차 개발계획을 자신의 회고록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이 계획안은 1959년에 자유당 정권, 1961년 민주당 정권이 시안작성에 착수했다가 미완성으로 남겨둔 장기 경제개발 계획안을 참고로 하여 서둘러 대폭 수정 보완한 것으로 대단히 조잡한 수준이었다. 계획에 책정된 공장의 대부분은 국내에 아직 설립된 바 없는 신공장 이었으며 관계 공무원은 물론 실업가들조차 외국에 나가 관계공장을 자세히 살펴본 사람이 드문 가운데 소요액이 책정되었다」
국가 원수가 차관 얻으러 외유
이렇게 엉성한 계획안이 짜여진 가운데 행정경험 없는 군인들이 각 부처의 수장 자리를 차지했다.
우리나라 경제를 이끌어갈 상공부 장관으로는 정래혁씨가 임명되었다. 차관으로는 하루 전날 민주당 정부로부터 임명을 받은 박충훈 차관이 자리를 그대로 유지했다. 『정장관은 경제통은 아니었지만
부하 직원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었지요. 최고회의와 마찰이 있을 때마다
정장관이 나서서 잘 막아 주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무슨 배짱으로 서슬 시퍼런 최고회의와 맞섰는지 모르겠습니다. 주로 예산문제 때문이었는데 무조건 깎기만 하는 게 상책이냐, 예산도 없이 맨주먹으로 일하란 말이냐 하는 게
주로 마찰의 요지였죠』
박충훈씨(전 국무총리, 대통령 권한대행)는 당시 가난했던 시절을 떠올리며 이렇게 들려준다.
61년 말에 우리나라 외환보유고는 약 2억달러에 불과했으니 각 부서가 예산문제로 시끄러웠을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당시 미국은 우리나라에 대한 윈조를 점차 줄여나가던 중이었는데 일시 적이나마 미국의 마음을 돌리게 한 사건이 일어났다. 정장관이 서독에 가서 재정차관 1억5천만 마르크(약3천만 달러)를 얻어 온 것이다. 적지 않은 이 차관으로 질식상태에 있는 우리 경제가 조금이나마 숨통을 틀 수 있었다.
이 일이 미국에 적지 않은 자극을 주어 다시 원조와 투자가 이어지게 되었다.
걸프나 칼텍스 같은 미국 회사들이 그 이후에 다시 발길을 한국으로 돌렸다. 1964년 12월에는 박대통령이 직접 서독에 가서 1천3백50만 달러의 재정차관과 2천6백25만 달러의 상업차관을
얻어오기도 했다.
1964년에 우리나라가 수출 1억 달러를 달성했을 때 이미 일본은 50억 달러를 넘어서고 있었고 태국은 7억3천6백만달러, 필리핀은 4억5천8백만 달러의 수출을 기록하였다.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도 우리의 다섯배 정도의 수출을 하고 있었다. 남미의 브라질이나 아르헨티나는 우리가 감히 넘보지도 못할 경제성장을 이룩한 시점이었다. 특히 북한은 우리를 훨씬 앞질러 가고 있었다. 남한이 정치적으로 혼란을 겪는 동안 북한은 강력한 철권통치 속에서 공업화가 착착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북한도 6?25로 피폐할 대로 피폐했음에도 60년대 초에 이미 수출 2억 달러를
달성한 상태였다.
북한은 1946년부터 민주개혁이라는 이름 아래 개혁을 실시하였는데 사실상 경제개혁이었다. 토지개혁과 주요 산업 국유화를 통해 기반을 마련한 다음 1947년에 경제개발 계획을 실시한 이래 계속적인 경제개발 계획을 추진해 나갔다. 53년 8월 당중앙위원회 제6차 전원회의 때 이미 김일성은 중공업의 복구발전과 경공업과 농업을 동시에 발전시킨다는 계획을 세웠다.
우리나라도 이승만 대통령 시절에 경제개발에 관한 논의가 있었지만 실제로 경제개발 계획을 실시한 것은 1962년의 일이니 북한은 우리보다 10년 앞서 경제에 관심을 기울였던 것이다.
자립적 민족경제로 앞서간 북한
북한은 1956년에 제1차 5개년계획을 수립하였으나 소련이북한의 경제정책을 비판하면서 원조를 대폭 삭감하기에 이른다. 아울러 동유럽 국가로부터의 원조도 삭감되었다. 이로 인해 북한은 외부의 원조에 의존하지 않는 이른바「자립적 민족경제 건설노선」을 채택했다.
자립적 민족경제는 자립성과 주체성을 본성으로 하는 경제정책으로서 생산의 인적?물적 요소들을 자체로 보장할 뿐 아니라 민족국가내부에서 생산 소비적 연계가 완결되어 독자적으로 재생산을 실현하여 나가는 경제체제를 의미한다.
자국의 자원과 인민의 수요를 충족시키는 것으로 설정되었다.
자립적 민족경제는 또한 해외에서 수입하는 물건을 국내에서 만들어 외화를 아끼자는 수입대체 전략의 한 방편이었다. 자급자족하고 자립경제를 건설하자는 건 우선 당장은 바람직해 보이지만 얼마 안가 한계에 부딪친다는 지극히 단순한 모순이 숨어 있었다. 이러한 자립적 민족경제는 한때 북한 경제가 자립경제의 전형으로 일컬어질 만큼 나름대로의 성공을 거두기도 하였으나 오늘날 북한 경제의 부진을 가져온 주된 요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자립적 민족경제정책의 채택이야말로 우리나라와 격차가 벌어지게 된 중요한 갈림길로
들어선 순간이라 할 수 있다.
1945년 우리나라는 2차대전이 끝난 후 아시아 국가들이 발빠르게 경제문제에 대처하여 빈곤타파는 물론 경제적 부를 주변에 과시하고 있을 때 해방과 6.25, 그리고 정치혼란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경제에 눈을 뜬것은 5?16이라는 또 한번의 정치격변을 겪은 후의 일이었다.
주변국가들에 비해 무려 16년이나 늦은 출발선에는 바닥을 드러낸 외환보유고, 혼미한 정치상황,
미미한 원조상황이 함께 서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나라가 극적인 역전극을 펼쳐 북한은 물론 우리나라를 앞섰던 나라들을 저만치 따돌린 것은 바로 결정적 순간에 수출주도라는 위대한 선택을 했기 때문이다. 당시 상공팀과 최고회의가 예산문제 외에 또 하나 중요한 마찰을 빚었는데 바로 수입대체냐 수출이냐 하는 문제였다.
최고회의뿐만 아니라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주도한 경제기획원의 입장도 수입대체 쪽이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석유?비료?철강 등 원자재는 물론 쌀?보리 등 생필품의 상당부분까지도 수입에 의존해야 했으므로 당장 수입대체가 유리할 것으로 판단되었다. 한국무역협회에서 발간한
「무역의 날 30년사」에는 50년대 상황이 이렇게 기술되어 있다.
미국의 원조가 농산물 위주로 이루어짐에 따라 정부는 이를 활용하여 밀가루 섬유 설탕 등 소위삼백산업을 중심으로 수입 대체적 공업화를 추진하였다. 이러한 정책은 미국의 구호물자를 원자재로 이용할 수 있다는 이점과 함께 이들 산업이 노동집약적이고 저수준의 기술이 요구되며 국민경제적 필요성이 크다는 점에서 추진되었다.
이러한 수입대체적 정책으로 인하여 50년대 전체의 수출액은 큰 변화를 보이지 않아 2천만 달러 내외에 그친 반면 수입대체를 위한 기계류 및 원자재수입과 농산물 수입등으로 수입은 3~4억 달러에 달하여 무역수지 적자폭은 연간 3억 달러를 상회하였고 이는 미국의 원조자금에 의하여
대부분 충당되었다」
당시 우리나라 상황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대목이다.
유원식씨(최고회의 재정위원장)등 최고회의 핵심 주체세력들은 수입대체산업 건설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제1차 경제개발 계획 속에 종합제철 공장 건설 문제가 논쟁의 대상이 되면서 수입대체냐 수출이냐 하는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중공업을 먼저 건설하여 수입대체를 해야 자립경제를 달성할 수 있다는 주장이 단연 우세했다. 이에 대한 상공부의 의견은 우선 비교우위가 있는 경공업을 육성하여
수출산업을 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수입대체와 수출 중 어디에 우선 순위를 두느냐 하는
중요한 기로에 서 있었던 셈이다.
상공부는 이 결정을 앞두고 일본 시찰을 다녀오는 등 여러가지 검토를 하였다. 당시 우리나라 철강수요는 약 10만t이었고 공장을 세운다면30만t의 규모로 잡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갔으나 막상 일본에 가보니 상황은 예상과 딴판이었다. 최소한 1백만t 규모가 아니고서는 종합제철의 구실을 할 수 없다는 결론이었다. 30만t은 뒷골목 대장간 수준에 불과한 지경이었다.
상공농사(商工農士)만이 살길
박충훈 상공차관을 비롯한 상무팀이 박정희 의장 앞에서 브리핑을 한 끝에 수입대체보다는
수출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상공부에서 수출을 강조하면서 박의장을 설득한 것은 다음과 같은 논리였다.
『철강공업을 예로 들자면 막대한 투자로 건설한 공장이 수출산업으로서 국가 경쟁력이 없으면 지탱해 나가기 힘들다.
그 공장에서 만들어진 제품을 수출하지 못할 경우 국내에서 국제시세보다 훨씬 비싼 물건을 울며 겨자 먹기로 써야 한다. 수출을 안하면 외화를 벌 수 없고 외화가 없으면 필요한 물자를 사올 수 없다. 그렇게되면 어쩔 수 없이 저개발상태가 계속될 수밖에 없다. 수출 지향적 경제는 전향적이고 적극적인데 비해 수입 대체형은 방어적이고 소극적이다.
뿐만 아니라 수출제일주의는 자유기업, 시장경제 원칙과 자유민주주의 창달에도 기여하는 것이다』 박의장은 자신의 통솔 목표와 일치한다며 상공부쪽의 손을 들어주었다. 보릿고개를 타개하고 실직자들에게 일자리를 마련하려면 원자재를 들여와서 가공수출을 하는 것이 현재로서는 최선이라는 상공부의 의견에 전적인 찬성을 표했다.
『박대통령을 따라 기차편으로 지방 순시를 간 적이 있어요. 기차 안에서 박대통령이 내게 이렇게 말하더군요. 우리나라에는 사농공상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제 우리나라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상공농사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내가 공이 상을 앞서 공상농사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했더니 박대통령이 그 말에도 일리가 있기는 하지만 물건을 만들기만 하면 무엇하느냐, 팔아야 되지 않느냐, 그러니 역시 공보다 상이 앞서야 한다고 말씀하시더군요』
박충훈씨는 이러한 박대통령의 사고가 수입대체가 아닌 수출제일주의를 채택하게 되었고 그런 연유로 그가 수출전략의 최선봉에 서서 지휘를 하였을 것이라고 들려준다. 김정렴씨의 회고록에도 박대통령의 이러한 생각이 잘 드러나 있다.
『경제야말로 국정의 기본이야. 경제가 잘 되어서 백성들이 배불리 먹고 등 따뜻하고 포실한 생활을 해야 정치가 안정되고 국방도 튼튼히 할 수 있지 않은가』
외환보우고 점점 줄어
당시 세계적인 추세는 수입대체 전략 수립이었다. 2차대전 이후 인도가 수입대체를 당면목표로 러시아로부터 지원을 받아 제철공장을 짓는 등 경제부흥의 기치를 내걸어 경제개발의 시범케이스로 전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을 때였다. 그런 가운데 우리나라가 수출 정책을 채택하는 것은 당연히 무모한 일로 비쳐졌다. 사실상 상공부도 수출이 안될 때를 대비한 방안이 전혀 없어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가공무역을 한다지만 수출이 안되면 원자재 값은 어떡할 것인가, 한 치 앞을 기약할 수 없을 때였다.
수출주도로 정책이 결정이 되었으나 결정을 하였다 하여 산적한 문제가 풀리는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수출할 물건을 만들 자금이 문제였다.
당시 우리나라 외화획득의 주 수입원이라고 해봐야 천연자원 수출과 미8군과 관계되는 사업이 전부였다. 『미8군내에 건설, 물품, 용역 등 세분야의 군납을 따내 외화를 벌어 들였는데 현대의 정주영씨가 건설공사를 따내서 4,5천만 달러, 한진의 조중훈씨가 용역을 따내 3,4천만달러를 벌어들였죠, 미8군에서 활동하는 연예인들의 수입이 중요한 외화 벌이가 됐을 정도니 외화벌기가 얼마나 어려웠는지 상상이 갈 겁니다』
당시 상공부 수출진흥과장이었던 문기선씨(현 문기상 합동특허법률사무소 소장)의 회고이다.
또 하나의 문제점은 각료의 잦은 교체였다. 자금도 문제지만 각료가 자꾸만 교체되다보니 일관성 있게 경제정책을 주도해 나갈 수가 없었다. 결국 방향만 수출주도로 잡아놓고 정작 정책은 허공에 뜬 상태였다. 당시 각료의 이동상황을 살펴보면 17대 정래혁 장관 1년2개월, 18대 류창순 장관이 7개월, 19대 박충훈 장관이 6개월, 20대 김훈 장관이 4개월, 21대 이병호 장관이 5개월 등
반년 단위로 장관이 바뀌었다.
더구나 국내공장 가동을 위한 원자재 수입과 생필품 수입, 공장건설 등으로 그나마 보유하고 있는 외화가 자꾸 줄어들기만 했다. 당시 상공부 공업국 과장이었던 오원철씨(현 기아경제연구소 고문)의 논문에 당시 우리나라 외환보유고 현황이 잘 나타나 있다.
「1962년 말에는 1억 6천6백79만3천 달러, 63년 3월에는 1억3천7백5만7천 달러, 동년 9월에는
1억5백40만5천 달러로 떨어졌으며 그나마 순 미국달러는 9천3백29만8천 달러로
채 1억 달러가 되지 않았다」
외화벌이 일등공신은 보세가공
오원철씨의 논문에 나타난 62년도 수출품목을 보면 당시 우리나라 사정이 잘 드러나 있다. 「1962년도에는 5천4백81만 달러어치를 수출했다. 내용을 살펴보면 돼지 1백47만 달러, 생선 3백45만 달러, 마른생선 2백49만 달러, 조개류 1백81만 달러, 쌀 8백93만 달러, 김75만 달러 등 식료품과 산 동물 수출이 2천 1백85만 달러에 이르렀다. 그 외 생사 3백96만 달러, 고령토 흑연 등 광석 2백69만 달러, 중석 3백37만 달러, 철광 3백85만 달러, 돈모 99만 달러, 한천 1백32만 달러, 무연탄 2백74만 달러 등 원자재를 가공도 안하고 수출한 것이 약1천5백만 달러가 되었다.
총 수출액의 75%가 천연물이었다」
경제개발이 추진되면서 1차산업 위주의 수출구조가 서서히 바뀌기 시작하여 1963년에 단순 가공품이기는 하나 합판이 최대의 수출품목으로 등장하면서 수출의 서광이 조금씩 비친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러나 2년간 경제개발계획은 별다른 진전이 없이 오히려 외환보유고만 줄어든 상황이 되고 말았다. 당시 외화를 벌어들인 일등공신으로는 보세가공이 있었다.
『5.16 직전에 상공장관을 지낸 천우사 사장 전택부씨는 동경상대를 나온 비즈니스 감각이 아주 뛰어난 분이었어요. 박장관과 친해서 두 분이 자주 만났는데 그때 좋은 아이디어가 많이 나온 걸로 알고 있어요. 그분이 최초로 보세가공 일을 일본으로부터 가져왔어요.
일명 홀치기라고 부르는 일이었죠. 일본에서 일감을 가져다 완제품이 아닌 중간단계의 일을 해서 다시 일본으로 보내면 일본에서 마무리를 하는 식이었죠. 일거리가 부족했던 때라 부녀자들에게
아주 인기를 끌었어요』
문기상씨의 회고이다. 보세구역을 설치해 외국물품을 가공하는 일은 자원이 모자라고 노동력은 많은 우리나라 입장에서 보면 가장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수출품목인 셈이었다. 원자재를 들여다 가공해 수출하는 보세 가공무역이 훗날 공산품 수출로 이어지게 되었으므로 개척자 역할을 톡톡히 한 셈이다. 박충훈씨는 그의 회고록에서 전택부씨를 조세가공의 시조라고 불러도 무방할 만큼 큰 기여를
했다고 찬사를 했다.
경제개발 계획의 축소 조정
수출주도라는 방향을 잡았지만 62년과 63년은 그 성과가 아주 미미한 실정이었다. 수출보다는 외국차관을 끌어들여 발전시설과 배전시설, 공장설립, 사회간접자본을 설립하는 일이 더 급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보니 의욕적으로 수립했던 경제개발 5개년계획은 축소 조정되고 어렵게 수립한 수출주도 정책은 유명무실해지고 말았다. 오원철씨는 논문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밝히고 있다.
「공업부문 투자액중 당초 중공업에 속하는 금속 기계부문에 28.8%를 투입하여 11개 사업을 추진하려던 원래 계획을 5개사업 14%로 축소시켰다. 그것도 교통부 철도공작창확충사업을 빼면 4개 사업에 겨우 2.1%를 할당한 것이다. 중공업은 보완작업시거의 배제되고 말았다. 경공업 분야는 40.2%를 투자하여 23개 사업을 추진하려던 원래계획이 12개 사업38.6%로 변경되었다. 나머지 31%는 중소기업 육성 등 기타 산업에 대한 투자였다. 특히 중소기업 육성은 시금한 과제로 인식
되어 당초 1.8%밖에 투자계획이 없던 것을 30.4%로 대폭 증액하였다.
교통부 소관 30억6천만원을 뺀 민간에 대한 중공업 투자액 5억3천만원과 경공업 투자액 9백88억2천만원을 비율로 나타내면 5대95이다. 그러니까 1차 5개년계획은 경공업분야에 중점 투자하도록 수정된 것이다. 연평균 성장률도 당초 7.1%에서 5%로 하향 조정하였고 총투자도 50.8%에서 31.9%로 대폭 축소 하였다. 가용 자원면에서 외자도입 계획도 8.95%에서 8.1%로 줄었다. 그리고 국무회의는 외환사정이 호전될 때까지 민간사업에 대한 지불보증을 중지한다는 결정을 내리고 말았다」
이렇게 된 배경에는 경제의 성장잠재력을 웃도는 지나친 성장목표 설정, 화폐개혁 실패와 그에 따른 경제적 혼란, 일기불순으로 인한 농산물의 흉작, 개발 인플레 발생, 수입수요 급증과 미국 원조감소로 인한 외환위기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해방 이후 두 번의 통화개혁 중에서 1953년 2월15일의 첫 번째 개혁은 6?25에 따른 막대한 전비를 충당하느라 과다하게 풀린 통화로 발생한 악성 인플레를 수습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1962년 6월에 단행된 긴급통화조치와 긴급 금융조치는 화폐단위만 10분의 1로 절하했을 뿐 국민경제에 크나큰 충격만 안겨준 쓰라린 패배였다.
구정권의 부패에 편승하여 음성적으로 축적, 편재된 자금이 상당히 온존되어 있다고 판단한 최고회의는 부강한 국가를 건설하기 위하여 이러한 음성자금과 과잉 구매력을 진정한 장기저축으로 동원하여 이를 투자재원으로 활용하는 동시에 인플레를 미연에 방지하는 조치로 통화개혁이 불가피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그러한 취지에도 불구하고 당시 우리경제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던 미국의 반대에 부딪쳐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민정이양 이후 「돌격내각」구성
김정렴씨의 회고록에는 당시 상황이 이렇게 나타나 있다.
「5.16 군사혁명 초기에 한미간에 알력이 있었고 혁명이 성공한 후 미국측이 이를 승인한 후에도 양국간의 정치적으로 원만하지 못한 상태가 계속되어 오던 차 통화개혁에 있어서도 독주와 비협조, 그리고 국가자본주의가 아니냐 하는 낭설 등으로 말미암아 한국 정부와 일대 대결을 해야겠다고 결심한 것 같았다. 미국측은 드디어 무조건 통화개혁의 백지화를 요구하면서 응하지 않으면 경제원조를 중단하겠다는 통보였다. 그 당시만 해도 미국의 경제원조는 우리나라 경제운용상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수출주도 정책이 비로소 활기를 띠기 시작한 것은 1964년부터이다.
당시 상공부에 재직했던 사람, 아니 우리나라 경제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1964년을 누구나 즐겁게 회고한다. 우리나라가 최초로 수출 1억 달러를 달성하고 경제기반을 다진 해이기 때문이다. 지난해 우리나라 수출이 1천억 달러를 돌파하게 되었다. 31년만에 1천 배의 성장을 이룩한 셈이다. 지금은 단일품목으로도 1백억 달러의 수출이 이루어지지만. 64년은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대단히 혼란스러운 해였다. 민정이양이 이루어져 제3공화국이 발족된 첫해지만 상황이 좋지 못했다. 야당의원들이 삼분폭리 사건을 들고 나왔고 새나라 자동차에 대한 의혹이 제기되었다. 국교정상화를 위한 한일회담 본회의가 열리고 있는 가운데 대학생들의 대일 굴욕외교 반대 데모가 전국적으로 파급되어 마침내 6.3사태로 이어져 서울 일원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되는 지경으로 번지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9월 들어 중부지방에 폭우가 쏟아져 7백70여명의 사망?실종자가 생기고 농작물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런 혼란한 지경에서 경제개발 계획은 실패의 조짐을 드러냈고 보릿고개는 여전히 사람들을 옥죄고 있었다. 개발계획을 세운 62년 초보다 상황이 더욱 나빠져 있었다. 위기의식이 감돌고 있었다. 바닥을 헤매는 외환보유고,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 경제상황. 이대로 계속 되었다가는 63년 12월 민정이양을 한 박정희 정부는 국민들로부터 외면을 당하게 될 게 뻔했다.
변화가 필요했다. 박대통령은 민심을 수습하고 새롭게 일어서기 위해서 대대적인 개각을 단행했다.
특히 경제각료 구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돌격내각」이라는 닉네임을 얻은 정일권 국무총리, 저돌적인 추진력의 장기영 부총리, 수출장관
이라는 별명을 가진 박충훈 상공장관, 금융계통의 해박한 학식을 지닌 김정렴상공차관으로 이어지는 강력한 수출인맥이 형성된 것이다. 이러한 인맥이 수출주도 정책을 성공으로 이끈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박충훈 상공장관은 이한원 대한제분 대표가 장기영부총리에게 천거하여 재기용되었는데 수출장관이라는 별명이 말해주듯 그의 기용이 매우 적절했다는 것이 당시 함께 일했던 사람들의
한결같은 평가이다
수출 3개년 계획 수립
김정렴씨는 회고록을 통해 당시 상황을 이렇게 얘기하고 있다.
「5월13일 연락이 와서 아침 일찍 정일권씨도 함께 자리를 했다. 장부총리는 박대통령에게 경제전반에 대한 소신을 피력한 다음 특히 시장 자유화정책의 중요성과 긴급성, 그리고 추진상의 크나큰 난관등을 상세히 설명하고 이를 꼭 성공시켜야만 하겠는데 이를 위해서는 박대통령의 확고하고 지속적인 지지와 재무부 및 상공부를 비롯한 경제부처 전체의 일사불란한 협력이 절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고 이 자리에서 박대통령으로부터 시장 자유화 정책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 언약과 함께 경제팀은 언제나 장부총리가 원하는 대로 구성해 주겠으니 기필코 시장자유화 정책을 성공시키라는 당부가 있었다」
수출이 원활하려면 적당한 선에서 수입도 자유화되어야 한다는 것이 당시 경제팀의 바람이었다. 그러나 수입이 자유화될 경우 가뜩이나 경쟁력이 없는 국내 상품이 잠식될 우려가 있어 선뜻 자유화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나 대통령의 지원 아래 시장 자유화 정책이 탄력적으로 운영되다가 1967년에 가서 네거티브방식이 본격 거론되었다.
박충훈 상공부 장관은 본격적인 수출주도 정책의 재수립을 위해 부임 첫날부터 분주했다. 투자규모, 자본조달 계획 등을 다시 책정하여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목표 실현 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보완계획을 세우기에 이른다.
우선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상관없이 상공부에서는 수출 3개년 계획을 세웠다. 3년 동안 7억 달러를 수출하여 3년 후에는 연간3억 달러를 수출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야심찬, 그러나 당시로서는 무모해 보이는 전략이었다. 수출구조에 있어서도 공산품을, 64년에 51.6%에서 67년에는 63%까지 높일 수 있도록 계획했다. 1964년의 상황을 살펴보면 우리나라 수출액은 전세계 국가중 84위로 세계 수출총액의 0.08%에 불과한 수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