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정치.사회/朴正熙 照明

국운을 좌우한 위대한 선택 2 - 이근미 (자유기고가)

淸山에 2009. 8. 29. 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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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출만이 살길입니다』

 

 

박충훈 당시 상공장관은 재임용되어 임명장을 받는 자리에서 박대통령에게 상공정책에 관하여 설명을 하면서 한 가지 부탁을 했다.

 

『수출만이 살길입니다. 앞으로 우리나라는 나라 전체가 수출 제일주의를 국가의 최중요 정책으로 삼고 매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대통령 각하께서 총사령관으로 진두 지휘해 주셔야 합니다. 격려도 해주시고 애로도 타결해 주셔야 합니다』

 

갖가지 난관이 가로막고 있는 상태에서 최고지도자가 강력한 힘으로 뒷받침해 주어야만 한다는 생각에서 박장관이 건의를 올린 것이다. 그 자리에서 박대통령은 쾌히 응낙을 했다. 박대통령은 그날의 약속을 성실히 지켜 상공부에서 수출지원책을 내놓으면 웬만한 것은 대통령 이름으로 받아들여져 일사천리로 시행되곤 했다. 정부조직법상 윗자리에 있는 경제기획원이나 재무부에서 상공부가 내놓은 시책의 뒤치다꺼리나 하느냐는 불평이 있을 정도였다.

 

상공부 장관 시절이 가장 보람있었다고 회고하는 박충훈씨는 수출장관이라는 별명을 의식한 탓인지 자신은 수출 엔진에 시동을 건 사람 정도로만 비쳐달라고 주문한다. 『박대통령이 총사령관이었고 나는 참모자에 불과했습니다』

 

오원철씨는 당시 분위기를 딱 한마디로 표현했다.

 

『국시는 수출제일주의, 정책은 공업입국이었죠』

외환보유고 겨우 9천3백만 달러로 빈털터리가 되기 직전, 수출하지 않으면 외화를 벌수 없고 외화가 없으면 죽는다는 각오로 뛰었다고 덧붙인다.

 

박장관은 대통령에게 수출 목표를 1억 달러로 약속하고는 상공부 취임식에서는 1억2천만 달러로 늘려 발표했다. 그만큼 분발하자는 의도였다. 상공부의 수출진흥책은 두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무역업무에 대한 애로 타개와 장려책이고 둘째는 수출품 제조업체에 대한 지원책이었다.

 

우선 잠시 중단되었던 수출입 링크제와 소요량 증명에 의한 기술소득제도를 부활시켰다. 수출입 링크제는 공산품 수출을 촉진시켜 우리나라 공업화의 기폭제 구실을 하게 한 제도이다. 당시 이 제도를 발판 삼아 현재의 재벌기업으로 성장한 기업도 있다.

 


내가 책임지겠다

 

당시는 항상 달러가 모자라 수입이 이권화 되다시피 했다. 환율이 1백30대 1이었을 때 1달러분의 물건을 수입하면 1천원이 되는 품목도 있었다. 수입허가만 받으면 당장5~6배의 장사가 되던 때였다. 당시는 수입을 하려면 반드시 상공부의 허가를 받아야 했는데 수입달러를 배정받는 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수출입 링크제란 바로 수출한 사람에게 수출액의 1백%에 해당하는 수입권을 주는 제도였다. 다만 어떤 물건이건 다 수입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무역계획에

책정된 범위 내에서만 가능했다.

 

당시 가장 수출을 많이 한 합판을 예로 들자면 90%가 원자재이고 가득액은 10%밖에 안되는데 1백%의 수입권을 주는 것은 부당이득을 주는 것이 아니냐는 논란이 많았으나 상공부는 그대로 강행했다.

그것이 자극제가 되어 수출품의 경쟁력을 강화시키고 고용을 늘려, 그로 인해 초기단계에서 국제시장을 개척해 나가기를 기대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공산품을 수출하면 돈을 벌게 된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인식시켜 얼마 되지 않은 국내자본이나마 공업분야로 몰릴 것을 기대했던 것이다. 약간의 적자 때문에 수출을 못하던 품목도 제도 때문에 수출을 하는 예가 많았다. 특히 수출기반이 약한 공산품의 수출에 도움이 되었다.

 

소요량 증명이란 기술소득제도로서 원료를 들여다 제품을 만들어 수출할 때 거기에 드는 원자재 수입을 인정하고 관세를 면제해주는 제도였다. 예컨대 원자재 열 개를 들여와 제품을 만들었을 때 알뜰하게 하여 두 개가 남았을 경우 그 두 개에 대해서 기술소득이라 하여 면세를 해주었다. 그러다보니 누구나 재료가 덜 들도록 연구를 하게 되었다. 이 제도는 엄밀히 따져 위법이었다. 박대통령이 『내가 책임질 테니 그대로 시행하라』는 말에 힘입어 시행을 계속할 수 있었다.

 

수출한사람에게 인센티브를 주어 더욱 수출을 늘리게 하는 한 방편이었다.

박충훈씨는 이 제도에 대해 여러 가지 말들이 많았으나 어느 특정인에게 혜택을 주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떳떳하게 시행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상공부는 64년부터 매년 수출진흥 종합시책을 마련하여 수출진흥정책을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추진해오고 있다. 당시 시책을 살펴보면 외화획득 기업의 수출소득과 수출활동에 대한 사업소득세 및 법인세 및 법인세50% 감면, 수출용 원자재에 대한 수입관세 면제, 수출금융의 특별 저리지원, 해외시장 정보의 수집 및 시장개척을 위한 무역진흥공사(KOTRA)와 중소기업을 위한 무역협회 산하 소액수출 전담회사인 고려무역 설치, 수출품 생산업체의 육성, 수출유공업자(생산업체의 기능공 기술자 세일즈맨 포함)에 대한 국가 상훈법에 의한 훈장포상 수여 등이 있었다. 수출진흥 종합시책 16개목표 중

제3항의 목표는 이런 것도 있었다.

 


무엇이든 내다 팔아라

 

「수출하여야만 이익이 된다는 상식을 무역상사 및 기업가가 갖도록 무역행정을 집행한다」

당시에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국민들에게 수출에 대한 인식을 심어주는 일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수출에 대한 인식이 없던 사람들에게 수출이야말로 돈 버는 길이라는 인식을 확실히

심어주는 것이 중요했다.

 

『웬만한 사람들은 다 수출에 매달렸죠. 그저 국내시장만 생각하던 사람들이 화려한 수출 장려제도를 보고 너도나도 무엇이든 팔려고 애썼어요. 가장 큰 소득은 수출만이 살길이라는 생각이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는 점입니다』

 

수출 장려제도가 전 국민에 널리 퍼진 것이 무엇보다도 큰 수확이었다고 박충훈씨는 전한다.

 

그밖에도 수출증대와 중소기업 육성을 함께 도모하고자 1백65개 업체를 수출품 생산업체로 지정하여 시설 투자금 융자, 외화배정등에 있어 우대조치를 강구하고 1965년에는 같은 차원에서 1백개 업체를 수출중소기업 시범공장으로 지정하여 생산성본부등 전문기관에서 경영지도 혹은

기술지도를 해주도록 했다.

 

지원시책을 다각도로 강구하고 수출을 많이 하면 고급승용차도 들여와 탈 수 있도록 해주는 등 혜택을 베풀자 수출은 명예와 소득을 보장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수출업계가 크게 활기를 띠게 되었다. 1964년은 국내 자본과 기술과 인력이 수출로 집중되어 하나의 붐을 이루어 거국적 수출무드가

조성된 해였다.

 

수출목표 달성이라는 지상과제를 안고 무역자유화, 수출지향공업화, 가공형 공업에서 중화학공업으로 발전시켜 나가자는 대의를 마련하고 열심히 추진해 나가는 가운데서도 의견 대립과 업계의

반발이 적지 않았다.

 

상공부가 품목별 자유화 물가안정을 위한 긴급 수입원료의 배분, 시설의 확충 및 배정 등을 시행할 때마다 이해가 상반되는 당사자들의 관심이 총집중되었다.

그럴 때마다 박장관은 유리창 행정이란 시정 방침하에 모든 것을 국장회의에서 처리해 나갔다.


때로는 격론이 벌어져 공기가 험악해지기도 했으나 찬반간에 충분한 의견개진이 있은 다음 무역의 자유화와 공업정책의 방향에 비추어 판정에 공정을 기했다.

 

마침내 1964년 11월30일, 수출액이 1억 달러를 초과한 1억1백39만2천 달러에 이르게 되었다. 그날의 기쁨을 잊지 않기 위해 11월30일을 수출의 날로 정해 매년 기념하고 있다. 당시 온 국민의 감격이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수출품의 내용은 빈약하기 짝이 없었다. 공산품이 60%를 차지했다지만 합판이 1천8백만 달러로 가장 많았고 다음이 면직물, 해태, 생사순이었다. 미국 일본 홍콩 독일 영국 등이 우리의 주요 수출국이었다. 주변국가들은 이미 우리의 대여섯 배, 북한은 우리의 두배 이상을 수출할 때였지만 뭔가 해낼 수 있다는 사기가 충천하게 된 것이 무엇보다도 큰 수확이었다.

 


『우린 그때 모두 미쳤었다』

 

마침내 1964j년 12월31일 10시경 1억2천만 달러의 수출목표가 달성되었다. 수출대금이 1억2천90만 달러가 입금된 것이다. 5개년 계획이 끝나는 마지막 해인 1966j년에 1억1천7백50만 달러를 수출할 계획이었는데 목표가 2년이나 앞당겨진 것이다. 바로 7개월 전 경제개발 계획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으며 외환보유고가 바닥을 드러내 시름에 잠겨있지 않았던가. 그런데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저녁 늦게까지 수출통계 숫자를 집계하여 수출목표액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결과를 기다리던 박대통령에게 목표 돌파를 보고했다. 박대통령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전 직원에 대한 위로와 격려의 말을 해주었다. 상공부 직원들은 모두 감격에 겨워 눈물을 글썽이며 사무실에서 만세를 불렀다. 통행금지가 거의 다 되었을 때야 비로소 퇴근을 서두른 상공부 직원들은 모두들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사무실을 나섰다.

 

『우린 그때 다들 미쳤었어요. 밤낮으로 일했던 기억밖에 없어요. 위에서부터 이래까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었죠. 최고지도자께서 적극 지원하니까 모두들 신이 나서 일했습니다. 무슨 일이든 신바람이 나야 성과가 큽니다. 정말 신바람 나게 일했어요』

 

박충훈씨는 그 신바람의 근원은 국가 최고지도자의 지원과 신뢰였다고 말한다.

『당시 상공부는 환상의 팀웍을 이루었어요. 복지부동이라는 말은 상상도 못했죠. 며칠씩 밤을 새는 건 보통이었어요. 퇴근시계가 땡 하면 퇴근하는 공무원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죠. 밤늦게까지 일하다가 우르르 달려나가 막걸리를 마시며 사기를 북돋웠죠. 선후배 관계가 아주 돈독했죠. 소신껏 일하라고 격려해 주었을 뿐 위로부터의 압력이란 없었어요.

 

그리고 인사가 아주 공정했어요. 낙하산 인사라는 것은 아예 없었고 결원이 생기면 평소 일 잘하는 직원을 눈여겨보았다가 서로 데려 가려고 했죠. 여름에는 아예 퇴근도 안하고 책상에서 잠깐 눈붙이고 나서 다시 일어나 일했습니다. 그때는 뭐랄까 어떻게 보면 너무 설치는 분위기 였어요.
모두들 열에 들떠서 신들린 듯이 일했습니다』

 

수출진흥과장이었던 문기상씨의 회고이다. 당시 최상의 콤비플레이를 벌였던 사람들은 상역 사이드에는 차관보, 김우근 국장, 심의환 상공과장, 문기상 진흥과장 등이었으며 기술계통으로는 오원철 공업1국장, 엄익호 공업2국장, 안영철 섬유과장, 이상섭 중화학과장, 류각종 경공업과장 등이었다.
문기상씨는 똑똑한 계장들이 든든한 바탕이 되었다고 덧붙인다.

 

『무엇보다도 자유롭게 자신의 의견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이 일할 맛을 나게 했습니다. 당시 박충훈 상공장관은 방문을 열어놓고 누구나 들어와서 의견을 말하도록 했는데 좋은 아이디어만 있으면 언제든지 뛰어들어가서 얘기를 했지요. 박장관은 용인술이 아주 뛰어난 분이라고 생각돼요. 무슨 이야기를 하든지 귀담아 듣고 잘한다고 용기를 북돋워 주었지요. 설사 가당찮은 의견이라도 끝까지 다듣고 난 다음 참 좋은 의견이지만 이렇게 하면 어떨까 하고 기분 나쁘지 않게 얘기하는 겁니다.

 

상사가 인정 해준다는 생각이 드니까 부하직원들이 모두들 신이 나서 일했지요』

문기상씨와 박충훈씨의 회고에는 공통적으로 신바람이라는 얘기가 들어 있다.

『우리는 그저 정책을 세워 주관해 나갔을 뿐이고 국민들이 국가의 시책에 적극 호응하여 열심히 따라준 덕분이지요. 그리고 첫째 국가 최고지도자의 의지가 확고했고 우리나라가 융성기에 접어들어 운이 크게 따랐던 것도 사실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박충훈씨는 그 당시의 감격이 아직도 새롭다고 전한다.

 


박대통령 야전사령관 자처

 

1964년 수출진흥 체제 구축의 일환으로 해외시장 개척을 전담하는 한국무역진흥공사(KOTRA)를 설립한 데 이어 1965년부터 수출진흥회가 개최되었다. 애초에 이 회의는 국무총리가 주재했었다.
제1회 회의는 정일권 국무총리의 주재하에 중앙청에서 열렸으나 제2회부터 청와대 응접실에서 박정희 대통령 주재하에 회의가 진행되면서 이름도 수출진흥 확대회의로 개칭됐다. 김정렴씨는 제1차 경제개발 계획추진에 있어 국가원수가 계획사업 하나하나를 항상 챙기고 정부와 금융기관으로 하여금 애로를 타개하도록 독려하고 적극적으로 지원해준 점이 성공의 지름길이었다고 그의 회고록에서 밝히고 있다.

 

시초부터 난항을 거듭하자 박대통령은 5개년계획에 책정된 사업 하나 하나의 진도를 챙기기 시작했고 급기야 청와대 비서실에 경제개발 5개년계획 상황실을 마련하여 사업별 세부진도를 기록시켜 틈 날 때마다 체크했다는 것. 진도가 느린 사업에 대해서는 수시로 관계장관에게 전화로 문의, 독려했으며 매월의 경제동향보고 청취 때는 물론 매분기의 정부사업 심사분석회의 때에 더 집중적으로 점검했다.

 

박대통령은 순수 민간사업도 하나하나 계획대로 준공되어야만 나라 전체의 경제개발이 이루어진다면서 각 부처는 민간사업일지라도 이것을 준 국가사업으로 간주해서 총력을 기울여 지원하라고 독려했다. 정부의 직.간접 지불보증하에 외국차관을 도입한 사업의 부실은 국민 부담으로 직결되며 국제금융시장에서의 우리나라 신용도를 손상시켜 추후의 차관도입에 지장을 준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당시 민간기업이 외국차관을 도입할 수 있었던 것은 국가가 지불보증을 서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수출이 호조를 보이자 축소 조정되었던 당초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목표를 초과 달성하는 기염을 토했다. 원래 경제성장률 7.1%로 계획하였던 것을 5%로 하향 조정하였지만 결과적으로 8.5%라는 실적을 올려 목표를 초과 달성했던 것이다. 그 중에서도 수출은 두 배 가까운 실적을 올렸다.

 

수출 연평균 26.3% 증가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마무리 된 66년 말 수출은 2억5천만 달러를 달성하고 연말 외환보유액도 2억4천만 달러에 달했다.

 

이러한 1차 연도 계획의 성공에 힘입어 2차 5개년 계획에 석유화학공업과 종합제철이 핵심적 사업으로 결정되었으며 1973년 중화학공업 선언으로 이어졌다. 우리나라 수출은 64년부터 92년까지 연평균 26.3%가 증가, 같은 기간 중 대만의 20.9%보다 높은 증가세를 유지해 왔다.


64년에 1억 달러에 불과했던 수출이 71년에 10억달러, 77년에 1백억 달러, 81년에 2백억달러, 85년에 3백억 달러, 88년에 6백억 달러를 돌파하는 수직상승세를 이루어 드디어 지난해

1천억 달러를 돌파했다.

 

한창 수출주도 정책을 펼쳐나가던 어느 날이었다. 박대통령은 수행원들과 공장을 순시하러 나갔다. 10대 소녀가 대통령이 옆에와 있는 줄도 모르고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박대통령이 갑자기 그 소녀의 손을 덥썩 잡으며 소원이 뭐냐고 물었다. 소녀는 너무 당황하여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대통령이 재차 소원이 뭐냐고 묻자 그 소녀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또래 아이들처럼

교복 한번 입어보고 싶다고 말했다.

 

박대통령은 그 자리에서 산업체 부설학교를 지어 어떤 학교와도 구별되지 않는 졸업장을 주라고 엄명했다. 교육부에서는 야간에 체육도 못한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난색을 표했다가 대통령으로부터 재차 엄명을 받고 학교를 설립, 소녀들에게 공부할 기회를 주었다.

 

60년대를 흔히 여자들이 꾸려나간 시대라고 말한다. 지금은 중년부인이 되었을 당시 공장에서 일한 소녀들에서부터 최고지도자에 이르기까지 수출증대에 불탔던 시대. 그때가 있었기에 오늘의 발판이

공고히 마련된 것이다.

 

1960년은 유엔이 개발연대로 설정한 해였다. 당시 영국 외무부가 작성한 분석자료에 우리나라 실정이 이렇게 기술되어 있다.

 

「한국이란 나라는 한반도 남쪽에 위치한 분단국으로서 별다른 가망이 없는 곳이다. 국민성은 게으르고 문맹률은 높으며 정치적 미숙에다 경제적 빈곤이 겹친 나라, 게다가 언제 터질지 모르는 군사적 불안 등 온갖 부정적 요인을 안고 있어서 가망이 없다」 국민의 피와 땀, 위대한 정책 덕분

한국전쟁을 취재했던 영국기자는 「쓰레기통에서 장미꽃 피기를 기다리는 격」이라고 당시

한국 실상을 혹평했다.

 

그러나 한국개발연구원과 하버드대학교 국제개발연구소가 공동 저술한 「한국경제 사회의 근대화」라는 책에는 이렇게 기술되어 있다.


「1961년 연간 7%의 성장을 목표로 하는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발표되었다. 60년대 초반의 경제동향에 비추어 볼 때 이 성장목표는 어처구니없이 높다고 여겨졌으나 결국에는 초과 달성되었다. 과거에 미국 고문관들이 거의 희망이 없는 나라라고 판단했던 한국이 경제사상 유례가 많지 않은 고도성장기의 문턱에 들어선 것이다.

 

그리고 1964년과 65년에 경제 자유화 계획(시장자유화 정책)이 도입되고 1964년~67년 수입대체 지향형 경제를 수출 지향형으로 전환시킴으로써 고도성장의 기반을 공고히 했다.


한국경제의 역량은 개발정책 수립에 있어서 보다도 그 시행에 있어서 더욱 뚜렷하게 발휘된다. 뮈르달의 정의에 따르면 한국 정부는 정책을 실천에 옮길 능력을 가진 양성국가인 것이다」

 

「온갖 부정적 요인을 갖고 있어 가망이 없는 나라」에서 장미꽃이 피어난 것은 피와 땀과 눈물을 흘린 온 국민의 저력과 결정적 순간의 위대한 선택, 수출주도형 정책의 채택 덕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