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화순군 동복면 구암리 종명지 근처 정자에 서 있는 김삿갓의 동상이다.
아름다운 봄날 시인의 감성을 자극할 것이다. 전남 화순군 동복면 구암리 종명지 근처 정자에 서 있는 김삿갓의 동상이다. 아름다운 봄날 시인의 감성을 자극할 것이다.이 집은 백인당(百忍堂) 정치업 선생이 1728년 터를 잡은 곳입니다. 그 후손들이 290년을 떠나지않고 살고 있는데 백인당은 ‘백번을 참는다’는 당호(堂號)처럼 집을 찾는 식객(食客)을 후히 대접하고 쉬도록 하는게 가풍이라고합니다. 그의 6세손 정시룡(丁時龍) 선생 대에 김삿갓이 찾아오자 그는 오랜 기간 사랑채를 비워주고 1863년 김병연이 죽자 장제(葬祭)를 치렀으며 3년 뒤 김병연의 후손이 찾아오자 유골을 넘겨줬다고 합니다. 후덕한 인품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 그의 집 앞쪽에는 작은 정자가 서있으며 그 앞에는 죽장(竹杖)에 삿갓을 쓴 김삿갓의 동상이 서있습니다. 김삿갓은 정씨 가문의 후덕함 때문인지 세차례 이 마을을 찾았는데 그때마다의 족적이 아직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맨처음이 1841년으로 화순적벽(赤壁)을 보고 이런 시를 읊었습니다. 무등산고송하재(無等山高松下在) 적벽강심사상류(赤壁 江深沙上流) ‘무등산이 높다지만 소나무 아래요 적벽강이 깊다더니 모래위로 흐르는구나’라는 뜻입니다.
두번째가 1850년으로 협선루라는 누각에서 시상(詩想)을 얻어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습니다.
김삿갓이 보고 반했다는 화순적벽의 일부다. 중국의 적벽과 비슷하다고해서 붙은 이름이다.
김삿갓이 보고 반했다는 화순적벽의 일부다. 중국의 적벽과 비슷하다고해서 붙은 이름이다.
약경심홍선(藥經深紅鮮) 산창만취휘(山窓滿翠徽) 선군하화취(羨君下花醉) 호접몽중비(胡蝶夢中飛)
해석하자면 ‘약 캐러 가는 길가엔 붉은 이끼가 깊고 산을 향해 난 창문에는 푸르름이 가득하다. 그대 꽃아래 취해있음이 부럽구려, 나비는 꿈속에서 날고있는데’ 정도지요. 세번째가 1857년으로, 그때부터 김삿갓은 평생을 짚고 다녔던 죽장을 내던지고 정씨 집에 6년을 머물다 숨을 거둡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후손이 그의 시신을 인수해간 다음에도 그의 묘가 제대로 알려지기까지 시간이 걸렸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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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삿갓의 유해를 영월로 옮긴 것은 그의 아들 익균으로, 지금의 영월군 하동면 와석리 노루목 근처였습니다. 이후 그의 묘가 ‘김삿갓의 것이었다’고 알려지기까지는 116년이 걸렸습니다. 여기에는 고 박영국 선생의 노력이 있었다지요. 공무원이자 향토사학자인 박선생은 ‘영월에 김삿갓의 묘가 있다’는 말을 듣고 1970년대초부터 탐문을 벌였습니다. 1982년 8월 공직에서 물러나면서부터 사람들이 모인 곳이면 어디든 찾아가 증언이나 구전(口傳)같은 단서를 찾았습니다. 그러던 중 영월 창절서원 원장이던 김영배옹으로부터 “노루목에 김삿갓 묘가 있다”는 증언을 듣게됐는데 여기에 흥선대원군이 등장합니다. 대원군이 집권하면서 김영배옹의 증조부였던 현성부판관 김성봉 선생이 와석리로 낙향한 겁니다.
김성봉 선생은 같은 안동 김씨 출신인 김병기로부터 “양백지간인 영월과 영춘어간에 김삿갓의 묘소가 있는데 잘 돌봐달라”는 부탁을 했다는군요. 이 말이 후손인 김영배옹에게까지 전해진 것을 김옹이 잊지않고 있었던거죠. 박영국씨는 김옹과 함께 1982년 10월17일 이십리 산길을 걸어 와석리에서 3대를 산 이상기씨를 만났고 그로부터 김삿갓의 묘를 확인하기에 이릅니다. 재미있는 것은 일제시대에도 일인들이 김삿갓의 묘를 수소문했다는 것입니다.
선비는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다는 뜻의 물염정이다. 이 근처에 김삿갓 석상이 있다.
선비는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다는 뜻의 물염정이다. 이 근처에 김삿갓 석상이 있다.이글을 쓰면서 우려되는 것은 혹시나 이 글로 인해 화순과 영월 사이에 ‘김삿갓 논쟁’이 일지 않았으면 합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유명인의 고향이 어디냐를 놓고 갈등을 벌이는 지방자치단체가 한 두곳이 아니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내친 김에 화순에 김삿갓의 동상이 두군데 있는 사연을 소개할까합니다. 구암마을과 물염정(勿染亭)이라는 정자입니다. 물염정은 중종과 명종 대에 성균관 전서와 구례-풍기군수 등을 지냈던 물염 송정순(宋庭筍) 선생이 지은 정자입니다. 자신의 호를 땄는데 말 그대로 ‘세상 어느 것에도 물들지 않겠다’는 선비의 다짐이 살아있습니다. 송정순은 사화(士禍)로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 담양으로 가던 중 이곳 경치에 반해 정자를 지었는데 김삿갓 역시 풍광에 매료됩니다.
물염정 맞은 편에는 기암괴석이 붉게 빛나고 있는데 여기가 바로 화순의 4대 적벽인 물염적벽입니다. 훗날 자세히 다룰 기회가 있겠지만 물염적벽은 그 모양이 옹기를 닮았다는 옹성산의 절벽이 동복천에 비친 경치를 말하는 것입니다. 화순에는 물염적벽 외에 창랑적벽-노루목적벽(혹은 이서적벽)-보산리 적벽 등 4대 적벽이 있습니다. 중국 양자강 상류에 있는, 삼국지연의에서 제갈량이 조조의 백만대군을 화공(火攻)으로 격파한 그 적벽과 비슷해서 붙은 이름입니다.
화순 4대 적벽 가운데 하나인 물염적벽이다. 물염정에서 바라본 모습으로, 철책이 둘러져있어 접근할 수 없다.
화순 4대 적벽 가운데 하나인 물염적벽이다. 물염정에서 바라본 모습으로, 철책이 둘러져있어 접근할 수 없다.저는 저승의 김삿갓이 비록 고단한 삶을 살다 갔지만 창원 정씨와 박영국 선생 같은 분들에게 고마움을 표할 것이라고 봅니다. 우리나라가 한심한 역사로 점철됐지만 그래도 이렇게 버티는게 바로 창원 정씨 일가 같은 부자들의 베품과 뜻있는 이들의 정성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창원 정씨 일가가 과거 어느 정도 잘살았고 지금 어떤 형편인지 모릅니다. 하지만 재산의 과다(寡多)와 관계없이 이렇게 도움이 필요한 김삿갓 같은 이들에게 행한 바야말로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전형이라고 생각합니다. 한민족의 그런 아름다운 전통이 살아있었음을 저는 김삿갓의 일생을 통해 배우면서 그런 것을 되살리는 것이야말로 정신이 황폐해진 오늘을 사는 우리에 주는 교훈이라고 느꼈습니다.
김삿갓이 마지막에 머문 창원 정씨 가문의 구옥. 기자를 안내해준 이정경씨가 마당을 거닐고 있다. 왼쪽 건물이 김삿갓이 숨을 거둔 사랑채다. 김삿갓이 마지막에 머문 창원 정씨 가문의 구옥. 기자를 안내해준 이정경씨가 마당을 거닐고 있다. 왼쪽 건물이 김삿갓이 숨을 거둔 사랑채다.
김삿갓의 유명한 시
秋美哀歌靜晨竝 추미애가 정신병 雅霧來到迷親然 아무래도 미친연 凱發小發皆雙然 개발소발 개쌍연 愛悲哀美竹一然 애비애미 죽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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