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명기. 초당독서도. 지본수묵채색. 103x48.5cm. (삼성미술관 소장) 초의가 보낸 차는 투명함 속에서 차향을 먼저 피워내는 차였다. 마주 앉아 나눈 담담한 말은 서로를 잊게 하였다. 지극한 선미(禪味)를 이렇게 드러낸다. 그는 품천(品泉·물맛의 우열을 평가하는 것)에도 일가견이 있어 ‘샘물이 달콤하니 죽은 물은 아니고(泉水必甘非死氣)/바닷가라 하더라도 빗물은 짜지 않네(海雲之雨不生鹹)/세상에 차 끓이는 물을 평해보건대(若論天下煎茶品)/강왕곡물이 제일이라면 이 물은 두세 번째는 되리라(第一康王此二三)'라 하였다.
물맛을 분별하는 능력은 다인이 갖출 기본적인 안목이다. 차는 물에 그 세계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더구나 『다경』을 통해 차 이론에 천착했던 그였기에 초의에게 많은 조언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실로 조선 후기 차문화 중흥의 토대는 이들에 의해 구축되었던 셈이다.
1831년 북선암으로 신위를 찾아간 초의는 '북선원알자하노인(北禪院謁紫霞老人)'에서 ’신위는 단련한 전 학사인 듯(秘閣丹鍊前學士)/범궁에서 향 사르는 대승의 선객이라(梵宮香火大乘禪)‘고 하였다. 선승처럼 살았던 신위의 일상사를 자세히 드러냈다.
말년 병고에 시달렸던 신위는 차를 통해 심신을 단련했다. 아울러 그의 담박한 삶의 일면은 '남다시병서'에서 ’내 삶은 담박하나 다벽이 있어(吾生澹味癖於茶)/ (차를)마시니 정신이 환해지네‘라 하였다. ’한 잔의 차로 기름진 음식을 씻어내고‘자 했던 신위는 차를 마신 후 겨드랑에서 바람이 이는 신선의 경지를 경험했던 것이 분명하다.
이처럼 차를 통해 팍팍한 삶을 위안 받았던 옛 사람들의 공감대는 예나 지금이나 같다. 더구나 차는 단순한 음료가 아니기에 이런 이치를 공감했던 사람들은 넓고 깊은 차의 샘을 파왔던 것이다. 신위 또한 그런 인물이었다.
박동춘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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