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 예술/옛시조 모음

순탄치 않은 삶, 차향에 묻고 선승처럼 살다 간 신위[차(茶)와 사람]

淸山에 2015. 4. 25. 17:05










[차(茶)와 사람]

순탄치 않은 삶, 차향에 묻고 선승처럼 살다 간 신위
[중앙일보] 입력 2015.04.25 13:43 / 수정 2015.04.25 15:21
차와 사람<23> 신위와 대스승 강세황
  
 

자하소조. 청대 왕여한 그림 (간송미술관 소장)


자하 신위(申緯·1769~1845)는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지식인으로, 차의 이로움을 체득했던 다인(茶人)이다. 타고난 그의 결기(決起)를 한눈에 알아본 이는 스승 강세황(姜世晃·1713~1791)이었다. 강세황은 신위를 ‘타고난 천재’라 평했다. 어린 시절 강세황 문하에서 그림을 익힌 인연으로, 후일 강세황이 구현한 문인화의 전통을 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신위 남다시병서 (박동춘 소장)





신위는 특히 석죽(石竹)을 잘 그렸다. 또 시서(詩書)에도 능해 조선후기 시·서·화(詩書畵) 삼절(三絶)로 칭송받았다. 그가 차를 즐겼던 흔적은 수 십 편의 시문으로 남아 있다. 제자 박영보가 초의차를 맛본 후 지은 '남다병서(南茶幷序)'에 화운(和韻)한 '남다시병서(南茶詩幷序)'는 그의 다시(茶詩) 중에서도 한국 차문화사를 살펴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그는 어느 시기부터 차를 알았던 것일까. 특별한 문화를 접하는 계기란 대부분 사람과의 인연에서 시작된다. 신위도 예외는 아니었다. 바로 대 스승 강세황과의 학연(學緣)이다. 강세황이 차를 즐긴 정황은 '풍로명(風爐銘)'에서 짐작할 수 있다. 내용은 이렇다.


향을 피우니 (그 향이) 오래도록 머물렀고
차 끓이는 일이 익숙하여라(烹茶易熟)
나의 서재에 (모두) 갖추어 있으니(供我文房)
혜강의 괴벽을 비웃지마라 『표암유고(豹菴遺稿)』권5


 



향을 피우는 일은 자신뿐 아니라 주변을 정화하기 위한 것이다. 서재뿐 아니라 그의 심신까지 정결해졌으니 선비의 서재는 이런 것이다. 만일 그가 향기만을 좇았다면 문인화의 탈속한 경지를 구현하기 어려웠을 터다. 차는 심신을 더욱 맑게 하는 효능이 있다. 더구나 시대의 자유인 혜강은 구속을 싫어했다. 혜강은 중국 삼국시대 죽림칠현(竹林七賢)의 일인으로 노장(老莊)을 숭상했던 인물이다. 그런 혜강의 괴벽을 비웃지 말라는 것이다.



신위. 묵죽도.


신위의 생애는 출사와 은둔으로 일관하였다. 1812년 7월 주청사서장관으로 연행(燕行)했던 그에게 추사 김정희는 옹방강(翁方綱)을 만나는 일이 가장 중요한 일임을 갈타한다. 신위가 연경을 출발하기 전 추사는 '송자하입연병서(送紫霞入燕幷序)'를 지어 ‘자하선배도 먼 길을 건너 중국에 들어간다 하니 (청나라의) 진귀한 경치와 위엄 있는 광경을 보겠지요. 그러나 저는 수많은 경관을 본다하더라도 소재노인을 한번 보는 것만은 못하다고 여깁니다(紫霞前輩涉萬里 入中國景偉觀 吾不如其千萬億而不如見一蘇齋老人也)’라고 하였다. 


 

 


추사가 옹방강을 꼭 만날 인물로 지목한 건 청나라의 장엄한 풍광보다 격조 높은 사람을 만나야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물론 신위는 옹방강과 청대의 학자들을 만났다. 그가 연경을 떠나던 때 옹방강은 자신과 사제의 의를 맺은 신위를 위해 장여한에게 '자하소조(紫霞小照)'를 그리게 했다. 간송 미술관 소장품인 이 소조는 연경의 문예인들과 교유했던 신위의 위상을 보여준다 하겠다. 신위 또한 천하의 명물(名物)인 용봉단을 대접 받았을 것이다. 신위는 연행에서 새로운 세계를 경험한 셈이다.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이처럼 귀한 것이다.


1818년에 쓴 '졸음(眠)'이란 시는 그의 차 세계를 살펴 볼 수 있는 자료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봄이 되니 온몸이 나른한데
막 끓기 시작한 차는 맑은 향이 피어나네(茶熟頭湯漠漠香)
글자 한 자 보지 않아도 그 중에 흥취가 있으니(一字不看中有味)
솔 그림자 가득한 창 아래에서 책 주머니 베고 누었네(滿窓松影枕書囊)
『경수당전고(警修堂全藁)』'무인록(戊寅錄)'


봄은 소생의 계절이다. 나른한 봄날 졸음이 오는 것은 생리적인 현상이다. 그는 나른함을 쫒으려고 차를 다렸다. 고요한 시공간에 차의 맑은 향이 피어난다. 이런 흥취는 차와 내가 하나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선비의 실용적인 격물치지(格物致知)다. 더구나 ‘솔 그림자 가득한 창 아래에서 책 주머니 베고 누는’ 신위는 부족함이 없었다. 물리(物理)의 만끽은 이렇게 드러나며 문인이 기망(期望)한 은일(隱逸)이다. 특히 차의 담박(淡泊)한 맛과 향의 구현은 완벽한 제다법과 수승한 물이 이루어내는 차의 이상 세계다.






시격(詩格)에서도 담박함을 지향했음은 홍현주가 신위에게 자신의 시의 평품(評品)을 요구했을 때 지은 시에서 ‘지긋한 맛은 담박함에 있다(至味在淡泊)’라고 한 데서도 알 수 있다. 또 신재식은 연경에서 돌아와 신위에게 청의 금속학자 전림(錢林·17??~18??)의 근체잡시, 그리고 신위의 '회인(懷人)'에 화운(和韻)한 두 편의 시를 보여주었다. 신위가 이 뜻을 살려 지은 시에 차의 이상 세계인 맑고 싱그러운 차의 극치를 다음과 같이 드러냈다.


다산이 담담하게 차 달이는 법을 전했으니(茶山傳法淡烹法)
남조를 흘겨볼 사람이 몇이나 될까
하염없이 옛일 슬퍼하자 시흥은 식어 가는데(弔古翩翩詞致冷)
가을바람만 쓸쓸히 마승의 꽃에 부네(西風吹瘦馬乘花)

『경수당전고』'창서존고(倉鼠存藁)' 권 2


다산(茶山)은 남송시대 증기(曾幾)의 자호(自號)다. 그는 시에 능했고 차를 잘 다루었다. 맑은 차를 선호하는 건 송 휘종 이후 널리 확산되었다. 백차 선호는 제다법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차를 만들 때 고(膏·차의 진액)를 짜내는 방법 말이다. 고를 짜낸 차는 마치 마른 대나무 잎과 같았다. 과다한 엽록소와 쓴 맛을 제거해 담백하게 만들기 위한 조치다.


이런 차를 잘 만들었던 ‘다산이 담담하게 차 달이는 법을 전했’다는 것. 따라서 차의 극치미를 드러냈던 남송시대를 누가 우습게 볼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마승은 송나라 무림 사람으로 원예에 밝아 꽃을 잘 관리했다. 겨울에도 꽃을 피우는 재주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한편 신위의 생애는 그리 순탄하지 않았다. 병조참판이 되었다가 강화유수로 임명된 그는 외척 세력이 정권을 장악하면서 이들의 미움을 받았다. 윤상도의 탄핵으로 어려움에 처했던 그에게 도움을 준 이는 김조순이었다. 시절의 대세를 파악했던 신위는 시흥의 자하산방에 은거한다.


1827년 부인이 세상을 떠나자 인생무상을 절감하고 불교와 차에 심취한다. 품성이 호탕했던 그는 당색(黨色)에 구애받지 않고 남인계의 정약용, 그리고 그의 자제와 교유했다. 자신은 소론이었지만 노론 김조순·김정희와도 돈독한 친분을 가졌다. 당색이 같았던 이유원(1814~88)과 정원용(1783~1873)과도 친밀하였다. 그가 초의를 만난 시기는 대략 1830년경이라 짐작된다. 초의는 그의 스승 완호의 탑명을 받기 위해 상경하여 시흥의 자하산방으로 신위를 찾아가 완호의 삼여탑명(三如塔銘) 서문과 글씨를 써달라고 청할 때 차를 선물한다.


초의가 청공한 차가 산방에 도착했네(製茶淸供到山房)
조심조심 기울여 또 자완의 차색을 감상하니
투명함 속에서 먼저 차향이 피누나
공하다는 걸 알았으니 무엇을 대할까(悟在虛空何必面)
상을 마주하고 담담히 나눈 말 서로를 잊었네(對床言說淡相忘)
『경수당전고』'축성팔고(祝聖八藁)'





이명기. 초당독서도. 지본수묵채색. 103x48.5cm. (삼성미술관 소장)


초의가 보낸 차는 투명함 속에서 차향을 먼저 피워내는 차였다. 마주 앉아 나눈 담담한 말은 서로를 잊게 하였다. 지극한 선미(禪味)를 이렇게 드러낸다. 그는 품천(品泉·물맛의 우열을 평가하는 것)에도 일가견이 있어 ‘샘물이 달콤하니 죽은 물은 아니고(泉水必甘非死氣)/바닷가라 하더라도 빗물은 짜지 않네(海雲之雨不生鹹)/세상에 차 끓이는 물을 평해보건대(若論天下煎茶品)/강왕곡물이 제일이라면 이 물은 두세 번째는 되리라(第一康王此二三)'라 하였다.


물맛을 분별하는 능력은 다인이 갖출 기본적인 안목이다. 차는 물에 그 세계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더구나 『다경』을 통해 차 이론에 천착했던 그였기에 초의에게 많은 조언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실로 조선 후기 차문화 중흥의 토대는 이들에 의해 구축되었던 셈이다.


1831년 북선암으로 신위를 찾아간 초의는 '북선원알자하노인(北禪院謁紫霞老人)'에서 ’신위는 단련한 전 학사인 듯(秘閣丹鍊前學士)/범궁에서 향 사르는 대승의 선객이라(梵宮香火大乘禪)‘고 하였다. 선승처럼 살았던 신위의 일상사를 자세히 드러냈다.


말년 병고에 시달렸던 신위는 차를 통해 심신을 단련했다. 아울러 그의 담박한 삶의 일면은 '남다시병서'에서 ’내 삶은 담박하나 다벽이 있어(吾生澹味癖於茶)/ (차를)마시니 정신이 환해지네‘라 하였다. ’한 잔의 차로 기름진 음식을 씻어내고‘자 했던 신위는 차를 마신 후 겨드랑에서 바람이 이는 신선의 경지를 경험했던 것이 분명하다.


이처럼 차를 통해 팍팍한 삶을 위안 받았던 옛 사람들의 공감대는 예나 지금이나 같다. 더구나 차는 단순한 음료가 아니기에 이런 이치를 공감했던 사람들은 넓고 깊은 차의 샘을 파왔던 것이다. 신위 또한 그런 인물이었다.


박동춘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