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모는 시동생인 박정희 의장을 아끼고 뒷바라지해줬다. 대구사범을 나와 문경에서 보통학교 선생을 하던 박 의장이 만주로 갈 때(군관학교 입학) 장인 박상희의 금시계를 훔쳐서 준 게 장모였다.
1961년 9월 최고회의 행사에서 테이프 커팅을 하는 박정희 의장(앞줄 왼쪽).
그의 왼쪽 뒤편에 박종규 경호대장, 오른쪽 뒤편에 선글라스 낀 김종필 중정부장이 서 있다. 맨 오른쪽은 최덕신 주월남대사. [중앙포토]
코를 골며 낮잠을 자고 있던 장인의 조끼 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몰래 빼서 내줬다 한다. 잠에서 깬 장인이 “시계 어떻게 했느냐”고 묻자 장모는 “시동생이 만주 가는데 여비 줄 돈이 없어서 생각다 못해 당신 시계를 꺼내 줬다”고 털어놨다. 장인은 처음엔 “아니, 이 녀석이”라며 화를 냈다. 장인은 박 의장이 일제가 창설한 만주군관학교에 들어가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곧 화를 참았다고 한다. 장모 말로는 장인은 결국 ‘아, 동생이 그게 없으면 만주로 가지 못할 형편이구나. 잘 가거라’라는 태도를 보였다.
황태성은 내 장인과 어릴 때부터 친했다. 경북 김천에서 활동을 했던 황태성은 대구 10·1 사건의 주동자였다. 그 후 대구사건 관련자에 대한 검거 열풍이 거세지자 황태성은 북쪽으로 도피했다. 과거 일제 땐 독립운동을 했고 민족주의자였겠지만 월북 후 공산당 정권의 부상을 지냈다.
황태성은 신문 과정에서 간첩이 아니라 김일성 밀사(密使)로 행세했다. 황태성은 박정희를 만나 남북 합작을 협상하라는 김일성의 지령을 받고 내려온 것이 분명했다. 남북 간 현안 문제를 해결하고 사이좋게 하자고 박 의장과 나를 설득하라는 밀명(密命)이었을 것이다.
여기서 ‘사이좋게’라는 건 남한이 손들고 북한에 합류하도록 적화(赤化) 공작을 하라는 뜻이다. 황태성의 친구인 박상희의 동생이 혁명에 성공해서 남한을 쥐고 있고, 그 사위는 중앙정보부장이라는 정보가 김일성에게 들어갔을 거다.
김일성은 박 의장의 과거 좌익 전력(前歷)도 주목했을 것이다. 그러니 황태성을 보내서 그 둘을 잡고 얘기를 하면 뭔가 하나 얻어올 수 있지 않겠느냐고 기대한 듯하다. 되든 안 되든, 내려가서 한번 공작(工作)을 좀 해보라고 보냈을 것이다. ‘잘 되면 좋고, 안 되면 거기 가서 죽어라’는 뜻이었을 거라 짐작한다.
하지만 어림없는 일이었다. 박정희 의장은 자신의 사상에 대한 의심 때문에 시달리고 있었다. 5·16 혁명 뒤에도 군내 일부 세력은 “박정희는 빨갱이다”고 떠들며 음해했다.
미국도 박 의장의 사상을 의심스러워했다. 오죽하면 내가 ‘반공을 국시(國是)의 제 1의(義)로 삼는다’는 혁명 공약을 첫머리로 내걸었겠나. 이런 일로 박 의장의 정체가 의심받을 빌미를 줬다간 자칫 혁명 과업까지 망칠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박 의장이 자신의 좌익 콤플렉스에 대해 내게 고충을 토로한 적은 한 번도 없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내가 그 심중을 헤아리고 있어서다.
김일성은 혁명 지도자인 박정희 의장을 오판했다. 김일성은 나에 대해서도 몰랐다. 나는 북녘 땅에서 휴전선을 넘어 내려온 황태성을 큰 간첩으로 취급했다. 그 이상으로 치지 않았다. 나는 중앙정보부장을 맡으면서 이렇게 결심했다.
‘나라의 근대화 과업을 수행하는 데 방해가 되는 것은 어떤 누구라도, 내가 이 자리에 있는 동안은 용서하지 않는다. 내가 모든 책임, 전 생명을 걸고 박정희 의장을 뒤에서 도우면서 근대화 과업을 밑받침하겠다’. 누가 뭐라고 하든 그게 나의 일관된 철학이었다. 혁명의 대표가 박 의장이고, 혁명의 뒷받침이 곧 박 의장 뒷받침이다.
황태성은 혁명 과업 수행에 결정적 장애 요인이 될 수 있었다. 나는 이 상황을 되도록 빨리 정리하기로 했다. 박정희 의장을 위해서도 그 길밖에 없었다. 박 의장이 밖으로 말하진 않았지만 황태성이란 문제점을 없애야 한다는 생각은 나와 같았다고 본다.
그를 밀사라고 볼 수 없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밀사였다면 황태성이 내려오기 전에 우리 쪽에서 어느 정도 물밑 호응이 있었어야 했다. 하지만 황태성의 서울 잠입을 정보부장인 나는 몰랐고, 내가 보고드리기 전까지 박 의장도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박 의장과 나는 황태성을 만날 까닭이 없고, 만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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