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이 기회에 태평양 4개국 경제공동체의 지속적 번영을 위해 몇 가지 제안을 하고자 합니다. 첫째, 동북아의 한·일·중 세 나라의 공존공영을 위해서는 반드시 미국의 참여가 필요합니다. 미국을 제외한 채 동북아의 번영과 평화를 논하는 것은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한·미 동맹과 일·미 안보협력체제는 한반도의 통일 이후에도 지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둘째, 제1차 세계대전의 교훈을 지적하려고 합니다. 대전 이전 유럽 열강들은 경제적 교류는 밀접했지만 이를 관리할 안보협의체가 없었습니다. 오스트리아 황태자 암살이란 예기치 못한 불상사가 발생하자 이를 통제하지 못하고 여러 나라들이 원하지 않은 전쟁에 연쇄적으로 휘말려 들었던 것입니다.
이 교훈을 바탕으로 한·미·일·중의 태평양 4대국 사이에 위기를 관리할 수 있는 기구가 존재해야 하며, 특히 국가 지도부 사이의 정기적인 대화체제가 견고하게 만들어져야 할 것입니다. 셋째, 지난 150년간 민주주의 국가와 민주주의 국가는 전쟁을 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려고 합니다. 동북아의 평화와 번영이 지속되려면 한국과 일본의 민주주의가 더욱 성숙하면서, 중국의 민주화가 자리 잡고 북한의 독재정권이 변해야 합니다.
미국·한국·일본이 역내(域內)의 민주화를 촉구하고 이를 지원해야 하는 것은 그것이 동북아의 평화와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한국에서 일어난 최근 반일(反日)시위에 대해 한·일 양 국민들이 여유 있는 대응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양국의 민주주의에 대한 신뢰가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한국에서의 반일운동은 민주주의의 원칙이 작동하는 가운데서 이뤄졌습니다. 한국인들은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에 분노하면서도 정부의 세련되지 못한 대일정책에 대해서는 공개적으로 비판을 하기도 했습니다. 한·일 두 나라 국민들은 정부 간 외교 마찰을 완충시키는 역할을 하면서 교류와 협력을 유지해 가고 있습니다.
한반도 분단, 남북 동족상잔
일본이 갚아야 할 역사적 빚
동북아의 항구적인 평화는 북한의 민주화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동북아의 평화와 번영에 결정적 장애물이 되고 있는 것은 북한의 반(反)인류, 반평화적인 도발행위입니다.
위험천만한 북핵 문제는 그들이 핵개발을 파기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김정일 정권은 그렇게 쉽사리 변질되거나 종식되지 않을 것입니다. 언제 어디에서 무슨 짓을 할지 예측이 어려운 그들을 상대로 해결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그 해결 방법이 평화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데 세계의 고민이 있습니다. 지금 6자회담은 회담을 위한 회담에 그치고 있습니다.
핵을 무기로 세계를 가지고 놀고 있는 북한에 도대체 무엇을 기대할 수 있다고 ‘대화에 의한 평화적 해결에 모두 합의했다’라고 하는 관용구(慣用句)를 되풀이하면서, 그들에게 시간적 여유를 허용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그리하여 그 어느 날 북한으로부터 결정적인 결단의 선택을 강요받는 사태를 자초하게 되지 않을까 우려를 금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북한의 핵 문제는 가능한 한 빠른 장래에 유엔 안보리로 가져가서, 국제사회가 단합해 ‘검(劍)과 쿠란’ 양수(兩手)로써 해결해 나가는 것이 최선책이라고 생각합니다. 국제공산주의자들의 침략을 저지했던 한국전쟁이 한국의 힘만으로써는 감당하기 어려웠던 것과 같이 한반도의 통일은 한국인의 힘만으로써는 어려울 것입니다.
한반도 분단과 남북 간 동족상잔(同族相殘)의 참화는 일본의 한반도 지배와 제2차 세계대전의 전후 처리가 불러온 결과이므로 일본 측에 책임이 없을 수 없습니다. 한국이 주도할 남·북한 통일 과정을 일본이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것은 이런 역사적인 빚을 갚는 일이 될 것입니다.
일본에 대한 한국인의 분노와 한국에 대한 일본인들의 경멸감이 아직 많이 남아 있었던 65년 한국과 일본은 대등한 국가 관계를 맺었습니다. 이 국교정상화에 일조한 사람으로서 저는 당시 국교정상화에 즈음한 박정희 대통령의 담화를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나는 우리 국민 일부 중에 한·일 교섭의 결과가 굴욕적이니 저자세니 심지어 매국적이라고까지 극언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위안부 속임수 모집, 젊었을 때 내 눈으로 봤다”
대일 청구권자금
우리 민족의 피의 채권
1966년 9월 1일 김종필 공화당 의장(오른쪽)이 제2회 아시아국회의원연맹(APU) 총회 참석차 방한한
기시노부스케(岸信介) 전 일본 총리와 환담하고 있다. 기시는 아베 신조 현 총리의 외조부다. [중앙포토]
그들의 주장이 진심으로 우리가 또다시 일본의 침략을 당할까 두려워하고 경제적으로 예속이 될까 걱정을 한 데서 나온 것이라면, 나는 그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어찌하여 그들은 그처럼 자신이 없고 피해의식과 열등감에 사로잡혀 일본이라면 무조건 겁을 집어먹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같은 비굴한 생각, 이것이야말로 바로 굴욕적인 자세라고 지적하고 싶습니다. 나는 이 기회에 일본 국민들에게도 한마디 밝혀둘 일이 있습니다. 과거 일본이 저지른 죄과(罪過)들이 일본 국민이나 오늘의 세대들에게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역시 믿을 수 없는 국민이다’ 하는 대일(對日) 불신감정이 우리 국민들 가슴속에 또다시 싹트기 시작한다면 이번에 체결된 모든 협정은 아무런 의의를 지니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이 기회에 거듭 밝혀두는 바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다행히도 한국인의 일본인에 대한 열등감과 패배의식은 이제 거의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일본의 지도자 중 일부는 한국인과 중국인들의 마음을 아프게 함으로써 일본을 불신케 하는 발언과 행동을 끊임없이 내어놓았습니다.
창씨개명과 일본어 사용 강요에 대한 변명, 강제 동원된 위안부의 존재에 대한 부정, 징용·징병자들에 대한 무시, 한·중 양 국민들에게 고통을 안겨준 전범(戰犯)들의 위패(※1978년 도조 히데키 등 A급 전범 14명 합사)가 있는 야스쿠니 신사(靖國神社)에 대한 지도부의 참배, 그리고 독도 영유권 주장, 일본의 침략행위를 변명하는 교과서의 검정 문제 등등 일본은 아직도 동아시아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아물지 않고 있는 역사적 상처를 도지게 하는 언행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최근 일본 시마네현이 ‘다케시마의 날 조례’를 제정하여 한·일 관계를 악화시켰습니다. 일본의 책임 있는 지도자들의 사려 깊은 행동이 너무나 아쉽습니다.
이번 교과서 검정 과정에서 일본 정부는 교과서 제작에 일절 간여할 수 없다고 변명하면서 공무원들이 개입해 교과서 제작자 측이 기술한 ‘독도가 한·일 간의 분쟁지역’이란 표현을 ‘독도는 일본의 영토’라는 식으로 바꾸도록 했다는 말도 들었지만, 사실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이 자리에서 한국이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독도 문제를 깊게 언급하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몇 가지 지적해 두고자 합니다.
일본이 1905년에 와서 이 섬을 자국의 영토에 편입했다는 주장은 다시 말해 그전에는 일본 영토가 아니었다는 자백과 다름없습니다. 일본 정부는 독도가 ‘역사적’으로 일본 것이었다고 주장하는데 그 역사란 것은 1905년 이후를 말합니다. 한국은 6세기 신라 때부터 독도를 영유, 관리했기 때문에 별도로 영토 편입을 선언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다만 공도(空島)정책을 쓰다가 개척정책으로 바꾼 1900년 대한제국은 칙령 41호로써 독도(당시 명칭은 석도·石島)를 울릉군수의 관할 범위로 명시했습니다. 일본의 영토 편입 조치보다도 5년이나 빨랐습니다. 이에 따라 1906년에 일본의 시마네현 측이 독도를 일본 영토라고 통보해 왔을 때 대한제국은 이 칙령에 따라 우리 땅임을 분명히 했던 것입니다.
다음으로, 조선왕조실록이나 비변사(備邊司) 등록(謄錄)과 같은 국가 공문서에는 울릉도와 독도가 명기되어 있고, 관찬(官撰) 영토지도에도 나타납니다. 1877년 일본 메이지 정부 태정관(太政官) 문서의 기록에도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영토’ 또는 ‘일본 영토 이외의 지역’으로 적혀 있습니다. 일본의 관찬 영토지도에서도 독도는 일본 땅이 아닌 것으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왜 일본에 겁을 집어먹느냐”
박정희, 한·일 대등한 관계 강조
셋째, 일본이 일·러전쟁 중에 독도를 빼앗아간 것은 5년 뒤 완결되는 한·일합병의 첫 조치였습니다. 일본은 일·러전쟁을 개전하자마자 조선을 군사적으로 점령하고 외교권을 박탈해 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독도를 시마네현으로 편입시킨 행위는 한반도 병합의 일환이었다고 한국은 이해합니다. 따라서 일본이 독도영유권을 제기하면 할수록 한국인들은 가슴속에 묻어두었던 ‘불행했던 과거’를 떠올리게 되어 있습니다.
독도의 한국 영유(永有)는 이처럼 역사적으로, 지리적으로, 문헌적으로 확실합니다. 일본은 한국과 전쟁을 하지 않는 한 한국이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독도를 빼앗아갈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이런 식으로 제기하는 것이 한·일 친선에 무엇이 도움이 되는지, 또 일본의 국가 이익에 무엇이 합치되는 것인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진정으로 일본의 국가 이익을 생각하고 동북아의 평화와 번영을 바라는 지도자가 있다면, 독도영유권 주장을 포기함으로써 한국인들의 불신감을 씻어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지 못한다면 지금처럼 미해결(未解決)로 놓아두는 것이 차선의 해결책이 될 것입니다.
저는 야스쿠니 신사에 안치된 태평양전쟁 전범의 위패를 다른 곳으로 옮겨놓을 수는 없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는 일본 요인들은 전범들에 대한 참배가 아니고 애국자들에 대한 참배라고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전범들의 위패를 분리해 다른 곳에 수용하는 것이 그렇게 어렵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난날 일본이 전시 총동원체제를 강화하면서 한국인에 대해 창씨개명과 징용·징병, 그리고 위안부 동원 등이 조선인들의 자발적 의사에 의해 이뤄졌다고 말하는 것보다도 더 지독한 모욕은 없을 것입니다. 이는 무엇보다도 사실이 아닙니다.
저도 젊었을 때 저의 이 눈으로 보았습니다. 조선 농촌의 가난한 처녀들이 일본의 공장에서 일한다는 말에 속아 끌려간 뒤에 위안부가 되어 돌아왔다가 가문에서 버림받은 실화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토 마사노리(伊藤正德)라는 전사(戰史) 작가가 쓴 책에도 조선인 출신의 위안부들이 뉴기니까지 끌려갔다가 죽어가는 대목이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오늘의 한국과 중국은, 메이지유신으로 먼저 근대화했던 일본인들의 우월감과 자존심을 만족하게 했던 그런 나라가 아닙니다. 한국과 중국은 일본과 대등한 좌표에 위치해 일본을 대하게 이른 것입니다.
프랑스와 독일의 경우 나폴레옹의 침공, 보불(普佛)전쟁, 제1·2차 세계대전 등 네 차례의 전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구원(舊怨)을 넘어서 화해 협력해 유럽연합(EU)의 경제권에서 번영을 함께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익히 보고 있습니다. 일본은 분로쿠 게이초(文祿慶長·※임진왜란)의 침략과 식민지배의 고통을 한국인들로 하여금 잊게 해줘야 합니다. 한반도의 자유통일을 위해 고난의 길을 걷고 있는 한국을 일본은 성의껏 협조해 한반도와 동북아에 영원한 평화와 번영의 구조를 정착시켜야 할 것입니다.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을 여행한 서양 사람들은 “일본 사람들은 부드럽고 겸양하고 마음에 여유가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고 합니다. 오늘의 일본인에 대해서도 외국인들이 이런 인상을 가질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한·중·일 3국+미국
위기 관리 기구 모색해야
45년 8월 15일 일본 천황의 항복 이후 북한에서는 잔류 일본인들에 대해 입에 담을 수 없을 정도의 고통을 안겨 주었습니다. 그러나 남한에서는 북한과는 반대로 이들을 평온무사(平穩無事)하게 귀국시켰습니다. 이러한 남과 북을 비교하면서 일본 국민 여러분은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여류 작가 후지와라 데이(藤原テイ)의 『흐르는 별은 살아 있다』라는 소설 속에 당시 남북한의 현황이 적나라하게 기술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도 일독(一讀)해 보십시오.
지난 과거를 돌아보면 우여곡절과 기복(起伏)도 많았지만 이 세상은 나쁜 사람들보다는 좋은 사람들이 더 많아서인지 어제보다는 오늘,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나아지는 발전의 도정(途程)을 걸어 왔습니다. 특히 여기서 다 거명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일본의 양식 있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저 자신의 삶에서 보람도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와 같은 전중세대는 거의가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하였습니다. 넘어야 할 고지는 아직도 많이 있으나 그 일은 저와 같은 노병(老兵)의 임무는 아닐 것입니다.
다만 남은 생애 중에 우리가 졌던 역사의 짐을 다음 세대에게는 넘기지 않도록 저의 미력이나마 최선을 다할 생각입니다. 여러분 한·일, 일·한 양국이 영구히 변함없는 우정과 협력과 평화와 번영이 함께하는 장래를 약속할 수 있도록 노력과 전진을 계속하지 않겠습니까? 장시간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리=전영기·최준호 기자 chun.younggi@joongang.co.kr (※표시는 정리기자 주)
● 소사전 메이지유신(明治維新·1868년)=도쿠가와 막부의 쇼군(將軍) 체제를 무너뜨리고 왕정(천황) 복고를 이룩한 변혁. 메이지 정권은 학제·징병령·조세 개정 등 개혁을 추진하고, 서구 선진 문물을 빠르게 받아들여 근대국가로 탈바꿈했다. 일본은 메이지유신의 성공으로 열강의 반열에 올라섰고, 중국(청나라)과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차례로 승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