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년 9월 8일 제주도 시찰 중인 박종규 경호대장,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 김종필 정보부장(오른쪽부터).
JP는 한 달여 뒤인 10월 15일 장모의 전화를 받고 황태성 남파 사실을 알게 된다. [중앙포토]
10월 22일 오후 반도호텔 객실에서 검은 선글라스를 낀 박 경감이 정보부 수사관들과 함께 황태성과 대면했다. 박 경감은 “내가 김종필입니다”고 먼저 인사했다. 그와 몇 마디 말을 나누던 황태성이 대뜸 “가짜는 저리 가라”고 소리쳤다. 가짜 김종필인 걸 금세 알아챈 것이다. 아마도 황태성은 남파되기 전에 사진으로 내 얼굴을 익혀 뒀을 것이다. 질문도 제대로 못해 보고 10분도 안 돼 취조는 무산됐다. 황태성이 내 대역(代役)에게 속았다는 시중의 얘기는 잘못 알려진 것이다.
황태성을 잡아서 가둬 놓고도 나는 박정희 의장에게 아무 보고도 하지 않았다. 박 의장은 과거 좌익 혐의 전력 때문에 사방에서 사상을 의심받던 차였다. 김창룡의 숙군(肅軍) 태풍에 휩쓸려 사형 구형까지 받았던 사람이다. 그가 늘 걱정하고 신경 쓴 문제가 그것이었다. 박 의장이 이 보고를 받으면 얼마나 놀라고 당황할지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가급적 조용히 내 선에서 알아서 처리하려고 했다. 하지만 황태성이 김일성 지시로 내려온 게 분명한 이상 박 의장에게 보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황태성을 체포한 지 며칠이 지나 장충동 최고회의 의장공관으로 찾아갔다.
“각하, 황태성이라는 사람을 아십니까?” 내 질문에 박 의장이 놀란 눈으로 날 쳐다봤다. “아니, 임자가 그 사람을 어떻게 알아?”
“놀라실 것 없습니다. 그 사람이 평양에서 내려와 각하와 저를 만나게 해 달라고 졸랐다고 합니다. 장모에게서 전화를 받고 제가 알았습니다. 수배해서 흑석동에 잠복하고 있던 걸 잡아 경찰서에 넣어 놨습니다. 신문에서는 의장님이나 정보부장을 만나 얘기하겠다면서 일절 묵비권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박정희 의장 얼굴이 갑자기 새하얘졌다. 박 의장은 내 보고에 놀라 “그래? 그래?”라고만 하고 말을 못했다.
그 심정을 나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박 의장을 조금이나마 진정시키려고 이렇게 물었다. “어려서 황태성에게 ‘형님, 형님’ 하고 그러셨다면서요.” “응. 그랬어…. 형님 친구니까 집에도 자주 놀러 왔지.”
가만히 뭔가를 생각한 뒤 박 의장은 “뭘 하려고 내려왔대”라고 물었다.
“말을 안 하니까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저희가 수사하면서 느끼기로는 김일성의 지령을 받고 내려왔습니다. 아마도 황태성이 (박상희 장인과) 친했으니까 각하하고도 친했으리라고 본 것 같습니다. 각하와 만나 남북 간 현안을 얘기하고 다리 놓으라는 명령을 받고 내려온 듯합니다. 그래서 각하와 저를 만나게 해 달라고 하고 있습니다.”
박 의장은 “난 안 만나”라고 말했다. 그리고 “지금 얘기한 그게 다냐”고 물었다. “답니다. 다른 건 없습니다. 각하께서 걱정하실까 봐 미리 보고드리지 않고 잡아넣은 다음에 보고 올리는 겁니다.” 박 의장은 다시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정리=한애란 기자 aeyani@joongang.co.kr
● 인물 소사전 김성곤(金成坤·1913~75)=호는 성곡(省谷). 정계·재계(쌍용그룹 창업자)·언론계(동양통신 창설, 성곡언론문화재단)·교육계(국민대학 재단이사장)에 굵직한 족적을 남겼다. 보성전문(고려대 전신)을 나와 1948년 금성방직, 62년 쌍용양회를 설립. 고향(대구 달성군)에서 4대 국회의원에 당선됐고, 5·16 후 공화당에 합류(6·7·8대 의원). 공화당 재정위원장 시절 그의 영문 이니셜 SK는 반(反) JP 세력인 4인 체제의 상징이었다. 71년 10·2 항명파동(오치성 장관 해임안)으로 박정희 대통령의 분노를 사 정계를 떠났다. 73년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을 맡았다.
● 김민하(金珉河)=경북사대부중과 중앙대(정치학 박사)를 나왔다. 5·16 직후 중앙대 강사(27세) 때 황태성 사건에 연루된다. 황태성이 동향(경북 상주) 친구 아들인 그의 집에 머물렀다. 그와 권상능(조선화랑 대표)씨는 이 사건으로 구속돼 옥고를 치렀다. 권상능씨는 황태성의 질서(姪壻, 조카사위). 권상능과 김민하는 처남· 매제 사이다. 그는 중앙대에서 교수(정당정치론)·총장을 지냈다. 교원단체총연합회 회장, 민주평통 수석부의장을 역임했다. 지난 1월 세계일보 회장에 취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