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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인민공사의 비참한 교훈

淸山에 2015. 4. 3.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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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인민공사의 비참한 교훈

객관 여건을 무시하고 정치적인 담론만 앞세우는 무책임한 정치인들의 작태 때문에

억울한 원혼(寃魂)으로 남은 2000만 민초들만 불쌍하였다.

마중가(중국문제 전문가) 


 
   대한민국의 무상복지 만능론자들은 한 번쯤 중국 인민공사의 비참한 교훈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1958년 8월의 일이다. 모택동은 북대하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우리 사회는 공산주의로 진입해도 괜찮을 정도로 대중이 진보하였다.》라고 말하면서 전국 인민공사화를 선포하였다.


  그리하여 두 달 만에 기존의 74만 개 초급단위의 농업합작사를 26만 개의 큰 규모의 인민공사로 개편하였다. 인민공사가 된 후 농민들의 땅은 모두 국유화되었고 하루 세끼 공사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입을 옷도 배급주고 농사일은 해도 되고 안해도 되고 식량은 양식창고에서 공짜로 가져다 먹으면 됐다. 공처(共妻)만 없고 모든 것이 공산화되었다.


  이렇게 3년이 지난 후 농촌의 모든 재산은 거덜났다. 땔 나무가 없어서 초가집 문짝을 모주리 뜯어다가 땠고 식량 창고는 가는 곳마다 약탈현상이 일어났으며 하루 이틀 굶기 시작한 농민들은 일주일, 이주일이 못돼 굶어 죽기 시작했다. 이렇게 3년 동안 아사한 농민의 숫자가 2000만이다.


  지금 중국의 인구를 연령별로 작성한 데이터를 보면 1959-1960-1961년 3년의 인구가 특별히 적고 출생률도 특별히 낮음이 나타난다.


  그때 중국 도처에서는 嬰兒(영아) 매매가 이루어졌고 人肉(인육) 먹기가 성행하였다. 독재자 모택동은 1961년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고 2인자 자리로 물러앉았다. 그러자 유소기 등소평등 실용주의자들이 대두하면서 모택동의 과대망상증을 비판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못마땅한 모택동은 6년을 韜光養晦(도광양회)하다가 1966년 복수의 비수를 유소기와 등소평에게 꽂기 시작했다. 이것이 이른바 문화대혁명이다. 객관 여건을 무시하고 정치적인 담론만 앞세우는 무책임한 정치인들의 작태 때문에 억울한 원혼(寃魂)으로 남은 2000만 민초들만 불쌍하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