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포천의 육군 대위 박태준(전 국무총리·1927~2011)은 석 달간 계속됐던 비상경계 명령이 24일 0시에 해제되자, 서울 시내로 외박을 나왔다. 일본 와세다 대학 선배와 술잔을 기울인 뒤 잠들었던 그는 25일 아침 눈을 뜨자 "왠지 가슴이 먹먹했다"고 했다. 전쟁 소식을 듣고 군용트럭을 잡아탄 그는 몇 차례나 갈아탄 끝에 간신히 부대에 복귀했다. 하지만 박태준은 "소련제 T34 전차를 앞세우고 쳐내려 오는 인민군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고 말했다.
1950년 4월 1사단장으로 부임한 백선엽 대령은 3개월 일정으로 경기도 시흥의 보병학교에서 '고급 간부 훈련' 교육을 받고 있었다. 작전참모의 전화를 받고 용산 육군본부로 향하던 그는 "차창 밖으로 보이는 거리는 평소 일요일과 조금도 다름 없이 조용하고 한가로웠다. 교회 종소리도 평화롭게 들려왔다"고 회고했다. 참모총장실에 들어간 그가 1사단으로 복귀해도 좋은지 묻자, 거구의 채병덕 참모총장은 "무슨 그따위 소리를 하는가. 빨리 사단으로 가라"고 소리쳤다. 1950년 10월 미 1기병사단에 앞서 평양에 입성하고, 1953년 한국군 최초의 육군 대장으로 진급한 '백선엽 신화(神話)'의 시작이었다. 대장 진급 당시 그의 나이는 33세였다. 이날 이승만 대통령은 아침 식사를 끝낸 뒤 오전 9시 30분쯤 경회루로 낚시를 하러 갔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어금니 치료를 받기 위해 치과에 갔다. 신성모 국방장관이 경무대로 들어온 시각은 오전 10시 30분이었다. '탱크를 앞세운 공산당이 개성을 점령하고 춘천 근교에 이르렀다'는 장관 보고를 받은 이 대통령은 "탱크를 막을 길이 없을 텐데…"라고 입속말을 했다. 밤새 잠 못 이루던 이 대통령은 새벽 3시, 도쿄의 맥아더 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었다. 미국 전속부관이 맥아더를 깨울 수 없다고 하자, 이 대통령은 화를 내며 "한국에 있는 미국 시민이 한 사람씩 죽어갈 테니 장군을 잘 재우시오"라고 고함쳤다. 그 소리가 커서, 프란체스카 여사가 수화기를 가로막았다. 통화가 끝나자 이 대통령은 곧바로 장면 주미(駐美) 대사에게 전화를 걸어 미 의회가 승인한 무기 지원안(案) 추진 상황을 알아보라고 닦달했다. 6·25 전쟁 첫날은 이렇게 지나갔다. 하지만 이날이 민간인과 군인을 포함해 남북 전체 인구의 10%에 이르는 300만명이 숨지거나 다치는 비극의 출발점이 될 것으로 짐작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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