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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세 번째 자료는, 그렇게 앨리스 현의 행적이 드러난 뒤 그의 상관인 정보참모본부장 니스트 대령의 1946년 8월 증언이다. “대령은 전 기간 동안 검열된 항목 수에 관한 도표를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그는 2월에 특별히 급속한 하강이 있었던 점에 대해 당시 전쟁부가 한 여성을 고용해 한국에 왔는데, 그녀가 그들의 임무를 망친 악마로 자라났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녀는 38이북 출신인 ‘북에서 온 그녀의 친구들’의 대다수를 고용함으로써 CCIG-K의 임무를 파괴하는 데 거의 성공했다. 그들은 그녀를 제공했고, 획득된 정보와 활동량은 차근차근 회복되기 시작했다.”(정용욱 편, <<해방 직후 정치·사회사 자료집>> 제2집(다락방, 1994), 32쪽) 여기서 ‘악마’로 묘사된 여성은 바로 앨리스 현이었다. CCIG-K가 한국어 편지의 검열을 위해 영어 구사가 가능한 한국인 통번역자들을 구하는 과정에 그녀가 개입해 북한 출신 공산주의자들을 다수 취직시켰고, 그 결과는 니스트 대령의 표현대로 ‘CCIG-K 임무의 파괴’로 귀결됐던 모양이다. 이는 그녀가 국내의 공산주의자들과 상당한 연계를 가졌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앨리스 현은 나중에 북한 당국이 주장한 대로 ‘미국을 위한 스파이’이기는커녕 ‘북한을 위한 공작원’의 성격을 가졌다고 보는 게 훨씬 더 합리적이다. 그녀는 결국 한국 근무 반년 만에 해고되어 미국으로 돌아갔다. ‘옥인동 사람’ 현순-앨리스 현 부녀의 동행 왜 이런 불일치가 생긴 것일까? 그녀가 비록 미군에 소속되어 있기는 했으되 미군을 위해 일한다기보다는 북한, 남로당 또는 미국 공산주의자들과의 연계 속에서 이들을 위해 일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속속 발굴되는 상황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녀는 그 시절 옥인동 인근에 살던 김수임, 노천명에 비해 연배로는 8~9년 위였지만, 따지자면 같은 이화여전 출신이었다. 정확하게는 1919년 3월 24일 4년제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를 제1회로 졸업하고 이화여전에 진학했으나 1920년 아버지의 뒤를 따라 상하이로 망명했기 때문에 이화여전을 졸업하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앨리스 현은 바로 지척에 사는 두 사람의 후배, 그 중에서도 미군의 통역으로 근무하던 김수임과는 잘 아는 사이였을 것이다. 학연과 지연, 그리고 그 시점에 점령군이었던 미군을 위해 일한다는 공통점으로 얽혀 있던 그들이 서로 몰랐을 가능성은 상당히 낮다. 그런 인연들이 당시 이들의 움직임에 어떻게 작용했는지도 궁금하다. 이들 이화여전 동창생들의 관계를 보여주는 자료는 아직 발굴되지 않았지만 앨리스 현 본인이 어떤 궤적을 그리며 북한에 경도되었는지를 살필 수 있는 자료는 여기저기 많이 산재해 있다. 그녀를 알기 위해서는 아버지 현순 목사를 먼저 알아야 한다. 옥인동 92번지를 원적지로 하는 현순-앨리스 현 부녀도 말뜻 그대로 동행자였기 때문이다. 대대로 역관을 지낸 집안에서 태어난 현순(1878~1968)의 일생은 유전(流轉)에 유전을 거듭한 역동적인 삶이어서 도저히 한두 마디로는 요약이 되지 않는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상투를 자르고 독립협회의 모임에 나가는 등 개화파의 세례를 듬뿍 받았고 관립영어학교에도 다녔다. 1903년에는 두 번째 출발하는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 이민자들을 위한 통역자로 동행했다가 1907년 귀국했다. 그때 임신한 상태에서 동행했던 부인은 하와이에 도착한 지 두 달 뒤 앨리스 현을 낳았다. ‘미국에서 태어난 첫 한국계 미국인’이었다.
현순이 상하이로 건너가 임시정부 조직에 참여한 직후의 사진. ‘대한민국임시정부국무원 대한민국 원년 10월 11일’이라는 표기가 선명하다. 앞줄 오른쪽부터 현순, 안창호, 신익희
현순은 귀국한 뒤로는 감리교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배재학당의 학감, 상동청년학원의 원장 등을 지냈고, 1911년 협성신학교를 졸업해 정식 목사로 안수를 받고서는 1914년 정동제일교회의 두 번째 조선인 담임목사가 되어 1년 가까이 시무했다.
정동제일교회에서 사임한 뒤 전국을 순회하며 주일학교를 조직하는가 하면 그의 부흥사 자질을 유감없이 발휘하던 중에 또 한 번의 유전이 일어났다. 1919년 2월 19일 기독교 계열 인사들이 3·1운동을 준비하는 모임에 참석해 상하이 지역의 연락책임자로 선정된 것이다.
그는 독립선언서를 미리 받아 상하이로 비밀리에 건너간 뒤 현지에서 이광수 등과 함께 이를 영어로 번역해 미국 대통령 등에게 발송했고, 임시정부 조직에도 참여해 외무차장, 내무차장 등을 역임했다. 그 다음 해에는 임시정부와 미국 정부 사이의 연락 업무를 위해 미국으로 건너가 구미위원부의 부장서리, 특명전권공사로서 동분서주했다.
그러나 이 무렵 대사관 설치 문제로 이승만 임시 대통령과의 갈등으로 사임하고 말았다. 그러나 임시정부에서는 그를 1922년 초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동양 민족혁명단체 대표회의’에 파견해 소련의 지원을 얻고자 했다. 현순은 실제 레닌, 트로츠키 등과 만나기도 했다.
그 뒤 1923~40년 기간에는 주로 하와이 지역에서 여러 한인교회의 목사로 사역하면서 임시정부 지원을 위한 자금을 모으는 등 제2선의 역할에 머물렀지만 그의 왕성한 활동력은 목사 퇴임 후 다시 한 번 발휘됐다.
그는 미국에 있으면서도 중국 내의 임시정부 및 독립운동 관계자들과 연계를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큰딸 앨리스와 큰아들 피터를 미군에 입대시켜 일본과의 막바지 전쟁에 가담시키고 그 자신도 미군 측에 일본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한편 김규식, 김원봉, 지청천, 신익희, 최동오, 유동열 등이 중국에서 중간파 및 진보적 인사들의 통일전선체로 조직한 조선민족혁명당에 가담해 1944년 하와이지부 총서기를 맡았다. 이 무렵 현순의 활동은 ‘기독교 사회주의’라는 말로 설명된다.
해방 직후 그는 미군 당국에 한국으로의 입국을 허가해 줄 것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당시 입국 목적은 김규식, 김약산 등과 만나 한국의 미래를 재조직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70세 가까운 나이에도 의기가 꺾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