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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세잔 (Paul Cézanne, 1839. 1.19 -1906. 10.22)그 산이 거기 있었네..생 비투아르 山

淸山에 2015. 2. 11. 06:23

 




폴 세잔 Paul Cézanne

(1839. 1.19 -1906. 10.22)


 

La cathédrale Saint-Sauveur

세잔이 다니던 교회로 1906년 10월 24일 세잔의 장례식이 열렸던 교회입니다.

 

 

남 프랑스의 액상 프로방스 Aix-en-Provence는 사과를 그린 정물화의 화가,

폴 세잔 (Paul Cézanne, 1839. 1.19 -1906. 10.22)의 고향입니다.

흔히 인류에게는 역사적으로 유명한 3개의 사과가 있다고 하지요.

아담의 원죄의 근원이 되었던 금단의 사과,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계기가 되었던 뉴턴의 사과,

그리고 세잔의 정물화의 사과...

 

그런데 첼로버젼이 더 있네요.

21세기의 스티브 잡스의 애플 컴퓨터의 사과..ㅎㅎ

apple computer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폴 세잔의 정물, 1895 (오르세미술관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평범한 화가의 사과는 먹고 싶지만 세잔의 사과는 껍질을 벗기고

싶지 않다. 잘 그리기만 한 사과는 군침을 돌게 하지만,

세잔의 사과는 마음에 말을 건넨다.”

-모리스 드니-


화가인지 공부하는 학생인지 오르세미술관에서

세잔의 정물화를 모사하고 있었습니다.

창조는 모방으로 부터...

(오르세 미술관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남프랑스 여행을 계획하면서 세잔의 고향, 액상 프로방스를 가고 싶었던 이유는

액상 프로방스에는 그의 생가가 있고 아틀리에가 있고 그가 잠들어 있는 무덤이 있고,

에밀 졸라를 알게 된, 그가 같이 다니던 학교도 있고, 그가 즐겨 다니던 카페도 있고...

더구나 모네가 빠리 근교에 있는 루앙의 성당 근처에 방을 얻어서 묵으면서

루앙성당을 몇 날이고 빛의 변화를 따라 그 성당을 그렸듯이

세잔이 밤낮으로 그렸다는 산, 생 빅투아르,

그 산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폴 세잔의 자화상, 1875 (오르세미술관에서 찍은 사진)

앙브루아즈 볼라르의 초상화를 그리던 중에

(Ambroise Vollard, 1866-1939, 빠리의 화상)

볼라르가 움직이자 사과처럼 앉아 있어야 한다고

버럭 화를 냈다는 폴 세잔, 아내를 모델로 그릴 때도 그랬다고 하는데

그의 자화상에서 그의 성격이 나타나는듯 합니다. ㅋㅋ

 

 

 

 

 

 

세잔의 아버지는 사업으로 성공하여 은행의 공동창업자로 부유하였기에

세잔은 그 당시 다른 화가들에 비해 물질에 관한 어려움은 겪지 않았고 또한

아버지로부터 많은 유산을 받았다고 합니다.

세잔은 고향에서 꼴레주 부르봉에 입학하여 미술을 공부하면서

이곳에서 만난 가난하고 병약했던 에밀 졸라를 도와주기도 하면서 순수한 우정을 쌓았지만

안타깝게도 훗날 친구 에밀 졸라의 글로 인하여 오랜 우정이 깨어지게 되지요.

 

세잔은 아버지가 원하여 시작한 법학공부를 중단하고 1861년에 빠리로 나가서

피사로 (Camille Pissarro:1830-1903)를 만나 스승과 제자로, 그의 영향을 받으며

다른 인상파 화가들과도 교류하면서도 열심히 자신만의 독특한 화풍을 추구하는 세잔에게

돌아오는 것은 신랄한 혹평 뿐이었다고 합니다.  가장 가까운 친구 에밀 졸라도

세잔의 그림을 이해하지 못하고 세잔이 그림에 소질이 있지만

위대한 화가는 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훗날 에밀 졸라가 실패한 화가의 삶을 그린 소설<작품>을 발표했을 때

주인공 화가를 자신을 모델로 했다고 여긴 세잔은 졸라와의 오랜 우정을 결별합니다.

 

 

 

 

세잔은 1886년 빠리에서의 힘들었던 생활을 정리하고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빠리에서 1869년에 그의 모델로 만나 첫 눈에 반해버린 마리 오르탕스 피케

Marie-Hortense Fiquet(1850~1922)와의 사이에서 1872년에 아들도 낳았지만

이런 저런 이유로 결혼을 미루어오다가 1886에야 결혼식을 올리지만 그 때는 이미

아내와의 관계도 원만하지 않았고 아내를 단지 그림을 그리는 대상으로 여길 뿐

거의 별거하다시피 지냈다고 합니다.

 

이렇듯 세잔은 화단에서도, 친구로부터도, 그리고 아내로부터도 멀어져서

실패와 좌절감으로 우울하게 지내며 죽을 때까지 오직 그림을 그리는 일에만 열중하며

마치 은둔자처럼 외롭고 고독한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생 빅투아르 산을 그리는 세잔, 모리스 드니 (image from internet)

 

세잔은 어느 날 밖에서 그림을 그리던 중 폭풍을 만나 집으로 돌아오는 중에

길에서 쓰러졌는데, 다행이 지나가던 마차에 의해 발견되어 집으로 와서

당분간 쉬어야 한다는 의사의 권유가 있었지만 다음 날도 또 그림을 그리러 나갔다가

다시 쓰러져서 며칠 뒤 1906년 10월 22일 숨을 거두었다고 해요.

한마디로 화가가 그림을 그리다가 생을 마감했으니 가장 행복한 죽음이라고 해야겠지요?

사인은 폐렴이었다고 합니다. 밖에서 비를 맞으며 내내 그림을 그렸으니...ㅋㅋ

 

 

 

세잔의 아틀리에의 뒷정원

 

 

1월 13일 화요일, 숙소에서 약 150km 떨어진 액상 프로방스에 가려고

아침부터 준비하고 그 큰 렌트카를 몰고 액상 프로방스 시내에 들어가서

세잔의 생가를 찾아갔는데 네비가 있었지만 주소를 입력했는데도

엉뚱한 곳에 데려다 주는 바람에 아주 좁은 골목길에 잘못 들어갔다가

차를 겨우겨우 돌려 나와서 이런 식으로 시내를 다닐 수 없겠다 싶어서

공용주차장을 찾아가 일단 차를 주차했습니다.

 

 

 

주차장에서 나와 제법 분주한 좁은 골목길로 들어가서 한참 가니 시청과 광장이 나왔습니다.

마침 빠리 테러사건이 일어났던 때라 시청 앞에는 이번 사건에 희생된 사람들을

애도하는 글들이 더덕더덕 붙어져 있었고 표현의 자유를 주장하는

"나도 샤를리, Je Suis Charlie"라는 문구도 보이고...

그러나 빠리와 남프랑스의 거리가 거리인 만큼

분위기는 비교적 조용하게 느껴졌습니다.

 

시청 광장을 지나고 여전히 세잔의 동상이 있는 미라보 광장을 찾지 못하고

누군가 붙들고 물어봐도 말이 잘 안통하고...

아침도 먹지 않고 서둘러 나와서 배가 고파져서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에 띄는 일식집에 들어가서 식사를 하고 광장을 물어보니 바로 근처였습니다.

제가 참 길치인가 봅니다. ㅋㅋ

 

 


미라보 Mirabeau 광장

 


큰 길 쪽으로 조금 걸어가니 미라보 Mirabeau 광장이 나오고 광장 한쪽에

화구를 메고 지팡이를 들고 있는 모습의 세잔의 동상이 나오더군요.

 

 

 

이 사진(1874년)을 모델로 왼쪽의 동상을 제작하였다고 합니다.



 

어찌나 반가운지... 바로 여기 계시네요. 안녕하세요? 세잔 할아버지!

혼자 괜히 기분이 좋아져서...그리던 님을 만난듯...이리 찍고 저리 찍고...ㅎㅎ

광장 뒤에 투어리스트 오피스가 있어서 세잔에 대한 안내 책자를 받으면서

세잔의 아틀리에를 가고 싶다고 했더니 걷기는 좀 힘들다고 버스를 타고 가라고 하는데

버스타고 갔다가 말도 안 통하면 안될 것같아서 에라, 차라리 택시를 타자...

분수 옆에 쭉 늘어서 있는 택시를 타고 세잔의 아틀리에를 가자고 했더니 ok!

택시기사가 영어를 잘 하지는 못해도

액상 프로방스 시내에서야 그의 마지막 아틀리에를 모를리는 없지요.

 

 

 

 

세잔의 아틀리에를 가는 도중에 생 피에르 묘지 (Saint-Pierre Cemetaray) 사인이 보여서

잠간 들렸다 가자고, 기다릴 수 있냐고 했더니 택시 미터야 계속 돌아가니 노 프러브럼!

그러나 크지 않은 묘지 같았지만 세잔의 묘를 찾는 것이 쉽지 않아 안내원에게 부탁을 하여

안내원과 함께 찾아간 세잔의 가족묘였습니다.

 

 


 



 

 

 

한참 사진을 찍고 있는데 안내원이 묘 뒤로 먼 산을 가리키면서

저기 보이는 산이 생 빅투아르 산이라고...

바라보니 그 산.. 세잔이 매일 밖에 나와서 그렸다는 생 빅투아르 산이

멀리 보이는데 마치 하얀 눈이 덮힌 것같았습니다.

그런데 하얀 것은 눈이 아니라 석회암(Lime Stone)이라고 하네요.

세잔은 죽어서도 그 산을 이렇게 등지고 있었습니다.


 

 

 

한참 기다리던 택시를 다시 타고

말년까지 그림을 그렸던 세잔의 마지막 아틀리에로 갔습니다.

아틀리에는 아담한 이층집이었는데 아래층은 기념품 샵이고

이층으로 올라가니 큰 방 하나...

세잔이 쓰던 침대, 책상, 화구, 옷, 모자, 옷장, 벽난로, 백팩, 가방, 심지어는

그가 그리던 해골까지 그대로 전시되어 있는데 사진촬영은 금지였습니다.

 

 

아래층 안내..

이층으로 올라가는 코너에 이렇게 세잔을 상징하는 사과가...

 

이층으로 올라가는 벽에 걸려있는 세잔의 사진, 젊어서는 에밀 졸라와 비교할 때 세잔은

상당히 큰 체구였다고 하는데 늙어서 그런지 세잔의 키가 매우 작아보입니다.

 

 

 


cezanne autoportrait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세잔의 사진 (1861년)이고 왼쪽은 세잔의

자화상입니다.(images from web) 


 

이층에서 이런 저런 것들을 구경하는데 안내하는 여직원이 어디에서 왔느냐고 해서

엘에이에서 왔다고 했더니 미국에도 세잔의 그림이 많이 있다고,

특히 필라델피아의 반스 파운데이션에 많이 있고

필라델피아 미술관에도 많이 있다는 말을 하대요.

마침 저도 반스 파운데이션에는 몇년 전에 가 보았기 때문에

개인 소장으로 세잔의 그림이 많았던 것이 기억난다고 했더니 안내직원은

세잔의 아내와 아들 사진도 보여주고 창 가에 있는 단스를 열어보이면서

세잔이 쓰던 안경 등 자잘한 물건들까지 보여주더군요. 

영어를 잘 하는 안내원이고 사람도 없어서 안내원에게 물었습니다. 

가족이냐고...웃으며 아니라고... 제가 계속하여 물었습니다.

그런데 세잔을 사진으로 보니까 잘 생겼던데 왜 자화상은

그렇게 무뚝뚝하고 험상궃게 그렸을까 궁금하다고 했더니

안내원도 수긍하면서 그가 몹시 수줍고 내성적인 성격이었다고,

그래서 자신의 모습을 그렇게 그린 것이라고 말하더군요. ㅎㅎ

 

 


 

그런 저런 이야기를 좀 나누다가 택시가 기다리고 있으니 또 서둘러 나와서

바로 가까운 곳에서 세잔이 생빅투아르 산을 그렸다는 곳...

Terrain des Pentres 화가의 그라운드,

세잔이 그린 산그림 9점을 빙둘러 놓은 언덕으로 올라갔습니다.

택시는 여전히 주차할 곳이 마땅찮아서 저렇게 인도로 올라가서 기다리고..

조금 올라가니 평평하게 돌로 다듬어진 화가의 그라운드...

세잔은 20여년 동안 80여점의 산 그림을 그렸다고 하는데 그 중에

9점이 나란히 놓여져 있어서 하나 하나 사진을 찍었습니다.

 

 

 




9점의 생 빅투아르 산 그림들입니다.


 

 

 

그곳 화가의 그라운드에서 바라 본 생 빅투아르 산...

세잔이 산을 그렸듯이 줌렌즈로 당겨서 찍어보았습니다.

워낙은 이곳에서 하루쯤 묵으면서 안개낀 아침의 산과 석양빛을 받고 있는

석회암으로 덮힌 하얀 산을 렌즈에 담고 싶었는데...에고고..꿈도 야무져...

몇 장 사진을 찍는 것으로 만족하고 내려왔습니다. ㅋㅋ

 

 

 

다시 기다리고 있는 택시로 분수가 있는 광장 옆 쪽으로

세잔이 즐겨 다녔다는 카페 가르숑 Cafe Les Deux Garçons으로 가자고 하면서

택시기사한테 커피 한잔 마시겠냐고 했더니 아니라고,

잠시 차에서 기다릴테니 사진을 찍으라고 합니다.

차를 주차할 곳이 마땅하게 없었거든요.

 

 

 

 

 

이곳에서 커피 한잔 하고 싶었는데 기사를 기다리게 하고 나만 마실 수가 없어서

사진만 몇 장 찍고... 생가랑 에밀 졸라와 함께 다녔다는 학교, 등 몇 군데 더 다니고 싶은데

기사도 잘 모르고...겨울이라 금새 어두워져버리니까 서둘러 숙소로 돌아가고 싶어져서

주차장에 데려다 달라고 하였습니다.  아쉽지만...

그 때까지 나온 택시비는 60유로,

택시가 아니었더라면 그나마 그 정도도 다 볼 수 없었을텐데

덕분에 아주 편하게 세잔의 고향을 돌아보고 서둘러 숙소에

무사히, 또 로타리에서 헤메이기도 하면서, 그러나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2015년 1월 13일...화요일날 여정이었습니다.

 

그러니, 무정, 무정한....

 

 

 

 

 

너무 가난했던 고흐처럼 물감을 살 돈이 없어서 전전긍긍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재산이 있다고 피카소처럼 많은 여자를 탐하지도 않고

그 누구와도 타협하지 않고 고향에서 은둔자처럼 외롭게 살면서

오직 순수하게 자신의 그림만 고집스럽게 그린 화가 세잔 할아버지를 위해서

무슨 음악을 올리까...아무리 생각해도 적당한 음악이 생각나지 않아서

포스팅을 미루고 있다가 생각난 음악,

슈베르트가 말년 1828년에 작곡한 '바위 위의 목동'입니다.

'Der Hirt auf dem Felsen'

 

 멀리 생 빅투아르 산 골짜기에까지 클라리넷의 아름다운 선율이

은히 울려 퍼지고 떠나버린 연인을 그리워하며 봄을 기다리는 마음이

곱고 맑은 소프라노 캐더린 배틀 Kathleen Battle의 노래에 실려

절절하게 마음 속 깊이 파고 드는 이 노래를

세잔 할아버지에게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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