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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장엽 망명 직전 또 다른 북한 최고위층 2명과도 접촉 있었다[다큐멘터리]

淸山에 2014. 9. 26. 07:39






[다큐멘터리]

‘황장엽 망명’ 특종 金容三 기자가 이제야 털어놓는 또 다른 특종

“황장엽 망명 직전 또 다른 북한 최고위층 2명과도 접촉 있었다”


 글 : 金成東 月刊朝鮮 기자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글 : 白承俱 月刊朝鮮 기자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 ‌‌황장엽과 뜻을 같이한 2명 중 1명은 의문의 교통사고로 사망한 김용순. 또 다른 1명은 북한 현직
    최고위층
⊙ ‌‌‌황장엽 망명 후 처형당한 북한농업상 서관히는 “뜻을 같이했던 인물”이라고 황장엽이 밝혀
⊙ ‌‌당시 공개 못했던 황장엽 친필서신 중 5·18 광주 관련 발언 내용: “광주학생문제도 그들을 뒤에서
    사주한 북의 공명주의자들이 책임전가한 일이다”
⊙ ‌‌‘황장엽 리스트’는 애초부터 없었다
⊙ ‌‌황장엽은 아들 황경모를 통해 김정일 암살 계획을 세웠었다
⊙ ‌‌전 국정원 고위 관계자의 충격 증언: “6·15 남북정상회담 후 국정원은 황장엽을 방치하려 했다”



취재지원 : 車彦助 月刊朝鮮 인턴기자

 
  수요일이었던 1997년 2월 12일 오후. 시사월간지의 제작 일정상 막바지 기사마감으로 정신없이 바쁜 시간을 보내던 당시 《월간조선》 김용삼(金容三) 기자는 자신의 눈과 귀를 의심했다. 텔레비전에서 다급하게 황장엽(黃長燁) 북한 노동당 국제담당비서와 김덕홍(金德弘) 려광무역연합총회사 총사장의 망명 소식이 베이징(北京)발(發)로 보도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보도를 보는 순간 김 기자는 “이럴 수가… 뭔가 착오가 난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을 했다. 김 기자가 ‘착오가 난 것은 아닐까’라고 생각한 것은 황 비서의 망명 개시 시점을 그해 4월께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랬다. 김 기자는 이미 수개월 전부터 황 비서와 김 총사장이 망명을 결행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김 기자가 황장엽, 김덕홍이라는 북한의 두 거물이 남한으로 망명을 꿈꾼다는 소식을 처음 접한 것은 그들이 망명을 결행한 시점으로부터 1년 전인 1996년 2월 무렵이었다. 알려진 대로 두 사람의 망명에 깊숙이 개입한 인물은 중국 등을 오가며 사업을 하던 이연길(李淵吉·2010년 3월 작고) 북한민주화촉진협의회 회장이다. 김 기자도 이 단체의 간부인 중앙상임위원을 맡고 있었다.
 
  이 회장은 8·15 광복 후 북한에서 반소(反蘇) 운동에 가담했다. 6·25전쟁 때는 미(美) 극동군 사령부가 운영하는 대북(對北) 첩보부대인 KLO(Korea Liaison Office·일명 켈로 부대) 고트대(KLO 소속의 한 지대) 대장이었다. 이 회장은 생존 시 북한의 유력 세력과 연계해 김정일(金正日)을 제거 또는 암살한 다음 북한에 개방적인 정권을 수립한 후 남북이 평화적으로 통일을 진행하는 것이 가장 싸고 안전하다는 철학을 가진 인물이었다. 즉 공작적 차원의 통일을 주창했던 것이다. 이 회장이 북한민주화촉진협의회를 발족시킨 것도 이런 자신의 신념을 실천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회장이 김덕홍씨를 처음 만나게 된 것은 1995년 5월경부터였지만 그 당시 김 기자는 이 회장의 김덕홍씨 접촉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황장엽 선생이 보낸 친필서신. 
  


  공작적 차원의 통일 방안
 

 

지난 96년 7월 중국 베이징에서 만난 황장엽 선생(왼쪽)과 이연길 회장. 


  소규모 무역업을 하는 이 회장의 사무실은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 있었는데 그 부근 허름한 다방에 조선족 ‘보따리 장사꾼’들이 많이 모였다. 이 회장은 그들과 가깝게 지냈다. 조선족 보따리상들은 이 회장 등이 구해준 의복 등을 중국에 가져가 팔았다. 김 기자도 이 회장 요청에 의해 조선족 보따리상들이 중국에 가져가서 팔 물건들을 구해주곤 했다. 그 물건들 중 많은 양이 북한이 외화벌이를 위해 만든 려광무역연합총회사 김덕홍 사장에게 건네졌다고 한다. 이런 과정에서 이 회장과 김덕홍씨가 서로 안면을 트게 된 것이다.
 
  서로 친숙하게 지내게 되면서 김덕홍씨는 황장엽 비서의 뜻을 이 회장에게 전하게 된다. 이 회장과 황장엽, 김덕홍 두 사람은 북한의 현실 타개를 위해 같은 생각을 갖고 있었음을 알게 되고 의기투합하게 된다. 김정일이 남북한 모두에 불행의 근원이라는 점을 함께 인식하고 다음과 같은 시나리오를 만들게 되는 것이다.
 
  첫째, 김정일을 설득해 해외 망명을 유도하거나, 둘째 민중봉기에 의해 김정일과 그의 추종집단을 타도, 셋째 비밀결사 조직을 통해 김정일 제거, 넷째 이 계획이 실행에 옮겨지지 못할 경우 자신의 한국 망명을 통해 김정일 체제에 결정적 타격을 가한다는 것이었다.
 
  불행하게도 이들의 최종 선택은 그 시나리오 중 마지막 고려사항이었던 황장엽 망명으로 귀결된다.
 
  김덕홍씨와 안면을 트기 전 이 회장은 러시아와 중국 등지를 오가며 러시아 벌목공 등 탈북자를 돕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북한 특수부대 출신들을 훈련시켜 북한에 침투시키는 작업을 극비리에 진행하고 있었다. 그의 지론인 ‘공작적 차원의 통일 방안’을 행동으로 옮기려 했던 것이다.
 
  이 회장은 김덕홍씨와의 접촉을 통해 더 쉽고 더 빠른 방법으로 그의 지론인 ‘공작적 차원의 통일 방안’을 실천할 방법을 찾아냈다. 황 비서의 망명 당시에는 밝힐 수 없었지만 황 비서의 아들 황경모를 그 작업에 참여시킬 수 있게 된 것이다.
 
  황 비서 망명 후 1999년에 비밀리에 처형된 것으로 알려진 황경모씨는 김일성대학 출신으로 현재 북한의 최고실세로 알려진 장성택의 조카사위이기도 했다. 당시 북한군 소속 외화벌이 회사에서 간부로 일하고 있었던 황경모씨는 김정일 정권의 타락상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고 한다. 군부와 김정일을 경호하는 호위총국 내에 두텁게 형성돼 있는 그의 인맥을 활용해 김정일을 제거하려고 했던 것이다. 물론 결과는 실패였다.
 
  황경모씨는 뜻을 함께하는 동지들과 모의해 거사 자금 마련에 나섰다. 그 자금 마련 방법 중의 하나가 북한의 국보급 문화재를 빼내 해외에 내다 파는 것이었다. 국보급 문화재를 빼내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유출 도중 발각되고 만다. 문화재 유출 사건에 조카사위가 연루된 것을 안 장성택이 황경모를 간염을 핑계로 급하게 군병원에 입원시켜 알리바이를 만들어 사건에서 벗어나게 해주었지만 이미 북한 반탐(反探)기관의 촉수는 황경모씨를 겨누고 있었던 것이다.
 
 
  망명 준비 인사가 황장엽이라니?
 
  김 기자가 이연길 회장이 중국에서 북한 고위층 인사와 접촉 중이라는 사실을 눈치채게 된 때는 황장엽 망명 사건이 벌어지기 1년 전쯤인 1996년 3월께였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이 회장이 접촉하고 있는 인사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이 회장이 북한 고위층 인사와의 만남 자체는 시인했지만 그 인사의 인적사항에 대해서는 굳게 입을 다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해 5월경이었다. 김 기자는 이 회장이 접촉하고 있는 인사가 황장엽이란 사실을 눈치챌 수 있었다. 그 무렵 이 회장이 김 기자에게 황장엽과 관련된 자료를 구해줄 것을 요청했기 때문이었다. 김 기자는 이 회장의 요청을 받고 《조선일보》 자료실과 통일부 자료실 등에서 황장엽과 관련된 자료들을 찾아서 건네주었다. 이 회장의 자료 요청을 받고 김 기자는 “사업을 하는 사람이 황장엽과 관련된 자료는 왜 구해달라는 걸까, 그렇다면 중국에서 접촉하고 있다는 북한 고위인사가 혹시 황장엽?”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김 기자로서는 황장엽이라는 존재가 주는 무게감 때문에 반신반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이 회장은 접촉 자체를 부인하거나 황장엽이라는 이름 자체를 김 기자가 거론하는 것을 거부하기도 했다. 하지만 김 기자는 그 무렵 많은 종교인과 사업가들이 황장엽, 김덕홍 두 사람과 접촉하고 있다는 풍문을 듣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소문이 떠도는 것은 북한 정권 내부를 흔들려는 정보기관의 역공작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 기자가 반신반의하는 사이에도 이 회장과 황장엽-김덕홍 라인의 베이징 접촉은 이어지고 있었다. 훗날 두 사람과의 접촉 사실을 시인하며 이 회장이 김 기자에게 건네준 ‘황장엽-김덕홍 접촉기’에는 그 사실들이 상세하게 실려 있다. 다음은 김 기자가 접촉기를 메모한 취재 기록의 일부다.
 
  <96년 3월 12일부터 14일까지 3일간 이연길 회장은 북경에 위치한 21세기 호텔 1905호실에서 김덕홍(60·여광무역연합총회사 총사장. 당 국제부 산하 평화주체재단 이사장이자 황장엽의 심복임)과 만나 여러 대화를 나누었다. 이때 이연길 회장은 훗날을 위해 김덕홍과의 대화 내용 중 중요한 부분을 기억을 더듬어 기록하여 보관하고 있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96년 3월 12일(화) 시간: 21시~22시
 
  김덕홍: “이 회장. 중앙일보 3월 2일자에 이병화라는 국제농업개발원장이 우리(북한) 노동자 3백명을 월 2백30달러 상당의 쌀을 주는 조건으로 내가(김덕홍) 제공의사를 밝혔다고 보도했는데, 나도 모르는 이야기가 남한 신문에 크게 나면 내가 어떻게 되겠소. 또 황장엽 비서 동지는 얼마나 난처해 하는지나 아오? 우리들(황장엽, 김덕홍)을 도와주고 보호해 주는 데 노력해야 하지 않겠소.”
 
  이연길 회장은 김덕홍이 헤어질 때까지 중앙일보 보도 내용이 이 회장의 제보에 의해 보도된 것으로 오해하여 매우 흥분해 있었다고 술회했다. 그래서 이 회장은 “무슨 내용인지 나도 모르는 것이 보도돼 놀랐다고 수차 설득한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이연길 회장이 기록한 김덕홍, 황장엽 등과의 대화록.
이 회장은 대화록 작성 후 김덕홍씨에게 다시 보여주고 확인을 했다고 한다. 
  


  北으로 전달된 청와대 비서실장의 발언
 
  김 기자의 취재기록에 이 회장과 황장엽의 직접 대화는 같은 해 7월 3일에 등장한다. 두 사람의 대화는 이날 오전 8시부터 베이징의 한 민가에서 이루어진다. 황 비서가 수행원을 따돌리고 비밀리에 김덕홍씨와 함께 나타난 것이다.
 
  <황장엽: “전쟁을 방지해야 합니다. 전쟁을 하면 민족이 수난을 돌이킬 수 없습니다. 전쟁 이외에 어떤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평화를 지켜나가야 합니다. 이 시기에 전쟁을 방지하려면 남한에서 식량을 원조해야 합니다. 북에 식량을 원조한다 해서 북이 부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호구지책에 지나지 않습니다. 원조 방법도 정부 차원이 아닌, 사회단체나 종교단체 명의로 해야 합니다. 그래야 이 사람들(북한)이 받습니다. 딱한 일입니다. 내가 학자적 양심을 걸고 이야기합니다. 북의 사회는 남한보다 한 50년 뒤떨어져 있습니다. 이런데다 식량원조한다고 해서 특별히 달라질 것이 없습니다. 식량원조하면 아무리 비밀로 해봐야 백성들이 다 알게 됩니다. 이것만이 전쟁을 방지할 수 있는 길입니다.”
 
  (이때 이 회장은 뭔가 말을 꺼내려고 했는데, 황장엽은 이 회장이 말할 틈새를 주지 않고 계속했다고 한다.)
 
  황장엽: “각별히 유념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쪽(남한) 권력 깊숙한 곳에 이곳(북한) 사람 박혀 있습니다(북한 첩자가 한국 권력층에 침투했다는 뜻이다). 특별히 경계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를 보호해 주셔야 합니다. 나를 만난다는 것을 극비로 해주셔야 합니다. 여러 가지 문제는 이 사람(김덕홍) 얘기를 들으시면 되고, 앞으로 의논해서 협조 주실 일이 있으면 잘 부탁드립니다. 나를 따라온 사람들이 있어서 여유있는 시간을 못 가지니 양해해 주십시오.(下略)”>
 
  다음 날인 7월 4일 아침 6시10분에는 베이징 21세기 호텔 커피숍에서 이 회장과 김덕홍이 만나 대화를 나눈다. 김 기자의 취재 메모다.
 
  <이날 김덕홍은 전날 황장엽의 발언, 즉 “남한 권력층에 북한 첩자가 침투해 있다”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청와대 김광일(金光一) 비서실장과 관련된 비밀정보를 이 회장에게 귀띔했다.
 
  김덕홍: “지난 6월 15일 황장엽 비서 동지가 출근길에 평양에 있는 내 사무실에 들러 봉투에 든 서류를 꺼내보라고 하기에 내가 꺼내보았다. 그 내용을 본즉 남한의 청와대 비서실장 김광일이 제보자와 나눈 대화록이었다. 소상한 기억은 없으나 김광일이가 한 말이 북한에 보고된 것이었는데 대충 기억나는 내용은 ‘(김영삼) 대통령이 큰일 났다. 이대로 가다간 박정희와 같은 운명이 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 빨리 손을 써야겠다’고 불평을 털어놓는 대화록이었다. 황장엽 동지께서는 ‘이 문건은 극비문서로 분류돼 당 비서에게만 배포된 서류’라고 했다.
 
  김덕홍은 “김광일과의 대화자가 바로 북한에 이런 내용을 제보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이 정보를 입수한 우리 정보기관에서는 청와대 내에도 불순세력이 침투한 것이 아닌가 하여 김광일 비서실장 주변을 조사했고, 김광일 비서실장도 이 문제로 조사를 받는 등 곤욕을 치른 것으로 알려졌다.
 
  이 과정에서 김광일 실장은 자기 친구이자 재일교포인 김○○(정확한 이름은 밝혀지지 않음)이 한국에 왔을 때 그와 만나 북한에 보고된 내용과 비슷한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고 증언했다.(中略)>
 
 
  이연길 회장이 황장엽에게 보낸 미공개 서신
 

 

황장엽(왼쪽 두 번째) 선생과 김덕홍(오른쪽 두 번째)씨가 필리핀을 거쳐 서울에 도착한 후인 1997년 7월 10일 안기부 청사에서 기자회견을 마치고 황 선생의 평양상고 동창인 강기석씨와 1994년 귀순한 여만철씨의 장녀 금주 양으로부터 각각 건네받은 꽃다발을 흔들어 보이고 있다. 



  이어지는 이 회장이 김덕홍씨와의 대화를 기록한 김 기자의 취재 메모다.
 
  <이날 김은 북한의 붕괴를 촉진하기 위한 방법, 원자탄 5개 보유, 만약의 경우 자살하겠다는 결심 등을 비장하게 밝혔다고 한다. 이 회장은 이날 김덕홍의 발언 중 기억에 남는 것을 다음과 같이 메모해 놓았다.
 
  —공화국 붕괴 촉진책: “중국과 북한을 이간시켜 중국이 공화국을 불신하게 만들어 경제원조를 중단하도록 해야 한다. 일본이 전후배상이나 어떤 명목의 배상을 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일본의 배상금이 북한에 들어가면 김정일 정권이 유지될 것이다. 또 미국이 서둘러 경제원조를 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
 
  —원자탄 보유 문제: “북한이 원자탄을 5개 가지고 있다고 알고 있다. 원자탄이 문제가 아니고 전방에 배치된 장거리포가 실제로 위력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
 
  —김덕홍의 자살 결심: “만약의 경우 북한에서 나에게 위해를 가할 경우 죽을 결심이니 자살용 극약을 구해달라. 우리의 이런 제보는 민족과 조국을 위한 결단이지 간첩행위가 아니다. 북의 현실은 작년 수해를 빙자한 것일 뿐 경제난은 10년 전부터 누적된 것이다. 실제로 굶어 죽는 사람이 연간 수천 명에 이른다. 굶어서 합병증으로 죽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 회장은 김덕홍의 굳은 결심과 의지를 이해하고 우리 정보기관을 통해 입에 넣고 깨물면 터지는 자살용 극약 앰풀(황장엽에게 전달됨)과 자살용 만년필 독침(김덕홍이 소지함)을 구해서 건네주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가 탄로날 경우 이 독침과 극약 앰풀로 자살할 결심까지 하고 이 회장과 접촉했던 것이다.>
 
  이연길 회장은 김덕홍씨의 부탁을 받고 자살용 독약을 보내주었지만 황장엽 비서에게 서신을 보내 그 독약을 사용하지 말 것을 권유한다. 망명 당시에는 미공개됐던 이 회장이 황 비서에게 보낸 서신을 소개한다. 작성 일자는 그해 11월 23일로 돼 있다.
 
  <기구한 역사 앞에서 엄청난 비극을 바라보며 고뇌하는 성자는 오늘따라 왜 이렇게 외로워 보이십니까. 사도들은 의로운 성자를 돕고 비극사회에서 광명천지로의 길잡이로 몸을 던졌습니다. 성자의 의지는 반드시 동반자의 협력으로 유종의 미를 거둘 것입니다. 언젠가는 몸은 가도 성자와 사도들의 정신은 영원히 역사 속에서 빛을 밝히고 살아남을 것입니다. 저는 성자를 위해 비극을 막기 위해 모든 수단을 다하여 최선의 방법을 연구하고 행동할 것입니다. 그리고 평화사상을 왜곡되지 않은 진정한 성자사상을 되찾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지난날 뱃사람들은 별을 보고 목적지까지 항해를 했습니다. 이 별이 잘못되거나 유성이 되어 없어지면 목적지까지 도달하는 데 상당한 고난을 겪게 될 것입니다. 성자는 바로 이 별입니다. 가지고 계신 약은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下略)>
 
 
  마침내 황장엽 망명 준비 사실을 털어놓다
 
  이 회장이 자살용 독약을 정보기관을 통해 구해준 데서 알 수 있듯 안기부(현 국정원)는 그해 7월 무렵부터 이 회장의 행보를 탐지하고 있었다. 이 회장으로서도 한 북한 거물 인사의 망명과 그 일에 소요되는 막대한 비용 등을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안기부의 도움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이 회장을 통해 황장엽 측과 접촉을 하던 안기부는 9월에 들어 이 회장을 접촉 라인에서 배제시키고 직접 접촉을 시도했다. 하지만 직접 접촉에서 상호 의사전달에 문제가 발생하자 다시 이 회장을 앞세워 접촉하기 시작했다.
 
  그해 10월 이 회장은 큰 고민에 빠져 있었다. 이 회장이 김 기자에게 직접적으로 황장엽 망명과 관련된 사실들을 털어놓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이 회장은 거물급 인사의 망명에 대한 중압감 때문인지 김 기자에게 “내가 뭘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가”하고 조언을 구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김 기자는 이 회장에게 황장엽 비서에게 남침용 땅굴, 북한이 만드는 위조지폐와 마약의 유통 경로, 6·25 당시 끌려간 미군 포로 문제 등 몇 가지 정보를 알아내 달라는 부탁을 했다.
 
  얼마 후 김덕홍씨로부터 답변이 왔는데 북한 땅굴 문제는 군 소관이기 때문에 알 수 없다, 국군과 미군 포로 생존 여부 문제와 마약 루트는 알아보겠다는 답이었다.
 
  1996년 11월 10일 김덕홍씨는 이 회장에게 북한에서 나올 때 받은 황장엽 비서의 메시지를 전해준다. 수첩 용지에 급하게 갈겨쓴 메시지였는데 망명 당시 전체 내용이 공개됐지만 한 줄이 빠진 채 공개됐다.
 
  그 빠진 내용이 “광주학생문제도 그들을 뒤에서 사주한 북의 공명주의자들이 책임전가한 일이다”라는 대목이다. 이 메시지에 드러난 문맥만으로는 ‘광주학생문제’가 5·18 광주 사건을 말하는 것인지 아닌지 분명하지 않다. 이 문맥이 5·18 광주를 거론한 것이라는 사실은 황장엽, 김덕홍 두 사람의 망명 후 16개월 만에 이루어진 두 사람과 김용삼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밝혀진다. 두 사람은 《월간조선》 98년 7월호와 인터뷰를 갖는다. 이때 인터뷰를 담당한 사람도 김 기자였다. 그의 술회다.
 
  “그때 두 사람과 인터뷰 중 김덕홍씨가 ‘여기 남한에 와서 꼭 하고 싶은 얘기를 해야 되겠다’면서 ‘조선노동당 대남 부서가 있는데 그 부서에 소속되어 있던 상당수 사람들이 광주민주화운동이 끝난 후에 일제히 훈장을 받았다. 내 친구들이 그 부서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그 친구들도 광주민주화운동 후에 훈장을 탔다고 축하 술을 함께 마시면서 그들에게 직접 들은 것이다’라는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그 자리에 함께 있던 황장엽 선생이 김덕홍씨의 말을 가로막으면서 ‘동생! 여기서 그런 얘기를 하면 어떻게 해’하면서 말리자 김덕홍씨는 ‘형님, 우리가 이런 얘기하러 여기(남한) 온 거 아닙니까. 왜 저를 말리십니까. 형님도 다 아시면서 왜 얘기를 못하게 하시는 겁니까’하면서 실랑이를 벌였죠.”
 
  김덕홍씨가 5·18 광주와 관련해 발언한 그 부분은 결국 기사에서 빠졌다. 두 사람과 김 기자의 인터뷰는 경호를 이유로 참석한 국정원 직원들이 바로 칸막이 옆에서 다 듣고 있었다고 한다. 인터뷰가 끝난 후 “광주 부분은 대단히 민감한 사안이니 기사화되면 정말 큰일 난다”면서 국정원이 강력하게 보도 자제 협조 요청을 해오는 바람에 기사 작성 과정에서 빠진 것이다.





 
  흔들렸던 망명 결심
 

 

서울 도착 1주년을 맞아 1998년 5월 7일 통일부 출입 기자들과 간담회를 갖고 있는 황장엽 선생과 김덕홍씨.
  1996년 11월 13일에는 황장엽 비서가 왜 북한을 탈출하여 한국으로 망명을 결심하게 됐는지, 그리고 한국에 가서 그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알리는 메시지를 이 회장에게 전해왔다.
  


  황장엽씨는 같은 해 11월 15일에는 망명 거사 시기를 특정하는 메시지를 보내온다.
 
  <(前略) 그러므로 명년(97년) 2월에 가는 것이 허용되는 경우(황장엽의 방일을 말함) 그 기회를 이용함이 제일 필요할 것 같이 생각됨. 이런 문제에 결단을 내리지 못하면 후세에 웃음거리로 됨.>
 
  이 무렵 이 회장은 혹시라도 일이 잘못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을 가졌던 것 같다. 망명 진행 과정에서 문제가 생길 경우를 대비하기 시작했다. 그 첫 번째 실천이 황장엽씨가 쓴 각종 논문과 문건, 비밀접촉일지, 황장엽씨가 입수한 북한 측 비밀 자료, 황장엽씨와 함께 촬영한 사진 등을 김 기자에게 넘겨준 것이다. 그때가 1996년 12월 말이었다.
 
  김 기자는 이 회장으로부터 넘겨받은 자료 중 그가 집필한 논문 <조선 문제>와 <개혁과 개방 문제>를 읽으며 전율을 느낄 정도의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주체사상의 창시자이자 김정일을 후계자로 옹립한 사람이 김정일을 히틀러의 숭배자라고 무자비하게 비판하는가 하면 “남북한의 대립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대립이 아니라 자본주의와 봉건주의의 대립”이라고 규정하는 대목 등에서는 머리가 어질어질할 지경이었다고 한다.
 
  김 기자가 충격과 전율의 황장엽 관련 자료를 입수할 무렵 안기부 라인에서 김덕홍씨를 접촉하면서부터 뭔가 매끄럽지 않은 움직임들이 포착되기 시작했다. 황장엽-김덕홍씨는 안기부가 직접 개입하는 문제에 대해 상당한 심리적 부담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김 기자에 따르면 당시 이 회장은 “안기부에서 너무 서툴게 그들을 대하는 것 같아 상당히 가슴을 졸이는 상황이 전개됐다”고 술회했다고 한다.
 
  황장엽 비서의 일본 방문은 애초에 예정돼 있던 프로그램이었다. 이 프로그램에 따라 안기부 관계자는 “일본 방문 때 한국으로 망명하라”는 권유를 했고, 황장엽씨는 가급적이면 북한에 남아 자신이 남북한 관계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을 수행할 마음이었으나 점점 심해지는 김정일의 감시에 마음을 고쳐먹고 70% 정도는 망명 결심을 했던 상태였다. 이 회장이나 김 기자는 황 비서가 최대한 기간 동안 북한에 남아 있는 것이 좋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고 그런 생각을 전달했다.
 
  이런 상황에서 이 회장은 1월 13일 베이징에서 김덕홍과 접촉을 했다. 이때 이 회장은 황장엽 비서의 북경-일본 방문 스케줄 등을 입수했다. 이 일정표는 황 비서 일행이 1월 28일 평양을 출발해 일본에서 열리는 학술간담회 등 국제 토론회에 참석한 후 2월 11일 베이징에 도착했다가 다음 날인 12일 중국 비행기를 이용해 평양으로 돌아가는 일정으로 돼 있었다.
 
 
  4월 인도 방문길에 망명할 계획이었다
 

 

‘황장엽 망명’ 사건에 대한 새정치국민회의 보고서(右)와 황 선생의 일본 방문 일정표(左). 


  1월 13일 베이징에서 있었던 김덕홍씨와의 접촉에서는 몇 가지 문제가 발생했다. 안기부 측에서는 일본 방문 시 한국으로의 망명을 강력히 희망했으나 황장엽 측에서는 “가능하다면 북한에 남아서 여러 가지 일을 돕고 싶다”는 의견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황장엽씨는 자신이 아직도 북한이 해외카드로 쓸 수 있는 인물임을 입증하기 위해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초청장을 정식으로 보내줄 것을 우리 측에 제안했다. 안기부는 이미 황장엽씨의 일본 방문 시 한국 망명 작전을 추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카터의 초청장 문제는 시간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했다. 안기부로서는 황장엽씨의 일본에서의 망명을 계속 추진할 심산이었던 것이다.
 
  이 회장은 카터 초청장 문제를 김 기자에게 부탁했다. 김 기자는 모퉁이돌 선교회의 이삭 목사를 찾아가 부탁했다. 이삭 목사의 이름은 지금까지 공개되지 않았는데, 황장엽과 김덕홍의 망명 과정에서 김용삼 기자의 부탁을 받고 필요한 일들을 헌신적으로 도와준 인물이다. 얼마 후 이삭 목사로부터 답변이 왔다.
 
  “우리와 친분이 있는 미국 친구들을 통해 카터 재단 사람들과 접촉을 해봤는데 어렵다고 하더군요. 대신 공화당 소속 상원의원 5명 명의로 황 비서의 미국 초청장을 발급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이 목사는 또 “180만 달러 규모의 의약품과 100만 평의 밭에 파종할 수 있는 옥수수 종자를 지원할 수 있으니 수신단체 이름과 하역 항구를 알려달라”고 했다. 이 의약품은 김덕홍씨가 대표로 있는 평양의 국제주체재단 앞으로 보내주기로 했다.
 
  이런 교섭이 오가는 와중에 이 회장은 김 기자에게 “황 선생은 이번에 망명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만약 망명하게 된다면 4월 인도 방문 때 가능성이 더 높다”고 전해왔다. 이 회장은 “황 선생은 4월에 북경-방콕을 거쳐 뉴델리를 방문하기로 예정돼 있다”, “중간 기착지인 방콕이나 뉴델리에서 일을 결행할 생각도 갖고 있으니 우리도 그에 대한 대비책을 준비하는 것이 좋겠다”고 전해왔다.
 
  이 소식을 듣고 김 기자는 황장엽씨가 망명을 결행하게 될지도 모를 인도 뉴델리와 방콕에 대한 사전답사 차원에서 인도 출장을 신청했다. 명목은 ‘약진하는 서남아 4개국(파키스탄, 인도, 방글라데시, 스리랑카) 현지 취재’였다. 황장엽씨의 망명 결행 전 뉴델리 주재 한국대사관의 현황 파악, 취재원 확보, 그리고 망명 취재 과정에서 발생할지도 모를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고자 했던 것이다.
 
  파키스탄에서는 지인을 통해 부토 여사를 물리치고 신임 수상에 당선된 나와즈 샤리프 수상 인터뷰 약속까지 잡아놓았다.
 
  김 기자의 해외 출장 출발일은 2월 16일이었고 4개국 취재를 위한 항공편 예약과 호텔 예약까지 모두 마쳐놓은 상태였다. 그런데 2월 12일 오후 황장엽-김덕홍 일행의 망명 소식을 텔레비전을 통해서 접하게 된 것이다.
 
  김 기자는 이내 갑작스런 망명 소식에 멍해져 있던 정신을 추슬렀다. 황 비서의 친필서신 등 그동안 이 회장으로부터 건네받은 후 비밀리에 숨겨두었던 황장엽씨의 각종 논문과 친필서신, 사진 등의 자료들을 꺼냈다. 마침 김 기자는 그동안 사건의 진행 상황을 정리해 놓고 있었다. 기사를 썼다.
 
  망명 다음 날 김 기자가 쓴 황장엽 망명 기사는 《조선일보》 1면 톱으로 “인민이 굶어 죽는데 무슨 사회주의인가”라는 제목으로 실렸다. 이 제목은 황장엽씨가 1월 3일자로 쓴 친필서신에 있는 내용이었다. 《조선일보》와 《월간조선》의 황장엽 망명 관련 특종은 계속 이어졌다. 김 기자가 황장엽씨의 망명 계획에 참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김 기자가 공개한 각종 문건과 논문, 비밀접촉 일지, 기사 등은 국내 언론은 물론 해외 언론에까지 인용 보도됐고, 김 기자는 《타임》, 《뉴스위크》, NHK, 《문예춘추》를 비롯한 세계 유수 언론들의 인터뷰 대상이 되기도 했다.
 


 



 
  안기부가 망명 사건을 정치적으로 이용 못한 이유는?
 

 

황장엽 선생은 끝내 북한의 민주화를 보지 못하고 2010년 10월 세상을 떠났다. 그해 10월 14일 오전 서울 풍납동 현대아산병원 영결식장에서 엄수된 故 황장엽 선생의 영결식. 


  훗날 《월간조선》 편집장을 역임한 김용삼 기자는 이제 전직 기자가 됐다. 언론계를 떠난 후 경기도 대변인을 지냈고 현재는 경기콘텐츠진흥원 감사로 일하고 있다. 언론계 후배로서, 또 같은 소속사 후배의 연을 내세워 그가 편집장일 때도 말하지 않았던 황장엽 망명 당시 밝히지 못했던 비화를 소개해 달라고 여러 차례 조른 끝에 우리는 인터뷰어와 인터뷰이로서 만날 수 있었다.
 
  김 기자는 “요즘의 남북한 상황을 보면서 그때 황장엽 비서와 함께 꿈꾸었던 김정일 제거를 통한 공작적 차원의 통일 방안을 실현하지 못한 아쉬움을 더 절실하게 느낀다”면서 “망명 당사자인 황장엽 선생도 고인이 되셨고, 망명 실행의 주역이었던 이연길 회장마저 돌아가셨기 때문에 이제는 기록으로 남겨놓아야 할 때라는 생각을 해왔다”고 말했다.
 
  우리는 인터뷰 초반에 본인이 황장엽 망명 계획에 참여하게 된 계기, 망명 과정 등을 길게 들은 후 몇 가지 질문을 보탰다. 첫 번째 질문이 “황장엽 리스트는 존재하는가”였다.
 
  돌아온 대답은 “애초부터 없었다”였다. 그의 말이다.
 
  “좀 길지만 그 질문에는 이 이야기로 답을 대신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연길 회장이 김대중(金大中) 대통령 당선 후 임복진 전 의원(당시 국민회의 안보특별위원장)에게 황장엽 망명 사건에 대한 진상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첫째, 안기부 대북공작팀이 황장엽 선생을 연말 대선에 이용하기 위해 망명을 급하게 서둘렀다. 둘째, 황 선생이 일본 체류 중 안기부 요원들의 망명공작 내용이 ○○○ 대북공작실장, ○○○ 일본주재 공사(국정원 소속)의 실수로 일본 내각조사실에 흘러나가는 등 망명작전의 과정이 엉성하고 위험천만했다. 셋째, 황장엽 리스트는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는데 안기부는 마치 리스트가 존재하는 것처럼 흘려 대선을 앞둔 야당의 발목을 잡으려 했다. 넷째, 《조선일보》가 황장엽 망명 사건의 전 과정과 본질을 사실 그대로 보도함으로써 안기부가 이 사건을 정치적으로 악용하려는 의도가 사전에 봉쇄됐으며 결국 이것이 김 대통령의 당선을 도왔다’는 요지의 진술을 했다고 해요.”
 
  —황장엽 선생 망명 후인 1997년 10월 서관히 노동당 당중앙위 농업담당비서가 평양 통일거리에서 공개 처형되는데, 혹시 황 선생을 접촉할 무렵 북한민주화촉진협의회나 우리 정보기관이 서관히도 접촉했던 것은 아닙니까.
 
  “북한민주화촉진협의회와 접촉이 있었던 인물은 아닙니다. 다만 서관히를 총살할 때 평양시 재판소장이 낭독한 판결문에서 ‘서관히는 미국의 고용간첩으로 30년간 암약했으며’ 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이듬해 3월 18일자 《요미우리 신문》 보도에 의하면 서관히가 처형될 때 사회안전부 함운건 정치국 부국장과 이병서 은성무역상사 총사장도 함께 처형됐는데 이들의 가택 수색에서 한국 정보기관과 접촉한 증거품들이 압수됐다고 합니다. 이는 황 선생 망명 직후 김정일의 지시에 따라 망명 경위와 접촉자들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밝혀진 것이라고 합니다.”
 
 
  남측이 접촉한 북한 최고위층 두 사람은?
 

 황장엽 선생 망명 직전 북한 최고위층 대리인이 보내온 ‘골동품 고증자료’. 이번에 처음 공개되는 문건이다. 


  —혹시 황장엽 선생에게 서관히와 관련된 내용을 따로 확인한 것은 없습니까.
 
  “황 선생은 국정원 안가에 있어서 연결이 안 될 때라 이연길 회장을 통해서 알아봤어요. 이 회장이 황 선생을 만났을 때 ‘서관히도 황 선생께서 우리 쪽에 연결해 준 겁니까’하고 물었더니 황 선생이 직답은 안 하고 ‘서관히는 내가 북한에 있을 때 흉허물없이 모든 고민을 나누던 사이다. 서관히를 통해 북한의 식량난이 왜 이렇게 심각하게 되었는지 상세하게 알게 됐고 북한에 있을 때 모든 일을 서관히와 상의했다’고 했답니다. 그 말로 유추를 해봐야죠.”
 
  —그렇다면 그 무렵 북한의 다른 고위층 인사를 접촉한 일이 없나요?
 
  “황 선생이 김덕홍씨를 통해 96년 말에 북한 최고위층 두 사람의 대리인을 이 회장에게 소개해 준 일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이미 죽었으니까 이름을 밝힐 수 있고 한 사람은 북한의 최고위층 인사로 아직 생존해 있어서 이름을 밝히기는 곤란합니다. 죽은 사람은 2003년 6월 의문의 교통사고로 평양에서 사망한 김용순 대남담당비서입니다.”
 
  —혹시 관련 물증이 있습니까.
 
  김 기자는 황장엽 망명 사건 당시 공개하지 않았던 ‘골동품 고증자료’라는 제목의 문건을 보여주었다. A4 용지 18장 분량의 문건으로 1996년 12월 23일에 팩시밀리로 송신됐다는 표시가 있었다.
 
  “북한 최고위층의 대리인이 이연길 회장을 만나서 북한 측근이 가지고 있는 도자기 등 이러이러한 골동품이 있는데 이걸 팔아서 자금을 마련할 수 있는지를 알아봐 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대충 그 목록을 들고 인사동에 가서 알아봤더니 진품이라는 보증서나 평가서가 있으면 돈이 꽤 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쪽에다가 사진하고 공증서 같은 것을 보내달라고 해서 먼저 넘어온 자료가 이 ‘골동품 고증자료’입니다.”
 
  이 골동품 고증자료에는 ‘인형돋을 무늬흰자기 단지’, ‘룡돋을 무늬 석간주 흰자기 단지’, ‘색화조무늬흰자기 항아리’ 등 11개 물품 목록과 함께 이들에 대한 고증서가 포함돼 있었다. 다음은 중국 청나라 때 물건으로 추정되는 은장도에 대한 고증서 전문 중 일부다.
 
  <칼집과 칼몸이 따로 마련된 당대의 일반 적장도 형식이다. 장도 머리, 장도집 끝머리에는 턱을 짓게 하고 그 나머지 부분에는 옻칠을 하였다. 재질은 은이다.
 
  칼집 머리에는 고리를 마련하고 칼을 고정시키도록 은대를 꽂는 구멍이 있다. (中略)
 
  여기에 보이는 임술년은 1982, 1920, 1862, 1802년으로 비정되는데 칼의 형태 글 내용 등으로 미루어 1862년이 가장 적당하다고 볼 수 있다.>
 
  이 골동품을 통한 자금 마련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고증서 외에 사진 등을 요청하며 시간이 흐르는 동안 황장엽 망명 사건이 터져버렸기 때문이다.
 
  “저와 이연길 회장은 황 선생 망명 사건 이후 북한 고위층 대리인들과의 모든 접촉 라인이 끊어졌습니다. 이연길 회장은 부산의 한 호텔에 감금되다시피 하여 모든 활동이 중지됐고,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된 대선 무렵에는 이 회장은 딸이 이민 가서 살고 있는 브라질로 외유를 떠나야 했습니다. 혹시라도 야당에 사건의 전모를 밝히는 기자회견이나 양심선언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고 해요. 당시 국정원은 황 선생이 북한 고위층 두 사람을 이연길 회장에게 소개시켜 준 사실을 모두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골동품을 팔아서 자금을 마련하려 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죠. 따라서 우리 정보기관이 바보가 아니라면 황 선생이 한국으로 망명을 한 이후에도 이 라인을 관리하고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김용순이 평양에서 석연치 않은 자동차 사고로 사망했다는 뉴스를 접하면서 저는 머리털이 쭈뼛 서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 이건 뭔가 이상하다. 그때 우리와 접촉한 이후 계속해서 뭔가의 움직임을 계속하다 문제가 된 것은 아닐까 하는….”
 
  —당시 입수했던 황장엽 선생이 가져온 비밀 문건 중 김정일 관련 문건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는데요.
 
  “김정일 관련 문건은 두 개였는데 하나는 김일성 대학 연설문으로 그때 공개됐고 하나는 김정일이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에 임명된 후 지휘서신을 보낸 내용인데, 우리 군에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아 아는 분을 통해 우리 군 정보기관에 제공했고 기사로는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대략 내용은 조선인민군은 앞으로 속도전을 해야 한다는 것과 화학전, 기계전을 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 문건은 표지에 ‘절대 비밀’이라는 표시가 돼 있었고 우리 군 당국도 비밀 문건으로 분류해 보관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망명 사건에는 김현철 비선조직도 관여했었다
 

 
2004년 7월 13일 수유리 이준열사묘역에서 이준 열사 순국 제97주기 추념식이 열린 가운데 기념사업회 이사장으로서 이연길 회장이 식사를 읽고 있다. 그 역시 그토록 염원했던 북한 땅의 민주화를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당시 국정원은 왜 황장엽 선생의 망명을 서둘렀을까요.
 
  “저도 그 점이 의아했어요. 저와 이연길 회장은 황 선생과 김덕홍씨가 북한에 남아서 최초로 저희와 접촉할 때의 심정으로 돌아가 김정일 제거에 앞장서 줄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1996년 9월 무렵 국정원이 개입하면서부터 사건의 본질이 엉망이 되었습니다. 김정일 제거는 뒷전으로 밀리고 두 사람을 어떻게 한국으로 데려오느냐에만 온 신경이 집중되어 버린 겁니다.
 
  한편으로는 황 선생이 북한에서 감시가 심해져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었다 해도 이건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불안감을 지우기 힘들었습니다. 심지어 국정원은 이연길 회장을 배제하고 황장엽, 김덕홍씨와 직거래를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두 사람이 국정원 직원들을 만나주지 않자 할 수 없이 이연길 회장을 다시 불러 접촉 라인을 재개할 정도로 세련되지 못한 방법으로 일을 처리한 겁니다.
 
  이연길 회장은 이런 상황을 당하면서 일이 잘못되면 큰일 날 수도 있겠구나 싶어 저에게 황 선생의 자료를 건네주면서 ‘만약 무슨 일이 벌어지면 역사의 기록을 제대로 해달라’고 신신당부를 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민주당이 황 선생님 망명 사건과 관련해 낸 보고서에는 ‘한보 사태’로 야기된 국내정치 사태의 정국 반전용으로 활용하려고 했다고 말하고 있어요. 또 대선에 활용할 생각도 있었던 것으로 봤고요.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런 목적으로 데려왔는지를 제가 알 수는 없는 일이잖아요? 추측은 할 수 있을지 몰라도.”
 
  —황 선생 망명 사건에 이 회장과 김덕홍 라인 외에 가동된 조직은 없었습니까.
 
  “우리 말고도 당시 김영삼 대통령의 차남 김현철씨의 비선 라인의 접촉이 있었고 김덕홍씨가 크리스천아카데미 강원룡 목사와도 접촉했던 것으로 알고 있어요. 김현철씨의 비선 라인에는 김숙향씨와 박태중씨가 등장을 하는데 이들은 한보 사태가 발생하면서 끝까지 참여하지 못하게 됩니다. 또한 황장엽-김덕홍 두 사람은 이연길 회장 측을 신뢰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황 선생이 결정적이고 중요한 자료들은 이연길 회장에게만 주었으니까요.”
 
  —안기부의 의도대로 일본에서 망명을 결행하지 못하게 된 이유는 뭡니까.
 
  “미숙한 공작 탓이라고 할까요. 안기부의 현지 라인과 망명 공작을 위해 한국에서 파견된 라인이 이원화되어 손발이 잘 맞지 않게 됨으로써 일본 내각조사실이 황 선생의 망명 시도를 알고 철저하게 대비를 했기 때문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황장엽 선생의 망명을 성공한 공작으로 봐야 할까요?
 
  “황 선생이 망명함으로써 애초 우리나 황 선생이 의도했던 김정일 제거를 통한 북한민주화 후 통일, 즉 공작적 통일방안은 물거품이 된 셈이죠. 주체사상의 창시자인 황 선생이 북한을 탈출함으로써 북한 지도부에 큰 타격을 준 그 정도에서 끝났기 때문에 절반의 성공이라고 해야 하나요?”
 
  김 기자는 황장엽 선생의 망명을 ‘절반의 성공’이라고 말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덧붙였다.
 
  “황장엽 선생이 망명한 후 북한에서 탈출하는 고위층이나 그들의 친인척이나 자녀 등은 한국에 대한 희망을 버리고 거의 대부분 외국으로 가고 있어요. 그들은 황장엽 선생의 남한 생활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죠. 특히 김대중 정부, 노무현 정부 시절 황 선생은 자유로운 활동이 거의 불가능했고, 연금상태나 다름없이 사는 모습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면서 북한의 최고위층이 남한에 와서 저런 비참한 대우를 받는 걸 보고 누가 남한으로 오겠습니까. 황 선생 이후로도 고위층이 많이 탈북한 것으로 아는데, 그들이 한국 대신 다른 나라를 택한 이유를 잘 새겨봐야 합니다.”
 
 
  대북 공작은 북한 최고 지도층을 대상으로 해야
 
  마지막으로 김 기자는 이런 당부를 했다.
 
  “박근혜 정부의 국정원은 대북 쪽에 활동의 중점을 두는 것으로 방향을 설정한 것 같은데요. 진정한 대북 공작은 북한 최고 지도층을 대상으로 한 고차원의 공작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저와 이연길 회장은 가진 것 아무것도 없이 거의 맨몸으로, 사비를 들여가며 민간 차원에서 김정일을 제거하고 북한에 민주화 바람을 넣어보자는 차원에서 시작한 것이 큰 성과를 낸 겁니다. 처음에 우리가 황 선생 관련 내용을 국정원에 신고했을 때 아예 믿으려고조차 하지 않더군요. 네까짓 것들이 해봐야 뭘 얼마나 하겠느냐 이런 투였어요. 그러나 우리는 진심으로 황 선생과 김덕홍을 만나 진심을 토로했고, 그들이 필요로 하는 물건이나 자금 등을 성심성의껏 만들어 제공했습니다. 이삭 목사가 180만 달러 상당의 의약품과 100만 평의 밭에 뿌릴 정도의 옥수수 종자를 구해준 것도 그런 사례 중의 하나입니다. 지금이라도 우리는 핵무기와 미사일 가지고 전 세계의 평화를 파괴하겠다고 협박 공갈하는 김정은을 단숨에 소리소문 없이 제거할 수 있는 공작적 차원의 통일방안이란 옵션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필요하다면 민간 전문가라도 동원해서 그런 대북 휴먼 네트워크를 만드는 게 급선무입니다.”
 
  기자는 최근 황장엽 선생의 남한 내 생활과 관련된 충격적인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 이 인사는 김대중 정부 시절 국정원의 고위 간부를 지낸 사람이다.
 
  “6·15 남북정상회담 후 황장엽씨의 관리를 담당하는 부서를 바꾸려는 움직임이 있었어요. 정상회담 전에는 북한 관련 부서에서 담당해 왔는데 갑자기 국내 담당 부서로 바꾸자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수사국 요원들이 반대를 했기 때문에 나는 그 뜻을 원장에게 전했습니다.”
 
  —이유가 뭔데요?
 
  “내보내라는 것이죠?”
 
  —미국이나 해외로요?
 
  “아니죠. 국정원의 보호 밖으로 내보내라는 거죠. 적극적인 보호에서 소극적인 보호로 바꾼다고 할까. 그때 김정일이 얼마나 황장엽씨를 미워하고 해치려 했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 아닌가요?”
 
  노(老) 망명객에게 한국에서의 13년은 고독과 분노와 좌절의 삶이었을 것이고 망명 계획 참여자로서 그것을 지켜봐야만 했던 김 기자에게도 그 시간은 고뇌의 시간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