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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의 전성기 펠리페 2세의 魂이 서린 에스코리알 이야기

淸山에 2014. 8. 18. 15:05







스페인의 전성기 펠리페 2세의 魂이 서린 에스코리알 이야기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스페인의 魂 에스코리알 궁전 이야기






   중세의 유럽에서는 왕들이 정략 결혼을 통해서 국토를 넓혀가는 일이 잦았다. 당시는 국가가 왕의 私物이었다. 결혼에 따라 국가가 이 王家 저 王家로 소속이 바뀌었다. 유럽 여행을 하다가 보면 잘 이해할 수 없는 역사와 만나게 된다.
 
  16세기에 왜 스페인이 멀리 떨어진 나폴리 왕국을 지배하였는가, 왜 신성로마제국의 칼5세는 스페인에서는 칼1세로 불리고, 그는 어떻게 해서 스페인뿐 아니라 네덜란드, 사르디니아, 밀라노, 오스트리아, 시실리, 이탈리아 남부, 보헤미아(지금의 체코), 모라비아(지금의 체코), 독일 도시국가 등 프랑스와 영국을 뺀 거의 全유럽을 지배했던가. 칼1세의 아들 필립은 왜 오스트리아를 지배하지 못했던가. 이런 사정을 이해하려면 유럽 王家의 복잡한 결혼관계와 이에 따른 국경의 변경을 알아야 한다.  
 
  유럽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정략 결혼은 칼1세와 필립 2세를 배출하게 되는, 지금의 오스트리아를 근거지로 하고 있던 합스부르그 왕조의 한 걸작품이다.
  1477년 합스부르그의 프리드리히 3세는 아들 맥시밀리안을 프랑스의 부르고뉴 公國의 공주 마리아에게 장가보냈다. 마리아는 아버지 '용감한 찰스' 大公이 죽자 프랑스의 루이 11세의 침공으로 영토를 많이 빼앗겨 합스부르그 왕가의 보호를 받으려 했던 것이다.
 
  마리아와 맥시밀리안 사이에서 난 왕자가 필립이다. 마리아는 부르고뉴의 영토를 아들 필립에게 넘겨준다. 그때 부르고뉴 公國은 지금의 베네룩스 3국(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그)이 있는 네덜란드 지역까지 지배하고 있었으므로 필립은 자동적으로 이 지역의 지배자가 되었다. 필립은 1496년에 스페인의 공주 조안나와 결혼한다. 조안나는 스페인을 공동 통치하던 페르디난드 왕과 이사벨라 여왕 사이에서 난 딸이었다. 필립과 조안나 사이에서 난 아들이 칼(영어로는 찰스) 1세였다.

 칼의 할머니 이사벨라 여왕은 스페인의 카스틸 왕국의 왕으로서 1492년에 이슬람 세력을 최종적으로 몰아내고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궁전을 접수하였고, 같은 해 콜럼부스를 후원, 신대륙을 발견하게 한 名君이다.
 
  이사벨라에 이어 페르디난드 왕이 죽자 그의 손자인 칼1세가 1516년에 스페인 왕이 된다. 칼1세는 부르고뉴와 네덜란드에 더해서 스페인의 거대한 영토를 상속받는다. 즉, 스페인, 나폴리, 시실리, 사르디니아, 그리고 막 개척되고 있던 아메리카 대륙의 식민지가 그의 소유가 된 것이다.
  이뿐이 아니다. 그의 할아버지인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맥시밀리언이 1519년에 죽자 그가 통치하던 독일, 오스트리아도 칼1세의 지배 하에 들어간다. 칼1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로서는 칼5세로 불리었다. 이렇게 해서 칼1세는 프랑스와 영국과 포르투갈을 뺀 거의 全유럽을 통치하게 되었다.
 
  스페인 왕 칼1세 겸 신성로마제국 황제 칼5세는 마틴 루터가 일으킨 종교개혁과 잇따른 신구교의 종교분쟁을 수습하는 데 골치를 썩여야 했다. 칼5세는 중세의 정신적 권력을 잡고 있던 교황권에 도전한 루터를 침묵시키려고 했으나 독일의 많은 영주들이 루터 편에 서는 바람에 성공하지 못했다. 종교개혁이 시작된 1517부터 30년 전쟁이 끝나는 1648년까지 약130년간 유럽 전체가 신구교 갈등으로 전쟁, 학살, 암살, 파괴, 혁명이 휩쓰는 아수라장으로 빠져들었다.
 
  신성로마제국(독일과 오스트리아 중심의 연합체) 황제로서 칼5세는 1555년 독일 아우구스부르그에서 신구교간의 분쟁을 일단 봉합하는 평화협정을 신교측과 맺는다. 이 협정에 의해서 영주들이 신구교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개인에게는 종교선택의 자유가 주어지지 않았다). 칼1세는 결국 종교혁명의 진압에 실패한 것이다. 그 1년 뒤(1556년) 칼1세는 퇴위하여 수도원에 들어가버린다. 그는 아들 필립(펠리페)2세에게는 스페인의 왕위를, 동생 페르디난드 1세에게는 오스트리아와 독일을 통치하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자리를 넘겼다. 이로써 합스부르그 王家는 스페인과 오스트리아로 兩分되었다.
 
  여기서 16세기를 대표하는 인물인 필립(스페인어로는 펠리페)2세가 등장한다. 필립 2세는 칼1세로부터 상속받은 스페인, 네덜란드, 부르고뉴, 나폴리, 밀라노, 아메리카 식민지에다가 1581년엔 포르투갈까지 병합한다. 필립 2세는 신교와 오스만 투르크의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가톨릭의 정통성을 수호하는 역할을 자임했다. 그는 검소하고 경건하며 신실한 신도였다. 가톨릭 세계의 수호자인 그의 관심은 유럽 각국에서 봉기하는 신교도 세력을 진압하는 데 집중되었다.
 
  그는 아메리카 식민지로부터 쏟아져 들어오는 富(부)를 전쟁에 썼다.
  처음에는 필립 2세가 유럽의 주도권을 쥐는 듯했다. 1557년 그는 프랑스 군대를 센트 퀜틴에서 대패시켰고 이를 기념하여 마드리드 근교에 에스코리알이라 불리는 거대한 궁전 겸 교회당 겸 가족무덤을 짓기 시작했다. 그는 수도를 톨레도에서 마드리드로 옮겼다. 1571년 필립 2세는 베니스 및 교황청과 연합함대를 만들어 지중해를 위협하는 오스만 투르크의 함대를 레판토 해전에서 격멸시켰다.
 
  필립 2세는 네덜란드에서 신교도들이 독립전쟁을 일으키자 2만 군대를 보내 이를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그는 포르투갈을 병합하여 신대륙의 식민지를 獨食했다. 하지만 1588년 필립2세는 결정적인 타격을 받는다. 네덜란드 독립전쟁을 사주한 영국을 치기 위하여 그가 보낸 無敵함대가 영국해군에 의해 전멸되고 만 것이다. 네덜란드의 신교도들도 영국의 도움을 받아 결국은 스페인을 물리치고 독립을 쟁취하고 영국에서 가톨릭 세력은 엘리자베스 1세의 탄압을 받는다. 國富를 전쟁에 때려넣어 국가를 파산상태로 몰고간 필립2세는 에스코리알 궁전에서 1598년 71세에 죽었다. 필립 2세는 16세기의 최강국 스페인의 전성기를 만들었으나 쇠퇴기를 열기도 했다.
 
  16세기는 스페인 필립 2세의 세기, 17세기는 네덜란드 해양인들의 세기, 18세기는 프랑스 루이 14세의 세기, 19세기는 大英제국의 세기, 20세기는 미국의 세기, 21세기는 중국의 세기가 아닐까.
 
  지금부터 필립 2세의 숨결이 남아 있는 에스코리알 궁전을 탐험해보자. 마드리드에서 약30km 떨어진 산중에 있는 이 화강암 궁전은 화려한 맛보다는 필립 2세의 성격을 반영하여 장중하고 엄격하다. 이 건물은 1563년부터 1584년까지 21년에 걸쳐 집중적으로 건축되어 그 양식이 통일적인 점이 특징이다. 1200개의 문과 2600개의 창을 가진 이 건물은 206X161m의 크기이다. 교회당의 돔은 높이가 91m이다. 궁전, 교회당, 가족무덤, 도서관의 용도를 가진 복합건물이다. 필립 2세는 이 도서관에 책 1만권을 소장했다고 한다. 이 건물은 근엄하기 이를 데 없어 베르사이유 궁전이나 마드리드에 있는 스페인(부르봉 王朝) 왕궁의 호화스러움과 대비된다. 에스코리알의 장중한 멋은 독일계통 합스부르그 왕조의 고유 분위기이기도 하다.
  에스코리알 궁전은 필립 2세의 혼이 서려 있는 역사적 유산이고 유네스코 지정 세계 문화 유산이지만 한국인 관광객들은 잘 가지 않는다. 이 궁전의 필립 2세 집무실은 뜻밖에 작고 검소했다. 필립 2세가 썼던 중국제 접는 의자는 아무 장식이 없이 딱딱하다. 그의 침실은 예배당 바로 옆에 붙어 있어 일하다가도 언제든지 예배를 올리기 위하여 들릴 수 있게 설계했다. 그는 통풍으로 죽어가면서도 이 방 침대에 누워 교회의 성찬대를 바라보았다고 한다.
  
  필립 2세는 가톨릭의 개혁을 주도했던 제수이스트의 후원자이기도 했다. 그러다가 보니 그 자신도 금욕적 생활을 보낸 것이 아닌가 느껴졌다. 19세기 스페인 철학자 미구엘 우나무노는 '무슬림 신도들이 메카를 순례하듯이 스페인 사람들은 에스코리알을 찾아가야 스페인의 혼을 느낄 수 있다'고 썼다. 이 건물의 내부도 군대 사령부처럼 엄숙하여 구경꾼들의 마음을 짓누른다. 구경을 끝낸 뒤 건물 바깥으로 나오면 해방감을 느낄 정도이다.
 
  스페인은 관광수입이 세계에서 가장 많다. 유네스코 지정 세계 문화유산수는 이탈리아 중국에 이어 세계 3위다. 에스코리알 같은 장엄한 독일적 건물이 있는가 하면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궁전처럼 동양적인 이슬람 문명의 精髓(정수)가 있고 스페인 왕궁처럼 화려한 라틴문명의 숨결도 느낀다. 동서양의 混在, 서양적인 것중에서도 라틴적인 것과 게르만적인 것의 혼합, 현대적인 것과 중세적인 것의 공존이 스페인의 매력이다. 스페인을 여행하고 나면 뇌리에 찍힌 殘影(잔영)이 아주 오래 간다.
 
  에스코리알에서 약15분 거리에는 '죽은 자의 계곡'으로 불리는 동굴 무덤이 있다. 스페인 내전 때 죽은 4만 명의 양측 屍身을 묻었다. 동굴을 262m 파고 들어가서 만든 추모회랑 끝에는 철권 통치자 프랑코의 무덤이 있다. 프랑코는 뭇솔리니와 히틀러의 지원을 받아 스탈린의 지원을 받던 좌익계 공화파를 무너뜨리고 스페인을 재통합했다. 헤밍웨이 같은 1930년대의 서구 지식인들이 공화파를 지지하는 바람에 프랑코의 이미지는 매우 나쁘지만 적지 않는 스페인 사람들로부터는 존경을 받는 편이다. 필자가 방문했을 때도 그의 무덤 위에는 꽃다발이 놓여 있었다. 이 동굴무덤이 파인 岩山 위에는 시멘트로 만든 높이 125m, 너비 46m의 돌 십자가가 있다. 세계에서 가장 크다고 한다. 스페인의 문화재는 일단 스케일이 대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