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00명의 戰士가 200만을 손에 넣다 일진일퇴하는 백병전이 수 시간 계속되었으나 승부는 나지 않았다. 오후에 들어 공격하던 노르만 군의 左翼(좌익)이 철통같은 잉글랜드 군의 수비에 밀려 후퇴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윌리엄 공이 죽었다는 소문이 퍼지고, 노르만 군의 좌익이 무너져 달아나기 시작하였다. 그동안 수비만 하던 잉글랜드 군이 추격에 나섰다. 이 위기를 逆轉(역전)시킨 것은 윌리엄 공이었다. 그는 자신의 건재함을 보여준 다음 후퇴하는 노르만 군을 수습, 반격에 나섰다. 잉글랜드 군은 유리한 高地(고지)를 버리고 추격에 나섰다가 노르만의 반격에 걸려 많은 전사자를 내고 돌아갔다.
노르만 기병 전술은 몽골군과 닮은 점이 있었다. 전투 중 달아나는 시늉을 한다. 적은 추격하느라고 戰列(전열)이 흩어진다. 이때를 틈타 재집결, 반격을 감행, 흩어진 적군을 섬멸한다는 공식이었다.
윌리엄 공은 해스팅스 전투 막판에 이 기만전술을 썼다. 이런 전술은 고도로 훈련된 부대만 할 수 있다. 윌리엄의 직할 부대가 유인에 동원되었다. 접전중 갑자기 등을 돌려 아래 쪽으로 달아나기 시작하였다. 잉글랜드 군은 수비전만 하다가 비로소 찬스를 잡았다고 판단했다. 그들은 수비대열에서 이탈, 달아나는 노르만 군을 좇기 시작하였다. 수비하기 좋은 고지를 버리고 흩어지면서 내려왔다. 달아나던 노르만 보병과 기병이 집결하더니 갑자기 유턴했다. 반격이 시작되었다. 잉글랜드 군이 몰리기 시작하였다. 이 순간 해롤드 왕이 전사하였다. 베이유 자수의 그림에 따르면 그는 화살을 눈에 맞고 죽었다. 왕이 죽으면 졸병들은 버틸 수가 없다. 잉글랜드 군은 무너졌다.
쌍방의 병력은 각 7000명 쯤 되었을 것이다. 그날 반 정도는 죽거나 다쳤을 것이다. 특히 잉글랜드 군의 피해가 컸다. 잉글랜드 지배층을 대표한 기사단은 이 전투와 이어진 여러 전투에서 궤멸되었다. 단 한 번의 전투로 국가의 지배층이 전면적으로 교체되어 버린 희귀한 사례이다. 윌리엄 공은 1066년 런던으로 입성, 영국 왕으로 즉위했다. 잉글랜드는 프랑스 어를 하는 노르만 戰士들의 지배 하로 들어간 것이다. 7000명의 戰士(전사)들이 전투에서 이기자, 200만(당시 영국 인구)의 잉글랜드 인과 국토, 그리고 한 문명이 수중으로 들어온 셈이다. 세계사에서 보기 힘든 성공적 벤처 투자였다. ‘베이유 刺繡’ 앞에서 프랑스 노르망디의 베이유를 찾았다. 이 古都(고도)의 옛 교수신학교 건물 내 박물관엔 '베이유 刺繡(자수)'라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있다. 1066년 노르망디의 윌리엄公이 잉글랜드에 상륙, 해스팅스 결전에서 해롤드 왕의 군대를 무찌르는 이야기를 담은 자수 그림이다. 50여개 장면의 사실적 그림인데, 길이 약 70m, 너비 약 50cm이다. 유리 안에 넣어 암실에서 전시하고 있었다.
이 보물에 대한 연구는 방대한데, 지금까지 확정된 사실은, 베이유 성당의 再建式(재건식)에 奉納(봉납)할 목적으로 정복왕 윌리엄의 이복 동생인 베이유의 오도 주교가 지휘하여 만든 것이란 점이다. 장군이기도 했던 오도는 윌리엄 왕이 고향인 노르망디로 돌아가면 대리 통치한 사람이다. 그가 자수 제작을 지시한 것은 1070년대로 보인다. 같은 시기 그는 베이유 성당의 건축도 시작하였다. 잉글랜드 기술자들이 자수의 제작에 참여, 7년 만에 완성한 뒤엔 베이유 성당으로 가져와 보관하였다. 이 자수에는 626명의 인물, 202마리의 말, 41척의 선박, 37동의 건물이 등장한다. 바이킹을 유명하게 만든 선박의 구조를 아는 데 좋은 자료이고 당시의 무기와 전술 연구에도 소중하다. 자수엔 밝은 별과 몽셍미셀 요새도 나온다. 나중에 천문학자들은 핼리 혜성임을 확인하였다. 해스팅스 전투가 있은 지 10년 정도 흐른 다음에 제작되었으므로 사실에 매우 가까운 그림이라는 평가이다. 윌리엄의 잉글랜드 정복은 이 베이유 자수로 해서 아주 실감 있게 다가온다. 일종의 동영상이다.
이 자수 기록화의 마지막 장면은 영국의 해롤드 왕이 눈에 화살을 맞고 죽는 모습이다. 해스팅 전투에선 앵글로 색슨 족의 귀족들이 왕과 함께 전멸하였다. 이는 발전적 변화의 곅기가 되었다.
영국의 운명이 바뀌다 프랑스 말을 하는 노르만 정복자들이 잉글랜드 지배층을 일거에 제거하고 앵글로 색슨족이 발전시킨 제도와 전통을 타고 앉아 새롭고 능률적인 국가를 만든다. 그때까지 영국은 유럽 문화권에선 멀어져 北海(북해)를 놓고 스칸디나비아의 후진 문화권에서 놀았다. 노르만 지배층에 의하여 프랑스-유럽 문화권과 연결되고 프랑스語 단어가 영어로 많이 들어와 세계적 언어가 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1066년 이전에 영국은 로마-게르만-바이킹족의 침공만 받아왔는데 노르만 귀족이 통치 집단으로 들어앉은 다음엔 국력이 강해져 한 번도 침공을 허용하지 않고, 오히려 외국을 침략하는 나라로 달라졌다. 이는 세계사의 흐름을 바꾼 것이다.
이 베이유 자수는 2차 대전 때 독일이 눈독을 들였으나 베이유가 노르망디 상륙 직후에 연합군에 의하여 해방됨으로써 난을 면했다. 지금 베이유는 인구가 1만4600명에 불과한 조용한 시골이지만 베이유 자수로 해서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 사이에선 잘 알려진 地名(지명)이다.
이 자수를 보존하여 온 베이유 성당은 1070년에 기공되어 수백 년에 걸쳐 완성된, 그리하여 노르만 로마네스크 양식과 노르만 고딕 양식이 융합된 단정한 인상의 건축물이다. 건축학도가 관찰하면 로마네스크 식이 고딕 식으로 변화해간 과정을 생생하게 알 수 있다. 노르망디 상륙전의 와중에서 파괴되지 않아 1000년 전의 원형을 온전하게 알 수 있다. 벽화 중엔 잉글랜드 왕 헨리 2세의 지시로 살해된 뒤 聖人(성인)으로 추존된 토마스 베켓의 이야기가 있다.
베이유 자수와 성당은 노르만 문화의 우수성을 상징한다. 11~13세기 유럽의 최고 문명은 프랑스에 있었다. 군사, 경제, 학문, 예술 모든 면에서 최고였다. 파리는 인구 20만의 매력적인 도시로 성장, 유럽의 인재들을 끌어 모았다. 노르만은 바이킹의 야성 위에 전성기의 프랑스 문화를 흡수, 보다 높은 수준의 새로운 문화를 재창조한 것이다. 노르만이 노르망디, 영국, 시실리 및 남이탈리아에 남긴 수많은 성당, 궁전, 성, 모자이크는 비잔틴과 아랍 양식까지 수용한 것도 많다. 위대한 戰士(전사) 집단이 위대한 文藝창조자가 된 경우이다. 로마네스크 건축붐을 일으킨 노르만
유럽을 여행하다가 보면 서로마가 게르만족에 의하여 멸망한 5세기 이후 11세기까지의 600년간에 세워진 건축물을 발견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중세 암흑기가 바로 이 시기였구나 하는 감을 갖게 된다. 이 시기의 건축물은 드물기에 소중하다. *이탈리아 동해안에 있는 라벤나엔 5~6세기의 초기 기독교 건물(산 비탈레 교회, 네온 세례당 등)이 있다. 라벤나는 서기 402~476년 사이 서로마 제국의 수도였다가 로마가 망한 뒤엔 동고트 왕국의 수도로 변했다. 서기 540년에 이탈리아 반도 수복에 나선 동로마 제국(비잔틴)에 넘어갔다가 751년엔 롬바르드 왕국으로 편입되었다.
*독일 아헨 성당: 프랑크 왕국의 전성기를 연 샬레마뉴 大帝(대제)의 무덤이 있는 9세기 초 건축물이다. *스페인 코르도바의 大모스크(메즈키타-카데드랄): 기둥이 천 개나 되는 이 모스크는 이슬람 세력이 이베리아 반도를 점령한 8~10세기에 걸쳐서 만들어졌다. 기독교 세력이 탈환한 뒤엔 성당으로 바꿨다. 11세기부터 프랑스, 노르망디, 잉글랜드, 남이탈리아, 시실리에서부터 새로운 양식의 많은 건축물들이 등장한다. 성당, 수도원, 성, 궁전이다. 이를 로마네스크 양식이라 부른다. 로마 양식의 건축이란 뜻이다. 거의 600년간 볼 만한 건물을 만들지 못했던 유럽 기독교 문명권에 변화가 생긴 것이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유형은 곧 고딕 양식으로 진화하고 유럽에 거대하고 아름다운 성당 건축 붐이 일어난다.
로마네스크 양식 건축 붐은 유럽 문명이 중세 암흑기의 침체를 벗어나 再起(재기)의 신호탄을 올림 셈이다. 이들 건물은 큰 것이 특징인데, 건축 기술의 발전을 반영한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확산을 매개한 것이 노르만 戰士(전사)들이었다. 이들이 정복 사업을 진행한 노르망디, 잉글랜드, 남이탈리아, 시실리에선 노르만 정권의 후훤 하에서 로마네스크 건축 붐이 일어났다. 노르만의 역사에 대하여 잘 모르는 이들도 시실리나 남이탈리아에 가 보고는 “바이킹(노르만)이 세웠다는 건물이 왜 이렇게나 많나”라고 고개를 갸우뚱 하게 된다.
노르만이 가는 곳에 성당이 선다
노르만-로마네스크 식 건물은 첫 인상이 육중하다. 벽이 두껍고 창이 작다. 실내는 검소하다. 반원형 천장, 원형 아치가 특징인데, 건물의 규모가 획기적으로 커졌다. 성당이라도 요새 같은 느낌을 준다. 실제로 성당과 성을 세트로 지어 방어용으로 이용하기도 했다. 서울 태평로의 성공회 본당 건물이 로마네스크 식이다.
노르만이 유럽 도처에서 남긴 노르만-로마네스크 양식의 건축물이나 예술품은 웅장하고 아름다워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것들도 많다. *영국: 더함 성당, 런던 탑, 윈체스터 성당, 웨스트민스터 사원 *프랑스: 몽셍미셀(수도원과 요새 겸함), 베이유 刺繡 그림 *南이탈리아: 나폴리의 달걀 성, 카스텔 몬테(시실리 왕국을 다스린 노르만-독일계 신성로마제국 황제 페데리코 2세가 세운 성), 트로이아 성당, 트라니 성당, 바리의 성당과 성 등 *시실리: 팔레르모의 대성상, 몽레알레 대성당, 팔레르모의 노르만 궁전과 교회, 체라푸 대성당 *노르망디의 수도였던 루앙은 노르만 시대의 건축 붐에 의하여 유럽의 유수한 건축도시로 성장했다. 윌리엄 공의 屍身(시신)이 안치되었던 캉의 수도원도 기념비적인 노르만-로마네스크 양식이다. 노르만은 11세기 전후에 유럽에서 가장 이동을 많이 한 사람들이었다. 북유럽에서 비잔틴, 예루살렘, 아프리카까지 다니다가 보니까 자연히 박식하고 개방적인 성격을 갖게 되었다. 이런 성격이 노르만 건축물에 나타난다. 스칸디나비아 식, 로마 식, 기독교 식에다가 비잔틴(그리스)과 아랍 양식까지 가미되니 건물의 인상이 풍성해진 것이다.
노르만의 세력 확장은 새로운 건축양식의 확장을 매개하였을 뿐 아니라, 교황 그레고리 7세가 주도한 교회 개혁의 강력한 후원자 역할을 맡은 것과도 맞물렸다. 영국 저술가 폴 존슨은 ‘예술-새로운 역사’라는 책에서 노르만을 ‘가장 활력 있고 재주 많은 소수 민족’이라고 표현하면서 유태인, 아르메니아인, 베니스인, 네덜란드인과 비견된다고 했다.
폴 존슨은 <신성로마제국의 바보 같은 황제들은 그레고리 7세의 교회 개혁에 반대하였으나 노르만 세력은 이를 적극적으로 지지, 스스로 법, 지혜, 敬虔性(경건성), 그리고 예술에서 큰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고 평했다.
그들은 질서를 파괴하는 야만 세력으로 출발하였다가 질서를 잡는 문명세력으로 변했는데, 예술을 그런 질서잡기의 수단으로 이용했다. 노르만은 문명세계의 지혜와 문화를 배우면서도, 바이킹으로서의 특징, 즉 적극성, 모험정신, 무자비성, 강력함, 폭력을 즐김, 손재주, 교활함, 수단이 많고 놀라울 정도로 과감한 성격을 버리지 않았다. 그들은 정복지에서도 교회 내의 개혁 세력, 즉 잘 교육된 수도승이나 주교들과 손을 잡았다.
더함 성당
노르만이 잉글랜드 켄트에 세운 로체스터 성은 당대 최강이었다. 45m 높이의 이 성벽은 한 번도 공격자의 入城을 허용하지 않았다. 궁전과 요새의 기능을 겸한 런던탑은 새로운 건축 사조를 반영했다. 교회, 궁전, 요새 기능을 겸했는데 영국을 정복한 노르만 왕조의 깊은 신앙심을 잘 드러냈다. 노르망디에도 수많은 수도원과 성을 지었는데, 캉의 채석장이 좋은 石材(석재)를 제공한 덕분이었다. 윌리엄은 잉글랜드를 정복하자 캉에서 석재를 실어 날라 교회와 성을 지었다. 캉의 석재는 ‘영국 교회의 흰 옷’이 되었다.
폴 존슨은 위의 책에서 정복자 노르만 지배층의 안목과 수준을 보여주는 사례로 더함 성당 건축을 들었다. 이 성당 건축을 지휘한 사람은 윌리엄 주교였다. 그는 정복왕 윌리엄의 친구였다. 윌리엄 왕이 1087년에 죽은 뒤 아들 루푸스가 즉위, 주교를 프랑스로 추방하였다. 주교는 3년간 파리와 노르망디의 건축물을 연구하고 돌아왔다. 왕의 신임을 회복한 그는 성당을 짓게 되는데 40년이 걸려 그의 死後에 완공된다. 더함 성당은 로마네스크 양식을 전면적으로 도입, 건물을 크게, 높게 만든 것인데, 건축학적으로 가장 창조적 건물로 꼽힌다.
갈비뼈를 닮은 반원형 천장(the ribbed vault), 飛樑(비량, the flying buttress, 벽을 바깥에서 버텨주는 역할), 뾰족한 아치(the pointed arch)는 이 성당에서 시도된 3대 건축 기법인데, 나중에 고딕 건축으로 이어진다. 그 전 건축물은 자재의 힘에 의존하였는데, 이 성당 이후엔 力學的(역학적) 계산에 의존, 부피를 키우고 창을 넓히고, 벽의 두께를 줄이게 된다. 폴 존슨은 <혁명적 技法을 도입한 건물이지만 전통적 양식 속에서 혁신을 한 것이라 보통 사람들은 급변을 눈치 채지 못하게 된다>면서 바로 이런 점이 노르만 사람들의 천재성이라고 해석했다. 잉글랜드 더함 성당의 길이는 143m, 예배당의 너비는 25m, 높이는 22m, 중앙 탑의 높이는 66m이다. 미국의 소설가 나다니엘 호돈은 더함 성당을 처음 본 감격을 이렇게 표현했다.
<나는 다리 위에 서서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장면을 보면서 찬양하고 황홀하였다. 성당은 크고, 성스럽고, 달콤한데 그 모든 것이 하나로 되었다. 나는 이처럼 사랑스럽고 대단한 광경을 일찍이 본 적이 없다.>
유럽의 성당은 토털 아트
중세 유럽의 성당은 주로 로마네스크,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양식인데, 폴 존슨에 따르면 인류의 예술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성취이다. 성당은 모든 양식의 예술을 다 포함하는 최대 규모의 토털 아트이다. 그는 사람들이 全생애를 투입, 성당을 찾아가 세밀하게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것은 결코 헛된 투자가 아닐 것이라고 했다. 이들 중세 성당의 진짜 위대성은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근 1000년간! 이렇게 오랜 기간 중단 없이 사용되는 예술품은 달리 없다. 중세에선 한때 국가 재정수입의 약10%가 성당을 짓는 데 투입되었다. 이 돈도 길게 보면 낭비가 아니다. 이들 성당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잘 정비, 관리되어 빛난다. 그런 중세 성당의 태반을 차지하는 로마네스크 및 고딕 성당에 가장 야만적이던 노르만의 손때가 묻어 있다는 점이 흥미로운 것이다.
노르만 戰士들은 어디를 정복하든지 통치와 행정에 뛰어났다. 잉글랜드를 정복한 윌리엄 왕은 1085년에 전국 國富(국부) 조사를 했다. 이 조사보고서는 ‘돔스데이 북(Domesday Book)'이라고 불린다. 전국 13,418 지역의 토지 및 가축 소유 실태, 세금, 軍役, 생활 상태 등이 자세히 기록되었다. 유럽 역사상 가장 치밀하고 정확한 國勢(국세)조사였다. 조사 목적은 課稅(과세)의 근거 자료를 마련하기 위함이었다. 이 조사에 의하여 노르만 王朝(왕조)가 잉글랜드의 토지 소유권을 장악,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를 확립하였음을 알 수 있다.
조사 대상 지역의 약5분의 1은 왕이 직접 소유하였다. 4분의 1은 교회, 반은 윌리엄 왕의 추종자들이 소유하였다. 해스팅 전투에서 토착 앵글로 색슨 귀족들이 섬멸됨으로써 지배층이 완벽하게 교체되었고 따라서 중앙집권적인 효율성 높은 통치가 가능하였다는 이야기이다. 남이탈리아를 장악한 노르만 세력도 이 돔스데이 북을 참고로 하여 1100년에 국세 조사를 실시했다. 노르만이 어딜 가든지 건축 붐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도, 중앙집권적, 효율적 행정능력을 바탕으로 개방-실용 정책을 펴 富國强兵(부국강병)에 성공한 餘力(여력)이 있었던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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