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
‘황장엽 망명’ 특종 金容三 기자가 이제야 털어놓는 또 다른 특종 “황장엽 망명 직전 또 다른 북한 최고위층 2명과도 접촉 있었다” 글 : 金成東 月刊朝鮮 기자 글 : 白承俱 月刊朝鮮 기자 ⊙ 황장엽과 뜻을 같이한 2명 중 1명은 의문의 교통사고로 사망한 김용순. 또 다른 1명은 북한 현직 최고위층 ⊙ 황장엽 망명 후 처형당한 북한농업상 서관히는 “뜻을 같이했던 인물”이라고 황장엽이 밝혀 ⊙ 당시 공개 못했던 황장엽 친필서신 중 5·18 광주 관련 발언 내용: “광주학생문제도 그들을 뒤에서 사주한 북의 공명주의자들이 책임전가한 일이다” ⊙ ‘황장엽 리스트’는 애초부터 없었다 ⊙ 황장엽은 아들 황경모를 통해 김정일 암살 계획을 세웠었다 ⊙ 전 국정원 고위 관계자의 충격 증언: “6·15 남북정상회담 후 국정원은 황장엽을 방치하려 했다”
취재지원 : 車彦助 月刊朝鮮 인턴기자 수요일이었던 1997년 2월 12일 오후. 시사월간지의 제작 일정상 막바지 기사마감으로 정신없이 바쁜 시간을 보내던 당시 《월간조선》 김용삼(金容三) 기자는 자신의 눈과 귀를 의심했다. 텔레비전에서 다급하게 황장엽(黃長燁) 북한 노동당 국제담당비서와 김덕홍(金德弘) 려광무역연합총회사 총사장의 망명 소식이 베이징(北京)발(發)로 보도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보도를 보는 순간 김 기자는 “이럴 수가… 뭔가 착오가 난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을 했다. 김 기자가 ‘착오가 난 것은 아닐까’라고 생각한 것은 황 비서의 망명 개시 시점을 그해 4월께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랬다. 김 기자는 이미 수개월 전부터 황 비서와 김 총사장이 망명을 결행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김 기자가 황장엽, 김덕홍이라는 북한의 두 거물이 남한으로 망명을 꿈꾼다는 소식을 처음 접한 것은 그들이 망명을 결행한 시점으로부터 1년 전인 1996년 2월 무렵이었다. 알려진 대로 두 사람의 망명에 깊숙이 개입한 인물은 중국 등을 오가며 사업을 하던 이연길(李淵吉·2010년 3월 작고) 북한민주화촉진협의회 회장이다. 김 기자도 이 단체의 간부인 중앙상임위원을 맡고 있었다. 이 회장은 8·15 광복 후 북한에서 반소(反蘇) 운동에 가담했다. 6·25전쟁 때는 미(美) 극동군 사령부가 운영하는 대북(對北) 첩보부대인 KLO(Korea Liaison Office·일명 켈로 부대) 고트대(KLO 소속의 한 지대) 대장이었다. 이 회장은 생존 시 북한의 유력 세력과 연계해 김정일(金正日)을 제거 또는 암살한 다음 북한에 개방적인 정권을 수립한 후 남북이 평화적으로 통일을 진행하는 것이 가장 싸고 안전하다는 철학을 가진 인물이었다. 즉 공작적 차원의 통일을 주창했던 것이다. 이 회장이 북한민주화촉진협의회를 발족시킨 것도 이런 자신의 신념을 실천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회장이 김덕홍씨를 처음 만나게 된 것은 1995년 5월경부터였지만 그 당시 김 기자는 이 회장의 김덕홍씨 접촉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황장엽 선생이 보낸 친필서신. 공작적 차원의 통일 방안
지난 96년 7월 중국 베이징에서 만난 황장엽 선생(왼쪽)과 이연길 회장. 소규모 무역업을 하는 이 회장의 사무실은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 있었는데 그 부근 허름한 다방에 조선족 ‘보따리 장사꾼’들이 많이 모였다. 이 회장은 그들과 가깝게 지냈다. 조선족 보따리상들은 이 회장 등이 구해준 의복 등을 중국에 가져가 팔았다. 김 기자도 이 회장 요청에 의해 조선족 보따리상들이 중국에 가져가서 팔 물건들을 구해주곤 했다. 그 물건들 중 많은 양이 북한이 외화벌이를 위해 만든 려광무역연합총회사 김덕홍 사장에게 건네졌다고 한다. 이런 과정에서 이 회장과 김덕홍씨가 서로 안면을 트게 된 것이다. 서로 친숙하게 지내게 되면서 김덕홍씨는 황장엽 비서의 뜻을 이 회장에게 전하게 된다. 이 회장과 황장엽, 김덕홍 두 사람은 북한의 현실 타개를 위해 같은 생각을 갖고 있었음을 알게 되고 의기투합하게 된다. 김정일이 남북한 모두에 불행의 근원이라는 점을 함께 인식하고 다음과 같은 시나리오를 만들게 되는 것이다. 첫째, 김정일을 설득해 해외 망명을 유도하거나, 둘째 민중봉기에 의해 김정일과 그의 추종집단을 타도, 셋째 비밀결사 조직을 통해 김정일 제거, 넷째 이 계획이 실행에 옮겨지지 못할 경우 자신의 한국 망명을 통해 김정일 체제에 결정적 타격을 가한다는 것이었다. 불행하게도 이들의 최종 선택은 그 시나리오 중 마지막 고려사항이었던 황장엽 망명으로 귀결된다. 김덕홍씨와 안면을 트기 전 이 회장은 러시아와 중국 등지를 오가며 러시아 벌목공 등 탈북자를 돕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북한 특수부대 출신들을 훈련시켜 북한에 침투시키는 작업을 극비리에 진행하고 있었다. 그의 지론인 ‘공작적 차원의 통일 방안’을 행동으로 옮기려 했던 것이다. 이 회장은 김덕홍씨와의 접촉을 통해 더 쉽고 더 빠른 방법으로 그의 지론인 ‘공작적 차원의 통일 방안’을 실천할 방법을 찾아냈다. 황 비서의 망명 당시에는 밝힐 수 없었지만 황 비서의 아들 황경모를 그 작업에 참여시킬 수 있게 된 것이다. 황 비서 망명 후 1999년에 비밀리에 처형된 것으로 알려진 황경모씨는 김일성대학 출신으로 현재 북한의 최고실세로 알려진 장성택의 조카사위이기도 했다. 당시 북한군 소속 외화벌이 회사에서 간부로 일하고 있었던 황경모씨는 김정일 정권의 타락상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고 한다. 군부와 김정일을 경호하는 호위총국 내에 두텁게 형성돼 있는 그의 인맥을 활용해 김정일을 제거하려고 했던 것이다. 물론 결과는 실패였다. 황경모씨는 뜻을 함께하는 동지들과 모의해 거사 자금 마련에 나섰다. 그 자금 마련 방법 중의 하나가 북한의 국보급 문화재를 빼내 해외에 내다 파는 것이었다. 국보급 문화재를 빼내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유출 도중 발각되고 만다. 문화재 유출 사건에 조카사위가 연루된 것을 안 장성택이 황경모를 간염을 핑계로 급하게 군병원에 입원시켜 알리바이를 만들어 사건에서 벗어나게 해주었지만 이미 북한 반탐(反探)기관의 촉수는 황경모씨를 겨누고 있었던 것이다. 망명 준비 인사가 황장엽이라니? 김 기자가 이연길 회장이 중국에서 북한 고위층 인사와 접촉 중이라는 사실을 눈치채게 된 때는 황장엽 망명 사건이 벌어지기 1년 전쯤인 1996년 3월께였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이 회장이 접촉하고 있는 인사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이 회장이 북한 고위층 인사와의 만남 자체는 시인했지만 그 인사의 인적사항에 대해서는 굳게 입을 다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해 5월경이었다. 김 기자는 이 회장이 접촉하고 있는 인사가 황장엽이란 사실을 눈치챌 수 있었다. 그 무렵 이 회장이 김 기자에게 황장엽과 관련된 자료를 구해줄 것을 요청했기 때문이었다. 김 기자는 이 회장의 요청을 받고 《조선일보》 자료실과 통일부 자료실 등에서 황장엽과 관련된 자료들을 찾아서 건네주었다. 이 회장의 자료 요청을 받고 김 기자는 “사업을 하는 사람이 황장엽과 관련된 자료는 왜 구해달라는 걸까, 그렇다면 중국에서 접촉하고 있다는 북한 고위인사가 혹시 황장엽?”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김 기자로서는 황장엽이라는 존재가 주는 무게감 때문에 반신반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이 회장은 접촉 자체를 부인하거나 황장엽이라는 이름 자체를 김 기자가 거론하는 것을 거부하기도 했다. 하지만 김 기자는 그 무렵 많은 종교인과 사업가들이 황장엽, 김덕홍 두 사람과 접촉하고 있다는 풍문을 듣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소문이 떠도는 것은 북한 정권 내부를 흔들려는 정보기관의 역공작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 기자가 반신반의하는 사이에도 이 회장과 황장엽-김덕홍 라인의 베이징 접촉은 이어지고 있었다. 훗날 두 사람과의 접촉 사실을 시인하며 이 회장이 김 기자에게 건네준 ‘황장엽-김덕홍 접촉기’에는 그 사실들이 상세하게 실려 있다. 다음은 김 기자가 접촉기를 메모한 취재 기록의 일부다. <96년 3월 12일부터 14일까지 3일간 이연길 회장은 북경에 위치한 21세기 호텔 1905호실에서 김덕홍(60·여광무역연합총회사 총사장. 당 국제부 산하 평화주체재단 이사장이자 황장엽의 심복임)과 만나 여러 대화를 나누었다. 이때 이연길 회장은 훗날을 위해 김덕홍과의 대화 내용 중 중요한 부분을 기억을 더듬어 기록하여 보관하고 있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96년 3월 12일(화) 시간: 21시~22시 김덕홍: “이 회장. 중앙일보 3월 2일자에 이병화라는 국제농업개발원장이 우리(북한) 노동자 3백명을 월 2백30달러 상당의 쌀을 주는 조건으로 내가(김덕홍) 제공의사를 밝혔다고 보도했는데, 나도 모르는 이야기가 남한 신문에 크게 나면 내가 어떻게 되겠소. 또 황장엽 비서 동지는 얼마나 난처해 하는지나 아오? 우리들(황장엽, 김덕홍)을 도와주고 보호해 주는 데 노력해야 하지 않겠소.” 이연길 회장은 김덕홍이 헤어질 때까지 중앙일보 보도 내용이 이 회장의 제보에 의해 보도된 것으로 오해하여 매우 흥분해 있었다고 술회했다. 그래서 이 회장은 “무슨 내용인지 나도 모르는 것이 보도돼 놀랐다고 수차 설득한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이연길 회장이 기록한 김덕홍, 황장엽 등과의 대화록. 이 회장은 대화록 작성 후 김덕홍씨에게 다시 보여주고 확인을 했다고 한다. 北으로 전달된 청와대 비서실장의 발언 김 기자의 취재기록에 이 회장과 황장엽의 직접 대화는 같은 해 7월 3일에 등장한다. 두 사람의 대화는 이날 오전 8시부터 베이징의 한 민가에서 이루어진다. 황 비서가 수행원을 따돌리고 비밀리에 김덕홍씨와 함께 나타난 것이다. <황장엽: “전쟁을 방지해야 합니다. 전쟁을 하면 민족이 수난을 돌이킬 수 없습니다. 전쟁 이외에 어떤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평화를 지켜나가야 합니다. 이 시기에 전쟁을 방지하려면 남한에서 식량을 원조해야 합니다. 북에 식량을 원조한다 해서 북이 부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호구지책에 지나지 않습니다. 원조 방법도 정부 차원이 아닌, 사회단체나 종교단체 명의로 해야 합니다. 그래야 이 사람들(북한)이 받습니다. 딱한 일입니다. 내가 학자적 양심을 걸고 이야기합니다. 북의 사회는 남한보다 한 50년 뒤떨어져 있습니다. 이런데다 식량원조한다고 해서 특별히 달라질 것이 없습니다. 식량원조하면 아무리 비밀로 해봐야 백성들이 다 알게 됩니다. 이것만이 전쟁을 방지할 수 있는 길입니다.” (이때 이 회장은 뭔가 말을 꺼내려고 했는데, 황장엽은 이 회장이 말할 틈새를 주지 않고 계속했다고 한다.) 황장엽: “각별히 유념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쪽(남한) 권력 깊숙한 곳에 이곳(북한) 사람 박혀 있습니다(북한 첩자가 한국 권력층에 침투했다는 뜻이다). 특별히 경계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를 보호해 주셔야 합니다. 나를 만난다는 것을 극비로 해주셔야 합니다. 여러 가지 문제는 이 사람(김덕홍) 얘기를 들으시면 되고, 앞으로 의논해서 협조 주실 일이 있으면 잘 부탁드립니다. 나를 따라온 사람들이 있어서 여유있는 시간을 못 가지니 양해해 주십시오.(下略)”> 다음 날인 7월 4일 아침 6시10분에는 베이징 21세기 호텔 커피숍에서 이 회장과 김덕홍이 만나 대화를 나눈다. 김 기자의 취재 메모다. <이날 김덕홍은 전날 황장엽의 발언, 즉 “남한 권력층에 북한 첩자가 침투해 있다”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청와대 김광일(金光一) 비서실장과 관련된 비밀정보를 이 회장에게 귀띔했다. 김덕홍: “지난 6월 15일 황장엽 비서 동지가 출근길에 평양에 있는 내 사무실에 들러 봉투에 든 서류를 꺼내보라고 하기에 내가 꺼내보았다. 그 내용을 본즉 남한의 청와대 비서실장 김광일이 제보자와 나눈 대화록이었다. 소상한 기억은 없으나 김광일이가 한 말이 북한에 보고된 것이었는데 대충 기억나는 내용은 ‘(김영삼) 대통령이 큰일 났다. 이대로 가다간 박정희와 같은 운명이 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 빨리 손을 써야겠다’고 불평을 털어놓는 대화록이었다. 황장엽 동지께서는 ‘이 문건은 극비문서로 분류돼 당 비서에게만 배포된 서류’라고 했다. 김덕홍은 “김광일과의 대화자가 바로 북한에 이런 내용을 제보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이 정보를 입수한 우리 정보기관에서는 청와대 내에도 불순세력이 침투한 것이 아닌가 하여 김광일 비서실장 주변을 조사했고, 김광일 비서실장도 이 문제로 조사를 받는 등 곤욕을 치른 것으로 알려졌다. 이 과정에서 김광일 실장은 자기 친구이자 재일교포인 김○○(정확한 이름은 밝혀지지 않음)이 한국에 왔을 때 그와 만나 북한에 보고된 내용과 비슷한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고 증언했다.(中略)> 이연길 회장이 황장엽에게 보낸 미공개 서신
황장엽(왼쪽 두 번째) 선생과 김덕홍(오른쪽 두 번째)씨가 필리핀을 거쳐 서울에 도착한 후인 1997년 7월 10일 안기부 청사에서 기자회견을 마치고 황 선생의 평양상고 동창인 강기석씨와 1994년 귀순한 여만철씨의 장녀 금주 양으로부터 각각 건네받은 꽃다발을 흔들어 보이고 있다.
이어지는 이 회장이 김덕홍씨와의 대화를 기록한 김 기자의 취재 메모다. <이날 김은 북한의 붕괴를 촉진하기 위한 방법, 원자탄 5개 보유, 만약의 경우 자살하겠다는 결심 등을 비장하게 밝혔다고 한다. 이 회장은 이날 김덕홍의 발언 중 기억에 남는 것을 다음과 같이 메모해 놓았다. —공화국 붕괴 촉진책: “중국과 북한을 이간시켜 중국이 공화국을 불신하게 만들어 경제원조를 중단하도록 해야 한다. 일본이 전후배상이나 어떤 명목의 배상을 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일본의 배상금이 북한에 들어가면 김정일 정권이 유지될 것이다. 또 미국이 서둘러 경제원조를 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 —원자탄 보유 문제: “북한이 원자탄을 5개 가지고 있다고 알고 있다. 원자탄이 문제가 아니고 전방에 배치된 장거리포가 실제로 위력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 —김덕홍의 자살 결심: “만약의 경우 북한에서 나에게 위해를 가할 경우 죽을 결심이니 자살용 극약을 구해달라. 우리의 이런 제보는 민족과 조국을 위한 결단이지 간첩행위가 아니다. 북의 현실은 작년 수해를 빙자한 것일 뿐 경제난은 10년 전부터 누적된 것이다. 실제로 굶어 죽는 사람이 연간 수천 명에 이른다. 굶어서 합병증으로 죽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 회장은 김덕홍의 굳은 결심과 의지를 이해하고 우리 정보기관을 통해 입에 넣고 깨물면 터지는 자살용 극약 앰풀(황장엽에게 전달됨)과 자살용 만년필 독침(김덕홍이 소지함)을 구해서 건네주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가 탄로날 경우 이 독침과 극약 앰풀로 자살할 결심까지 하고 이 회장과 접촉했던 것이다.> 이연길 회장은 김덕홍씨의 부탁을 받고 자살용 독약을 보내주었지만 황장엽 비서에게 서신을 보내 그 독약을 사용하지 말 것을 권유한다. 망명 당시에는 미공개됐던 이 회장이 황 비서에게 보낸 서신을 소개한다. 작성 일자는 그해 11월 23일로 돼 있다. <기구한 역사 앞에서 엄청난 비극을 바라보며 고뇌하는 성자는 오늘따라 왜 이렇게 외로워 보이십니까. 사도들은 의로운 성자를 돕고 비극사회에서 광명천지로의 길잡이로 몸을 던졌습니다. 성자의 의지는 반드시 동반자의 협력으로 유종의 미를 거둘 것입니다. 언젠가는 몸은 가도 성자와 사도들의 정신은 영원히 역사 속에서 빛을 밝히고 살아남을 것입니다. 저는 성자를 위해 비극을 막기 위해 모든 수단을 다하여 최선의 방법을 연구하고 행동할 것입니다. 그리고 평화사상을 왜곡되지 않은 진정한 성자사상을 되찾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지난날 뱃사람들은 별을 보고 목적지까지 항해를 했습니다. 이 별이 잘못되거나 유성이 되어 없어지면 목적지까지 도달하는 데 상당한 고난을 겪게 될 것입니다. 성자는 바로 이 별입니다. 가지고 계신 약은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下略)> 마침내 황장엽 망명 준비 사실을 털어놓다 이 회장이 자살용 독약을 정보기관을 통해 구해준 데서 알 수 있듯 안기부(현 국정원)는 그해 7월 무렵부터 이 회장의 행보를 탐지하고 있었다. 이 회장으로서도 한 북한 거물 인사의 망명과 그 일에 소요되는 막대한 비용 등을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안기부의 도움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이 회장을 통해 황장엽 측과 접촉을 하던 안기부는 9월에 들어 이 회장을 접촉 라인에서 배제시키고 직접 접촉을 시도했다. 하지만 직접 접촉에서 상호 의사전달에 문제가 발생하자 다시 이 회장을 앞세워 접촉하기 시작했다. 그해 10월 이 회장은 큰 고민에 빠져 있었다. 이 회장이 김 기자에게 직접적으로 황장엽 망명과 관련된 사실들을 털어놓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이 회장은 거물급 인사의 망명에 대한 중압감 때문인지 김 기자에게 “내가 뭘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가”하고 조언을 구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김 기자는 이 회장에게 황장엽 비서에게 남침용 땅굴, 북한이 만드는 위조지폐와 마약의 유통 경로, 6·25 당시 끌려간 미군 포로 문제 등 몇 가지 정보를 알아내 달라는 부탁을 했다. 얼마 후 김덕홍씨로부터 답변이 왔는데 북한 땅굴 문제는 군 소관이기 때문에 알 수 없다, 국군과 미군 포로 생존 여부 문제와 마약 루트는 알아보겠다는 답이었다. 1996년 11월 10일 김덕홍씨는 이 회장에게 북한에서 나올 때 받은 황장엽 비서의 메시지를 전해준다. 수첩 용지에 급하게 갈겨쓴 메시지였는데 망명 당시 전체 내용이 공개됐지만 한 줄이 빠진 채 공개됐다. 그 빠진 내용이 “광주학생문제도 그들을 뒤에서 사주한 북의 공명주의자들이 책임전가한 일이다”라는 대목이다. 이 메시지에 드러난 문맥만으로는 ‘광주학생문제’가 5·18 광주 사건을 말하는 것인지 아닌지 분명하지 않다. 이 문맥이 5·18 광주를 거론한 것이라는 사실은 황장엽, 김덕홍 두 사람의 망명 후 16개월 만에 이루어진 두 사람과 김용삼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밝혀진다. 두 사람은 《월간조선》 98년 7월호와 인터뷰를 갖는다. 이때 인터뷰를 담당한 사람도 김 기자였다. 그의 술회다. “그때 두 사람과 인터뷰 중 김덕홍씨가 ‘여기 남한에 와서 꼭 하고 싶은 얘기를 해야 되겠다’면서 ‘조선노동당 대남 부서가 있는데 그 부서에 소속되어 있던 상당수 사람들이 광주민주화운동이 끝난 후에 일제히 훈장을 받았다. 내 친구들이 그 부서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그 친구들도 광주민주화운동 후에 훈장을 탔다고 축하 술을 함께 마시면서 그들에게 직접 들은 것이다’라는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그 자리에 함께 있던 황장엽 선생이 김덕홍씨의 말을 가로막으면서 ‘동생! 여기서 그런 얘기를 하면 어떻게 해’하면서 말리자 김덕홍씨는 ‘형님, 우리가 이런 얘기하러 여기(남한) 온 거 아닙니까. 왜 저를 말리십니까. 형님도 다 아시면서 왜 얘기를 못하게 하시는 겁니까’하면서 실랑이를 벌였죠.” 김덕홍씨가 5·18 광주와 관련해 발언한 그 부분은 결국 기사에서 빠졌다. 두 사람과 김 기자의 인터뷰는 경호를 이유로 참석한 국정원 직원들이 바로 칸막이 옆에서 다 듣고 있었다고 한다. 인터뷰가 끝난 후 “광주 부분은 대단히 민감한 사안이니 기사화되면 정말 큰일 난다”면서 국정원이 강력하게 보도 자제 협조 요청을 해오는 바람에 기사 작성 과정에서 빠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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