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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의 驚異 노르만 紀行(1)

淸山에 2014. 9. 2. 15:57

 


 




세계사의 驚異 노르만 紀行(1)

7000명이 200만을 정복하다!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세계사의 경이' 노르만 紀行


바이킹 戰士들은 프랑스의 노르망디에 정착, 문명화된 이후 잉글랜드와 남부 이탈리아 및 시실리를 정복, 유럽 최고의 번영을 이루면서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축붐을 일으켜 중세 유럽을 깨운다. 해적질을 하던 야만인이 文明 건설의 주인공이 된 수수께끼를 찾아 노르망디, 南이탈리아, 시실리를 가다.

 

趙甲濟(조갑제닷컴 대표)

 

 


기사본문 이미지

                                                              몽셍미셀 수도원과 공중 정원
 







바이킹에서 노르만으로


2010년 봄 바이킹의 고향인 스칸디나비아를 여행하고 온 필자는 어떤 모임에서 이탈리아 주재 한국 대사를 지낸 분과 옆 자리에 앉게 되었다. 내가 “시실리도 바이킹과 깊은 관련이 있더군요”라고 아는 체를 했다. 그는 내 손을 잡으면서 “그걸 아는 한국인을 처음 본다”고 했다. 다른 사람들은 잘 모르는 흥미로운 비밀을 공유한 사이처럼 친밀한 대화가 오갔다. 그 뒤 필자는 바이킹과 노르만의 역사적 발자취를 찾아서 나폴리, 시실리, 노르망디를 한 달 정도 취재하였다. 문명파괴자가 위대한 문명건설자로 돌변한 과정은 세계사의 가장 경이로운 이야기꺼리일 것이다. 2010년 월간조선에 두 차례에 걸쳐서 소개한 기사는 바이킹을 중심으로 한 것이었지만 지금부터는 프랑스의 노르망디에 정착한 노르만 戰士(전사)들의 ‘두 나라 이야기’가 될 것이다.


서기 793년 6월 바이킹 해적이 잉글랜드의 동해안 섬을 습격, 수도원을 파괴하였다. 이것이 그 뒤 약 300년 간 이어지는 바이킹과 노르만(프랑스 노르망디에 정착한 바이킹) 세력의 대폭발, 그 序曲(서곡)이었다. 지금의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에 살던 바이킹은 유럽 全域(전역)을 공포에 떨게 하였다. 날씬하고 빠른 배로 해안을 덮치고, 강을 따라 내륙으로 들어가 약탈을 자행하였다. 이들은 해적이면서 동시에 貿易船團(무역선단)이기도 했다. 바이킹과 노르만은 선박을 매개로 한 기동성으로 놀라운 활동범위를 기록했다. 잉글랜드,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아이슬랜드, 그린랜드, 캐나다, 볼가 강, 키에프, 콘스탄티노플,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시실리, 北아프리카, 중동이 활동무대였다. 


바이킹과 노르만은 여러 나라를 정복하고, 또 나라를 세웠다.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 아이슬랜드, 러시아 公國(공국. 키에프), 노르만 공국, 잉글랜드, 시실리 왕국, 안티옥 공국 등.


바이킹의 야성을 문명적으로 진화시켜 그 힘으로 세계사의 흐름을 바꾼 곳은 프랑스 북쪽 노르망디 대평원이다. 11세기, 노르망디 공국의 윌리엄 공이 정복하여 역사의 무대에 등장시킨 새로운 모습의 잉글랜드와, 같은 시기에 노르망디의 오트빌 家門(가문) 戰士(전사)들이 이탈리아 남부 정복 사업을 통하여 세운 시실리 왕국은 12세기엔 유럽에서 가장 번영하는 나라가 되었다. 바이킹과 노르만이 세운 나라들 중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 영국, 아이슬랜드는 지금도 늘 랭킹 20위 안에 드는 세계의 一流(일류) 국가로 분류된다. ‘바다의 戰士(전사) 집단’ 바이킹은 一流(일류)국가 제조기인 셈인데, 대제국 제조창인 ‘草原(초원)의 戰士(전사) 집단’ 몽골-투르크 기마민족과 유사점이 많다.

 


매력 있는 戰士

 

노르만족의 성격에 대하여 11세기 베네딕트 수도사이자 역사학자인 제오프리 말라테라는 이런 기록을 남겼다. 


<꾀가 많고, 정복과 통치를 위하여는 자신들의 전통을 버린다. 모든 것을 모방하고, 상반된 성격인, 베풀기와 탐욕을 겸한다. 두목은 좋은 평판을 얻기 위하여 많이 베푼다. 노르만족은 아부에 능하고, 어릴 때부터 웅변가들이며, 법으로 엄격히 다스리지 않으면 통제가 잘 안 된다. 말과 무기, 사냥을 좋아하고, 추위나 배고픔을 잘 견딘다.>


노르만족은 적응력이 뛰어났다. 전통이나 관습의 구속을 받지 않고 필요에 따라 행동하였다. 어느 지역을 정복하면 재주 있는 현지인들을 채용하고, 좋은 여자를 골라 결혼도 했다. 노르만 지도자들은, 글을 읽을 줄 모른다고 열등감을 갖지 않았으며 교회의 書記(서기)를 보좌역으로 채용하여 文盲(문맹)의 문제를 해결하였다는 것이다(정복왕 윌리엄도 문맹자였다).


비잔틴(동로마) 제국의 알렉시오스 1세의 딸 안나 콤네네는 소녀 시절에 본 노르만 왕자 보헤몽(안티옥 공국의 건설자)에 대하여 이런 기록을 남겼다.  


<로마 땅에선 볼 수 없는 인물이었다. 그는 가장 키가 큰 비잔틴 사람보다도 한 단위가 더 컸다. 허리는 가늘고 어깨는 넓었으며 깊은 가슴과 강력한 팔을 가졌다. 너무 야위지도, 너무 살이 찌지도 않았다. 균형 있는 몸이었다. 그의 몸은 희고, 얼굴은 붉은 점이 있었다. 머리카락은 황색이었으나 다른 야만인처럼 허리까지 내려오지 않고 귀까지만 오도록 잘랐다. 수염은 면도칼로 잘라 분필보다 더 부드럽게 보였다. 그의 푸른 눈은 높은 품격과 기상을 보여주었다. 매력적인 사람이었지만 무섭기도 하였다. 용기와 열정이 몸과 마음에 녹아 있었지만 전쟁을 좋아하는 기질이었다. 그는 위트가 있고 재주가 많아 곤란한 상황에서 늘 벗어나곤 하였다. 대화를 할 때 그는 정보가 많아 보였고, 그의 답은 반박할 수가 없었다. 그런 체격과 그런 성격은, 황제 이외엔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정도였다.> 


바이킹과 노르만족을 묘사할 때 자주 등장하는 게 큰 체격과 용기, 명예욕, 그리고 실용적 정신과 적응력이다. 고고학자들의 遺骨(유골) 조사에 따르면 바이킹 남자의 평균 키는 약 174, 여자는 158cm였다고 한다. 중세 유럽인들 중 가장 큰 체격이었다.

 


노르망디 紀行

 

노르망디는 북쪽 사람들(바이킹을 지칭)이 사는 땅이란 뜻이다. 덴마크 출신들이 중심을 이룬 일단의 바이킹은 서기 800년부터 英佛(영불) 도버 해협에 면한 프랑스 해안 지대를 공격하다가 세느강을 따라 올라가면서 流域(유역) 지방을 황폐화시키더니 885년엔 파리를 포위한 적도 있었다. 프랑스 왕은 견디다 못해 서기 911년에 노르망디를 바이킹에게 떼어주었다. 프랑스 왕에게 형식적으로만 臣從(신종)하는 노르망디 公國이 탄생한 것이다.  


이곳으로 몰려든 바이킹은 곧 기독교로 개종하고 프랑스 어를 쓰게 되었다. 유럽문명권으로 편입된 것이다. 그럼에도 바이킹의 정신과 자질을 간직하였다. 바이킹의 野性(야성)과 프랑스적 문명이 교배하여 雜種(잡종)강세의 노르만 戰士(전사) 집단이 태어난 것이다. 노르망디 지역은 지금도 그렇지만 草地(초지)가 넓어 말을 키우는 데 유리하였다. 배를 잘 모는 바이킹은 좋은 말들을 길러내 유럽 최강의 기마군단을 편성하는 한편 활 부대를 양성했다.  


노르망디는 1944년 6월6일의 상륙작전으로 세계에 그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1066년 노르망디公 윌리엄이 이끄는 노르만 군대는 노르망디 해안을 출발, 잉글랜드를 점령했다. 세계사를 바꾼 두 상륙작전의 무대인 노르망디는 면적이 3만672평방킬로미터, 인구는 약 345만 명이다. 野山(야산)조차 보이지 않는 대평원이다. 英佛(영불)해협으로 들어가는 세느강 流域(유역)이라 농토와 목장이 많다. 노르망디는 문화와 예술과 영화를 통하여도 많이 알려져 있다.
 
몽셍미셀 요새, ‘셀부르의 우산’이란 영화의 무대가 된 셀부르 항구,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 나오는 오마하 비치, 유명 배우들이 총출동한 영화 '더 롱기스트 데이', ‘남과 여’란 영화의 무대인 해안도시 도빌, 그리고 소설가 모파상과 프로벨, 인상파의 원조 클라우드 모네, ‘미국의 민주주의’를 쓴 알렉스 드 토크빌 등이 이곳 출신이다.  나의 노르망디 기행은 파리의 마르모탕 모네 미술관에서 시작되었다. 이 미술관은 1932년에 폴 마르모탕이란 역사연구가가 자신의 저택과 르네상스 시대의 미술품을 기증하여 설립되었다. 1971년에는 모네의 아들이 아버지의 작품 65점을 미술관에 기증하였다. 1950년엔 한 부자 여성이 아버지의 수집품을 기증하였는데 모네의 ‘해뜨는 印象’(Impression-Sunrise)이 포함되었다.

 


인상파 화가들이 좋아한 풍경


63x48cm의 캔버스에 그려진 ‘해뜨는 印象(인상)’ 앞의 의자에 앉아 보았다. ‘해뜨는 印象’은 세계 미술사의 흐름을 바꾼 그림이다. 모네는 이 그림을 노르망디 해안의 르아브르 항구(세느강이 노르망디 평원을 거쳐서 도버 해협으로 들어가는 하구)에서 창문을 통하여 그렸다. 1872년이었다. 사실적 묘사가 아니라 모네가 받은 日出(일출) 항구의 풍경 인상을 그렸다. 햇볕과 이미지를 重視(중시)하니 자세한 묘사는 생략되었다. 모네가 이 작품을 전시회에 출품할 때는 제목을 붙이지 않았다. 주최 측에서 제목을 요구하여 ‘‘해뜨는 印象’이라고 作名하였다. 제1회 인상파 전시회가 1874년에 열렸다. 이 전시회를 본 한 평론가는 혹평을 하면서 모네의 그림 제목을 따서 ‘인상파들의 전시회’라고 썼다. 이때부터 ‘인상파’라는 말이 통용된다.   인상파의 그림을, 평론가들은 스케치 수준의 미완성 작품, '벽보보다 나을 것이 없다'는 식으로 비판하였지만, 그림에 대한 새로운 관점은 곧 야수파, 입체파 등 20세기의 새로운 畵風(화풍)으로 발전해갔다.

모네의 '해뜨는 인상'은 1985년에 이곳 마르모탕 미술관에서 도난당하였다가 5년 뒤에 회수되었고 이듬해부터 다시 전시되고 있다. 모네는 노르망디의 지베르니에서 살면서 노르망디 풍경을 많이 그렸다. 르아브르 항구나 해안 풍경뿐 아니라 노르망디 公國의 수도였던 루앙의 대성당을 여러 시각에서, 여러 시점에서 그린 것, 지베르니의 저택 정원에 있는 睡蓮(수련)을 그린 것 등이다. 다른 인상파 화가들도 노르망디의 작은 항구와 마을로 몰려갔다. 이렇게 하여 노르망디의 풍경은 예술가들의 도움으로 세계인들에게 친숙한 존재가 되었다. 이런 그림을 보고 노르망디를 찾는 이들도 많다. 그래서 위대한 예술가는 위대한 생산자이다.


 


강이 흐르는 대평원


프랑스는 西유럽에서 가장 큰 나라이다. 본토는 54만 7000평방킬로미터이고 남태평양 등에 있는 영토까지 포함하면 67만 4843평방킬로미터이다. 농토가 비옥하여 해외로 나가는 이민자가 많지 않다. 영토가 세계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프랑스는 배타적 經濟水域(경제수역) 면적이 1102만 5000평방킬로미터로서 근소한 차이로 미국에 이어 2등이다. 인구는 6535만 명인데 최근 늘고 있다. 프랑스는 GDP가 세계 5위이고 富(부)의 축적을 의미하는 家口(가구)의 총자산으로 치면 세계 4등이다. 국방예산은 세계에서 5위이고 병력규모는 유럽연합에서 1등이다. 핵폭탄을 300개 보유한 군사 강국이고, 외교관 숫자가 미국에 이어 두 번째, 保健 서비스의 질은 세계1등으로 평가된다(WHO).

노르만 戰士(전사)들의 경쟁력은, 체력과 정신력이 뛰어난 바이킹 민족이 비옥한 노르망디의 자연과 프랑스의 풍성한 문화와 만나서 생긴 것이다. 노르망디를 비옥하게 만드는 원천은 세느강이다. 한국인들은 파리에 가서 그 유명한 세느강을 보고는 강폭이 좁은 데 놀란다. 한강보다 작다고 誤解(오해)한다. 세느강은 부르고뉴 지방의 야산에서 發源(발원), 르아브르-옹페르 항구 사이 하구를 통하여 바다(도버 해협)로 들어간다.

길이는 776km이고 流域면적은 7만 8650평방킬로미터이다. 漢江(한강)은 길이가 514km이고 流域(유역)면적은 3만 4402평방킬로미터. 세느강은 年中(연중) 流量(유량)의 차이가 거의 없다. 좁지만 깊다. 河口(하구)에서 120km 떨어진 루앙까지 해양선이 올라오고, 하구에서 560km지점까지도 배가 다닌다. 파리를 관통하는 세느강엔 37개의 다리가 걸려 있다. 河口(하구)엔 한때 세계에서 가장 길었던 斜張橋(사장교)인 노르망디 大橋가 있다.


노르만의 품격, 몽셍미셀


강이 흐르는 노르망디 대평원을 달리면 도버 해협. 바다의 냄새가 밀려오는 저 멀리 섬 위에 교회 같기도 하고 요새 같기도 한 몽셍미셀(聖미셀의 山)이 지평선에서 나타났다. 프랑스에서 에펠 탑 다음으로 많이 소개되는 사진이다. 2등변 삼각형의 몽셍미셀은 海面(해면)에서 교회 첨탑까지 높이가 150m이다. 아래 79m 부분의 산비탈엔 주택과 가게가 붙어 있고 그 위 약70m는 교회, 수도원, 정원, 성벽 등으로 구성된 복합건물이다. 이 건물의 양식은 山頂(산정)에 지은 수도원이 로마네스크 양식이고 그 뒤 고딕 식 수도원이 더해졌으므로 로마네스크 식으로 분류된다.


몽셍미셀은 노르만 公國의 후원으로 세워졌다. 서기 1017~1144년 사이 건축된 로마네스크 식 수도원은, 이탈리아 건축가 윌리엄 드 볼피아노가 노르만 공국 리처드 2세의 초청을 받아 설계한 것이다. 노르만의 윌리엄 공이 잉글랜드로 쳐들어간 다음 해인 1067년 몽셍미셀 수도원은 그의 정복 사업을 지지하게 되었다. 윌리엄 공은 이에 대한 보답으로 잉글랜드의 작은 섬을 선물로 주고 여기에 몽셍미셀 수도원의 새끼 수도원을 지어주었다.


몽셍미셀은 대평원이 끝나는 해안에서 약600m 떨어진 섬이다. 潮汐(조석) 干滿(간만)의 차이가 10m를 넘는다. 드러난 모래 바닥을 밟으면서 걸어 들어갈 수도 있으나 반드시 전문 가이드의 안내를 받아야 한다. 관광객들은 주차장에서 전용 버스로 갈아탄 뒤 내려서 육교를 통해서 들어간다.


몽셍미셀은 요새 성격이 강하다. 15세기 英佛(영불) 100년 전쟁 중 영국군의 공격을 견뎌낼 수 있었던 것도 바다와 격해 있는데다가 절벽과 성벽으로 둘러싸여 접근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잔 다르크는 몽셍미셀의 영웅적 방어에 크게 鼓舞(고무)되었다고 한다. 나중엔 감옥으로도 사용되었다.


1070년대에 만들어진 유명한 ‘베이유 刺繡(자수)’ 그림에도 몽셍미셀이 나온다. 윌리엄 공의 인질이 되어 있던 미래의 잉글랜드 왕 해롤드(당시는 영주)가 바닷가 모래가 꺼지면서 빨려드는 두 노르만 병사를 구하는 장면이다.


연간 300만 명이 찾는 몽셍미셀은 노르만의 군사적, 종교적, 예술적 실력을 집약한 것이다. 신앙과 생존본능과 美的(미적) 감각이 한 건물에 집중된 셈이다. 섬과 교회 건물을 다 합치면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같은 크기이다. 꼭대기 수도원에 붙어 있는 옥상 정원은 꼭 하늘에 매달려 있는 것 같다. 수도원에서 까마득한 절벽 아래를 내려다 보면 몽셍미셀은 신이 인간을 부려서 만든 건물이란 실감이 온다.




 

윌리엄 정복왕이 떠난 항구에서

 

노르망디의 디브 수 메르 항구는 1066년 9월, 노르만 공국의 윌리엄 공이 이끄는, 약 7000 명의 프랑스 어를 쓰는 기사들과 약 2000 마리의 말이 약 700 척의 배를 타고 출항한 곳이다. 필자는 노르망디를 여행하면서 해안 휴양지 도빌에서 하룻밤을 자고 난 뒤 베이유로 가는 길에 이 항구를 찾았다. 디브 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평온한 모습의 작은 항구엔 세계사의 결정적 순간, 그 흔적은 없었다. 주민에게 이곳이 그곳이냐고 물었더니 '아니 외국인이 어떻게 그런 것까지 아느냐'는 표정이었다.


1066년 윌리엄 공은 해롤드 왕이 즉위한 직후 잉글랜드 원정을 결심한다. 자신이 王位(왕위) 계승권이 있다면서 교황청에 로비하여 지원을 약속 받고 기사들을 모집한다. 자신의 휘하 기사들뿐 아니라 이웃한 브리타뉴, 프랑다스를 넘어 全유럽의 모험가들이 몰려 왔다. 모험심이 강한 유럽의 전사들에게 잉글랜드 원정은 일종의 벤처 투자 사업이었다. 윌리엄 공은 원정에 참여하는 기사들에게 성공하면 잉글랜드의 땅을 나눠주겠다고 약속했다.


 원정군을 편성, 유지하는 데는 대단한 軍需(군수)지원이 있어야 했다. 마크 모리스라는 학자의 계산에 의하면 디브 수 메르 항구에 집결한 7000명의 병력과 2000 마리의 말을 먹이는 데는 하루 28t의 밀가루와 하루 3만 갤런의 물이 필요하였다고 한다. 이들에게 잠자리를 마련하는 것도 대단한 일이었다. 중세엔 상비군을 최소한으로 유지하다가 필요할 때 대규모 병력을 모집하는 식으로 하지 않으면 재정적으로 감당할 수가 없었다. 


8월 초 노르만 군은 출항 준비를 끝냈지만, 날씨와 풍향이 맞지 않아 한 달 정도 기다려야 했다. 윌리엄 공은 속이 타 들어갔을 것이다. 700척의 대함대가 디브 항을 떠난 것은 9월12, 13일 중 하루로 추정된다. 바다는 거칠었다. 함대는 잉글랜드로 곧 바로 향하지 못하고 노르망디 연안을 따라 동쪽으로 약160km를 항해, 생벨러리 항에 도착했다. 여기서 다시 보름 정도 날씨의 好轉(호전)을 기다리다가 9월27일 저녁 잉글랜드를 향해 출항하였다.


노르만 군의 잉글랜드 점령 과정은 중세에서 가장 정확하게 기록된 사건이다. 베이유 자수에선 시각적으로 기록했고 여러 권의 從軍記(종군기)가 있어 생생하게 알 수 있다. 윌리엄 공이 탄 旗艦(기함)은 너무 빨리 나갔다. 28일 아침 잉글랜드 해안으로 다가가는 데도 後續 (후속)함대가 보이지 않았다. 윌리엄 공은 그래도 태연하게 아침 식사를 맛있게 했다고 전한다. 곧 뒤따르던 함대가 나타나, 페븐시에 상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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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망디 대평원이 바다와 맞닿는 곳에 몽셍미셀이 나타난다.



영국의 운명을 하루에 결정한 해스팅스 전투

 

윌리엄 공은 배에서 바닷가에 내릴 때, 다리를 헛놓아 엎어졌다. 불길한 징조였다. 그는 두 팔을 뻗으면서 외쳤다고 한다. '내가 잉글랜드를 잡았다.'


잉글랜드 왕 해롤드는 그때 북쪽 요크셔 지방에 있었다. 윌리엄 공의 상륙 사흘 전 이곳에서 決戰(결전)이 있었다. 노르웨이의 바이킹 왕이 수백 척의 원정군을 데리고, 동해안에 상륙했다. 그 또한 잉글랜드 왕좌를 노렸다. 남쪽에서 노르만 군의 상륙을 기다리던 해롤드 왕은 군대를 급히 북상시켜 스탬포드 다리에서 노르웨이 침략군을 만났다.


‘스탬포드 다리의 전투’로 알려진 이 싸움에서 노르웨이 바이킹 군대는 전멸하고 왕도 죽었다. 대승을 거둔 해롤드 왕에게 노르만 군의 상륙 소식이 전해진 것은 10월1일 전후였다. 해롤드 왕은 강행군을 하면서 남하하기 시작하였다.


10월14일 아침 해롤드 왕이 지휘하는 앵글로-색슨 군대와 윌리엄 공이 지휘하는 노르만 군대는 해스팅스에서 마주 섰다.  해롤드 왕이 언덕의 능선을 차지했다. 노르만 군은 적을 올려 다 보는 위치여서 불리하였다. 특히 노르만 군의 자랑인 기병 돌격이 어렵게 되었다.


노르만 군은 3열로 섰다. 첫째 列은 弓手(궁수), 둘째 열은 중무장 보병, 셋째 열은 기병. 윌리엄 공은 이 기병 열의 한복판에서 지휘하였다. 잉글랜드의 기병은 말에서 내려 보병처럼 싸웠다. 이날 잉글랜드 군은 활 부대를 동원하지 않았다. 그들은 방패를 이어 붙여 방벽을 만들고 수비 자세를 취하였다.


노르만 군은 먼저 활로 집중 사격을 시작했다. 잉글랜드 군은 방패로 화살의 폭우를 피했으나 사상자가 났다. 이어서 노르만의 중보병이 앞으로 나와 잉글랜드 군을 덮쳤다. 방패와 방패, 칼과 칼이 부딪치는 소리, 함성, 비명이 戰場(전장)을 진동했다. 잉글랜드 군은 물러나지 않았다. 창과 도끼, 돌을 매단 몽둥이를 던지며 저항하였다. 노르만은, 중보병의 공격이 효과를 보지 못하자 기병을 보냈다. 기병돌격은 언덕을 향하여 올라가는 형국이라 큰 충격을 주지 못하였다.



 




7000명의 戰士가 200만을 손에 넣다

 

일진일퇴하는 백병전이 수 시간 계속되었으나 승부는 나지 않았다. 오후에 들어 공격하던 노르만 군의 左翼(좌익)이 철통같은 잉글랜드 군의 수비에 밀려 후퇴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윌리엄 공이 죽었다는 소문이 퍼지고, 노르만 군의 좌익이 무너져 달아나기 시작하였다. 그동안 수비만 하던 잉글랜드 군이 추격에 나섰다. 이 위기를 逆轉(역전)시킨 것은 윌리엄 공이었다. 그는 자신의 건재함을 보여준 다음 후퇴하는 노르만 군을 수습, 반격에 나섰다. 잉글랜드 군은 유리한 高地(고지)를 버리고 추격에 나섰다가 노르만의 반격에 걸려 많은 전사자를 내고 돌아갔다.


노르만 기병 전술은 몽골군과 닮은 점이 있었다. 전투 중 달아나는 시늉을 한다. 적은 추격하느라고 戰列(전열)이 흩어진다. 이때를 틈타 재집결, 반격을 감행, 흩어진 적군을 섬멸한다는 공식이었다.


윌리엄 공은 해스팅스 전투 막판에 이 기만전술을 썼다. 이런 전술은 고도로 훈련된 부대만 할 수 있다. 윌리엄의 직할 부대가 유인에 동원되었다. 접전중 갑자기 등을 돌려 아래 쪽으로 달아나기 시작하였다. 잉글랜드 군은 수비전만 하다가 비로소 찬스를 잡았다고 판단했다. 그들은 수비대열에서 이탈, 달아나는 노르만 군을 좇기 시작하였다. 수비하기 좋은 고지를 버리고 흩어지면서 내려왔다. 달아나던 노르만 보병과 기병이 집결하더니 갑자기 유턴했다. 반격이 시작되었다. 잉글랜드 군이 몰리기 시작하였다. 이 순간 해롤드 왕이 전사하였다. 베이유 자수의 그림에 따르면 그는 화살을 눈에 맞고 죽었다. 왕이 죽으면 졸병들은 버틸 수가 없다. 잉글랜드 군은 무너졌다.


쌍방의 병력은 각 7000명 쯤 되었을 것이다. 그날 반 정도는 죽거나 다쳤을 것이다. 특히 잉글랜드 군의  피해가 컸다. 잉글랜드 지배층을 대표한 기사단은 이 전투와 이어진 여러 전투에서 궤멸되었다. 단 한 번의 전투로 국가의 지배층이 전면적으로 교체되어 버린 희귀한 사례이다. 윌리엄 공은 1066년 런던으로 입성, 영국 왕으로 즉위했다. 잉글랜드는 프랑스 어를 하는 노르만 戰士들의 지배 하로 들어간 것이다. 7000명의 戰士(전사)들이 전투에서 이기자, 200만(당시 영국 인구)의 잉글랜드 인과 국토, 그리고 한 문명이 수중으로 들어온 셈이다. 세계사에서 보기 힘든 성공적 벤처 투자였다.

 

 

‘베이유 刺繡’ 앞에서

 

프랑스 노르망디의 베이유를 찾았다. 이 古都(고도)의 옛 교수신학교 건물 내 박물관엔 '베이유 刺繡(자수)'라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있다. 1066년 노르망디의 윌리엄公이 잉글랜드에 상륙, 해스팅스 결전에서 해롤드 왕의 군대를 무찌르는 이야기를 담은 자수 그림이다. 50여개 장면의 사실적 그림인데, 길이 약 70m, 너비 약 50cm이다. 유리 안에 넣어 암실에서 전시하고 있었다.


이 보물에 대한 연구는 방대한데, 지금까지 확정된 사실은, 베이유 성당의 再建式(재건식)에 奉納(봉납)할 목적으로 정복왕 윌리엄의 이복 동생인 베이유의 오도 주교가 지휘하여 만든 것이란 점이다. 장군이기도 했던 오도는 윌리엄 왕이 고향인 노르망디로 돌아가면 대리 통치한 사람이다. 그가 자수 제작을 지시한 것은 1070년대로 보인다. 같은 시기 그는 베이유 성당의 건축도 시작하였다. 잉글랜드 기술자들이 자수의 제작에 참여, 7년 만에 완성한 뒤엔 베이유 성당으로 가져와 보관하였다.

이 자수에는 626명의 인물, 202마리의 말, 41척의 선박, 37동의 건물이 등장한다. 바이킹을 유명하게 만든 선박의 구조를 아는 데 좋은 자료이고 당시의 무기와 전술 연구에도 소중하다. 자수엔 밝은 별과 몽셍미셀 요새도 나온다. 나중에 천문학자들은 핼리 혜성임을 확인하였다. 해스팅스 전투가 있은 지 10년 정도 흐른 다음에 제작되었으므로 사실에 매우 가까운 그림이라는 평가이다. 윌리엄의 잉글랜드 정복은 이 베이유 자수로 해서 아주 실감 있게 다가온다. 일종의 동영상이다.


이 자수 기록화의 마지막 장면은 영국의 해롤드 왕이 눈에 화살을 맞고 죽는 모습이다. 해스팅 전투에선 앵글로 색슨 족의 귀족들이 왕과 함께 전멸하였다. 이는 발전적 변화의 곅기가 되었다.

 


 

영국의 운명이 바뀌다

 

프랑스 말을 하는 노르만 정복자들이 잉글랜드 지배층을 일거에 제거하고 앵글로 색슨족이 발전시킨 제도와 전통을 타고 앉아 새롭고 능률적인 국가를 만든다. 그때까지 영국은 유럽 문화권에선 멀어져 北海(북해)를 놓고 스칸디나비아의 후진 문화권에서 놀았다. 노르만 지배층에 의하여 프랑스-유럽 문화권과 연결되고 프랑스語 단어가 영어로 많이 들어와 세계적 언어가 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1066년 이전에 영국은 로마-게르만-바이킹족의 침공만 받아왔는데 노르만 귀족이 통치 집단으로 들어앉은 다음엔 국력이 강해져 한 번도 침공을 허용하지 않고, 오히려 외국을 침략하는 나라로 달라졌다. 이는 세계사의 흐름을 바꾼 것이다.


이 베이유 자수는 2차 대전 때 독일이 눈독을 들였으나 베이유가 노르망디 상륙 직후에 연합군에 의하여 해방됨으로써 난을 면했다. 지금 베이유는 인구가 1만4600명에 불과한 조용한 시골이지만 베이유 자수로 해서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 사이에선 잘 알려진 地名(지명)이다.


이 자수를 보존하여 온 베이유 성당은 1070년에 기공되어 수백 년에 걸쳐 완성된, 그리하여 노르만 로마네스크 양식과 노르만 고딕 양식이 융합된 단정한 인상의 건축물이다. 건축학도가 관찰하면 로마네스크 식이 고딕 식으로 변화해간 과정을 생생하게 알 수 있다. 노르망디 상륙전의 와중에서 파괴되지 않아 1000년 전의 원형을 온전하게 알 수 있다. 벽화 중엔 잉글랜드 왕 헨리 2세의 지시로 살해된 뒤 聖人(성인)으로 추존된 토마스 베켓의 이야기가 있다.


베이유 자수와 성당은 노르만 문화의 우수성을 상징한다. 11~13세기 유럽의 최고 문명은 프랑스에 있었다. 군사, 경제, 학문, 예술 모든 면에서 최고였다. 파리는 인구 20만의 매력적인 도시로 성장, 유럽의 인재들을 끌어 모았다. 노르만은 바이킹의 야성 위에 전성기의 프랑스 문화를 흡수, 보다 높은 수준의 새로운 문화를 재창조한 것이다. 노르만이 노르망디, 영국, 시실리 및 남이탈리아에 남긴 수많은 성당, 궁전, 성, 모자이크는 비잔틴과 아랍 양식까지 수용한 것도 많다. 위대한 戰士(전사) 집단이 위대한 文藝창조자가 된 경우이다.

 


로마네스크 건축붐을 일으킨 노르만

 

유럽을 여행하다가 보면 서로마가 게르만족에 의하여 멸망한 5세기 이후 11세기까지의 600년간에 세워진 건축물을 발견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중세 암흑기가 바로 이 시기였구나 하는 감을 갖게 된다. 이 시기의 건축물은 드물기에 소중하다.


*이탈리아 동해안에 있는 라벤나엔 5~6세기의 초기 기독교 건물(산 비탈레 교회, 네온 세례당 등)이 있다. 라벤나는 서기 402~476년 사이 서로마 제국의 수도였다가 로마가 망한 뒤엔 동고트 왕국의 수도로 변했다. 서기 540년에 이탈리아 반도 수복에 나선 동로마 제국(비잔틴)에 넘어갔다가 751년엔 롬바르드 왕국으로 편입되었다.

*독일 아헨 성당: 프랑크 왕국의 전성기를 연 샬레마뉴 大帝(대제)의 무덤이 있는 9세기 초 건축물이다.

*스페인 코르도바의 大모스크(메즈키타-카데드랄): 기둥이 천 개나 되는 이 모스크는 이슬람 세력이 이베리아 반도를 점령한 8~10세기에 걸쳐서 만들어졌다. 기독교 세력이 탈환한 뒤엔 성당으로 바꿨다.


11세기부터 프랑스, 노르망디, 잉글랜드, 남이탈리아, 시실리에서부터 새로운 양식의 많은 건축물들이 등장한다. 성당, 수도원, 성, 궁전이다. 이를 로마네스크 양식이라 부른다. 로마 양식의 건축이란 뜻이다. 거의 600년간 볼 만한 건물을 만들지 못했던 유럽 기독교 문명권에 변화가 생긴 것이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유형은 곧 고딕 양식으로 진화하고 유럽에 거대하고 아름다운 성당 건축 붐이 일어난다.
 

로마네스크 양식 건축 붐은 유럽 문명이 중세 암흑기의 침체를 벗어나 再起(재기)의 신호탄을 올림 셈이다. 이들 건물은 큰 것이 특징인데, 건축 기술의 발전을 반영한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확산을 매개한 것이 노르만 戰士(전사)들이었다. 이들이 정복 사업을 진행한 노르망디, 잉글랜드, 남이탈리아, 시실리에선 노르만 정권의 후훤 하에서 로마네스크 건축 붐이 일어났다. 노르만의 역사에 대하여 잘 모르는 이들도 시실리나 남이탈리아에 가 보고는 “바이킹(노르만)이 세웠다는 건물이 왜 이렇게나 많나”라고 고개를 갸우뚱 하게 된다.



노르만이 가는 곳에 성당이 선다


노르만-로마네스크 식 건물은 첫 인상이 육중하다. 벽이 두껍고 창이 작다. 실내는 검소하다. 반원형 천장, 원형 아치가 특징인데, 건물의 규모가 획기적으로 커졌다. 성당이라도 요새 같은 느낌을 준다. 실제로 성당과 성을 세트로 지어 방어용으로 이용하기도 했다. 서울 태평로의 성공회 본당 건물이 로마네스크 식이다.  


노르만이 유럽 도처에서 남긴 노르만-로마네스크 양식의 건축물이나 예술품은 웅장하고 아름다워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것들도 많다.  

*영국: 더함 성당, 런던 탑, 윈체스터 성당, 웨스트민스터 사원

*프랑스: 몽셍미셀(수도원과 요새 겸함), 베이유 刺繡 그림

*南이탈리아: 나폴리의 달걀 성, 카스텔 몬테(시실리 왕국을 다스린 노르만-독일계 신성로마제국 황제 페데리코 2세가 세운 성), 트로이아 성당, 트라니 성당, 바리의 성당과 성 등

*시실리: 팔레르모의 대성상, 몽레알레 대성당, 팔레르모의 노르만 궁전과 교회, 체라푸 대성당

 *노르망디의 수도였던 루앙은 노르만 시대의 건축 붐에 의하여 유럽의 유수한 건축도시로 성장했다. 윌리엄 공의 屍身(시신)이 안치되었던 캉의 수도원도 기념비적인 노르만-로마네스크 양식이다.


노르만은 11세기 전후에 유럽에서 가장 이동을 많이 한 사람들이었다. 북유럽에서 비잔틴, 예루살렘, 아프리카까지 다니다가 보니까 자연히 박식하고 개방적인 성격을 갖게 되었다. 이런 성격이 노르만 건축물에 나타난다. 스칸디나비아 식, 로마 식, 기독교 식에다가 비잔틴(그리스)과 아랍 양식까지 가미되니 건물의 인상이 풍성해진 것이다.  


노르만의 세력 확장은 새로운 건축양식의 확장을 매개하였을 뿐 아니라, 교황 그레고리 7세가 주도한 교회 개혁의 강력한 후원자 역할을 맡은 것과도 맞물렸다. 영국 저술가 폴 존슨은 ‘예술-새로운 역사’라는 책에서 노르만을 ‘가장 활력 있고 재주 많은 소수 민족’이라고 표현하면서 유태인, 아르메니아인, 베니스인, 네덜란드인과 비견된다고 했다.


폴 존슨은 <신성로마제국의 바보 같은 황제들은 그레고리 7세의 교회 개혁에 반대하였으나 노르만 세력은 이를 적극적으로 지지, 스스로 법, 지혜, 敬虔性(경건성), 그리고 예술에서 큰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고 평했다.  


그들은 질서를 파괴하는 야만 세력으로 출발하였다가 질서를 잡는 문명세력으로 변했는데, 예술을 그런 질서잡기의 수단으로 이용했다. 노르만은 문명세계의 지혜와 문화를 배우면서도, 바이킹으로서의 특징, 즉 적극성, 모험정신, 무자비성, 강력함, 폭력을 즐김, 손재주, 교활함, 수단이 많고 놀라울 정도로 과감한 성격을 버리지 않았다. 그들은 정복지에서도 교회 내의 개혁 세력, 즉 잘 교육된 수도승이나 주교들과 손을 잡았다.


더함 성당


노르만이 잉글랜드 켄트에 세운 로체스터 성은 당대 최강이었다. 45m 높이의 이 성벽은 한 번도 공격자의 入城을 허용하지 않았다. 궁전과 요새의 기능을 겸한 런던탑은 새로운 건축 사조를 반영했다. 교회, 궁전, 요새 기능을 겸했는데 영국을 정복한 노르만 왕조의 깊은 신앙심을 잘 드러냈다. 노르망디에도 수많은 수도원과 성을 지었는데, 캉의 채석장이 좋은 石材(석재)를 제공한 덕분이었다. 윌리엄은 잉글랜드를 정복하자 캉에서 석재를 실어 날라 교회와 성을 지었다. 캉의 석재는 ‘영국 교회의 흰 옷’이 되었다.


폴 존슨은 위의 책에서 정복자 노르만 지배층의 안목과 수준을 보여주는 사례로 더함 성당 건축을 들었다. 이 성당 건축을 지휘한 사람은 윌리엄 주교였다. 그는 정복왕 윌리엄의 친구였다. 윌리엄 왕이 1087년에 죽은 뒤 아들 루푸스가 즉위, 주교를 프랑스로 추방하였다. 주교는 3년간 파리와 노르망디의 건축물을 연구하고 돌아왔다. 왕의 신임을 회복한 그는 성당을 짓게 되는데 40년이 걸려 그의 死後에 완공된다. 더함 성당은 로마네스크 양식을 전면적으로 도입, 건물을 크게, 높게 만든 것인데, 건축학적으로 가장 창조적 건물로 꼽힌다.


갈비뼈를 닮은 반원형 천장(the ribbed vault), 飛樑(비량, the flying buttress, 벽을 바깥에서 버텨주는 역할), 뾰족한 아치(the pointed arch)는 이 성당에서 시도된 3대 건축 기법인데, 나중에 고딕 건축으로 이어진다. 그 전 건축물은 자재의 힘에 의존하였는데, 이 성당 이후엔 力學的(역학적) 계산에 의존, 부피를 키우고 창을 넓히고, 벽의 두께를 줄이게 된다.

폴 존슨은 <혁명적 技法을 도입한 건물이지만 전통적 양식 속에서 혁신을 한 것이라 보통 사람들은 급변을 눈치 채지 못하게 된다>면서 바로 이런 점이 노르만 사람들의 천재성이라고 해석했다.


잉글랜드 더함 성당의 길이는 143m, 예배당의 너비는 25m, 높이는 22m, 중앙 탑의 높이는 66m이다. 미국의 소설가 나다니엘 호돈은 더함 성당을 처음 본 감격을 이렇게 표현했다.

<나는 다리 위에 서서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장면을 보면서 찬양하고 황홀하였다. 성당은 크고, 성스럽고, 달콤한데 그 모든 것이 하나로 되었다. 나는 이처럼 사랑스럽고 대단한 광경을 일찍이 본 적이 없다.> 



유럽의 성당은 토털 아트


중세 유럽의 성당은 주로 로마네스크,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양식인데, 폴 존슨에 따르면 인류의 예술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성취이다. 성당은 모든 양식의 예술을 다 포함하는 최대 규모의 토털 아트이다. 그는 사람들이 全생애를 투입, 성당을 찾아가 세밀하게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것은 결코 헛된 투자가 아닐 것이라고 했다.
 
이들 중세 성당의 진짜 위대성은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근 1000년간! 이렇게 오랜 기간 중단 없이 사용되는 예술품은 달리 없다. 중세에선 한때 국가 재정수입의 약10%가 성당을 짓는 데 투입되었다. 이 돈도 길게 보면 낭비가 아니다. 이들 성당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잘 정비, 관리되어 빛난다. 그런 중세 성당의 태반을 차지하는 로마네스크 및 고딕 성당에 가장 야만적이던 노르만의 손때가 묻어 있다는 점이 흥미로운 것이다.


노르만 戰士들은 어디를 정복하든지 통치와 행정에 뛰어났다. 잉글랜드를 정복한 윌리엄 왕은 1085년에 전국 國富(국부) 조사를 했다. 이 조사보고서는 ‘돔스데이 북(Domesday Book)'이라고 불린다. 전국 13,418 지역의 토지 및 가축 소유 실태, 세금, 軍役, 생활 상태 등이 자세히 기록되었다. 유럽 역사상 가장 치밀하고 정확한 國勢(국세)조사였다. 조사 목적은 課稅(과세)의 근거 자료를 마련하기 위함이었다. 이 조사에 의하여 노르만 王朝(왕조)가 잉글랜드의 토지 소유권을 장악,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를 확립하였음을 알 수 있다.


조사 대상 지역의 약5분의 1은 왕이 직접 소유하였다. 4분의 1은 교회, 반은 윌리엄 왕의 추종자들이 소유하였다. 해스팅 전투에서 토착 앵글로 색슨 귀족들이 섬멸됨으로써 지배층이 완벽하게 교체되었고 따라서 중앙집권적인 효율성 높은 통치가 가능하였다는 이야기이다. 남이탈리아를 장악한 노르만 세력도 이 돔스데이 북을 참고로 하여 1100년에 국세 조사를 실시했다. 노르만이 어딜 가든지 건축 붐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도, 중앙집권적, 효율적 행정능력을 바탕으로 개방-실용 정책을 펴 富國强兵(부국강병)에 성공한 餘力(여력)이 있었던 덕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