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5장,
더 이상 여미영은 승재의 가게에 나타나지 않는다.
승재 또한 여미영에 대해서는 생각도 하지 않고 딸들에 대한 세심한 신경을 쓴다.
큰 딸인 승미를 데리고 브레지어와 생리팬티를 구입해 주고 딸들의 속옷도 함께 구입을 하며 승미와 쇼핑을 한다.
쇼핑을 하는 동안 승리는 승인이를 데리고 집을 본다.
이제 승리의 상처도 많이 아물어 조금은 불편하지만 그런대로 보행을 하면서 그동안 밀린 공부를 하느라 더욱 책상 앞을 떠날 줄을 모른다.
공부에 대한 욕심도 누구보다 많은 승리의 성품이다.
무엇이든 남들에게 지는 것을 싫어하고 남들 앞에서 리드하기를 즐겨하는 승리의 성품이 두어 달 가까이 학교를 가지 못해 쳐진 공부를 하느라 더욱 열중을 한다.
그런 승리의 모습이 승재를 기쁘게 하고 있다.
“승미야!
우리 맛있는 것을 사 가지고 갈까?“
”아빠!
집에서 늘 과일을 먹고 있는데 다른 것이 뭐가 필요해요?“
“그래도 너희들이 먹고 싶은 것이 있을 것 아니냐?
과일만 먹는다고 다른 것이 먹고 싶은 생각이 없다는 것은 아니지?“
”아빠!
과일만으로도 충분해요.
승리도 승인이도 과일을 좋아하고 있으니 다른 것을 먹고 싶다는 말을 하지 않아요.“
“그래?
그럼 우리 부지런히 집으로 가서 동생들을 데리고 외식을 할까?“
“가게 문은 오늘 아주 열지 않으시려고요?”
“그런가?
그럼 안 되겠지?“
”아빠!
자장면 시켜다 먹어요.“
”그러고 보니 우리 딸들이 자장면 먹은 것이 오래 되었구나?
그러자.
아빠도 자장면이 먹고 싶다.“
“아빠!
고맙습니다.
실은 이런 속옷들이 필요했거든요.“
”그랬어?
승미야!
아빠가 모르는 것이 많다.
이제 승미가 아빠한테 그런 것들을 말해주면 참 좋겠다.
아빠는 여자가 아니라서 모르는 것들이 많거든!“
“그래도 아빠처럼 자상하게 이런 것들을 사 주시는 아빠는 별로 없을 걸요?
친구들 얘기를 들어보면 술을 마시고 엄마를 때리고 집안을 늘 불안하게 하는 아빠들이 많은 것 같애요.
그리고 아빠가 무섭다는 친구들도 있어요.
아빠처럼 모든 이야기를 다 들어주는 아빠들이 별로 없는 것 같아요.“
”그래도 그 아이들에게는 엄마가 있지 않니?
아빠가 못해주는 것을 그 친구들은 엄마가 다 해주시니 좋을 것이다.“
”아빠는 저희들에게 엄마 몫까지 다 해주고 계시잖아요.
그래서 저희들은 별로 불편한 것도 모르고 엄마가 없어서 아쉽다는 생각을 하지 못해요.“
”승미가 아빠를 그렇게 이해를 해 주고 있으니 아빠는 참 좋다.
우리 딸들이 있어 아빠는 늘 힘이 생기고 행복하단다.“
부녀는 손을 마주 잡고 이야기를 하며 걷는다.
아무런 일도 없이 편안하고 바쁜 일상생활이 계속된다.
이제 승미가 중학교에 입학을 하고 승리는 오학년이다.
따라서 승인이는 열 살이 되지만 여전히 그 상태에서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 다섯 살의 어린아이의 철부지 모습의 승인이다.
티 없는 승인이의 눈동자는 맑고 곱다.
승인이를 있는 모습 그대로만 바라보고 있으면 참으로 마음이 편안해지지만 더 이상 자라지 않는 승인이의 정신연령이 마음을 무겁게 하고 있다.
자신이 살아 있을 때는 승인이를 위해서 모든 것을 다 해 줄 수가 있지만 자신이 이 세상을 떠나고 나면 과연 승인이가 어찌 살아갈 것인가를 생각하면 앞이 암담해지는 승재다.
승인이가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오직 그림을 그리는 것뿐이다.
그렇다고 그것으로 직업을 삼아 살아갈 수 있는 승인이가 될 수가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승재로서는 승인이의 앞날에 대한 불안감으로 마음이 무거워진다.
그림을 그린다는 것 하나만으로 세상에 나설 수가 없는 승인이다.
모든 앞가림을 할 수 없는 승인이는 혼자서는 세상을 향해서 한 발도 나갈 수가 없다.
승인이는 장애인 미술대회에서 대상을 받는다.
자신만의 독특한 기법으로 그림을 그려나가는 승인이다.
독창적이고 색상의 선택이 탁월하다는 평이 내려지지만 승재로서는 불안한 마음을 떨쳐버릴 수가 없는 것 또한 숨길 수가 없다.
영원히 다섯 살 어린 아이로 멈춰버리는 승인이의 정신이다.
“유미야!
우리 승인이를 어떻게 하지?
다섯 살의 어린아이의 정신으로 어떻게 이 험한 세상을 헤쳐 나갈 수가 있을까?
너무나 아름답고 예쁜 우리 승인이가 평생을 그 나이의 생각으로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갈 수가 있을 것인지 당신이 대답을 해봐!
당신은 모두 알고 있을 것이 아닌가?“
밤이면 깊은 잠을 들지 못하는 승재다.
아이들이 모두 잠들고 난 다음에 가게의 간이침대에서 늘 잠을 청하곤 하지만 단 하루도 편안하게 깊은 잠을 잘 수가 없다.
세 딸들의 앞날이 걱정스럽기도 하고 특히 승인이의 앞날이 불안하기 때문이다.
나이에 비해 육체는 조숙해서 늘씬하고 아름다움을 보이고 있지만 영락없는 어린아이다.
승미는 중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집안 살림을 거의 맡아서 해 내고 있다.
이제 밥을 하는 것에서부터 빨래며 집안 청소를 어른들 못지않게 척척해내곤 한다.
힘든 아빠를 위해 자처하고 나선 승미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저녁을 맡아서 준비하곤 한다.
“승미야!
아빠가 할 테니까 너는 공부나 하면 좋겠다.“
”아빠!
저도 이젠 다 컸습니다.
밥하는 것 빨래하는 것 그다지 힘든 일도 아니고 제가 있는데 아빠가 하신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아요.
주방에 들어와 계시다가 손님이 오시면 물 묻은 손으로 나가셔야 하는 아빠의 모습이 너무 싫고 제가 할 수 있는데 모든 것을 아빠한테 맡겨드릴 수는 없는 일이에요.“
”아빠는 우리 승미가 집안일과 동생들에게 신경을 쓰느라 공부를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면 너무 마음이 아프다.“
”아빠!
공부하는 시간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동생들이라고 해도 일일이 시중을 들어줄 수 있는 동생들이 아니고 이젠 다 큰 아이들이니 그렇게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아요.“
”그래도 승인이는 아직 어린아이잖니?
그래서 많은 신경을 써야 하는데 네가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을 빼앗기는 것이 아니냐?“
”아빠!
우리 승인이는 이제 모든 것을 알아서 해 나가는 것이 많아졌어요.
혼자서 씻기도 하고 옷도 잘 갈아 입으니 손이 갈 것이 없어요.
그냥 곁에서 잘 하는 것인가 하고 봐주기만 하면 되니까 신경을 쓸 필요가 없어요.“
“고맙다.
그러나 네 성적이 떨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젠 고등학교도 가야하고 특히 대학을 들어가기 위해서는 너무 실력이 모자라면 아빠가 참으로 마음이 아플 것 같다.“
”네!
공부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승미는 이제 집안의 안주인 노릇을 톡톡하게 해 내고 있다.
워낙에 제 엄마의 성품을 타고 태어났는지 깔끔하고 정리 정돈을 잘 한다.
아내의 모습을 그대로 닮아가고 있는 맏딸이다.
승미는 그런대로 반에서 상위권에 속하고 있는 실력이다.
그러나 승리는 악착같은 성품이 있어 일 이등을 놓치지 않는다.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은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해 내고야 마는 승리의 성품이다.
이름 그대로 모든 일에 승리를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품인 것이다.
아이들의 이름을 돈을 주고 작명소를 찾는다는 생각을 애초에 해 보지도 않았다.
그저 자신의 이름과 아내의 이름을 한 자씩 따서 붙인 맏딸 승미의 이름과 자매간처럼 보이도록 지어주며 인생의 승리를 하라고 한 것이고 막내인 승인이는 자신이 혼자서 어질 인자를 넣어 모두 승자를 하나씩 붙여 넣다보니 자신의 형제들과 같이 모두 승자가 붙여진 이름이 되어버렸다.
아내는 단 한 번도 막내의 이름조차 불러보지 못하고 떠나버렸다.
승인이라는 이름을 말을 해 주었지만 자신의 입으로 제대로 막내의 이름을 부르지 못하고 얼굴도 제대로 보지를 못했던 막내였다.
엄마의 품안은 고사하고 엄마 얼굴도 보지 못하고 자라고 있는 승인이다.
승인이에게는 오직 아빠만이 존재를 하고 있다.
그런 승인이 학교는 싫다는 말도 하지 않고 재미를 붙이고 있는 것은 역시 그림이다.
이론으로야 배울 수 없다고 하더라도 교사의 말이라면 잘 따르고 그대로 하려는 노력의 흔적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승인은 늘 자신의 방법만을 고집하며 그림을 그린다.
이제 승재는 그런 승인에게 스케치 북 대신에 아내가 쓰던 그림도구 일체를 내어준다.
그동안 아내의 그림과 도구들을 그대로 보관해 오고 있던 승재였다.
자신의 것과 함께 그림과 도구들을 하나도 버리지 않고 간직해 오면서 가끔 꺼내보곤 한다.
아이들이 모두 잠든 늦은 밤 아내의 그림을 꺼내본다.
아직 미완성인 그림들도 있다.
아내가 쓰러지기 전까지 조금씩 시간을 내어 그리던 그림들이 미완성인 채로 남아 있는 것이 서너 작품이 된다.
그 작품들에서 아직도 아내의 진한 체취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아내의 모든 혼과 정성이 들어 있는 작품들이다.
“여보!
우리 승인이가 당신을 닮아가고 있소.
이제 당신이 쓰던 도구 일체를 승인이에게 물려주고 싶소.
당신도 승낙을 하는 거지?“
승인이는 엄마의 모든 것들을 물려받자 눈이 반짝거리며 빛을 발한다.
“승인아!
이제 그리고 싶은 대로 네 마음대로 그림을 그려라!
엄마가 하늘에서 그런 승인이를 보면서 얼마나 좋아할까?“
”엄마?
엄마 없어!“
“아냐!
엄마는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있단다.
우리는 언제나 엄마와 함께 있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엄마 없어!“
승인은 아빠가 하는 말의 뜻을 알아듣지 못한다.
“그래,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
그러나 엄마는 늘 우리와 함께 있는 거란다.“
승인은 눈을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둘러본다.
승재는 이제 집을 다시 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만 아직은 여유가 없다.
아이들이 점점 더 커가고 방이 비좁다.
특히 승인이를 위해서는 화실도 마련해주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다.
세 딸을 단칸방에서 키우는 것이 못내 미안하고 자신이 무능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며 더욱 최선을 다해서 장사를 해 나간다.
어떻게 하든 승미가 고등학교에 올라가기 전까지는 아이들만의 방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 더욱 부지런히 몸을 움직인다.
이렇게 단칸방에서 아이들을 품어 안고 살아가는 것도 이제는 힘들다는 생각이다.
다 큰 여자아이들을 아빠와 같은 방에서 살아간다는 것도 그렇지만 공부 때문이라도 각자의 방이 필요하다는 것을 승재는 생각을 한다.
아직 집을 사기에는 턱없이 부족하지만 가게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는 곳에 전셋집이라도 얻을 생각으로 알아본다.
그러나 전셋집은 생각보다 상당히 비싸다.
더구나 딸들에게 각자의 방을 주려면 평수가 작은 것은 방이 모자란다.
자신은 거실에서 잠을 잔다고 하더라도 방이 세 개는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제 승미가 중 삼으로 올라가는 시점이다.
승리 또한 중학생이 된다.
더욱 마음이 조급해지는 승재다.
이 겨울이 지나고 나서 봄이 되면 이사를 해야만 한다는 생각을 한다.
승재는 큰 형수님을 찾아간다.
모든 경제적인 것을 형수님이 맡아서 관리해 오고 있는 것이다.
형수님과 상의를 해 볼 생각인 것이다.
“형수님!
상의드릴 일이 있습니다.“
”서방님!
어떤 일이든 제가 도움이 되어드릴 수 있는 일이라면 얼마든지 도움이 되어드릴게요.“
형수인 오화영은 막내시동생이 자신과 의논을 하겠다며 찾아온 것이 좋다.
“다름이 아니라 이제 아이들이 커서 단칸방에서 지내기에는 어렵습니다.”
“그렇겠지요.
어머님께서도 늘 걱정을 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형수님과 상의를 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아직 집을 구입하기에는 능력이 닿지 않고 전셋집을 얻으려고 알아보니 돈이 부족합니다.
형수님의 도움을 구하고 싶습니다.“
”얼마나 부족한가요?
아무래도 아이들 각자의 방을 주어야 하니까 작은 평수는 안 되겠지요.“
”네!
손에 쥔 것은 일억 정도인데 그것으로는 집을 구하기하 상당히 어렵습니다.“
”전세 값이 너무 비싸지요?
아무래도 적어도 방이 세 칸짜리를 얻으시려면 그 돈으로는 얻지 못할 것입니다.“
”네!
오천 정도가 부족한데 혹여 돈을 빌리실 곳이 없겠는지요?“
“그 정도면 마땅한 곳이 있나요?”
“네!
바로 가게 뒤쪽으로 아파트가 있는데 조금 오래된 아파트라 그런지 그 정도면 방이 세 개가 있는 평수를 얻을 수 있더라고요.”
승재는 자신이 알아보고 다니던 아파트를 이야기한다.
글: 일향 이봉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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