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속으로]
프랑스·독일의 화해, 한·일 관계 롤 모델로 [중앙일보]
140년간 큰 전쟁 네 번, 2승2패 … 적대에서 화해로, 거대한 역사 전환의 힘은 무엇인가
1차 대전 프랑스 승전비 정식 명칭은 알자스-로렌 기념비(콩피에뉴 숲, 파리서 80?). 긴 칼(프랑스)이 독수리(독일)의 심장을 찔러 추락시킨 형상. ‘조국과 정의의 수호자, 알자스-로렌의 영예로운 해방자인 프랑스의 영웅적 군인에게’라고 적혀 있다.
[박보균 대기자]
프랑스와 독일은 이웃이다. 화해와 협력의 동반자다. 하지만 20세기 전반까지는 숙적(宿敵)이었다. 두 나라 관계는 적대와 증오로 차 있었다. 나폴레옹 시대부터 두 세기에 걸친 약 140년간이다. 양국은 네 차례 큰 전쟁을 치른다.
①나폴레옹의 베를린 진군(1806년, 프랑스 승리) → ②보불(普佛)전쟁(1870~71년, 독일 승리) → ③ 1차 세계 대전(1914~18년, 프랑스 승리)→ ④히틀러의 파리 점령 (2차 대전 초기 1940년, 독일 승리)이다. 보불은 프로이센(普魯西·보로서)과 프랑스(佛蘭西·불란서)의 한자 표시다. 전쟁의 결과는 4전2승2패다.
전쟁은 참극이다. 1차 대전 때 프랑스군 140만 명이 숨졌다. 젊은 세대 40%가 증발됐다. 독일의 서부전선 희생 규모도 비슷했다. 원한과 복수심은 세대로 이어졌다. 1945년 2차 대전 종전 이후 대전환이 시작된다. 양국 리더십들은 과거와의 단절을 시도했다. 그리고 화해와 평화의 시대를 열었다. 두 나라는 유럽연합(EU)의 견인차다.
피켈하우베(Pickelhaube, 뿔 달린 헬멧)를 장식한 독일 제국의 독수리.
숙적에서 동반자로-. 그 거대한 전환의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은 한·일 관계의 롤 모델이 될 수 있는가. 8·15 광복 67주년이다.
나는 그 역사의 무대를 찾아갔다. 프랑스의 콩피에뉴(Compiegne)와 베르사유(Versailles) 궁전, 랭스 대성당, 독일의 베를린 역사박물관, 프랑크푸르트-. 역사 현장은 특유의 방식으로 단서와 해법을 준다.
프랑스의 콩피에뉴와 베르사유 궁전은 기억의 장소들이다. 영욕이 뒤얽힌 역사의 절묘한 무대다. 그 기억 속에 영광은 독점되지 않는다. 수치도 일방적이지 않았다. 그곳에서 프랑스와 독일은 승패의 서사시를 교대로 썼다. 콩피에뉴는 파리에서 북동쪽, 자동차로 1시간10분 거리(80㎞)다. 작은(인구 4만) 도시다. 중심가 시청 주변은 고풍스러운 건물들로 차 있다. 나는 약속대로 그 지방 사학자를 만났다. 로랑 로베르(57). 관광지 자원 봉사자다. 시청을 출발한 지 5분 뒤 울창한 숲이 펼쳐진다. 4차선 도로를 따라 15분쯤 가면 목적지다. 숲 속에 기념 광장을 조성했다. 정식 명칭은 ‘콩피에뉴 휴전 숲속 빈터(la Clairiere de l’Armistice)’다.
1806년 10월 나폴레옹, 베를린 입성 브란덴부르크 문을 지나 베를린에 입성하는 나폴레옹의 위용.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 승리 직후다. 시민들은 불안 속에서 환영했다.
1918년 11월, 1차 세계대전은 막을 내렸다. 독일은 항복한다. 4년 4개월의 잔혹한 전쟁은 끝났다. 프랑스 국민은 환호했다. 프랑스는 승전 의식을 갖는다. 장소는 콩피에뉴 숲. 형식은 휴전조약. 실제는 독일의 항복 서명식이다. 보불전쟁 패배 48년 만의 설욕이다.
원형의 기념 광장은 서울시청 앞 광장의 반쯤 된다. 입구의 황토색 조각은 도발적이다. 청동의 장검(長劍)과 독수리-. 승리의 월계수로 감싼 긴 칼이 독수리의 심장을 찌른다. 독수리는 거꾸로 쓰러져 처박힌 형상이다.
브란덴부르크 문 콰드리가 수모 콰드리가를 탈취하는 나폴레옹. 승리의 여신이 전차(戰車)를 모는 조각상으로 국가적 명예를 상징하는 브란덴부르크 문 위를 장식한다. [박보균 대기자]
독수리는 제국 독일의 상징이다. 칼은 연합국을 의미한다. 프랑스의 승전비다. 명칭은 알자스-로렌(Alsace-Lorraine) 기념비-.
알자스-로렌은 만성적인 영토 분쟁 지역이다. 전승국이 교대로 주인이 된다. 프랑스는 1차 대전 승리로 그 지역을 되찾았다.
로베르는 “알자스-로렌 획득은 영토 집념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었다. 그것은 상대방에 대한 우월감과 복수욕의 과격한 표출”이라고 말한다. 나는 독수리 조각을 살폈다. 제국의 독수리, 라이히사들러(Reichsadler)다. 독일 황제(Kaiser)와 제후, 장군들의 헬멧을 장식한 독수리다. 카이저의 권위는 독수리의 웅비하는 날개 속에서 펼쳐졌다. 하지만 콩피에뉴 숲에서 날개는 처참하게 꺾였다. 그 승전비의 화법은 격정적인 직설이다.
1871년 1월 독일 보불전쟁 승리,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 황제 즉위식 안톤 폰 베르너의 ‘베르사유에서 황제선언’(Kaiserproklamation). 프랑스 영광의 상징인 베르사유 궁전에서 비스마르크(흰색)가 주도한 빌헬름 1세 황제 즉위식. 보불전쟁 승리와 독일 통일을 과시한다.
숲 속 빈터의 중간에 놓인 둥근 화강암에 글귀가 새겨져 있다. “이곳에서 제국 독일의 범죄적 자존심을 굴복시켰다. 이는 자유 민중이 노예로 속박당하지 않기 위해서 싸운 승리를 말한다.” 그 어휘들로 콩피에뉴 숲은 정의의 성전(聖殿)이 된다. 성전의 글귀는 대중을 격발시키는 단어를 채집한다.
프랑스의 1차 대전 영웅 포슈(F. Foch) 원수의 동상도 서 있다. 동상 얼굴은 여유 있는 위엄이다. 광장 끝 쪽에 2층 박물관이 있다. 그 앞에 자그마한 르노 F-17 탱크가 놓여 있다. 회전 포탑이 최초로 탑재된 탱크의 원조다.
광장은 주말인데도 조용하다. 접근성이 떨어지는 것도 그 이유다. 박물관 입장료는 4 유로다. 콩피에뉴 전문가인 로베르는 “여기가 기억의 장소임을 실감할 것이다. 특별한 전시물을 만나게 된다”고 말했다. 박물관 특별 전시물은 열차 객차다. 휴전 조인식 객차(Le Wagon de L’Armistice)-. 그 객차에서 1, 2차 대전 두 차례 프랑스와 독일은 휴전 조약을 맺었다.
1919년 6월 프랑스 1차대전 승리, 베르사유 궁전 강화조약으로 설욕 베르사유 조약 협상 광경(윌리엄 오픈 작품). 윌슨(미국 대통령), 클레망소(프랑스 총리), 로이드 조지(영국 총리)가 가운데에 그려져 있다. 거울의 방에 전시한 기념물, 93년 전 서명 때 썼던 화려한 책상과 의자다. [박보균 대기자]
전쟁 5년째인 1918년 늦가을, 독일은 전선을 포기했다. 연합군 총사령관 포슈는 은밀한 휴전 장소를 물색했다. 기자들을 피하고 독일 대표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포슈는 콩피에뉴 숲 빈터에 철로를 연결했다. 그의 전용 객차를 옮겨놓았다.
로베르의 목소리는 진지해진다. “이제 객차 속으로의 시간 여행이다. 이 객차만큼 승리와 절망의 순간을 담은 유물은 없다.”-. 11월 11일 콩피에뉴 숲 속 객차-. 휴전 조인식이 열렸다. 독일 대표는 휴전 조건을 물었다. 포슈는 “조건은 없다”고 일축했다. 그것은 무조건 항복하라는 위압적 명령이다. 독일 대표단에게 굴욕의 탈출구는 없었다.
1962년 7월 프랑스 랭스 대성당에서 프랑스와 독일의 역사적 화해를 이룬 드골(왼쪽)과 아데나워.
그리고 7개월 뒤 1919년 6월 베르사유 조약으로 이어진다. 베르사유 조약은 독일을 험악하게 압박했다.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의 정치적 불안은 만성적이었다. 히틀러는 원한의 열정을 생산했다. 절치부심(切齒腐心)의 복수욕을 퍼뜨렸다. 그 속에서 나치(Nazi)는 성장하고 집권한다.
독일은 다시 전쟁을 시작했다. 2차 대전 초기, 1940년 5월 프랑스를 침공했다. 프랑스 수뇌부는 마지노선의 난공불락 신화에 의존했다. 독일의 전략은 프랑스의 허를 찔렀다. 마지노선을 우회해서 프랑스 영토를 유린했다. 6주 만에 프랑스는 항복한다.
나치 총통 히틀러는 휴전 장소로 콩피에뉴 숲을 선택했다. 로베르는 히틀러의 상상력을 해부한다. “히틀러는 복수의 드라마를 기습하듯 연출했다. 연출 방식은 같은 장소에서 같은 의식(儀式)이다. 치욕과 수모를 프랑스에 되돌리는 극적인 반전을 노렸다.”-. 기억의 장소는 통치의 무기다. 히틀러는 역사의 민감한 소재를 대중 장악의 무기로 활용했다. 독일국민은 국가적 굴욕을 청산한 그에게 열광했다.
히틀러는 항복 조인식을 찾았다. 독일군은 박물관 속에 있던 객차를 숲 속 빈터로 끌어냈다. 하켄크로이츠(Hakenkreuz, 갈고리 십자가)로 알자스-로렌 승전비를 덮었다. 박물관 한쪽에 히틀러 사진들이 걸려 있다. “히틀러 얼굴은 경멸과 분노, 증오와 복수, 환희와 쾌감이 뒤엉켜 광채를 뿜어내고 있다.”-. 미국인 기자 윌리엄 시러(William Shirer, 『제3제국의 흥망』 저자)의 기사도 눈에 띈다.
1918년 11월 1차 대전 종전, 콩피에뉴 숲 객차 독일 항복 조인식 1차 대전 휴전 협상 대표인 프랑스군 원수 포슈(오른쪽 둘째)와 연합국 대표들. ‘콩피에뉴숲 빈터’로 옮겨진 열차 객차에서 항복 조인식이 열렸다.
히틀러는 객차에 올랐다. 22년 전의 휴전 현장 그대로다. 승자와 패자의 위치만 바꿨다. 히틀러는 의자에 앉는다. 지난번 승자인 포슈의 자리다. 히틀러가 연출한 ‘따라하기 복수’는 완결된다.
객차 안에서 기묘한 공기가 퍼져 나온다. 상호 경멸과 분노, 희열과 낙담이 뒤엉켜 새어나온 듯하다.
베 르사유 궁전은 영욕의 기억을 특별히 드러내지 않는다. 탐사는 베르너(A. von Werner)의 그림부터가 적절하다. ‘베르사유에서 황제선언’-. 그 그림은 베를린의 역사박물관에 전시돼 있다(원본은 비스마르크 박물관). 베르너는 1871년 1월 18일 베르사유 궁전 모습을 사진처럼 화폭에 담았다. 프로이센 왕 빌헬름1세가 통일 독일제국 황제로 즉위하는 광경이다. 그 기획자는 철혈 재상 비스마르크(O. von Bismark).
1870년 시작한 보불전쟁에서 프랑스는 패퇴했다. 황제 나폴레옹 3세(나폴레옹 1세 조카)는 국경 근처 세당에서 항복했다. 참모총장 몰트케(H. von Moltke)의 프로이센군은 파리 외곽 베르사유 궁전으로 진입했다. 루이 14세가 지은 그 궁전은 프랑스 왕정의 권위와 자존심을 상징한다.
비스마르크는 궁전의 ‘거울의 방’을 황제 선포식전으로 선정했다. 그 방(73X10.5m, 높이 13m)의 거울과 샹들리에가 뿜어내는 사치와 화려함은 압도적이다. 그 장소 선택 의도는 복합적이었다. 프랑스의 자존심을 짓밟는 시위였다. 프랑스에 대한 독일 국민의 열등감을 씻는 의식이기도 했다. 그때 독일은 수십 개 작은 나라로 쪼개져 있었다. 통일의 요건은 프랑스의 영향력 제거다.
1940년 6월 2차 대전 초기, 콩피에뉴 숲 객차 히틀러 ‘따라 하기’ 복수 히틀러는 1차 대전 수모를 설욕하려고 같은 객차에서 프랑스의 항복을 받는다. 객차 앞에 히틀러(왼쪽 셋째)와 공군사령관 괴링(넷째, 뒷모습) 등 나치 수뇌부.
그 65년 전, 1806년 나폴레옹 1세는 프로이센군을 대파한다. 그의 베를린 입성은 독일의 집단 기억 속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프랑스군은 브란덴부르크 문 위의 ‘콰드리가(Quadriga)’를 빼앗는다(8년 뒤 반환). 베르사유 궁전에는 베를린 입성 광경을 포착한 그림이 걸려 있다. 비스마르크의 베르사유 선택은 그 수치에 대한 반격이었다. 프로이센군은 거울의 방을 야전병원으로도 사용했다.
보불전쟁은 독일을 유럽의 최강국으로 등장시켰다. 역사는 다시 소용돌이친다. 이번에는 프랑스의 와신상담(臥薪嘗膽) 차례다. 1차 대전의 종결은 1919년 6월 베르사유에서의 조약 체결이다.
베르사유 궁전은 프랑스의 힘과 영광으로 복귀한다. ‘거울의 방’ 한쪽에 그 역사를 기억하는 유리 공간이 있다( 8X4 m, 높이 3.5m 정도). 그 공간은 관광객이 몰리는 성수기엔 치운다. 그 속에 조약 서명 때 쓰인 수려한 책상과 의자가 전시돼 있다.
유리 벽에 연합국 대표들의 얼굴을 새겼다. 영국 화가 오르펀(W. Orpen)의 조인식 그림(런던 전쟁박물관 소장)을 복사해 붙였다. 프랑스 총리 클레망소는 독일을 거칠게 옥죈다. 독일의 군사 경제적 재기를 막는 기능으로 조약을 작동시켰다.
1962년 7월 랭스 대성당 드골-아데나워 화해의 미사 프랑스 랭스 대성당(Cathedrale Notre-Dame de Reims)의 역사적인 화해 장면. 1962년 7월 드골(오른쪽)과 아데나워는 미사에 참석해 적대적 역사를 청산키로 했다.
전후 프랑스 사회는 허술해졌다. 전쟁의 잔혹함은 평화 열망을 고조시켰다. 정치권은 좌우로 분열됐다. 전쟁 의지는 약화됐다. 그런 속에서 평화는 썩고 비굴해졌다. 히틀러의 공갈과 선동은 허점을 파고들었다. 히틀러는 베르사유 조약 파기를 권력 쟁취의 소재로 삼았다.
콩피에뉴 숲 박물관 안 휴전조약 객차 앞에 선 기자.
나는 로베르가 보낸 e-메일을 읽었다. “나폴레옹부터 따지면 2차 대전 종전(1945년)까지 약 140년, 보불전쟁부터 70여 년간 굴욕과 설욕의 역사가 양국 사이에 숙명처럼 펼쳐졌다. 패권·팽창의 제국주의 시대는 그 숙명을 강화했다. 콩피에뉴 기념물은 그 숙명의 기억장치이면서도 그 운명을 극복하라는 메시지다.”
그 시대 양국 관계의 우선적 속성은 우월과 지배, 복수와 응징, 불신과 경멸이다.
베르사유 궁전에 담긴 이력은 그 숙명을 기억나게 한다. 콩피에뉴 객차는 그 숙명의 직설적인 잔해다. 그 기억의 창고는 양국 관계를 화해와 우호로 바꾸라는 역설의 서사시로 존재한다.
8·15 광복 67년 … 랭스 대성당 석판 묵시록적 화해 결의
한·일 리더십의 결단과 전략적 용기 필요
프랑스 랭스의 대성당은 기억의 장소다. 그 기억은 콩피에뉴 숲과 다르다. 프랑스와 독일 사이 화해(reconciliation, Versohnung)의 출발지다.
1962년 7월 8일 프랑스 대통령 샤를 드골과 독일 총리(당시 서독) 콘라트 아데나워는 랭스 대성당 미사에 함께 참석했다. 역사의 새 지평을 여는 선언적 광경이다.
랭스 대성당은 프랑스의 성지(聖地)다. 성당 정문 바닥에 기념 석판이 있다. “아데나워와 나는 대성당에서 화해를 맹세했다”, 샤를 드골. 1962.7.8 주일(主日) 11시02분. 분 단위까지 적은 그 단선적 결의는 묵시록적 감흥을 준다.
1963년 1월 22일 파리 엘리제궁, 아데나워와 드골은 다시 만났다. 화해 협력의 엘리제 조약에 서명했다. 2차 대전 이후 냉전시대에 유럽은 쇠퇴를 경험했다. 두 사람은 역사의 동반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국력의 재도약을 위해 조약을 맺은 것이다. 독일과 프랑스는 ‘가깝고도 가까운 나라’다. 유럽연합(EU)을 이끄는 쌍두마차다. 여론조사에서 양국 사람은 가장 친한 나라로 상대방을 꼽는다. 올해 두 나라는 유럽 재정위기 해법을 놓고 갈등을 겪고 있다. 하지만 동반자로서의 운명은 견고하다.
한 ·일 관계는 여전히 ‘가깝고도 먼 나라’다. 위안부, 교과서문제가 터지면 양국관계는 거칠어진다. 그 우선적 원인은 일본의 역사 접근 태도다. 식민지사에 대한 일본 지도층의 반성·사과는 지지부진하다. 일본의 집요한 독도 욕심은 그 연장선이다. 이는 독일 리더십의 진정한 사과 자세와 다르다.
국가 간 화해 심리는 비슷한 국력을 확인하려 한다. 독일·프랑스의 전쟁 승부는 2승2패였다. 한·일은 임진왜란, 강제병합만 따지면 일본의 승리다. 하지만 한국의 부국강병은 세계사의 특별한 성취다. 삼성전자와 현대차의 전진, 올림픽에서의 비약, 젊은 세대 경쟁력은 높아진 국력을 드러낸다.
8·15 광복 67주년이다. 동북아의 장래는 불투명하다. 북한 체제의 불안정성, 중국의 위세는 정세의 불확실성을 높인다. 한국은 중국과 친해야 한다. 일본과도 가까워야 한다. 그 접근법은 대통령 시절 김대중 연설에도 있다. “불행한 관계는 일본의 한국 침략 7년(임진왜란)과, 식민 지배 36년간이다. 50년도 안 되는 두 불행한 역사 때문에 1500년 이상의 교류와 협력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은 어리석다.”(1998년 일본 의회).
진정한 친선은 한·일 지도자들의 역사적 결단을 필요로 한다. 프랑스·독일 리더십의 비전과 전략적 용기는 롤 모델이다. 일본 지도층은 과거사와 진솔하고 대담한 결별을 해야 한다. 한국과 일본은 21세기 한·중·일 협력시대를 함께 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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