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基白, "신라가 민족사의 大勢, 발해는 지류" 조갑제닷컴
한국 史學界의 泰斗였던 李基白 교수는 별세 직전 월간조선 편집위원이던 鄭淳台씨와 한 인터뷰에서 신라의 민족사적 정통성을 부정하는 풍조를 개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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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平壤을 民族史의 중심으로 설정하기 위한 전략의 일환이라고 봅니다. 그들은 民族史의 정통성을 檀君朝鮮-고구려-발해-고려-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다 설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민족사의 정통성은 지리적 위치에 의해서 결정되는 게 아닙니다. 우리 민족사가 전개해온 올바른 방향과 일치하는 정치를 하는가, 하지 않는가에 의해 결정되는 것입니다』 ―黃長燁씨는 「南北대결의 핵심은 민족사에 있어서의 正統性을 놓고 벌이는 타협 불가능한 권력투쟁」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그러면 누가 민족사의 正統이고, 누가 민족사의 異端입니까. 『독재국가는 韓國史에서의 正統性을 주장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 독재를 뒷받침해 주고 있는 이른바 「주체사학」은 韓國史學을 타락시키고 있습니다』 ―北韓의 「朝鮮全史」나 「朝鮮通史」에서는 고구려가 우리 역사상 中世 봉건시대를 열고 이끌어간 나라, 즉 삼국시대의 主役으로 기술되어 있습니다. 또한 4세기에 들어서면서 본격화하는 고구려의 남진정책은 삼국통일을 위한 통일의지의 표현이라 되어 있는 반면, 백제나 신라의 북진정책은 反통일적인 것으로 기술되어 있습니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3國 중에서 고구려가 선진국임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 사실이 고구려가 당연히 3國을 통일할 자격이 있는 나라요, 백제와 신라는 당연히 고구려에 병합되어야 할 나라로 규정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메소포타미아나 이집트가 선진국가였다고 해서, 세계가 당연히 그들에 의해서 통일되어야 한다고 규정하는 것이 잘못인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고구려는 독재정치에 의해서 국가가 분열되었기 때문에 패망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었습니다. 백제 또한 그러했습니다. 이에 반해 신라는 약간의 시련이 있기는 했지만, 국내의 단결이 굳건해서 통일의 기반이 어느 나라보다도 강했습니다』 ―우리 사회 일각에서도 新羅가 唐과 동맹한 것을 反민족적 事大主義라고 비난하는 데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건 문제가 있는 시각입니다. 3·1운동을 事大主義라고 규정한 日帝 어용학자의 억지 주장과 마찬가지인 겁니다. 신라는 고구려와 동맹하기를 원했지만, 고구려가 거절했기 때문에 생존을 위해 唐과 동맹을 했던 것입니다. 설마 新羅더러 비록 망하더라도 가만 있어야 하는 게 옳다고 주장할 사람은 없겠지요. 더욱이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한 뒤에 신라는 唐과 치열한 전쟁을 하여 唐을 축출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신라는 독립정신이 강한 나라였습니다』 ―民族史에 있어서 삼국통일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우리나라 역사의 시초부터 이미 민족이 형성되어 있었고, 또 그것이 하나의 국가로 형상화되고 있었다는 낡은 사고방식이 아직도 잔존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객관적인 역사적 진실과는 너무나 거리가 멉니다. 처음에는 滿洲와 한반도에 걸쳐서 수없이 많은 씨족공동체가 산재해 있었고, 靑銅器시대에는 각기 독립된 수백 개의 城邑國家 혹은 部族國家들이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이 정복과 동맹의 과정을 거치면서 고구려, 백제, 신라로 통합 정리되어 삼국시대가 된 것입니다. 그러다 신라의 통일에 의해 민족의 틀이 거의 완성된 것입니다』 ―新羅의 삼국통일은 민족의 再통일이 아니라 최초의 통일이라는 말씀이군요. 그런데 선생님의 「韓國史新論」에서는 統一新羅와 渤海가 병립하는 南北朝時代를 설정해 두었더군요. 『우리 역사에서 渤海는 여러 각도에서 다른 견해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高句麗 유민인 大祚榮(대조영)이 세웠고, 大祚榮의 후계자인 渤海 武王 스스로가 고구려의 後身임을 밝혔으니까 南北朝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渤海를 우리 민족사에서 統一新羅와 대등한 위치로 놓은 것은 어색하지 않습니까. 渤海 멸망 후 高麗로 넘어온 渤海 유민은 10만명 정도로 추산될 따름이거든요. 『渤海는 소수의 고구려 유민이 다수의 靺鞨族(말갈족)을 통치했던 나라입니다. 만약 말갈족이 현재 독립국가를 이루고 있다면 그들에게 渤海史는 이민족의 지배를 받던 시기의 靺鞨史로 서술될 것입니다. 반면에 우리로서는 高句麗 유민이 통치했던 만큼 渤海를 당연히 韓國史에 포함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統一新羅가 우리 민족사에서 大勢를 차지했고, 발해는 支流라고 할 수 있습니다』 ―6·25를 전후하여 적지 않은 남쪽의 역사학자들이 사회주의 국가 건설에 참여하겠다고 월북했는데, 당시로는 사회주의의 虛像이 드러나지 않았던 만큼 결국은 줄을 잘못 선 것 아닙니까. 『金日成·金正日의 북한은 민족사 차원에서 보면 크게 퇴보한 체제입니다. 북한의 근·현대사는 金日成·金正日 개인 집안의 역사입니다. 「朝鮮王朝實錄」이나 「承政院日記」를 보면 임금에 대한 신하의 言路가 놀랄 정도로 트여 있었습니다. 東獨이 붕괴되기 전의 일입니다만, 韓國史를 전공하는 괴텔 교수가 한국에 온 적이 있습니다. 한림대학에서 만났는데, 그의 말로는 북한은 사회주의국가가 아니라고 하더군요. 북한은 조선왕조보다도 더 전제적이라고 해야겠지요. 金日成·金正日이 교시한 「주체적 입장과 방법론」을 역사연구에서 일관되게 견지하여야 할 유일한 지침으로 삼는 이른바 「주체사관」은 이미 학문의 세계가 아니라 정치적 도구입니다』 ―북한의 「朝鮮全史」를 보면 金日成의 증조부 金膺禹(김응우)가 대동강을 침범한 미국의 무장상선을 「불배 공격」으로 침몰시켰고, 3·1 독립운동의 중심은 평양이고, 그 주역이 金日成의 아버지 김형직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조작한 것을 역사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사실의 참 모습을 밝히는 작업은 다른 말로 바꾸어 표현하면 진리의 탐구입니다. 그러므로 학문의 목표는 진리의 탐구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진리는, 당연한 일이지만, 거짓이 아닌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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