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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0년만에 다시 잇는 親善의 뱃길

淸山에 2012. 8. 9. 20:09

 

 

 

 

 

1260년만에 다시 잇는 親善의 뱃길  
 
  
<혈연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가까운 민족은 일본인, 한국인, 몽골인이다. 한국인과 몽골인이 本家이고 일본인은 分家인 셈이다. 일본인은 本家에 감사해야 한다. 동시에 일본인은 한반도를 거쳐 일본 땅에까지 와서 좋은 나라를 만든 조상들의 진취성에 대해서 자부심을 가져도 된다. 本家인 한국인들도 分家의 이런 업적을 평가해주었으면 한다.>
    
 
趙甲濟    
 
  
 
  
  다시 잇는 親善의 뱃길


  -1260년 전 新羅人 사절단의 東大寺 방문을 想起하며-
 
 
  앵커우먼 출신의 일본 저널리스트 사쿠라이 요시코씨는 '세상은 의외로 과학적이다'는 책에서 이런 요지의 글을 썼다.
 
  <혈연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가까운 민족은 일본인, 한국인, 몽골인이다. 한국인과 몽골인이 本家이고 일본인은 分家인 셈이다. 일본인은 本家에 감사해야 한다. 동시에 일본인은 한반도를 거쳐 일본 땅에까지 와서 좋은 나라를 만든 조상들의 진취성에 대해서 자부심을 가져도 된다. 本家인 한국인들도 分家의 이런 업적을 평가해주었으면 한다.>
 
  신라의 불교가 전성기를 맞은 것은 통일 직후인 8세기 중반기의 景德王代였다. 불국사, 석굴암, 聖德大王神鐘을 만들도록 한 이가 경덕왕이다. 일본도 이 무렵 나라(奈良)를 수도로 하고 불교문화를 꽃피우고 있었다. 일본 聖武天皇은 서기 743년에 화엄종의 本寺로서 東大寺를 건립하도록 지시한다. 745년부터 공사가 본격화되었다. 일본의 國力이 총동원된 대사업의 핵심은 금동불상을 만드는 일이었다. 盧舍那大佛이라 불리는 금동불상이 완성되어 준공식을 갖기로 한 것은 서기 752년이었다.
 
  이해 정월 일본은 山口忌村人麻呂라는 사신을 신라 景德王에게 보내 東大寺 大佛의 開眼式(개안식: 완성한 부처에 눈을 그려넣는 행사)이 4월에 있을 것임을 통보했다. 신라는 그해 3월22일 일곱 척의 배에 700여 명의 사절단을 태워 大宰府(후쿠오카 북쪽)에 도착시켰다. 이들중 370명은 나라(奈良)까지 가서 開眼式을 마친 大佛에 참례했다. 이 大佛은 높이가 16m나 되고 무게는 300t을 넘었다.
 
  신라의 700여 명은, 경축사절단이자 貿易商이었다. 일본인들이 부러워하는 많은 물건을 가져갔는데 일본 조정은 귀족들로부터 신청을 받아 신라 물건을 사들였다. 그 구매신청문서가 買新羅物解라는 이름으로 일본에 현존해 있다. 구매신청이 들어온 물건은 향료, 염료, 안료, 약품, 서적 등으로 실제 팔린 것은 약200점이다.
 
  2012년 여름의 포항~교토(마이즈루) 바닷길 교류는 1260년 전 신라인들의 東大寺 방문을 想起시킨다. 7~8세기 한반도와 일본의 관계는 지금의 韓日 관계와 비슷하다. 한반도가 신라의 의하여 통일되어가는 과정에서 일본은 처음엔 신라와 敵對的인 관계를 유지하다가 통일이 완성된 다음엔 우호관계로 돌았다.
 
  일본은 663년 百濟 부흥운동을 지원하기 위하여 약3만 명을 파병, 白村江 해전에서 羅唐 연합군에 패배하였다. 672년 親신라적인 天武天皇이 壬申의 亂으로 집권하고, 신라가 唐과 전쟁을 시작하면서 두 나라는 가까워진다. 신라와 일본은 거의 동시에 唐에 대한 사신 파견을 중단하고 상호 교류를 늘린다. 서기 668(文武王)~779년(惠恭王) 사이 신라는 47회에 걸쳐 遣日本使를 보내고, 일본은 이 기간 25회 遣新羅使를 보낸다. 일본은 통일국가를 만들어가는 신라를 연구하여 古代국가를 완성하는 데 참고로 하였다. 신라-일본 관계가 좋았던 데는 한반도가 신라에 의하여 통일됨으로써 안정기에 들어갔고, 두 나라가 불교를 共有하고 있었던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는 대한민국이 북한정권을 흡수, 자유통일하면 한반도가 안정되고, 한국과 일본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제도를 共有함으로써 항구적인 친선관계를 누릴 수 있을 것이라는 암시이기도 하다.
 
  포항은 신라 때 韓日 교류의 창구였다. 오늘의 포항제철은 韓日 협력의 상징이다. 포항과 교토 두 도시를 잇는 바다의 뱃길은 1260년 전 신라 사절단 東大寺 방문의 意義를 되새기게 한다. 한반도 통일 과정에서 두 나라가 협력하면 親善관계는 더욱 굳어질 것이다. 한국인들은 '통일되고, 변영하고, 자유롭고, 강력한 한반도'를 꿈꾼다. 통일신라와 대한민국처럼 개방적이고 강력한 정권이 한반도를 안정적으로 통치할 때 진정한 韓日 우호가 가능할 것이다. 
    
  '신라는 나쁘게 백제는 좋게 배우는 일본인'


  오카자키 히사히코: <고대사를 읽으면 일본과 백제의 近親(근친)관계는 뭔가 이상할 정도로서 역사의 뒤편에 감춰진 사실이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盧泰敦 서울대 교수는 '삼국통일전쟁사'에서 亡國(망국)의 恨(한)을 품고 일본으로 망명한 백제인들이 일본의 正史인 日本書紀(일본서기)를 쓰는 데 직간접으로 관계하여 신라를 부정적으로 보는 역사관을 일본인들의 마음속에 심었고, 이것이 지금의 韓日 갈등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취지의 기술을 하고 있다. 필자는 수년 전부터 이와 비슷한 글을 써 왔다. 오늘의 韓日 갈등, 그 深層(심층)에는 신라와 백제의 갈등이 깔려 있다는 의미였다. 日本書紀는 8세기 초에 간행된 일본 최초 正史(일본 정권이 편찬한 공식 역사서)인데, 正史이므로 이 책에서 기술한 부정적인 新羅觀(신라관)은 그대로 일본에서 국가적, 국민적, 공식적 對신라관-對한국인관으로 굳어졌다는 이야기이다.
  일본이 한국의 자유통일을 지원한다는 의미는 이런 부정적 한반도觀에서 벗어난다는 뜻이기도 하다. 
  

  신라와 백제의 近親증오가 韓日간의 증오로 변질  

  
  日本書紀(일본서기)와 이 책에 쓰여진 역사관을 배우고 자란 일본인들은 백제에 대하여는 좋은 감정을, 신라(한국)에 대하여 惡(악)감정을 갖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대사 출신의 외교 평론가인 오카자키 히사히코(岡崎久彦)씨는 1970년대 한국주재 일본 대사관에서 근무한 적이 있었다. 그는 ‘이웃나라에서 생각한 것’이란 책을 썼는데, 한국의 정치와 역사에 대한 가장 균형 잡힌 저술로 평가받고 있다. 올해 79세인 오카자키 히사히코씨는 지금도 자민당 정부에 전략적 助言(조언)을 하는 사람이다. 그는 이 책에서 노태돈 교수가 쓴 ‘呪術(주술)’과 비슷한 의미로서 ‘백제의 亡靈(망령)’이란 표현을 했다.
  <일본과 신라 사이의 안티파시(antipathy․뿌리 깊은 증오심) 속에는 신라와 백제의 近親(근친)증오적인 안티파시가 그대로 들어가 있다는 느낌이다. 즉, 신라의 일본에 대한 경계심 속엔 백제에 대한 경계심이 섞여 있고, 일본의 신라에 대한 감정적 혐오 속에는 백제계 遺民(유민)의 영향이 짙은 일본 조정의 新羅(신라)혐오라는 요소가 크게 작용한 것은 아닐까? 고대사를 읽으면 일본과 백제의 近親(근친)관계는 뭔가 이상할 정도로서 역사의 뒤편에 감춰진 사실이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우리가 戰前(전전)에 소학교 때 배운 상식도 그러하였다. 백제는 일본에 문자와 불교를 전해준 좋은 나라이고, 신라는 熊襲(웅습․규슈 남부의 미개 부족)의 오야붕(두목) 같은 나라로서, 일본이 공격하면 즉시 항복하여 충성을 맹세하는 나라로 묘사되어 있었다. 사람에 따라선 일본 조정의 書記(서기) 등은 모두 백제계 인물이므로, 역사 등도 백제에 유리하도록, 신라는 나쁜 것으로 기록하여, 일본인의 조선인 멸시는 이 백제계 사람들의 신라멸시에서 시작되었다는 주장을 하는 이도 있다. 日本書紀(일본서기)에는 百濟記(백제기), 百濟新撰(백제신찬), 百濟本記(백제본기)라는 지금은 전해지지 않은 百濟의 古記(고기)를 여러 군데서 인용하고 있는데, 이것들도 文體(문체)를 보면 백제 사람들이 야마토 조정에 제출하기 위하여 쓰여진 것이란 說(설)이 최근에 유력해졌다>
    
  신라에 대한 저주를 위해 쓰여진 日本書紀
    
  신화와 사실이 뒤섞여 있고, 왜곡과 조작이 심한 日本書紀(720년 발간)를 읽어보면 반 이상이 가야, 백제, 신라, 고구려와 관련된 기사이다. 이 책의 집필진은 가야 백제를 자신들의 편으로, 신라를 主敵(주적) 내지 屬國(속국)으로 간주하는 서술방법을 택하고 있다. 신라가 한반도를 통일한 뒤에는 이런 적대감과 경멸감이 한민족에 대한 감정으로 바뀌어 오늘날 韓日민족감정의 한 축이 형성되는 것이다. 일본 고대사의 가장 큰 수수께끼는 왜 일본 정권이 신라를 그토록 미워하게 되었는가이다.
  日本書紀 欽明천황 23년7월 기사에는 任那(임나: 가야지방에 있었다는 일본의 기지)를 도와 신라를 치려고 파견되었다가 신라군에게 포로가 된 調吉士(귀화 백제인氏族)란 사람에 대한 내용이 있다.
  <신라 장군이 칼을 빼어 그를 죽이려고 하였다. 억지로 바지를 벗겨 궁둥이를 내놓고 일본을 향하게 하고 큰 소리로 '일본 대장은 내 엉덩이를 먹어라'고 말하게 하였다. 그는 그런데 큰 소리로 '신라왕은 내 엉덩이를 먹어라'고 했다. 그는 고문을 당하면서도 전과 같이 부르짖었다. 이 때문에 죽었다. 그 아들도 아비의 시신을 안고 죽었다. 그의 처 大葉子 또한 잡힌 몸이 되었다. 슬퍼하여 노래를 불렀다. '한국의 城上에 서서 大葉子가 領巾을 흔드는 것이 보인다. 難波(나니와)를 향해서'>
  倭人(왜인)으로 귀화한 백제인이 倭(왜)를 위해 싸우다가 신라군에게 잡혀 고문을 받으면서도 생명을 던져 倭(왜)에 충성을 바치고, 신라군의 포로가 된 그의 아내는 천황이 있는 難波(나니와)를 향해서 충성의 깃발을 흔든다. 이런 글을 쓴 사람들이 조국을 신라에게 빼앗겨 돌아갈 고향이 없어진 백제系 일본인이었다면 이해가 간다.
  서기 562년 신라가 大伽倻(대가야), 지금의 高靈(고령)을 점령하여 가야국이 최종적으로 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일본의 欽明천황은 이런 한탄을 한다. 日本書紀에 적혀 있는 대목을 옮긴다.
  <신라는 서쪽 보잘 것 없는 땅에 있는 작고도 더러운 나라이다. 하늘의 뜻을 거역하며 우리가 베푼 은혜를 저버리고 皇家(황가)를 파멸시키고 백성을 해치며 우리 郡縣(군현)을 빼앗았다. 지난날에 우리 신공황후가 신령의 뜻을 밝히고 천하를 두루 살피시어 만백성을 돌보셨다. 그때 신라가 天運(천운)이 다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 애걸함을 가엾게 여기사 신라왕의 목숨을 살려 있을 곳을 베풀어 번성하도록 하여주었다. 생각해보아라. 우리 신공황후가 신라를 푸대접한 일이 있는가. 우리 백성이 신라에게 무슨 원한을 품었겠느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라는 긴 창과 강한 활로 미마나(가야 지방)를 공격하여 온 백성을 죽이고 상하게 하며 간과 다리를 잘라내는 것도 모자라 뼈를 들에 널고 屍身(시신)을 불사르기를 서슴지 않는다. 그들은 미마나의 우리 친척과 모든 백성들을 칼도마에 올려놓고 난도질을 마음대로 저지른다.
  하늘 아래의 어느 백성이 이 말을 전해 듣고 가슴 아프게 생각지 않겠는고. 하물며 황태자를 비롯하여 조정의 여러 대신들은 그 자손들과의 情懷(정회)를 회상하며 쓰라린 눈물을 흘리지 않겠느냐. 나라를 지키는 중책을 맡은 사람들은 윗분을 모시고 아랫사람들을 돌보아 힘을 합하여 이 간악한 무리에게 천벌을 내리게 하여 천지에 맺힌 원한을 풀고 임금과 선조의 원수를 갚지 못한다면 신하와 자손의 길을 다하지 못한 후회를 뒷날에 남기게 될 것이다>
  欽明천황은 '그들(신라)은 미마나의 우리 친척과 모든 백성들을 칼도마에 올려놓고 난도질을 마음대로 저지른다'고 말했다. 大伽倻(대가야) 지역의 사람들을 倭의 천황이 '친척'이라고 부른다. 이는 고대 일본을 세운 主力 세력이 伽倻에서 규슈를 거쳐 近畿지방(나라, 교토)으로 건너간 伽倻人들임을 암시한다. 동시에 일본의 天皇家가 가야계통 사람들임을 추정하게 한다.
 
  전쟁과 천재지변이 가장 많았던 신라
 
  일본과 한반도의 관계는 영국과 유럽대륙의 관계와 비슷하다. 오늘의 영국은 원주민에다가 독일에서 건너간 앵글로와 색슨족, 덴마크에서 건너간 바이킹족, 그리고 프랑스의 노르만디 지방에서 건너간 노르만족이 섞여서 만들어낸 나라이다. 일본도 한반도에서 건너간 고구려족, 신라족, 가야족, 백제족이 각축하고 협력하여 만든 나라이다.
  지금 경남지방에 있었던 가야족은 일찍부터 현해탄을 건너 北(북)규슈에 근거지를 만들어 한때는 韓日(한일) 양국에 걸친 세력권을 형성하였다. 신라 사람들은 일본 동해안의 시마네 지방으로 많이 건너갔다. 북규슈에서 힘을 기른 가야족은 세토나이카이라는 內海(내해)와 연안지방을 경유하여 나라, 교토 지방으로 진출, 여기에 일본 고대국가 야마토(大和)를 세운다. 이 가야세력은 天皇家(천황가)를 이루는데, 한반도의 本家(본가), 즉 가야 잔존세력을 계속 유지하려 하다가 보니 가야에 위협적인 신라에 대항하여 백제와 전략적 동맹을 맺게 된다. 백제의 지식인들이 우호국인 倭로 많이 몰려가 가야계 천황가를 떠받치는 관료집단을 형성하고 문자와 불교를 전하여 倭의 발전에 기여한다.
  자연히 왜-가야-백제연합전선이 형성되어 신라를 압박한다. 신라는 고구려의 도움을 받아 여기에 대항하다가 강성해지자 고구려에서 독립, 6세기 중반 진흥왕 때는 관산성(지금의 충북 옥천) 결전에서 가야+왜+백제 연합군을 혼자서 섬멸하여 100년 뒤의 삼국통일의 길을 연다.
  한국 역사학계의 원로학자인 申炯植(신형식) 교수가 쓴 '新羅通史'(주류성 출판사)에는 재미있는 통계가 있다. 삼국시대의 전쟁통계이다. 전쟁을 가장 많이 한 나라는 신라로서 총174회이다. 다음이 고구려로서 145회, 백제는 141회이다. 신라는 고구려, 백제, 가야, 倭와 싸웠다.
  고구려는 중국 및 북방민족과 가장 많이 싸웠고 백제와는 다음으로 많이 싸웠다. 백제는 신라와 가장 자주 싸웠다.
  신라는 지진, 가뭄, 태풍과 같은 천재지변에서도 삼국중 가장 많은 피해를 보았다. 申교수가 三國史記를 분석하여 통계를 냈다. 삼국시대에 한정해보면 신라는 322회의 천재지변을 겪었다. 백제는 191회, 고구려는 153회였다. 申교수는 천재지변이 가장 많다는 것이 오히려 신라를 강하게 만들었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삼국사기의 記事 내용을 분석해보면 신라는 정치에 관한 기사가 가장 많다고 한다. 정치란 권력승계를 평화적으로 하는 기술이고 지배층 내부 및 백성들과 지배층 사이의 단합을 도모하는 예술이다. 신라는 왕위 계승이 가장 안정적으로 된 나라이다. 지배층과 백성 사이의 단합도 삼국 중 가장 성공적이었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군사적 승리 이전에 정치와 외교의 승리이다.
  申교수는 신라가 수행한 수많은 전쟁의 긍정적 면을 이렇게 분석했다.
  <전쟁은 제도개혁이나 정치반성의 계기를 제공했고, 이것이 사회발전의 轉機(전기)를 가져왔다. 특히 신라는 통일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백성들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확장시켰으며, 對唐(대당)전쟁을 통해서 백제 고구려의 殘民(잔민)을 하나의 민족대열에 융합했다. 신라는 對外(대외)전쟁을 민족적 自覺(자각)과 융합의 수단으로 삼은 것이다>
  전쟁과 천재지변은 국가가 당면하는 가장 어려운 과제이다. 이 난관을 성공적으로 돌파한 나라나 인간은 강건한 체질을 터득하게 된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逆境(역경)을 극복한 결과였다. 역사에 공짜는 없는 것이다. 하물며 국가로서 가장 하기 어려운 것이 통일인데 남북통일이 요행수나 공짜로 이뤄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과학이 아닌 미신이다.
 
  親신라 정권 天武천황
 
  서기 645년 일본 천황가에 쿠데타가 발생한다. 주모자 中大兄(나카노오오에)皇子는 皇極(황극)천황을 폐위시키고 孝德(효덕)천황을 등극시킨 뒤 자신은 황태자가 되어 실권을 잡았다. 이 政變(정변)에서 그를 결정적으로 도운 동지가 있었으니 백제 王族으로 추정되는 나카토미노카마타리(中臣鎌足)였다.
  정권을 잡은 나카노오오에는 大化(대화)의 改新(개신)이라 불리는 일대 개혁을 단행한다. 황족 및 지방의 귀족과 호족들이 갖고 있던 토지 및 백성들의 소유권을 천황의 公地(공지)와 公民(공민)으로 만들었다. 전국적으로 이들 땅과 사람들을 지배하기 위한 중앙집권적 행정기구, 전국에 통용되는 획일적인 세금제도를 만들었다. 나카노오오에는 大化라는 年號(연호)를 일본 역사상 처음으로 쓰게 하였다.
  연호를 이때 처음으로 사용했다는 것은 천황의 지배력이 일본 全土(전토)에 처음으로 미치게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고 중앙집권적인 권력의 출현을 의미하기도 한다.
  大化改新(대회개신)의 주도세력은 親百濟(친백제) 정책을 썼다. 서기 660년에 백제가 唐과 신라 연합군에 의하여 멸망하자 당시의 천황(齊明)은 직접 사령관이 되어 백제 부흥운동파를 돕기 위한 구원군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천황은 중도에 사망하는데 실권자 나카노오오에는 바톤을 이어받아 약3만 명의 병정과 수백척의 군함으로 구성된 대함대를 금강 하류의 서해연안으로 보냈다. 일본 역사에서 白村江의 해전으로 유명한 이 싸움에서 신라-당 연합군은 일본군을 전멸시켰다. 서기 663년의 일이다.
  나카노오오에는 羅唐(나당) 연합군이 일본으로 쳐들어올 것이라고 생각하여 수도를 오오츠(大津)로 옮기고, 대마도, 규슈 등 곳곳에 성을 쌓게 하고 스스로 천황(天智) 자리에 올랐다. 그는 백제로부터 건너온 지식인, 관료, 귀족들을 우대하여 그들로부터 선진 문화 및 행정술을 배웠고 이를 국내 개혁에 활용했다. 개혁자 나카노오오에, 즉 天智천황은 서기 671년에 죽고 아들이 弘文(홍문)천황으로 등극한다. 이 등극에 불만을 품은 나카노오오에의 동생 오오아마(大海人)皇子(황자)가 반란을 일으켰다.
  오오아마측에는 신라에서 건너온 渡來人들이 붙었다. 신라의 문무왕이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叛軍(반군)을 지원하였다는 설도 있다. 천황측에는 백제 도래인들이 섰다. 한반도 통일전쟁의 축도판적인 싸움이 벌어진 것인데 신라 도래인들이 밀던 반군이 이겨 홍문천황을 자살케 한 뒤 오오아마를 天武(천무)천황으로 추대했다. 親新羅 정권이 선 것이다. 이 반란을 ‘壬申의 亂’이라 부른다.
  天武천황은 14년간 집권하면서 절대적인 권력을 휘둘렀다. 그는 2~3년에 한번씩 대규모 사절단을 신라에 보내 신라의 발달된 제도와 문화를 배워왔다. 신라도 거의 매년 사절단을 일본에 보냈다. 신라는 對唐(대당)결전을 벌이고 있을 때여서 일본이 唐과 손을 잡지 않도록 하는 데 외교의 중점을 두었다. 이 시기 왜는 唐과 국교를 끊고 신라 하고만 교류함으로써 ‘우호적 중립’을 지켰다. 최근의 한일관계를 제외하면 이때 두 나라 사이가 가장 좋았다.
 
  本家와 分家의 상호 존중
 
  일본 역사학자 이노우에 기요시(井上 淸) 박사는 天武천황이 신라로부터 통일 국가 만들기에 대한 노하우를 열심히 배워 율령을 정비하고 고대 일본 국가를 완성했다고 평가하였다.
  천무천황은 역사 편찬을 지시하였으나, 日本書紀가 완성된 것은 그가 죽은 뒤인 서기 720년이었다. 日本書紀를 편찬하는 데 큰 영향을 끼친 이는 백제 왕족 출신으로 나카노오오에의 쿠데타를 도왔던 나카토미노카마타리(中臣鎌足)의 아들 후지와라후히토(藤原不比等)였다. 후히토는 親신라 정권이던 천무천황 시절엔 숙청을 면하는 데 급급하였으나 그 후 문무천황 옹립에 성공하여 政界(정계)의 실력자가 되었다. 그가 편찬을 주도한 것으로 추정되는 日本書紀가 신라를 매도하는 편향적인 기술방향을 갖게 된 것은 그가 백제 왕족의 후손이란 점, 親신라적인 천무천황 시절 핍박을 받았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자연스런 것이다.
  후히토의 아버지 中臣鎌足은 죽기 직전 天智(천지)천황으로부터 후지와라(藤原)란 姓(성)을 받아 후지와라노카마타리(藤原鎌足)가 된다. 그 후 수백 년 동안 백제계 후지와라 집안이 일본의 정권을 장악, 反신라 정책과 反신라적 시각을 일본인의 역사와 유전자 속에 심었던 것이다. 이런 反신라 감정은 고려-조선-대한민국으로 이어지면서도 傳承(전승)되어 反韓(반한)감정으로 고착된 것이다.
  新羅(신라)에 패배한 백제와 倭人(왜인)이 흘린 피와 원한의 呪術(주술)에서 벗어나려면, 오늘의 일본인들은 古代史(고대사)의 진실을 솔직하게 인정해야 하고, 한국인들은 일본에 대한 근거 없는 우월감이나 열등감을 정리하여야 할 것이다.
  일본이 한국 주도의 한반도 통일을 지원하는 것은, 이 주술에 걸린 일본인들이 스스로 이 주술을 깨는 일이다. 일본 보수층을 대표하는 앵커우먼 출신의 일본 저널리스트 사쿠라이 요시코씨는 '세상은 의외로 과학적이다'는 책에서 이런 요지의 글을 썼다.
  <혈연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가까운 민족은 일본인, 한국인, 몽골인이다. 한국인과 몽골인이 本家이고 일본인은 分家인 셈이다. 일본인은 本家에 감사해야 한다. 동시에 일본인은 한반도를 거쳐 일본 땅에까지 와서 좋은 나라를 만든 조상들의 진취성에 대해서 자부심을 가져도 된다. 本家인 한국인들도 分家의 이런 업적을 평가해주었으면 한다>
 
  日本人이 韓民族에 감탄하였을 때
 
  서기 676년 일본의 天武천황은 唐과 싸우는 신라에 物部麻呂(모노노베노마로)라는 사람을 대사로 보낸다. 이때 일본은 신라 편에 서기로 하고 親신라 정책을 펴고 있을 때였다. 신라로 떠나는 마로 대사에게 지금의 국방부 차관에 해당하는 사람이 부탁했다.
  “신라에 가거든 모노노베씨, 부탁이 있는데 그 나라의 兵制를 보고 왔으면 하네”
  그는 부연설명을 했다.
  “신라는 300년 동안 전쟁만 한 나라이다. 백제와 싸워 이기더니 북방의 강국 고구려와 싸워서도 이겼다. 지금은 세계제국인 唐을 상대로 한반도의 통일과 민족의 독립을 걸고 싸우고 있다. 당연히, 군사면에선 물론이고 전략전술에 있어서도 우리나라보다 앞서 있을 것이다“
  국방차관은 이렇게 덧붙였다.
  “만약 전투가 있으면 직접 戰場에 나가서 唐과 신라의 전법을 보고 오게. 나라는 작고 백성은 적은 신라가 어떻게 하여 唐과 싸우고 있는지 알아야 우리가 방위책을 세우는 데도 도움이 될 걸세”
 
  신라 파견 大使가 된 마로가 신라에 가서 본 것은 大國 唐에 대해서는 표면적으로는 순종하면서도 싸워야 할 때는 국가의 존망을 걸고 싸우는 韓民族의 모습이었다.
  신라는 唐과 싸우면서도 불리하면 唐의 황제에게 굴욕적인 사과문을 보냈다. 이제는 신라가 손을 들겠구나 하고 안심하고 唐軍이 쳐들어오면 신라는 다시 들고일어나 백제, 고구려 유민과 함께 손을 잡고 唐軍을 격퇴했다.
 
  마로 대사는 일본인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면 抗戰, 일면 사과’의 신라 전술을 보고는 “대륙에 붙어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이런 굴욕도 참지 않으면 안되는구나”하는 이해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마로 대사는 신라 사람들이 굶어가면서도 對唐결전의지를 꺾지 않는 것을 보고는 감탄한다. 마로 대사는 “지금이야말로 唐軍을 몰아내어 한민족의 국가적 통일을 달성하기 위하여 싸워야 한다는 열정으로 모두가 불타고 있다”고 판단했다.
 
  676년 겨울 신라는 서해의 기벌포에서 唐의 해군과 결전한다. 신라 해군은 초전에서는 졌으나 곧 반격을 개시하여 결국 唐軍을 패퇴시킨다. 마로는 이 전투를 구경한다.
  <唐船이 패주하는 것을 보고 신라의 장병들은 처음에는 믿어지지 않는 듯했다. 추격을 중단하고 도망가는 唐船을 멍하니 보고 있다가 겨우 자신들이 唐에 이겼다는 것을 깨닫고는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는 배의 갑판 위에서 미친 듯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믿을 수 없는 신라의 승리에 충격을 받은 것은 일본 사절단이었다. 당은 백촌강 해전에서 일본해군을 전멸시킨 超강대국이었다. 지금의 상황으로 국제비교를 해보면 唐과 신라는 지금의 미국과 한국의 차이보다 국력 차가 더 컸다. 그 작은 나라 신라가 세계제국인 당을 무찌르고 독립을 지켜낸 것이다. 서기 676년 음력11월의 일이었다. 신라의 판도는 지금의 한국에다가 북한의 3분의 1을 보탠 규모였다. 마로는 통일신라와 우호관계를 맺고 677년 2월1일 귀국했다.
 
  위의 내용은 ‘古代로부터의 증언-壬申의 亂’이란 책에서 인용한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산케이신문 편집위원 야기소우지(八木莊司)씨이다. 천무천황은 신라의 실력을 알아본 뒤 30년 동안 唐과는 국교를 단절하고 신라하고만 대규모 사절단을 교환한다. 일본은 이 30년간 신라로부터 선진문물과 제도, 특히 통일국가를 완성시킨 비결을 배워 와서 일본의 고대국가를 정착시키는 개혁을 한다.
 
  천무천황은 壬申의 亂이란 쿠데타로 집권할 때 신라 도래인의 지원을 받았었고 그 자신이 신라계 사람이란 說도 있다. 唐에 만약 신라가 복속해버렸다면 오늘날 한민족은 존재하지 않고 그때 이미 중국인화되었을 것이다. 신라를 속국으로 만든 唐은 元이 고려를 복속시킨 뒤 그랬던 것처럼 신라군과 함께 일본을 침공하였을 것이다.
 
  신라의 對唐결전이 없었더라면 오늘의 일본인도 없었을지 모른다. 신라가 당의 정복정책에 브레이크를 걸었기 때문에 그 뒤 약 200년간 동아시아에선 평화가 유지되고 찬란한 문명이 꽃피었다. 당시 唐은 세계文明의 중심을 잡았고, 신라는 선진국이었다. 신강성의 省都인 우루무치의 박물관에 가 보면 당나라 때의 지도가 있다. 당과 陸續(육속)한 나라는 전부 청색인데 유일하게 한반도만 백색이었다. 신라가 대륙의 유일한 독립국이었던 것이다.
 
  신라를 미워하는 속성을 가진 일본인들도 감탄한 신라의 삼국통일을 저주하고 깎아내리는 것을 業으로 삼고 있는 역사학자들이 한국에 많다. 민족사의 가장 중요하고 영광스러우며 결정적인 위업을 굳이 부정하려 드는 것은 신라의 민족통일국가 수립의 바탕 위에 세워진 대한민국의 建國을 부정하기 위함이다. 신라의 삼국통일과 대한민국의 수립은 민족사의 2大사건이다. 두 사건중 하나를 부정하면 나머지 하나도 부정하게 된다. 자유통일을 지향하는 오늘의 한국인이 교과서로 삼아야 할 것은 신라의 삼국통일이고 참고서로 볼 만한 것은 독일통일이며 反面교사로 경계할 일은 월맹이 성공한 월남적화통일이다.
 
  벼랑에서 날아버린 新羅   
  
  삼국사기를 읽어보면 신라의 삼국통일은 벼랑에 몰려 死活을 건 생존투쟁을 하는 과정에서 이뤄진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 생존투쟁에 나서도록 신라를 벼랑으로 몰아붙인 것은 백제의 의자왕이었다. 신라 삼국통일의 세 元勳 金春秋, 文武王, 金庾信은 원한과 분노와 걱정을 담고 산 사람들이다. 이런 감정이 그들뿐 아니라 신라지도부에 위기의식을 심어 젖먹던 힘까지 다 쏟아내는 생존투쟁을 하도록 만들었다. 여기서 超人的인 힘이 모여 당초 목표보다 더 높은 삼국통일을 가능케 한 것이다. 삼국통일은 신라 지도부에겐 생존투쟁이면서도 일종의 복수극이었다. 이념은 감정이란 말이 있다. 감정이 이념, 즉 공동체의 이해관계에 대한 자각을 만들어내고 이것이 역사를 바꾸는 수가 있다는 이야기이다.
 
  삼국사기 列傳 김유신條에 이런 글이 있다.
 
  <공의 나이 17세였는데 고구려, 말갈, 백제가 국토를 침략하는 것을 보고 강개하여 구적을 평정할 뜻을 품고 홀로 떠나 중악 석굴에 들어가 재계하고 하늘에 알리어 맹세하기를, '적국이 無道하여 이리와 범이 되어 우리나라를 침요하니 편안한 날이 없습니다. 저는 한 사람의 미약한 신으로서 재주와 힘을 헤아리지 않고 禍亂을 없애기를 뜻하니 오직 하늘이 하강하시어 저에게 능력을 빌려주십시오'라고 하였다. 공이 난승이란 노인을 만나 말하기를 '저는 신라사람입니다. 나라의 원수를 보면 마음과 머리가 아프므로 저의 정성을 민망히 여기시어 방술을 가려쳐주십시오'라고 말했다>
 
  백제 의자왕은 초기에는 海東曾子라는 별명을 들을 정도로 善政을 베풀었다. 그의 실수는 외교에서부터 왔다.
  그는 고구려, 倭와 동맹하여 신라를 여러 번 쳤다. 특히 서기 642년 백제 장군 允充이 지금의 합천 大耶城을 친 것이 문제였다. 당시 政界의 실력자 金春秋의 사위 品釋이 대야성을 지키고 있다가 妻子와 함께 항복했다. 윤충은 품석 부부와 자녀들을 모두 죽이고 머리를 잘라 의자왕에게 보냈다. 왕은 윤충을 표창하고 신라 사람 1000명을 잡아갔다.
  이 소식을 들은 김춘추는 '종일 기둥에 의지하여서 눈을 깜박이지도 않고 사람이나 물건이 그 앞을 지나가도 알지 못하더니, 얼마 후에 말하기를 '슬프다. 대장부가 되어 어찌 백제를 멸하지 못하랴'하고 곧 왕에게 나아가 말하기를 '臣이 고구려에 가서 군사를 청하여 백제에 대한 원수를 갚고싶습니다'라고 하니 왕(선덕여왕)이 허락하였다'고 한다(삼국사기).
 
  대야성의 비극은 金春秋의 원한이 되었지만 그는 목숨을 건 통일외교로써 이 원한을 민족통일 의지로 승화시킴으로써 역사를 바꾸어놓았다. 백제는 대야성에서 전술적 승리를 거두었지만 항복한 敵將을 죽임으로써 신라 지도부에 원한을 심어 결국은 결정적 패배를 자초하고 만다. 백제군이 항복한 김춘추의 사위와 딸을 죽인 데는 아마도 서기 554년에 진흥왕의 군대가 관산성(지금 충북 옥천) 싸움에서 백제의 聖王을 죽인 뒤 시체를 땅속에 파묻고 밟아버린 것에 대한 복수심도 작용했을 것이다.
  김춘추는 고구려, 일본, 唐을 오고가면서 동맹외교를 시도하다가 羅唐동맹을 성공시킨다. 당시 세계최강대국과 손잡은 신라는 백제-고구려-왜의 남북3國동맹을 차례로 격파한 뒤에는 唐과 결전하여 삼국통일을 완성한다. 30여년이 걸린 통일과정이었다.
  신라의 승리와 백제의 패배는 동맹국의 선택에 의하여 결정났다. 삼국사기의 편집책임자 金富軾은 백제本紀의 마지막 장에서 평하기를 '백제는 이웃과 친하게 지내지 못했고 大國(唐)의 명령을 어겼으니 그 망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했다. 이승만이 6.25 전쟁으로 위기에 몰렸을 때 韓美동맹을 만들어 자유통일의 발판을 놓은 것은 김춘추가 위기에서 탈출하기 위해 목숨을 건 외교로써 羅唐동맹을 맺어 삼국통일의 근거를 구축한 것과 통한다. 노무현식으로 동맹을 우습게 여기는 자세는 위기의식이 없이 오만하다는 증거이다. 절체절명의 위기를 당하여 동맹을 중히 여기지 않는 자는 自蔑을 예약한다.
 
  서기 660년 羅唐연합군은 사비성을 점령하여 백제를 멸망시킨다. 삼국사기엔 金法敏(뒤에 문무왕)이 복수하는 장면이 나와 있다.
  <의자왕의 아들 隆이 대좌평 천복 등과 함께 나와 항복하니, 金法敏(뒤에 문무왕)은 융을 말 앞에 꿇리고 그 낯에 침을 뱉으며 꾸짖기를, '지난 날 너의 아비가 내 누이를 원통하게 죽이고 옥중에 묻어 나로 하여금 20년간 마음 아프고 머리 앓게 하였으니, 오늘의 네 목숨은 나의 손에 있다'하니 융은 땅에 엎드려 아무 말이 없었다(서기 660년)>
 
  唐은 백제를 친 신라를 견제하기 위하여 이 부여융을 웅진도독으로 삼아 舊백제땅을 다스리게 하니 신라는 불만이 많았다. 唐은 패전국의 왕자인 부여융과 승전국의 王인 문무왕이 일종의 의형제 관계를 맺어 화해선언을 하도록 강요했다. 한때 부영융의 얼굴에 침을 뱉었던 문무왕으로서는 기가 찰 노릇이었다.
 
  <'백제 부여융을 세워 웅진도독으로 삼아 제사를 받들고 옛 땅을 보존케 하니 신라와 서로 의지하여 여국이 되고 각자 묵은 감정을 없애 화친을 맺을 것이며 각각 詔命(조명)을 받들어 번속이 되어야 한다' 운운(서기 665년 문무왕과 부영융의 웅진 취리산 盟文)>
 
  서기 668년 羅唐연합군은 평양성을 쳐서 드디어 고구려를 멸망시킨다. 당은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두어 고구려 땅을 다스리고, 백제땅은 부여융이 대리통치를 하도록 하고, 신라의 문무왕은 鷄林대도독으로 임명하여 한반도를 속국으로 통치하기 시작했다. 문무왕과 김유신은 이에 對唐결전을 결심하고 먼저 舊백제땅을 공격한다. 唐이 설인귀 장군 이름으로 경고서한을 보낸다. 문무왕이 쓴 답장엔 이러한 대목이 있다.
 
  <'신라와 백제는 屢代의 깊은 원수인데 지금 백제의 형상을 보면 따로 한 나라로 자립할 모양이니 100년 후에는 자손들이 반드시 呑滅(탄멸)될 것이다. 신라가 이미 국가의 州인 이상 두 나라로 나눌 수 없는 일이니 원컨대 한 집안이 되어서 길이 후환이 없도록 해달라'하였소(671년 문무왕이 唐將 설인귀에게 보낸 편지에서)>
 
  즉 신라가 절망적 상황에서 당시 세계최대의 제국과 결전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든 것은, 한반도에 대한 唐의 통치가 오래 가면 백제가 다시 일어나 신라를 쳐서 자손들을 다 죽일 것이라는 공포감이었다. 신라는 또 벼랑에 몰린 것이다. 이 벼랑에서 떨어죽느니 날아버리겠다고 높이 뛰었다. 運도 따라주어 신라는 對唐결전에서 승리하여 한반도를 민족의 보금자리로 만들었다.
 
  대한민국이 지금 신라처럼 벼랑에 몰렸다. 핵무장한 김정일 정권과 이 김정일에게 굴종하는 노무현 정권, 그리고 김정일의 심부름꾼이 친북좌익 세력으로부터 포위당했다. 우리 편이어야 할 미국은 盧 정권의 反美 정책으로 구경꾼 입장을 취하고 있다. 대한민국이 기사회생의 복수전을 펼치지 않으면 100년이 가기 전에 빨갱이들에게 자손이 모두 呑滅될지 모른다. 신라가 당을 상대로 한 전쟁을 결단하여 자존과 독립을 지켜냈듯이 국민들은 생존을 위한 투쟁에 나서야 할 순간에 서 있다. 문제는 얼마나 많은 국민들이 이런 위기의식을 느끼느냐이다.
 
  민족사의 결정적인 危機와 好機에 처하여 내어놓는 대운하 계획이나 열차페리 구상은 소꿉장난 수준이 아닌가? 민족의 챔피언이 되어 김정일과 맞서 자유통일을 완수할 김유신型의 지도자는 어디 있는가? 
   
  신라를 저주한 天皇
 
  서기 562년 신라가 大伽倻, 지금의 高靈을 점령하여 가야국이 최종적으로 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일본의 欽明천황은 이런 한탄을 한다. 일본의 正史인 日本書紀에 적혀 있는 대목을 옮긴다.
 
  <신라는 서쪽 보잘것 없는 땅에 있는 작고도 더러운 나라이다. 하늘의 뜻을 거역하며 우리가 베푼 은혜를 저버리고 皇家를 파멸시키고 백성을 해치며 우리 郡縣(군현)을 빼앗았다. 지난날에 우리 신공 황후가 신령의 뜻을 밝히고 천하를 두루 살피시어 만백성을 돌보셨다. 그때 신라가 천운이 다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 애걸함을 가엾게 여기사 신라왕의 목숨을 살려 있을 곳을 베풀어 번성하도록 하여주었다. 생각해보아라. 우리 신공황후가 신라를 푸대접한 일이 있는가. 우리 백성이 신라에게 무슨 원한을 품었겠느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라는 긴 창과 강한 활로 미마나(가야를 일본에선 미마나라고 불렀다)를 공격하여 온 백성을 죽이고 상하게 하며 간과 다리를 잘라내는 것도 모자라 뼈를 들에 널고 시신을 불사르기를 서슴지 않는다. 그들은 미마나의 우리 친척과 모든 백성들을 칼도마에 올려놓고 난도질을 마음대로 저지른다.
  하늘 아래의 어느 백성이 이 말을 전해듣고 가슴 아프게 생각지 않겠는고. 하물며 황태자를 비롯하여 조정의 여러 대신들은 그 자손들과의 情懷(정회)를 회상하며 쓰라린 눈물을 흘리지 않겠느냐. 나라를 지키는 중책을 맡은 사람들은 윗분을 모시고 아랫사람들을 돌보아 힘을 합하여 이 간악한 무리에게 천벌을 내리게 하여 천지에 맺힌 원한을 풀고 임금과 선조의 원수를 갚지 못한다면 신하와 자손의 길을 다하지 못한 후회를 뒷날에 남기게 될 것이다>
 
 
  欽明천황은 '그들(신라)은 미마나의 우리 친척과 모든 백성들을 칼도마에 올려놓고 난도질을 마음대로 저지른다'고 말했다. 大伽倻(대가야) 지역의 사람들을 倭의 천황이 '친척'이라고 부른다. 이는 고대 일본을 세운 主力 세력이 伽倻에서 규슈를 거쳐 近畿지방(나라, 교토)으로 건너간 伽倻人들임을 암시한다. 동시에 일본의 天皇家가 가야계통 사람들임을 추정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