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학대로 얼굴-손 망가진 그녀, 한국인 첫 간호사 되다
■ 첫 근대교육 받은 2명 1908년 졸업사진 공개
근대식 간호교육을 받은 이 그레이스(왼쪽)와 김 마르다의 졸업사진. 사진 제목에 ‘한국의 첫 간호학생과 졸업장(DIPLOMAS)’으로 기록되어 있다. 대한간호협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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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간호원이 되기 위해 여러 해 동안 준비해 왔고, 결혼을 해도 계속 일할 겁니다.”
서울 중구 정동의 보구여관(保救女館·이대병원의 전신) 간호원양성소 앞에서 여학생이 당차게 말했다. 부모가 딸의 결혼 상대를 점찍던, 여성은 배우자를 선택할 수 없던 구한말. 이 여학생은 남편이 될 이하영 목사의 청혼에 자신의 의견을 또박또박 밝혔다.
원래 이름은 이복업. 양반집의 종이었다. 다리를 다쳐 보구여관에서 치료를 받다가 간호 활동에 관심을 갖게 됐다. 보구여관이 1903년 12월 간호원양성학교를 정식으로 만들자 간호 공부에 뛰어들었다. 학교에서는 이 그레이스로 불렸다.
간호학생의 일과는 오전 7시 시작됐다. 밤 근무를 마친 간호사로부터 ‘야간 보고서’를 건네받고 일을 하다가 오후 5시 야간 근무자를 위해 보고서를 준비하면 끝났다. 밤중에 응급 상황이 발생하면 자다가도 뛰어나가야 했다.
간호이론과 실습교육을 받기 위해서는 글부터 배워야 했다. 당시 여성은 글을 배울 기회조차 없었다. 이 씨에게 간호교육 외에 기초적인 수학을 가르치던 선교사들은 “머리가 영리해 내용을 무척 잘 이해한다”고 기록했다.
김 마르다 역시 처음에는 환자로 보구여관과 인연을 맺었다. 남편의 학대로 손가락 일부와 코가 잘려 치료를 받았다. 자녀조차 못 만나게 되면서 실의에 빠졌다가 자신의 상처를 돌봐주는 병원 사람들에게 마음을 열면서 간호 공부를 시작했다.
두 여성은 근대교육을 받은 첫 한국인 간호사다. 전에도 조선 여성 일부가 병원에서 일했지만 환자의 피고름을 닦는 수준이어서 ‘의사 보조’로 불렸다.
이들의 1908년 졸업식 사진이 국내에 처음 공개됐다. 대한간호협회와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UCLA) 아시아언어문화학과의 옥성득 교수가 한국 간호역사의 뿌리를 찾으려고 3년간 노력한 결과다.
미국인 선교사이자 간호사였던 에스더 실드씨가 조선 여성을 간호사로 양성하기 위해 1920년대 세브란스병원 간호원양성학교에서 사용한 강의록. 당시 해부학 시간에는 진흙으로 뼈의 모형을 만들었다. 대한간호협회 제공
옥 교수는 프린스턴신학교, 뉴저지 주 매디슨 연합감리교회역사연구소 고문서실, 캐나다 토론토의 캐나다연합교회 고문서실, 체코국립박물관을 찾아다니며 자료 100여 점을 수집했다.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겪으면서 국내에서 사라진 근대 기록이다.
성명숙 간호협회장은 “졸업장을 든 두 사람의 사진이 발견됨에 따라 1900년대 초 국내에서 간호 교육이 체계적으로 이뤄졌다는 사실이 확인됐다”고 설명했다.
조선 간호사들이 1923년 4월 17일 조선간호부회를 처음 결성한 사실도 확인됐다. 지금까지는 4월이라고만 알려졌을 뿐, 구체적인 날짜는 알 수 없었다. 간호협회가 나이팅게일의 생일이자 국제 간호사의 날인 5월 12일에 기념식을 했던 이유다.
옥 교수는 “이번에 발굴한 문헌을 통해 여자 간호사들이 남자 환자를 처음으로 치료할 수 있던 시점이 1907년이라는 점을 알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일제가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로 해산하는 과정에서 항의하는 시위가 벌어지고 환자가 크게 늘자 여성도 남자를 간호하는 데 투입했다는 말이다.
간호협회는 이번에 발굴한 자료 100여 점 중 60점을 ‘간호역사 뿌리 찾기 특별전’에서 공개한다. 1920년대에 외국인 선교사들이 한국인 간호사를 가르치면서 사용했던 강의록도 공개된다. 주사를 놓거나 상처를 감싸는 법을 상세한 그림과 함께 보여준다.
전시회는 서울역사박물관에서 다음 달 8일부터 31일까지 열린다. 첫날인 다음 달 8일 오후 2시에는 이만열 숙명여대 명예교수(전 국사편찬위원장)가 전시회의 의미에 대해 설명할 예정이다.
노지현 기자 isityou@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