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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조사관, "나는 金賢姬를 이렇게 檢證했다"

淸山에 2012. 7. 25. 19:58

 

 

 

 

 

美조사관, "나는 金賢姬를 이렇게 檢證했다" 
  
李明山(필명)    


 
 KAL-858 폭파사건이 발생한 지 25년이 지났는데 우리사회에서는 아직도 金賢姬는 가짜라고 우겨대는 한심한 인간들이 설치고 있어서 그 당시 金賢姬 사건을 담당했던 미국정부의 조사관으로서 내가 金賢姬를 어떻게 檢證 했는지 구체적인 眞實을 언론에 다시 한 번 띄운다.
 
 - 1988년 2월 5일 東亞日報 1면 기사 <미국 국무성은 2울 4일 미 하원 외무분과위원회 아세아/태평양 소위원회가 주재한 KAL-858기 폭파사건 청문회에서 미국의 독자적인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클레이턴 맥나마웨이> 국무성 테러담당 대사는 金賢姬 자백의 진실성을 뒷받침 할 수 있는 미국의 독자적인 보강증거를 추가로 제시했다. 고도로 훈련되고 한국어를 유창하게 하는 미국 조사관은 KAL-858기의 폭파가 북한 최고지도자의 지령에 의한 소행이며 金賢姬는 틀림없는 북한 공작원이라고 보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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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金賢姬의 眞實 - 
 
 그녀의 눈에는 아직도 참회의 눈물이 마르지 않았다. 그녀는 116번째의 희생자다.
 
 가, 증인들이 살아있다.
 
 미국이 국제테러리스트 명단에 북한을 포함하는 데는 1970년 일본여객기 “요도호”를 북한으로 납치한 적군파 테러분자들을 아직도 보호하고 있는 것과, 1976년 판문점 도끼만행사건, 1983년 아웅산 폭파사건, 1987년 대한항공 858기 폭파사건 등이 중요한 이유로 되어있다.
 
 그중에서도 무고한 동족 115명의 생명을 앗아간 대한항공 858기 참사가 단순한 테러집단의 행위가 아니라 국가지도자의 명령에 의하여 치밀한 작전계획과 오랜 훈련을 거쳐 자행 되었다는 사실이 그 심각성을 더해주고 있다. 이 사건의 뒤에는 1980년대 남한의 경제가 급성장하고 88올림픽을 앞두고 국제적위상이 높아지고 있을 때 북한은 이를 시기하고 방해하기 위하여 가진 방법을 다 동원하였다.
 
 특히 해외에서는 외교공관을 통하여 88올림픽 서울개최의 부당성을 선전하고 유력인사들을 회유하려고 향응과 선물 등 막대한 돈을 뿌리기도 했으며 치사한 선전공세를 벌렸다. 그러나 그들의 올림픽방해공작이 뜻대로 되지 않자 김정일의 직접지시에 따라 비행기 폭파와 같은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다.
 
 열사의 뜨거운 모래위에서 일하다가 그리운 가족을 만나러 귀국하던 우리 근로자들이 참변을 당했지만 그와 같은 범행을 저지른 북한 공작원 두 명중에 한사람이 생포되어 조사를 받고 이 범행이 북한의 국가지도자의 지시에 의해 진행되었다는 사실이 천하에 밝혀졌는데 그동안 북한과 남한의 좌익 친북세력이 기회만 있으면 이 사건이 남한정부의 조작이라고 터무니없는 생떼를 부렸다. 2003년 11월 24일 동아일보 기사에 보면 서현우(43)라는 사람이 KAL기 폭파 의혹을 소설로 출판하여 물의를 일으키고 이에 분노한 당시에 이 사건을 담당했던 5명의 국가안전기획부 (안기부) 조사관들이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이 사건의 조사는 안기부뿐만 아니라 미국정부도 관여하였음으로 국가안보와 외교관계의 민감한 사안 때문에 공개할 수 없는 부분도 있지만 공개된 자료와 증거만으로도 충분히 이 사건의 진실을 밝힐 수 있다고 믿으며 차제에 반드시 법정에서 진실여부를 규명하고 친북세력들이 다시는 국민들과 희생자유족들을 혼란에 빠뜨리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우선 첫째, 폭약을 비행기 선반에 장착한 두 명의 북한공작원 중 한명인 김현희가 아직 살아있고 이 사건을 담당했던 조사관들이 살아있다. 모든 조사가 끝나고 김현희는 법정에서 사형언도를 받았으나 대통령 특별사면으로 풀려났다.
 
 그토록 흉악한 테러범을 왜 살려 주느냐고 반발하는 유족들도 있었지만 그 사건의 진실여부를 놓고 오늘과 같은 물의가 발생했을 때 범행에 직접 참여했든 장본인이 없었더라면 아무리 조사관들이 증거를 제시해도 의혹의 그림자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김현희가 살아있어야 하는 이유가 몇 가지 있다. 그는 엄밀히 말해서 북한 사회에 태어났다는 이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 사건에 말려들었다. 진정한 범인은 김정일이다. 김현희는 그 목숨이 다할 때까지 그의 눈에서 참회의 눈물이 마르지 않을 것이다. 희생자와 유족들의 아픔의 115배나 되는 무거운 고통을 지고 그가 평생을 살아야한다. 그는 116번째의 희생자다.
 
 그는 대한민국의 수사기관에 최고도의 협조를 했다. 그리고 이 사건의 산 증인으로 그는 살아 있어야한다. 대한민국은 그를 <증인으로 살려두려고> 살려주었다.
 
 나. 조사관들의 자질과 능력
 
 세상에 밥 먹고 할 일이 없어서 그 흉악한 북한독재자의 범행을 덮어버리고 대한항공 858기의 폭파 같은 끔찍한 사건을 한국정부의 조작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어느 나라 국민이며 그들의 주장이 과학적 근거가 있는지 대한민국 수사관들의 능력을 불신하는 이유가 어디 있는지 묻고 싶다.
 
 필자는 이 사건에 관여했던 조사관들을 다 만났으며 그들이 작성한 보고서를 한 줄도 빼지 않고 다 읽었고 김현희도 직접만나 보았다. 대한민국의 수사관들이 다 유능하고 국가관이 투철하지만 특히 국가정보원의 대공수사관들은 그들의 국가관, 안보의식, 수사능력, 인간성 모든 분야에서 대한민국 최고의 엘리트들이였다.
 
 그들이 작성한 보고서를 읽을 때에 그들의 해박한 지식, 치밀한 수사접근과 분석, 철두철미한 방증자료의 이용, 그리고 날카로운 판단 등 참으로 그들이 흐뭇하며 자랑스러운 느낌을 갖게 했다. 그 당시의 수사 총책임자의 말에 의하면 특히 김현희를 조사할 때 몇 가지 원칙을 수사요원들에게 제시했는데 절대로 강압적인 방법을 쓰지 말 것, 순수한 인간애와 진실을 보이고 본인이 스스로 깨닫고 협조할 때 까지 인내하고 기다릴 것 등이었다고 한다.
 
 김현희는 사실 1987년 12월 15일 서울로 압송되어 안기부 대공수사국에 도착한 후 8일간은 비협조적 이었고 자기가 북한 공작원인 사실을 부인하고 교육받은 대로 일본인 <하지야 마유미>로 고집을 했다. 그러나 그가 시내구경을 하고 남산에 올라가 서울의 야경을 보고난 다음날 12월 23일 오후 5시에 처음으로 한국말을 했으며 진실을 토로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후에 그 이유를 물으니 서울에 와서 여러 가지를 보고 듣고 북에서 교육받은 내용과 너무나 차이가 나며 특별히 그가 협조하기로 결심한 이유는 자기를 담당한 조사관들과 협조자들의 따뜻하고 순수한 인간성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제 우리는 과연 김현희가 북한 김정일의 지시에 따라 대한항공 858기를 폭파한 북한공작원이냐 아니면 일부 친북세력이 주장하는 대로 대한민국정부의 조작이냐를 놓고 논리적 해명을 해야 한다. 대공수사에서는 조사관들이 북한의 모든 분야에 걸친 정확하고 해박한 사전지식이 있어야한다.
 
 이 사전지식이란, 공산주의 이론, 북한의 건국 과 권력구조, 권력투쟁과 숙청, 북한의 정부구조와 기능, 당의 조직과 운영, 군부, 경제, 사회, 문화, 교육, 대남공작, 통일정책, 대외정책, 언어, 풍습, 인민생활 수준, 간부들의 비리, 지도급 인사들의 개인 신상문제, 사회갈등, 반체제활동, 인권문제, 국내치안과 보안기관의 활동, 남북한 비교, 그리고 지금 같으면 핵무기를 포함한 대량살상무기개발 등 현안문제, 남북 교류, 국제관계 등 모든 분야에서 많이 알아야한다.
 
 이 사전지식이 없으면 상대방이 허위진술을 하는지 진실을 말 하는지 판단할 수가 없다. 그리고 조사관들은 심리학적 감각이 예리해야한다. 상대방의 행동과 태도, 말과 눈빛, 일거수일투족에서 상대방의 진실여부를 탐지한다. 그리고 조사관은 자기 스스로 진실하고 진지해야하며, 상대방이 마음속으로 존경할 수 있게 처신해야하며, 무식하고 경망하거나 진실성이 없다는 인상을 주면 상대방의 협조를 기대하기 어렵다. 그리고 조사관들은 대화에서 조리가 있어야하며, 논리가 정연하고, 설득력이 있어야한다. 말도 되지 않는 말로 상대방을 설득할 수 없다.
 
 조사관들이 이와 같은 자격과 자질을 갖추어야하는 이유는 상대방의 진실을 이끌어내기 위한 기본 조건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유능하고 훌륭한 조사관이라도 상대방이 허위진술을 하면 조사를 진행할 수가 없다. 그래서 모든 형태의 수사에서 피의자를 심문할 때 꼭 지켜야하는 절차가 있다.
 
 우선 간단한 인적사항을 질문하고 그 다음은 어떤 내용이건 심문을 진행하는 척 하면서 실제로는 상대방의 진실성 (bona fides) 판정을 위한 내용의 질문을 하되 절대로 상대방이 눈치를 채서는 안 된다. 조사관이 자기의 모든 상식과 지식을 동원해서 상대방이 진실을 말하고 있다고 판정하면 그 때부터 본격적인 심문에 들어간다. 그러나 어떤 지능수준이 높고 각오가 단단한 피의자는 교묘하게 허위진술을 계속한다. 그런 경우에 사용하는 기술이 있다. 조사관은 절대로 화를 내서는 안 되며 부드럽고 편안한 태도로 상대방을 대하고 언제나 마음 놓고 상대방이 무슨 말이고 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해야한다. 하루고 이틀이고 필요하면 일주일이고 실컷 떠들어대고 다 기록해 둔다. 그리고 어떤 시점에서 지금까지 한말을 정리하는 식으로 다시 묻기 시작한다.
 
 지구상에서 어떤 천재라도 자기가 한말이 진실이 아니고 꾸며낸 허위진술이라면 이 반복심문에서 허위가 들어난다. 다시 말해서 상대방의 일관성 (consistency)을 탐지 하는 것이다. 김현희를 담당했던 안기부 조사관들은 이런 점에서 아주 유능하며 투철하다. 김현희는 그 방대한 양의 심문조서에서 끝까지 이 일관성을 유지했으며 대한민국 정부는 그가 김정일의 지령에 의하여 대한항공 858기를 폭파한 북한 노동당 대외정보조사부 소속 공작원임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다.
 
 다. 방증자료의 대조와 분석
 
 안기부의 조사가 끝나고 이 사건의 내용이 보도되었을 때에도 북한은 악랄하게 남한의 조작이라고 우겨댔으며 국내 친북세력이 이에 동조했고 심지어 일본의 교도통신을 포함한 해외 언론에서도 이 엄청난 사건의 진실성 여부를 놓고 약간의 의문을 제기했던 것은 사실이다. 이때 국제테러에 대해서 가장 많은 관심을 갖고 또 방대한 자료와 수사능력을 갖추고 있는 미국정부가 개입을 했다.
 
 한국정부의 승인과 협조를 받고 미국은 이 사건의 독자적인 수사를 진행했다. 수사내용은 한국정부가 발표한 내용이 100% 진실이라는 것을 확인했을 뿐 아니라 추가적으로 확고부동한 단서와 근거를 제시했다. 첫째, 김현희가 안기부 조사관들에게 진술한 그 방대한 분량의 진술 내용과 미국 측에 진술한 내용에서 추호도 차이점이 발견되지 않았다. 만약 김현희가 북한공작원이 아니고 남한에서 조작한 인물이며 남한정부가 훈련을 시켜서 본인이 북한공작원인 것처럼 행동을 했다고 가정하자.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물론 김현희는 지능지수가 높고 대단한 기억력을 갖고 있었지만 세상에 뛰어난 천재라 할지라도 진실이 아니면 허위는 반드시 드러나게 마련이다. 심리학적으로 피의자는 수사관 앞에서 거짓말은 세 번 이상 사용할 수 없으며 3일 이상을 지탱하지 못한다. 그의 출생, 학교생활, 가족관계, 공작원 포섭과정, 공작교육을 받은 초대소 위치와 환경, 복잡하고 어려운 공작교육내용, 심지어는 매일매일 일과스케줄 까지, 접촉한 인물들, 외국어학습, 공작실무교육과 유럽 주요도시와 마카오 까지 여행하면서 실시한 해외실습, 중국실습, 마카오실습, 광주 2차 파견, 및 암호문해독 등 전문지식과 실제경험이 없이는 그가 다 기억할 수가 없다.
 
 1988년 2월 4일, 미국 국무성은 하원 외무위원회 아세아태평양 소위원회 (위원장 스티브 쏠라즈)가 주재한 KAL-858기 폭파사건에 관한 청문회에서 미국정부의 독자적인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그 내용이 1988년 2월 5일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포함한 국내일간신문에 보도 되었다. 그때의 보도내용을 간추려서 반복하면 다음과 같다.
 
 클레이턴 맥나마웨이 국무성 테러담당 대사가 김현희 자백의 진실성을 뒷받침하는 미국의 독자적인 보강증거를 제시했는데 그 독자적인 보강증거의 내용은 이렇다.
 
 “고도로 훈련되고 한국말을 유창하게 하는 미국정부의 관리가 김현희를 직접만나 조사를 했다.” - 김승일과 김현희가 사용한 자살용 독약은 청산염으로 과거에도 북한 공작원들이 사용했다. 그들이 소지한 위조여권은 일본정부가 북한 간첩으로 파악하고 있는 사람의 협조로 일본의 실재인물의 인적사항을 도용한 것이다.
 
 미국의 조사관이 약 40매의 북한인물 사진을 제시하고 아는 사람을 지적하라고 했을 때 김현희는 그 많은 사진 중에서 두 사람을 골라내어 하나는 대외정보조사부 부부장이며 김현희가 공작임무를 받고 평양을 떠날 때 김정일의 특별지령문을 읽어주고 김정일 초상화 앞에서 충성의 맹세 의식을 집행한 <이용혁>이며 하나는 그가 헝가리 수도 부다페스트에 체류했을 때 그를 관리했던 지도원 <한송삼>이라고 분명하게 말했다.
 
 이 사진의 얼굴은 한국정부도 미국의 조사관도 한 번도 본 일이 없는 사람들이며 워싱턴에서 정확한 정보라고 판정을 했다. 미국의 조사관은 김현희에게 부다페스트에 체류했을 때 지도원 <한송삼>이 관리하는 아지트를 사용했는데 그 집의 건축구조와 정원과, 출입문과 주위환경을 묘사하라고 했다.
 
 김현희는 약도를 그리고 정원에 정원수가 몇 그루 있으며, 집 출입문은 철문이고 페인트 색은 무엇이고 집밖에는 큰 공터가 있고 폐차장이 있었다고 진술했다. 그의 진술은 미국이 이미 보유하고 있던 정보와 정확하게 일치했다. 당시 한국은 헝가리와 국교가 없었기 때문에 현지공관도 없었고 그와 같은 자료는 사용할 수가 없었다.
 
 김현희는 조사를 받을 때 북한특유의 용어를 사용했고 <했습니다> 또는 <아닙니다> 할 때 말끝을 빨리 끝내는 북한 억양을 시종일관하게 사용했다. 그가 사용한 북한 용어 중에 이런 것들이 있다. 우리가 몇 사람이 모여서 회식 하는 것을 그는 <동석식사>라고 했고, 상호간을 <호상간>으로, 수사관을 <특무>로, 덴마크를 <단마르크>로, 헝가리를 <웽그리아>로, 폴란드를 <뽈스카>로, 스웨덴을 <스웨리>로, 독일 소시지를 <독일 순대>로, 탈당을 <출당>이라고 말했다. 그래도 김현희를 한국 안기부가 조작하고 훈련한 인물이라고 주장할 수 있겠는가.
 
 라. 무엇이 진실인가
 
 김현희를 처음 대했을 때 느낀 인상은 저렇게 영리하고 미모의 젊은 여자를 115명의 무고한 동족을 살해한 무시무시한 테러리스트라고 생각하기가 힘들었다.
 
 그의 시선을 바라보았을 때 말로 표현이 안 되는 무서운 참회와 고통이 서려있었다. 26세, 발랄하고 무성한 청춘의 좋은 시절을 보내야할 그 나이에, 국제 테러리스트라니! 그의 범죄를 따지기 전에는 일단 그도 우리의 귀여운 딸이다. 누가 그를 저렇게 만들었나.
 
 북한은 여러 면에서 국가라고 보기에는 오히려 광신도집단이라고 생각을 하게 된다. 절대독재자 (교주)가 명령을 하면 신도들은 앞뒤를 따지지 않고 신명을 다 바쳐 따라야한다. 과거에 지구상에 존재했던 모든 cult 집단 (일인숭배 광신도집단)이 그러했고 그들은 절대로 설득이나 타협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이며 결국에는 파멸로 끝나는 사람들이다. 북한의 김정일 독재집단이 바로 그런 집단이며 생명을 걸고 그를 추종하는 인민이 약 300만 정도 되며 나머지는 저들을 먹여 살리기 위한 노예 노동자들이다.
 
 남한에도 김정일 독재집단을 동조하는 얼빠진 인간들이 약 500만 정도라고 하니 참으로 통곡할 일이다. 북한에는 김일성과 김정일을 위한 동상이나 조형물이 약 35,000개나 된다고 하며 유네스코의 보고에 의하면 통일이 되어도 이 더러운 조형물을 제거하는데 약 10-15년이 걸린다고 한다.
 
 김현희도 태어나서부터 그런 분위기 속에서 자란 희생물이며 그가 깨닫고 뉘우치기 전까지는 수많은 동족의 생명보다 김정일의 악독한 계략을 절대 소중하게 여겼던 사람이다. 그런 체제 밑에서 아리따운 처녀 김현희가 무시무시한 국제 테러리스트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다시 한 번 짚어보겠다.
 
 김현희는 1962년 1월 27일 평양시 동대원구역 동신동에서 아버지 김원석 어머니 임명식의 2남2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1963-1967년에는 쿠바주재 북한대사관 3등서기관이었던 아버지와 함께 하바나 에서 살았고, 1968년 9월에 평양시 서성구역 하신동 하신인민학교에 입학, 재학 중에는 영화에 아역으로 출연했다.
 
 1972-1977년 평양 중신중학교에 재학, 중1때 또 아역으로 영화에 출연. 1977년 8월 김일성 종합대학에 입학, 예과 1년 마치고, 1978년 9월 평양외국어대학 일본어과에 입학. 1980년 3월 외국어대학 2학년 때 3차의 면접시험을 거쳐 당에 소환되어 중앙당 대외정보조사부 공작원으로 그의 비운이 시작 되었다.
 
 그리고 여러 비밀 초대소에서 밀봉교육을 받았고, (1980/4-1981/4)에는 금성정치군사대학 (공작원양성소) 에서 체계적인 대남공작 기초교육을 받았고, (1981/4-7)에는 남한실정 교육을, (1981/7-1983/3)에는 일본어와 일본인화 교육을 받았다.
 
 1982년 4월 13일 노동당에 입당. (1983/3-1984/7)에는 본격적인 공작원 실무교육을 받았고, (1984/8-10)에는 당시 70세가량의 노인 김승일과 배합, 김승일은 <하지야 신이찌>로 김현희는 <하지야 마유미>로 일본인 부녀로 위장, 임무수행 훈련을 시작, 1984년 8월 15일 두 사람은 담당지도원 1명과 함께 평양을 떠나 모스코, 부다페스트, 비엔나, 코펜하겐, 프랑크푸르트 까지 여행, 담당지도원은 마카오로 가고 김승일-김현희 조는 쥬리히, 제네바, 파리로 갔다. 9월 20일 파리에서 김승일은 서울로 가고 김현희는 방콕, 홍콩을 거쳐 마카오로 갔다.
 
 9월 26일 담당지도원과 김승일과 김현희가 마카오에서 다시 합류했다. 그리고 김승일-김현희 조는 중국 광주와 북경을 거쳐 평양으로 돌아갔다. 두 사람은 이번 해외여행에서 3만 3천 달러를 사용했다. (1985/1-6)에는 용성 5호 초대소에서 중국어 교육을 받고, (1985/7-1986/8)에 김현희는 김숙희와 조가 되어 중국 광주에서 현지실습과 북경어와 광동어 실습을 했다. 두 사람은 평양중앙방송에서 발신되는 암호통신을 수신하여 해독하는 실습도 했다.
 
 (1986/8-1987/1) 위 두 사람은 마카오로 옮겨 명주대 아파트 1동3층 A호실에 살면서 <하지야 마유미>와 <다가하시 게이고>로 된 위조일본여권을 사용했다. 여기서 그들은 평양에서 발신되는 암호통신을 해독하는 실습을 계속했고 미용실, 은행, 영화관, 환전소, 택시 등 자본주의 국가의 편의시설 이용법을 익혔다. (1987/2-9) 평양에 돌아가 용성43호 초대소에서 사상재무장 교육을 받고 4월 15일에는 김현희가 가족을 만나러 휴가를 갔다. 이것이 김현희가 부모를 만나는 마지막일 줄을 누가 예측 했겠는가.
 
 (1987/9-10) 마카오 이민국에서는 대륙에서 밀입국한 난민들에게 영주권을 준다는 뉴스를 접하고 김현희와 김숙희가 다시 마카오 인접도시 광주로 파송되었다. 김현희는 마카오에 잠입하여 우잉 (吳英)이란 흑룡강성의 실존인물의 이름을 도용하여 출생과 가족관계 등 구체적인 내용을 사전에 암기하고 있다가 마카오 영주 신분증을 쟁취하도록 되어있었다. 그러나 1987년 10월 4일 김현희는 단독으로 귀국하라는 급한 지시를 받고 10월 7일 평양에 도착했다. 중요한 일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 공작임무
 
 
 1987년 10월 7일 밤8시 동북리 초대소에서 김승일과 김현희는 노동당 중앙위원회 대외정보조사부의 최고 간부로부터 공작임무를 받았다. 두 사람은 일본인으로 위장하고 여행하면서 “남조선 비행기를 제끼는 것” 이라고 했다. 목적은 88올림픽을 앞두고 “남조선 괴뢰의 2개조선 책동을 막고 적들에게 큰 타격을 주기위한 것”이라고 했다.
 
 
 그 후 그들은 담당 지도원들과 함께 5일간 동북리 초대소에서 구체적인 작전계획을 토의했다. 공격 목표는 1987년 11월 28일 바그다드발 아부다비경유 서울행 대한항공 858기였다. 이 때 김승일이 이의를 제기했다. “중동에 이란-이라크 전쟁이 진행 중이기 때문에 그 지역 공항 검문검색이 심하다”고 했으나 조사부 최 과장이란 사람이 이를 묵살하고 “이 임무는 김정일 동지의 친필비준이 난 계획임으로 수정할 수 없다” 고 단호하게 말했다.
 
 이 임무를 수행하기위해 조사부 테러담당 전문가 4인이 한 달간의 연구토론 끝에 최종확정한 작전계획은 이러했다.
 
 [1987년 11월 12일 김승일 김현희 공작조 평양출발, 11월 14일 모스코에서 부다페스트로 이동, 부다페스트 아지트에 4박5일간 체류, 비엔나로 이동 6박7일 체류, 비엔나에서 비엔나-베오그라드-바그다드-아부다비-바레인행 항공권 구입, 아부다비-바레인은 위장 루트이고 그들은 별도로 아부다비-암만-로마행 비행기표를 구입할 것. 11월 24일 비엔나에서 베오그라드로 이동 4박5일 체류 중 11월 27일 메트로폴리탄 호텔에서 임무담당과장과 지도원을 만나고 비행기 폭파용 시한폭탄 인수, 11월 28일 베오그라드출발 바그다드도착, KAL-858기 탑승직전에 시한폭탄 (트랜지스터 radio)을 정확히 9시간 후에 폭발하도록 작동시킬 것, 11월 28일 23:45 바그다드에서 KAL-858기 탑승, 시한폭탄을 비행기 선반에 둔 채 아부다비에서 내릴 것. 11월 29일 02:50 아부다비공항 도착 후 현지이탈, 바레인으로 가지 말고 11월 29일 09:00 이탈리아 항공편으로 로마로 갈 것. 로마 도착 후 2박3일 관광하고 12월 1일 11:00 이탈리아 항공편으로 비엔나로 빠지고 즉시 평양으로 돌아올 것.]
 
 이와 같은 작전계획에 따라 11월 10일에는 동북리 초대소에서 격려 및 송별을 위한 파티가 있었고 11월 12일 아침 6시30분경, 김승일과 김현희는 폭파담당 지도원들과 더불어 조사부 부부장 <이용혁>이 지도하는 대로 김정일에 대한 충성맹세문을 낭독했다. [전약 - 생명의 마지막까지 친애하는 지도자동지의 높은 권위와 위신을 백방으로 지켜 싸우겠습니다.] 그리고 그날 08:30 순안 비행장을 떠나 모스코로 갔다.
 
 바. 죽음의 행진
 
 김승일과 김현희는 대체적으로 위에 언급한 작전 계획에 따라 여행을 했고 1987년 11월 28일 밤11시10분경 예정대로 바그다드에서 KAL-858기에 탑승하고 7B와 7C 좌석에 앉았다. 머리 위 선반에 쇼핑백에 든 시한폭탄 (폭약이 장착된 트랜지스터 radio와 콤포지션 액체 폭약)을 두고 11월 29일 새벽 02:44에 아부다비에 내렸다. (KAL-858기는 그날 아침 8시경 버마 남쪽 안다만 공해상공 약 11km 하늘에서 115명의 생명과 함께 폭파되었다.)
 
 두 사람은 그날 아침 9시 로마행 비행기를 타려고 통과여객 대합실에 들어갔다. 출구에서 공항안내원이 항공권과 여권을 제시하라고 요구하자 김승일이 당황했다. 탈출용으로 별도로 사 두었던 아부다비-암만-로마행 항공권을 제시할 경우 아부다비가 출발지로 되어있어 원칙적으로 통과 비자를 받아 일단 공항 밖으로 나가 입국수속을 취한 뒤에 다시 출국 수속을 거쳐 비행기에 탑승해야 하는 것이다.
 
 평양에서 루트를 연구할 때 아부다비에서는 일본인이 통과 비자를 받을 수 없다는 설명을 들었다. 통과여객 대합실로 들어가면서 아부다비까지 오게 된 과정이 명시되지 않은 항공권을 제시하면 분명히 의심을 사게 될 것이라고 믿고 김승일과 김현희는 할 수 없이 바레인행 항공권과 여권을 제시했다. 안내원은 탑승수속을 대신해주고 바레인행 탑승권을 건네주었다.
 
 두 사람은 대합실에서 기다리다가 마음에 내키지 않는 오전 9시발 바레인행 비행기를 탔다. 아부다비에서 퇴로를 설정하는 작전계획에 결정적인 실수가 있었다. 이 때 만일 로마로 무사히 빠졌으면 그들을 체포할 수 없었을지도 모르고 KAL-858기 폭파사건은 영원히 미스테리로 남아 북한이 주장하는 대로 남한의 조작극으로 치부되고 말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KAL-858기 폭파 뉴스를 접한 안기부는 전 세계 조직망에 비상을 걸었다.
 
 폭파직전 출발지인 아부다비에서 내린 승객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일본인 두 사람이 나타났고 바레인 입국카드에서 수상한 점을 발견했다. 입국카드에 일본인 두 사람이 성을 쓰지 않고 이름만 “신이찌” 그리고 “마유미” 라고 기재한 것이다. 안기부는 현지 직원과 대한항공 출장소 직원들을 동원하고 일본경찰에 조회하여 그들이 소지한 여권이 위조여권이란 사실을 발견하게 되고 바레인 인터내셔널 호텔에 투숙하고 있는 그들이 일단 북한 공작원이라고 단정하고 수사를 진행했다.
 
 11월 30일 밤9시에 현지 한국대사관 서기관 한사람이 호텔을 방문하여 신이찌를 만나고 신원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영어와 한자 필답으로 의사를 소통하고 KAL-858기가 폭파하여 탑승객 전원이 사망했다는 사실을 발설했다. 12월 1일 아침 김승일은 모든 것을 체념하고 태연 하였다고한다. 비행장으로 가기 전에 독약 앰풀이 들어있는 말보로 담배 한 갑을 김현희에게 주면서 혹시 사용해야할 일이 있을지 모르니 보관하고 있으라고 했다.
 
 비행장에 가서 로마행 탑승수속을 마치고 출국신고카드를 작성 출국검색대를 통과하려고할 때 대기 중이던 일본대사관 직원이 여권과 출국신고카드 제시를 요구하고, “당신들은 위조여권 소지자들이니 일본비행기로 일본에 가야한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바레인 경찰관 5명이 그 두 사람을 에워쌌다.1987년 12월 1일 오전 9시, 김승일은 김현희에게 “이젠 모든 것이 끝장이다. 여기서 약을 먹자”고 했다. 바레인 경찰이 그들을 공안실로 데리고 가 몸수색을 한 후 대합실에 가서 대기하고 있을 때 김승일이 김현희에게, “나는 살만큼 살았기 때문에 괜찮지만 젊은 마유미상한테는 정말 미안하다”는 고별인사를 했다.
 
 이들의 태도가 수상하자 경찰이 가방을 압수할 때 김현희는 재빨리 가방에서 독약앰풀이 들어있는 말보로 담뱃갑을 꺼낸 뒤 가방을 건네주었다. 지켜보던 다른 경찰관이 “그 담배도 달라”고 했다. 담배를 빼앗으려고 안 빼앗기려고 실랑이를 하는 동안 김승일은 완전히 독약 앰풀을 깨물어 삼켜 즉사하고 김현희가 담배를 입에 물고 깨무는 순간 <아람 핫산>이란 경찰관이 재빨리 그를 덮쳐 김현희는 앰풀 끝부분을 깨물어 청산액체가 기화되면서 기공으로 들어가고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모든 후속조치와 양국간의 협의가 끝나고 김승일의 시체와 자살에 실패한 김현희는 1987년 12월 15일 서울로 압송되었다.
 
 사. 의심하는 사람들의 넌센스
 
 이 사건은 너무나 엄청난 사건이며 같은 동족에 대한 비굴한 범죄행위로 전 세계가 치를 떨었다. 그러나 이 사건을 계기로 88올림픽의 안전을 위하여 여러 나라들이 협조를 했고 특히 미국은 올림픽개최 수개월 전부터 한국 대테러요원들을 훈련했고 대규모의 대테러실무자들을 서울에 파송하여 공항 출입국 단속과 국제 테러리스트 조직과 그들에 대한 자료 제공 등 철두철미하게 한국정부와 협조하며 서울 올림픽의 성공을 숨어서 도와주었다.
 
 우리 일반국민들 가운데 이와 같은 사실을 아는 사람들이 몇이나 될까. 서울올림픽의 성공은 대한민국의 위상을 온 세상에 떨쳤고, 소련을 위시한 동구권 나라들과 국교를 정상화하는 길을 열었고, 국제무역과 경제교류를 활성화하는 데 지대한 기여를 했다.
 
 북한은 어째서 대한민국을 파괴하려고 기를 쓰고 있으며 세상이 다 알고 있는 저들의 범죄행위를 왜 한국정부에 뒤집어씌우려고 하는 것인가. 슬픈 일은 KAL-858기 폭파의 희생자 유족들 일부까지도 저들과 동조하여 가해자인 북한을 비호하고 같이 슬퍼해야 할 피해자인 한국을 의심하고 공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