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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가장 감사해야 할 나라는?

淸山에 2012. 7. 8. 06:19

 

 

 

 

 

한국에 가장 감사해야 할 나라는? 
 
 
 6.25 덕분에 지옥 문턱에서 살아난 臺灣(대만)이다. 
趙甲濟    
 
 지구상에서 한국에 가장 감사해야 할 나라는 어디일까? 한국이 미국에 감사해야 하듯이. 정답은 臺灣(대만)이다. 한때 자유중국으로 불렸던 나라이다. 1992년 盧泰愚 정부가 중국과 수교하기 전까지 한국은 대만을 중국 전체를 대표하는 유일한 합법정부로 대우하였다. 대만 정부의 창설자 莊介石(장개석)은 1949년 모택동에 밀려날 때까지 중국 본토를 다스리면서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모택동은 1949년 10월 중국 본토 정복을 끝낸 뒤 대만으로 도망 친 장개석 군대를 섬멸할 계획을 세웠다. 1950년 초엔 약15만 명의 상륙 병력과 약4000척의 선박을 중국측 對岸(대안)에 집결시켰다. 소련 독재자 스탈린은 무기 지원을 약속하였다. 바로 그 시기 트루먼 대통령은 미국이 대만에 대한 모든 군사적 지원을 끊는다고 발표하였다. 사실상 대만을 포기한 것이다. 중국의 대만 점령은 시간문제로 보였다. 이 발표가 있었던 1950년 1월5일 모택동은 모스크바에서 스탈린과 中蘇동맹 협상을 진행중이었다. 미국이 이때를 잡아 대만 포기를 선언한 것은 中蘇 동맹을 맺지 않으면 미국이 문호를 열어놓고 기다리고 있겠다는 모택동에게 보낸 암시였다. 스탈린은 모택동이 유고슬라비아의 티토처럼 독자노선을 걸을까 걱정하고 있었다. 만약 공산 중국이 미국 영국 등 서방국가들과 수교하여 독자노선을 걷는다면 스탈린과 소련의 국제공산주의 세력에 대한 지도력은 약해지고 미국은 中蘇를 분열시키려 할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스탈린은 모택동의 중국을 소련의 영향력 안에 잡아두기 위하여 당근과 채찍을 번갈아 사용하고 있을 때였다. 바로 이때 김일성은 스탈린으로부터 남침 허가를 받으려고 보채기 시작하였다.
 
 전쟁과 정치의 본질을 잘 이해하는 노련하고 냉정한 스탈린은 김일성과 모택동을 조종하면서 미국을 치는 기회가 왔다고 생각한다. 소련은 1949년 여름에 核실험에 성공하여 미국의 핵무기 독점 시대를 끝낸다. 비슷한 시기에 중국이 공산화되었다. 핵무장한 소련과 인구가 가장 많은 중국이 손을 잡으면 미국 등 자유세계에 대항할 힘이 생긴다. 어떻게 하면 중국이 중립진영이나 미국측으로 넘어가는 것을 막고 소련 밑에 붙들어두는가였다. 이는 세계의 판도를 결정할 문제였다.
 
 이때 김일성이 찾아와서 남침 허가를 내려주고 군사적 지원과 전쟁 지도까지 해달라고 스탈린에게 매달린 것이다. 스탈린은 김일성을 미끼로 삼고 한반도를 국제전쟁터로 만들어 중국과 미국이 싸우도록 하면 중국은 자연히 소련에 의존하게 될 것이고 미국과는 敵이 될 것이라고 계산한다.
 
 문제는 대만이었다. 모택동의 중국은 대만 공격 시기를 1950년 여름으로 설정하였다. 김일성의 남침 예정시기와 겹친다. 만약 모택동의 중국군이 미국으로부터 버림 받은 대만을 먼저 공격, 점령해버리면 모택동은 홀가분한 입장에서 대만점령을 방임해준 미국에 접근하려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스탈린은 중국과 미국을 한반도에서 싸우게 할 수 없게 된다. 중국의 대만 공격이 먼저인가, 북한군의 남침이 먼저인가에 따라서 세계사가 달라질 순간이었다.
 
 이 순간 스탈린은 대만침공과 한국공격 시기를 결정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모택동과 김일성은 거의 동시에 스탈린에게 공격을 위한 무기 지원을 요청하였다. 스탈린은 김일성의 남침을 우선적으로 지원하기로 한다. 1950년 4월 모스크바를 찾아온 김일성에게 스탈린은 "무기를 지원한다. 전쟁계획도 만들어준다. 그러나 미국이 개입해도 소련군을 보낼 순 없다"고 못을 박은 뒤 조건을 단다.
 
 "모택동을 찾아가 설명하고 양해를 받으라. 양해를 얻지 못한다면 재검토하자."
 
 스탈린은 김일성의 남침에 모택동을 보증인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김일성은 5월에 모택동을 찾아간다. 모택동은 김일성의 남침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겠다고 약속한다. 미군이 개입하면 중공군을 보내겠다고까지 했다. 김일성은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고 호언장담하였다. 스탈린과 트루먼 같은 사람들이 요리하는 냉전시대의 국제정치판에서 불학무식한 김일성은 이용가치밖에 없었다. 스탈린이 자신을 미끼로 삼아 미국을 한반도로 끌어들여 중국과 싸움을 붙이려 한다는 것을 알 턱이 없었다.
 
 1950년 6월25일 김일성이 남침하였다. 미국 시간으로 6월27일 오전 트루먼 대통령은 장관들 및 의회지도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두 가지 역사적 발표를 한다. 우선 미국의 해공군력으로 한국을 지원하도록 하였다는 것(3일 뒤 육군파병 결정), 그리고 미 7함대를 대만 해협으로 보내 중국의 침공으로부터 대만을 지키도록 명령하였다는 것이었다. 트루먼의 결단으로 두 나라가 살아났다. 이 두 나라는 그 뒤 경제개발에 성공, 1인당 국민소득(구매력 기준)에서 머지 않아 미국을 따라잡게 된다.
 
 김일성이 먼저 남침하는 바람에 모택동의 대만 점령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모택동의 不運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스탈린은 유엔군이 인천상륙 후 북한군을 무너뜨리면서 38선을 넘어 北進하자 모택동에게 파병을 압박한다. 김일성도 파병을 애걸한다. 모택동은 대만 점령을 위하여 모아두었던 병력을 한국으로 보내게 되었다. 그리하여 미군과 싸운다. 미국과 친선관계를 맺을 수도 있었던 아주 짧은 기회의 시간은 닫히고 기나긴 美中 敵對의 시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이 시기 중국은 미국 등 서방세계로부터 고립되어 선진기술을 도입하지 못하게 된다. 모택동이 일으킨 대재앙인 대약진 운동과 문화대혁명으로 수천 만 명이 죽어나간 것도 이 시기였다. 그 22년 뒤 닉슨 대통령 시절 비로소 美中 관계에 돌파구가 생기고 본격적인 개혁 개방은 30년이 흐른 1980년대부터였다. 모택동과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이용당하여 인민들을 도탄에 빠뜨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