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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秘話-스탈린이 김일성의 승리를 방해?

淸山에 2012. 7. 7. 14:05

 

 

 

 

 

6.25전쟁秘話-스탈린이 김일성의 승리를 방해? 
 
 
 "한반도에서 미국과 중국이 싸우도록 하여 美中 접근을 차단하는 게 목적이었다"
趙甲濟    


 
 최근 100년간 일어난 전쟁중 世界史의 흐름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전쟁은 1914년의 제1차 세계대전, 1939년의 제2차 세계대전, 그리고 1950년의 6.25 南侵전쟁이다. 1960년대의 월남전쟁이 한국전보다 더 많이 보도되고 영화로도 더 많이 다뤄졌지만 세계사의 흐름에 끼친 영향은 의외로 작다. 東南亞라는 지역과 東北亞라는 지역이 가진 전략적 가치가 다르기 때문이다.
 
 6.25 전쟁에 대한 연구는 요즘 더 활발하다. 그 의미가 날이 갈수록 커지기 때문일 것이다. 6.25 전쟁은 '스탈린의 전쟁'이었다는 방향으로 정리된다. 스탈린이 기획하고 지휘하고 그의 죽음으로 휴전한 전쟁이기 때문이다. 스탈린은 김일성을 미끼로 이용, 미군 등 유엔군과 중공군을 한반도로 끌어들여 국제전쟁터로 만들었다. 한국군, 북한군, 중공군, 미군, 유엔군, 그리고 민간인들을 합쳐 약300만 명이 죽었다. 전쟁을 일으킨 소련의 人命 피해는 조종사 수백 명(많아야 1000명 수준) 정도이다.
 
 그렇다면 스탈린이 勝者인가? 60년 전엔 그렇게 보였으나 그가 일으킨 전쟁 때문에 미국 등 서방세계가 國力을 총동원, 국제 공산주의 세력에 정면승부를 걸어 이를 무너뜨렸으니 지금은 敗者로 굳어졌다.
 
 스탈린의 목적은 무엇이었던가? '한반도를 국제戰場으로 만들어 이곳에 미국과 중국을 끌어들여 싸우게 하는 것이었다'는 데 연구자들의 의견이 거의 일치한다. 여기서 김일성과 스탈린의 목적이 달라진다. 김일성은 소련과 중공의 도움을 받아 남한을 쳐 부수고 한반도를 공산화 통일하는 게 목적이었다. 스탈린은 중국과 미국이 붙어서 오래 싸우게 함으로써 出血을 시키는 게 목적이었다. 그렇게 되면 소련의 세계전략에 유리한 판도가 만들어진다. 중국은 미국 등 서방세계와 敵이 되므로 자연히 소련에 의존하게 된다. 중국을 통일한 모택동은 대만을 점령하고 미국과 수교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 스탈린은 중국과 미국이 가까워지는 것을 막는 데 전략의 최우선 순위를 두었다. 중국과 미국의 접근을 막는 가장 좋은 길은 서로 싸우게 하는 것이었고 그 무대를 한반도로 설정한 것이다. 김일성은 도구로 이용되었다.
 
 하지만 김일성이 기습 南侵의 여세를 몰아 단시간에 부산까지 밀고내려가 한반도 赤化통일을 성공시키면 미군의 상륙이 불가능해지고 스탈린의 목적은 이뤄질 수 없다. 미국이 들어오고, 이어서 중국군을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북한군이 너무 빨리 부산을 점령하면 안 된다. 그래서 스탈린은 김일성의 早期 승리를 막기 위하여 여러 가지 수를 썼다는 주장이 나온다. 정 창-존 핼리데이 共著인 '毛澤動 秘話'와 리처드 C. 소른턴 교수(조지 워싱턴 대학)가 쓴 '왕따'(ODD MAN OUT)이란 책이 대표적이다.
 
 黃長燁 선생도 작고하기 전 필자에게 재미 있는 비화를 들려주었다. 김일성이 남침 전쟁에서 이기지 못한 것은 서울을 점령한 뒤 근 1주일을 머뭇거리면서 漢江을 건너지 못한 때문이라고 아쉬워하더란 것이다. 그 원인에 대하여 김일성은 스탈린 탓을 하였다고 한다. 스탈린이 渡河 장비 등 군수지원을 해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김일성은 스탈린이 북한군의 南進을 고의로 늦추었다는 생각을 하더란 이야기였다.
 
 소른턴 교수도 같은 맥락의 주장을 한다.
 
 *소련이 만들어준 南侵전쟁계획서에는 서울점령까지만 적혀 있었다. 서울을 점령하기만 하면 후방에서 남로당 지하 조직원 20만 명이 들고 일어나 李承晩 정부와 국군은 무너질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국군은 기습을 받았지만 항복을 거부하였고, 남로당의 폭동은 일어나지 않았으며, 미국은 파병을 결정하였다.
 *김일성과 지도부는 당황하였다. 일부는 점령한 서울을 지켜내는 데 주력해야 한다면서 漢江 도하를 반대하였다. 이때 스탈린이 개입, 한강을 건너 부산을 향햐여 진격하라고 압박한다.
 *김일성은 전쟁지도를 할 때 스탈린의 명령을 구하고 충실하게 수행하였다. 스탈린은 구체적으로 전술 전략을 통제한다. 스탈린은 북한군이 너무 빨리 부산항을 점령, 미군이 상륙할 수 없도록 해서는 안 된다고 계산, 북한군의 南進 속도를 늦춘다. 一例로 主力을 분산시킨다. 정예 6사단을 떼내어 전략적 가치가 없는 호남지역으로 보낸 것이다.
 *스탈린이 미국을 불러들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중공군을 끌어들이기 위하여 취한 가장 중요한 조치는 유엔 안보리 회의에 불참, 유엔 차원의 武力개입을 막지 않은 것이었다. 이는 스탈린이 말리크 유엔 대사에 지시하여 이뤄진 것이다. 스탈린은 미군이 유엔군의 기치하에 한국에 들어오도록 도왔다.
 
 스탈린이 중공군을 끌어들이기 위하혀 미군의 한반도 투입을 반겼다는 가설을 앞으로 검증해보기로 한다. 
   

 

 


*6.25 南侵전쟁의 경과



1. 1949년3월5일: 김일성, 스탈린에게 南侵 의사 타진. 스탈린은 미군이 주둔하고 있다고 南侵 반대.
2. 1949년6월 주한미군 철수.
3. 1949년8월 소련의 原爆실험 성공
4. 1949년10월 중국의 공산화. 모택동, 약3만 명의 조선족 병력 북한으로 귀환시키다.
5. 1950년1월12일: 에치슨, 내셔널 프레스 클럽 연설. "한국은 미국의 방어선에서 제외"
6. 1950년1월17일 김일성, 駐中북한대사 환송식에서 南侵의욕 밝히니 며출 후 스탈린, 김일성을 訪蘇 초청.
7. 1950년3월30일-4월25일: 김일성, 모스크바 방문. 스탈린, 모택동의 동의를 조건부로 남침 허가.
8. 1950년5월13-16일, 김일성 박헌영이 모택동 방문, 南侵 동의 및 미군 개입시 파병 약속을 받다.
9. 1950년6월: 소련군이 작전계획서 입안.
10. 1950년6월25일: 전면 남침. 트루먼 한국 파병 결심. 해공군 먼저 파병한 뒤 30일에 육군 파병 결정. 27일 유엔안보리 한국에 대한 군사지원 결의. 28일 서울 함락, 7월3일부터 본격적인 한강 渡河 시작. 북한군의 6일간 지체가 결정적인 패인. 7월20일 대전 점령, 6사단 호남으로 진격, 8월부터 낙동강 방어전 시작.
11. 1950년9월15일: 인천상륙작전 성공. 유엔군 北進, 북한군 붕괴 시작.
12. 1950년10월1일: 국군 38선 돌파. 김일성, 모택동에게 구원군 파병 호소.
13. 1950년10월5일: 스탈린, 모택동에 파병 설득.
14. 1950년10월8일: 모택동, 김일성에 파병 통보. 그 직후 소련이 항공지원 어렵다고 하자 중공 지도부에서 파병보류론 대두, 모택동 다시 파병 결정.
15. 1950년10월13일: 스탈린, 김일성에게 만주로 피신 권고.
16. 1950년10월15일: 웨이크섬에서 트루먼과 맥아더 회담. 맥아더, 중공 개입 가능성 부인.
16. 1950년10월18일: 중공군, 북한지역으로 진입.
17. 1950년10월말: 중공군, 1차 공세 후 잠적.
18. 1950년11월말: 유엔군 대공세, 중공군과 정면 충돌. 유엔군 후퇴 시작.
19. 1951년1월4일: 서울 재함락. 워커 사망후 리지웨이 중장이 8군 사령관으로 부임.
20. 1951년1월에서 봄: 맥아더, 중공본토 공격 혹은 한반도 철수 주장. 유엔, 對中 휴전안 제안, 중공 거부. 리지웨이 반격 성공, 서울 수복하고 38선으로 복귀.
21. 1951년4월: 맥아더 해임.
22. 1951년6월5일: 소련 말리크, 휴전협상 제의.
23. 스탈린, 김일성의 휴전요청 거부, 出血戰 지속시킴.
24. 트루먼, 휴전협상 조건으로 포로들의 자유의사 존중 원칙 고수.
25. 1953년3월5일: 스탈린 사망. 3월19일에 소련 각료회의가 휴전하기로 결의.
26. 1953년6월: 이승만, 반공포로 석방, 한국을 희생시키는 휴전을 거부하겠다고 위협하며 미국의 對韓안전보장책 요구. 중공군 중부전선 보복성 공격. 미국은 이승만 제거계획.
27. 1953년7월27일: 휴전.
28. 1954년: 韓美상호방위조약.

*미결된 戰後처리-평화협정시 타결해야 할 사건들

1. 약15만~20만명으로 추정되는 전쟁중 납북자
2. 약12만명으로 추정되는 인민군과 좌익에 의한 학살자
3. 약2만5000명으로 추정되는 국군포로 未귀환자
4. 전쟁범죄자 처벌 및 보상

*6.25 전쟁의 세계사적인 의미

1. 중공, 대만 공격 단념. 미국, 대만 보호 결정.
2. 일본의 경제부흥
3. 韓美日안보동맹 성립
4. 독일의 재무장과 NATO의 군사동맹화
5. 미국의 군비증강 본격화
6. 한국, 자유진영의 쇼윈도 역할
7. 본격적인 냉전의 시작, 40년 뒤 서방세계의 승리로 마무리
8. 냉전의 최종적인 종언은 한국의 자유통일로

*한국 국내에 끼친 영향

1. 1953년 체제 등장: 좌익을 일소하고 反共자유민주주의 노선으로 근대화, 민주화 성공.
2. 군장교단의 등장과 집권, 산업화의 주체
3. 전면적인 韓美동맹 체제의 가동
4. 한국의 해양화 촉진
5. 조선조적 명분론의 퇴조와 실용적인 국가 분위기 조성
6. 전쟁을 겪은 국민들은 강인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