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정치.사회/파헤친 歷史

서양인의 눈으로 본 임진왜란

淸山에 2012. 7. 7. 09:29

 

 

 

 

 

서양인의 눈으로 본 임진왜란

 

서양인의 눈으로 본 조선 수군


417년 전인 1592년, 15만 여명의 일본군이 “명으로 가는 길을 빌리겠다"(假道入明)는 명분으로 조선을 침략한다. 아무런 준비 없이 전쟁을 맞이한 조선은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이기도 하나 수군과 의병 등의 활약에 힘입어 전세를 역전시키고 결국 일본군을 완전히 패주시키는데 성공한다.

 

전쟁은 7년 간이나 지속되며 조선의 기존 정치ㆍ경제ㆍ사회체계를 파괴한다. 이러한 임진왜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영의정이었던 유성룡이 전쟁의 전 과정을 지켜보고 작성한 징비록(懲毖錄)이나 충무공 이순신이 기록한 난중일기(亂中日記)와 같이 당시대인의 문헌을 참고하는 방법이 널리 사용되고 있다. 반대로 임진왜란의 선봉장이었던 고니시 유키나가 휘하의 장수인 오제키가 쓴 전기인 ‘조선정벌기’(朝鮮征伐記), 가토 기요마사의 종군승이었던 시탁(是琢)의 ‘조선일기’(朝鮮日記), 다치바나 무네시게의 ‘조선 이야기’(朝鮮記) 등 일본인들의 문헌을 통해 우리와는 사뭇 다른 그들의 시각을 살펴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조선인도, 일본인도 아닌 제3자의 눈으로 바라본 임진왜란은 어떤 전쟁이었을까? 그에 대한 대답을 해주는 서적이 남아있다.

 


임진왜란 최초의 전투를 묘사한 "부산진 순절도"


루이스 프로이스(Luis Frois)는 포르투갈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이다. 그는 천주교 포교를 위해 1563년 일본으로 건너갔고,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등 당시 일본의 최고 권력자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다 1597년 일본 나가사키에서 사망한다. 일본 내부 사정에 정통했던 루이스 프로이스는 ‘포르투갈령 동인도 역사’를 편찬하던 포르투갈의 국가적 사업에 따라 1549~1594년까지의 ‘일본사’를 편찬하게 된다. 그리고 바로 이 안에 서양인의 눈으로 바라본 임진왜란의 발발원인, 전개, 일본군의 패배 원인 등이 상세하게 기술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임진왜란과 도요토미 히데요시’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간 되었다.

 

그럼 그는 임진왜란을 일으키는 주도적 역할을 한 당시 일본의 최고 권력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그(히데요시)는 키가 작고, 또한 추악한 용모의 소유자로서 한쪽 손의 손가락이 여섯 개인 육손이였다. … 가신뿐만이 아니라 국외자에 대해서도 극도로 오만했으므로 누구나 싫어했으며 그에 대해 증오심을 품지 않는 이가 없을 정도였다. - ‘임진왜란과 도요토미 히데요시’ 2003. 국립진주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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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당히 부정적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평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평가는 임진왜란에 대해서도 이어진다.


이 계획은 해상으로 군단을 파견하게 되어 있으나, 바다로부터 떨어진 내륙 지방에 사는 군후나 무장들은 선박도, 수부도, 항해에 필요한 어떤 수단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 많은 사람이 가인이나 친밀한 사람과 담화를 할 때 “이토록 끝없는 고난을 무릅쓰고 외국 땅에 함께 죽음을 구하러 갈 정도라면 차라리 일본에서 자살하는 쪽이 낫다”고 하는 말을 입 밖으로 내어 말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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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내부적으로도 임진왜란에 대해 많은 반대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전국시대를 거치며 혼란에 빠져있던 일본을 통일하고 스스로 태합(太閤)의 자리에 오른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위세에 아무도 반기를 들 수 없었고 결국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게 된다. 전쟁을 앞두고 루이스 프로이스는 조선이라는 나라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었으며, 어떻게 평가하고 있었을까?


조선인은 달단인이나 오랑캐들과도 자주 접촉하면서 그들에게 용감히 대항하였다.…이 나라는 풍요하여 많은 쌀과 보리가 나고…그들이 만든 공작품은 정교하고 아름다워서 그들이 솜씨가 좋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조선 군사에 대한 평을 보자.


사람들은 피부색이 하얗고 건강하고 대식가들이며 힘이 세다. 그들은 터키 인의 활과 같은 작은 활을 매우 잘 다루고, 독을 바른 화살을 사용한다고 한다. 그 밖의 무기는 위력이 없고, 특히 칼은 짧으며 그다지 쓸모가 없다.…내륙 쪽에 있는 몇몇 성채는 방비가 충분치 않으나 일본과의 경계에 해당하는 해변 일대의 성채만은 방비가 견고하며, 그곳에는 보유 가능한 많은 양의 탄약을 쌓아 놓았다.


 
조선 수군의 항진도((航津圖)


.또한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조선 군사들의 무장과 사뭇 다른 이야기가 나오기도 한다.


병사들은 단단한 가죽 갑옷을 착용하였고 유럽인의 모자와 같은 철모를 쓰고 있었다. 그것들 중 어떤 것은 강철로 되어 있었고 그 밖에는 무쇠로 되어 있었다.


 

 

당시 이런 평을 바탕으로 아마도 ‘조선역해전도’(朝鮮役海戰圖) 에서와 같은 조선군의 무장이 그려진 듯 하다. 이 그림이 공개된 후 역사적 진위여부를 두고 다소간의 논쟁이 있었지만 물에서 전투를 해야하는 수군이 이렇게 무거운 갑옷을 착용하면 활동성면에서 큰 제약을 받기 때문에 후세 일본인의 과장으로 봐야할 것이다.

루이스 프로이스는 전쟁의 초기 진행과정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묘사한다. 조선의 육군은 일본군에게 연전연패하며 쉽사리 서울까지 내어준다. 일본군은 빠른 속도로 진격을 해나가지만 제1진의 선봉장인 고니시 유키나가는 보급 문제로 고민에 빠진다.


대원정을 행하기 위해서는 우선 먼저 필요한 식량 및 모든 군수품을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되며 … 나의 계획으로는 서울은 바다에 가까이 위치해 있고 강을 1리 정도 거슬러 올라가면 다다를 수 있기 때문에, 해상으로 식량을 수송하고 부근을 흐르는 강을 통해서 서쪽으로부터 서울을 포위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하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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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원활한 보급을 위해 수륙병진작전을 계획한 것이다. 하지만 거침없이 진군하던 일본군은 바로 여기서 커다란 장애물을 마주하게 된다. 바로 충무공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었다.


일본군이 부딪친 난관은 조선군이 서로 단결하여서 연합군을 편성, 수많은 배에 승선하여 공격해 온 사실이었다. 조선군은 일본군보다도 해전에 훨씬 익숙했기 때문에 일본군에게 많은 손해를 입혔는데, 이러한 일본군의 재난은 끝없이 계속되었다.


 


조선 수군의 주력함인 판옥선(板屋船)


그리고 이어서 조선 수군과 일본군의 첫 번째 해전(옥포해전)을 자세하게 묘사한다.


이전부터 조선인은 일본 배를 찾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들과 조우하자 큰 소리를 지르고 기뻐하며 배를 몰아 일본의 함대를 공격했다. 조선의 선박은 높고 튼튼하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일본 배를 압도하였다. 우선 조선 수군 쪽에서 화기에 의한 공격이 있었는데, 이것이 일본인을 몹시 애먹이고 괴롭혔기 때문에, 일본인은 조선인들의 이 성가신 접근 전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바다 쪽으로 멀리 나아가는 전술로 응전했다. 이 싸움에서 조선인들은 70척의 일본 배를 빼앗고 병사 대부분을 살해하였다. 나머지 병사들은 겨우 목숨만 건지고서 도망쳤다. 


 

 
돌격선인 거북선 / 사천포해전에서 최초로 등장한다.


 

옥포해전은 충무공 이순신과 원균이 연합하여 판옥선 27척 등의 함대를 이끌고 도도 다카도라가 지휘하는 일본 함대 50여 척을 맞아 승리한 전투이다. 해전의 전개과정이나 조선 수군의 공격 전술 등을 살펴볼 때 상당한 신빙성을 가진 기록임을 알 수 있다.

이후 조선 수군에게 연전연패하는 일본군을 보며 루이스 프로이스는 어떤 평가를 내릴까? 대답은 간단하다.


여타의 많은 일들을 열거하는 것은 그만두겠는데, 일본군은 해전에 대한 지식이 너무 짧고 적을 격퇴하기 위한 화기가 부족하여 바다에서는 언제나 불리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조선 수군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일본군


 

루이스 프로이스는 임진왜란에 직접 종군한 선교사는 아니다. 그는 일본 내에 머무르며 간접적으로 접한 소식을 통해 이와 같은 기록을 남겼다. 하지만 천주교도였던 고니시 유키나가 등 유력 영주들과의 관계, 도요토미 히데요시 등 권력자와의 친분 등을 고려했을 때 루이스 프로이스는 전쟁을 주도하는 일본 권력층의 시선이 투영된 상당히 정확한 정보를 접했을 것이라 예상할 수 있다.

 

그런 그의 눈에 비친 조선 수군은 전술, 전략, 함선, 무기 등 모든 면에서 일본군이 따라올 수 없는 당대 최고의 군이었다. 그리고 루이스 프로이스가 남긴 기록에 직접 등장하지는 않지만 당시 조선 수군을 이끌었던 인물이 충무공 이순신이라는 점을 생각해 볼 때 그 역시 당대 최고의 군사 지휘관이라 할 수 있다. 충무공 탄신일 464주년을 맞이한 오늘, 서양인의 시선을 통해 400여년전 조선 수군과 충무공 이순신의 위대함을 다시금 느낄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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