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정치.사회/정치-외교-국방

北傀, 제2연평해전 이틀 전 "발포하겠다" 교신

淸山에 2012. 6. 18. 17:29

 

 

 

 

 

北傀, 제2연평해전 이틀 전 "발포하겠다" 교신  
  


 '발포'정보 보고 받은 국방부, 서해부대엔 'NLL 단순침범' 정보만 하달
조갑제닷컴    

 

 

제2연평해전 전사자 
 

2002년 6월 제2연평해전(서해교전)을 일으킨 북한 경비정 684호가 교전 이틀 전에 상급부대인 8전대(戰隊) 사령부에 보고한 ‘특수정보(SI) 15자’는 ‘발포 명령만 내리면 바로 발포하겠다’인 것으로 밝혀졌다.

 

<월간조선>은 최신호 보도(7월호)에서 <북한군 교신록>을 근거로 당시 제2연평해전이 종료되기 전에 황해도 소재 신천통신중계소가 북한 해군사령부의 지시 사항을 북한 경비정 684호가 소속된 8전대 사령부로 중계했다고 전했다. 

 

당시 북한 해군사령부와 서해함대사령부는 선제공격 보고를 8전대사령부로부터 받고 684호에 “사격을 했으니 이탈해서 올라오라”고 지시했다. 또 8전대사령부가 현장 부근에 있던 북한 388호에 “불당 소리(포성) 들리냐”고 하자 388호 측에서 “포성 소리 들린다”고 답했다.

 

제2연평해전을 전후해 북한군 간에 오간 교신 내용은 1999년 1차 연평해전에서 패퇴했던 북한이 2002 한일월드컵으로 들뜬 우리 사회 분위기를 틈타 치밀하게 준비한 끝에 선공(先攻)을 감행했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월간조선>은 전했다.

 

당시 교전이 끝난 뒤 우리 對北 통신감청부대인 5679부대가 감청한 SI첩보에 ‘발포’라는 단어가 있다는 사실은 알려졌으나 15자 전체가 공개된 것은 처음이다. 당시 국방부는 이런 첩보가 있었음에도 북한 경비정의 NLL 침범을 ‘단순침범’으로 평가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해군작전사령부는 <6월27일 北684호 NLL 침범 상황 결과> 문건에서 “등산곶 경비정(684호)이 NLL 침범 시 아(我) 고속정에 대한 사격 의도를 내포하고 있었다. 8전대사령부와 사격기도 관련 교신을 했다. 기동 전 철저한 사격준비 상태를 갖추고 왔다”고 분석했다고 보도했다. 합참 정보본부가 이를 토대로 작성한 장관 보고용 보고서에는 그전 보고와 달리 15자 도발 정보가 명시됐다. 하지만 해당 보고가 국방장관을 거쳐 예하부대로 하달될 때에는 관련 내용이 삭제됐으며 ‘단순침범’이라는 내용만 남았다고 전했다.


김대중 정권과 軍 일각에서는 이 같은 교신 기록을 입수하고서도 제2연평해전을 ‘우발적 사건’으로 평가했었다. <조선닷컴> 보도에 따르면 김동신 前 국방장관은 “제2연평해전 직전에 발포라는 단어가 포함된 도발 정보를 보고받은 바 없다. 해당 보고를 받았다면 당연히 예하부대에 이를 알리고 軍 경계태세를 강화했을 것”이라며 관련 내용을 부인했다고 한다. 

 

기사본문 이미지

 
제2연평해전 생존자 이희완 대한민국 해군 소령. 이희완 소령은 당시 한쪽 다리를 잃은 상황
속에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참수리호를 지휘해 우리 軍의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였다. 


한편, 제2연평해전 당시 차단기동을 하던 한국해군 고속정 357호를 향한 북한군 등산곶 684호의 기습 함포공격으로 시작된 전투는 함포와 기관포를 주고받는 치열한 격전 끝에 우리 해군의 피해는 6명 전사, 18명 부상, 참수리급 고속정 357호 침몰이었다. 북한의 피해는 약 30여명의 사상자를 내고 SO-1급 초계정 등산곶 684호가 반파(半破)된 채로 퇴각했다.

 

대한민국 해군에서는 집중포격을 당한 참수리 고속정 357호 정장 윤영하 소령(당시 대위, 1계급 추서)이 그 자리에서 중상을 입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전사했다. 부정장 이희완 소령(당시 중위)이 쓰러진 정장을 대신해 지휘권을 행사했다. 그는 한쪽 다리를 잃은 상황 속에서도 맡은 바 임무를 완수해 우리 軍의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였다.

 

대한민국 국방부는 처음 서해교전(西海交戰)이라고 부르던 것을 2008년 4월에 제2연평해전(第二延坪海戰)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제2연평해전 추모식을 정부기념행사로 승격시켰으며, 주관 부서도 해군 2함대 사령부에서 국가보훈처로 옮겼다.

2007년 6월28일 참수리 고속정을 대체한 차기고속함 1번함이 윤영하함으로 명명되어 진수되었으며, 2009년 6월 2일 실전 배치됐다. 2009년 9월 23일 STX조선해양에서 2번함이 한상국함으로, 3번함이 조천형함으로 각각 진수됐다. 2009년 12월 11일 한상국함과 조천형함에 이어 STX조선해양에서 4번함인 황도현함, 5번함인 서후원함이 각각 진수됐다.

 


*국군의 감청부대는, 2002년 6월27일 북괴 경비정 684호가 서해 NLL을 침범한 뒤 상급부대(8전대) 에 ‘발포 명령만 내리면 바로 발포하겠다’고 보고하는 것을 확인, 상부에 보고하였으나, 햇볕정책에 취한 국방부는 이를 묵살, 예하부대에 기습가능성을 경고하지 않았다. 이틀 뒤 북괴 경비정은 NLL을 넘어왔으나 김대중 정권의 지시로 경고사격을 하지 못하도록 손발이 묶여 있었던 우리 해군 경비정 참수리호는 겨우 경고방송을 하기 위하여 접근하였다가 기습을 받고 침몰, 해군 6명이 전사, 18명이 부상당했다. 월간조선 7월호가 북괴군의 교신을 감청한 우리 軍의 문서를 입수함으로써 전모가 밝혀졌다. 당시 반격에 나선 우리 해군 함정들이 집중사격으로 北 해군 함정을 격침시키기 직전까지 갔으나 상부의 명령으로 사격을 중지, 북괴 함정이 귀환하도록 버려두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더구나 김대중 정권은 '계획된 도발'임을 통신감청으로 확인하고도 사건 직후 '우발적 충돌'이라고 北에 면죄부를 주려 하였으며 어용방송 MBC는 북괴군의 공격 책임을 우리 漁船(어선)에 전가하였다. 당시 대통령 김대중은 戰死傷한 해군 빈소에 문상도 하지 않고 도쿄로 축구 구경을 떠났다.


*참수리호 피격 사건은 김정일 정권에 굴종해온 김대중 정권이 사전 정보를 확보하고도 이를 묵살, 북괴군의 기습공격을 결정적으로 도운 利敵행위의 결과이다. 김대중 정권은 김정일 정권과 공모, 국군을 공격한 셈이다. 인류역사상 前例가 없는 반역이다. 김대중 정권은 노벨평화상에 눈이 멀었는지 5억 달러의 對北불법송금으로 제1차 평양회담을 매수했고, 김대중의 약점을 잡은 김정일은 對南적화전략문서인 6.15 선언을 들이밀어 이에 서명하게 함으로써 남한 정권을 부하처럼 부렸다. 이후 김대중-노무현 정권은 약100억 달러의 금품을 北으로 보내 핵개발을 돕는, 세계사에서 유례가 없는 利敵행위를 저질렀다. 그런 반역적 분위기에 취한 당시 軍 지휘부가 북괴군의 도발징후를 묵살, 우리 해군을 희생양으로 바친 것이다.


*李明博 정부의 국방부와 검찰, 기무사는 모든 수사력을 동원, 이 희대의 利敵행위를 조사하여 관련자를 斷罪하고 국회는 즉각 국정조사에 착수하라! 민족반역자의 공격을 돕기 위하여 대한의 아들 6명을 희생시키고도 '우발적 사고'인 것처럼 조작하려 하였던 김대중 정권 관련자들은 옛날 같으면 능지처참을 당하였을 것이다. 이 세력이 다시 정권을 잡겠다고 설치고 김대중은 관례에도 없는 國葬(국장) 대우를 받아 국립현충원에 묻혔다. 대한민국이 죽지 않았는데 어찌 이런 일을 덮고 넘어가겠는가? 국군의 등에 칼을 꼽은 '내부의 敵'을 알고도 응징할 수 없는 나라는 생존할 자격이 없다. 軍 수뇌부는 유례 없는 군사적 利敵행위에 대한 입장을 밝혀라! 군에 자녀를 보낸 부모들이 안심할 수 있도록 하라!

 

 

 

 

 

 

北의 도발정보를 입수하고도 묵살, 참수리호를 북괴군에 희생물로 바친 김대중 정권하의 軍수뇌부를

利敵행위로 斷罪하라!  
 
 
 김대중 정권은 敵軍과 공모, 國軍을 공격한 셈이다.  
 
햇볕정책에 마취되어 敵軍의 도발을 사전에 알고도 묵살, 대한의 아들 6명을 희생시키고도 '우발적 사고'인 것처럼 조작하였던

김대중 정권 관련자들은 옛날 같으면 능지처참을 당하였을 것이다. 이 세력이 다시 정권을 잡겠다고 설친다.  
 국민행동본부    

 
 *국군 감청부대는, 2002년 6월27일 북괴 경비정 684호가 서해 NLL을 침범한 뒤 상급부대(8전대) 에 ‘발포 명령만 내리면 바로 발포하겠다’고 공격의 허가를 구하는 것을 확인, 상부에 보고하였다. 햇볕정책에 취한 국방부는 기습의도를 묵살하고 '단순침범'으로 조작, 해군을 안심시켰다. 이틀 뒤 이 북괴 경비정은 다시 NLL을 넘어와 사격자세를 취하였다. 김대중 정권의 지시로 경고사격도 하지 못하도록 손발이 묶여 있었던 우리 해군 경비정 참수리호는 겨우 경고방송을 하기 위하여 접근하였다가 기습을 받고 침몰,

해군 6명이 戰死, 18명이 부상당했다. 월간조선 7월호가 북괴군의 교신을 감청한 우리 軍의 비밀문서를 입수함으로써

전모가 밝혀졌다. 


 *당시 반격에 나선 우리 해군 함정들이 집중사격으로 北 해군 함정을 침몰시키기 직전까지 갔으나 상부의 명령으로 사격을 중지, 북괴 함정이 귀환하는 것을 구경만 하였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더구나 김대중 정권은 '계획된 도발'임을 통신감청으로 확인하고도 사건 직후 "우발적 충돌"이라고 北에 면죄부를 주었으며 어용방송 MBC는 북괴군의 공격 책임을 우리 漁船(어선)에 전가하였다. 당시 대통령 김대중은 戰死傷한 해군 빈소에 문상도 하지 않고 도쿄로 축구 구경을 떠났다.


 *참수리호 피격 사건은 김정일 정권에 굴종해온 김대중 정권이 명백한 도발 정보를 확보하고도 이를 묵살, 북괴군의 기습공격을 결정적으로 도운 利敵행위의 결과이다. 김대중 정권은 김정일 정권과 공모, 국군을 공격한 셈이다. 인류역사상 前例가 없는 반역이다. 김대중 정권은 노벨평화상에 눈이 멀었는지 5억 달러를 김정일의 해외비자금 계좌 등으로 보내 민족반역자와의 회담을 매수하였다. 평양에 온 김대중을 겁 주고 약점 잡은 김정일은 對南적화전략문서인 6.15 선언을 들이밀어 이에 서명하게 함으로써 남한 정권을 부하처럼 부렸다. 이후 김대중-노무현 정권은 약100억 달러의 금품을 김정일 정권에 바쳐 핵개발을 돕는, 세계사에서 유례가 없는 利敵행위를 저질렀다. 그런 반역적 분위기에 취한 당시 軍 지휘부가 북괴군의 도발징후를 묵살, 우리 해군을 희생양으로

 바친 것이다.


 *아직 늦지 않았다. 李明博 정부의 국방부와 검찰, 기무사는 모든 수사력을 동원, 이 희대의 利敵행위를 조사, 관련자를 斷罪하고 국회는 즉각 國政조사에 착수하라! 민족반역자의 공격을 돕기 위하여 대한의 아들 6명을 희생시키고도 '우발적 사고'인 것처럼 조작하였던 김대중 정권 관련자들은 옛날 같으면 능지처참을 당하였을 것이다. 이 세력이 다시 정권을 잡겠다고 설치고 김대중은 관례에도 없는 國葬(국장) 대우를 받아 국립현충원에 묻혔다. 대한민국이 죽지 않았는데 어찌 이런 일을 덮고 넘어가겠는가? 국군의 등에 칼을 꼽은 '내부의 敵'을 알고도 응징할 수 없는 나라는 생존할 자격이 없다. 차제에 北의 핵무기 개발을 도운 從北정권의 반역세력도 색출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