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는 공산침략을 격퇴한 자유진영의 勝戰譜다 [국방일보] 李東馥 6·25전쟁이 발발한지 62년이 지났다. 북한정권은 여전히 남한과 미국의 ‘북침’을 주장하고 있고, ‘한반도 공산화’를 목표로 ‘제2의 6ㆍ25’를 꿈꾸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에서 6ㆍ25는 점점 잊혀지고 있으며, 일부 세력들은 진실을 왜곡하고 있다. 6ㆍ25전쟁 62주년을 맞아 전쟁의 진실을 제대로 파악하고 또다시 이 땅에 전쟁의 참화가 드리워지지 않도록 완벽한 대비태세를 확립해 나가야 하겠다. 김일성이 계획하고 스탈린이 승인했으며, 모택동이 지원한 6·25전쟁. 거짓된 역사가 판칠 때 국민들의 안보의식은 혼란에 빠지고, 대한민국의 역동성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6ㆍ25전쟁의 진실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그 교훈을 간직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6ㆍ25전쟁은 ‘김일성이 계획하고, 스탈린이 승인했으며, 모택동이 지원한 남침전쟁’이다. 6ㆍ25에 관한 북침설ㆍ내전설ㆍ유인설 등 그럴듯한 추론과 가설에 의한 주장들이 있어 왔지만, 이러한 이설(異說)들은 러시아의 대통령 문서보관소에 있던 비밀자료가 공개되면서 설 자리를 잃었다. 이 자료들은 전쟁의 진실을 명확하게 얘기해 주고 있다.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남침 의사를 표명한 것은 1949년 3월 모스크바 회담에서였다. 이에 스탈린은 ‘아직은 아니다’라고 생각하며 김일성의 제안을 거부했다. 스탈린이 태도를 바꾸어 1950년 1월 30일자 전문에서 김일성의 남침을 승인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몇 개월 사이에 국제정세의 중대한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러시아 대통령실 문서고에 소장되어 있던 비밀문서에는 ‘변화된 국제환경’에 대한 스탈린의 언급이 기술되어 있다. 1949년 8월 소련의 원자탄 보유, 10월 중국공산당의 내전 승리, 1950년 1월 중ㆍ소 우호동맹 체결로 중국이 북한을 도울 수 있다는 점, 또 미국이 아시아에서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데 어려움이 발생할 것이라는 등의 내용이다.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모택동의 협조를 구하도록 했고, 김일성은 지시대로 이행했다. 모택동은 스탈린이 남침 계획을 승인했음을 확인하고, 북한을 돕겠다고 약속한다. 곧바로 모택동은 만주 선양 부근에 9개 사단을 배치하고, 소련과의 군사방위조약을 서둘러 체결했다. 이러한 조건이 충족된 상황에서 김일성이 전면 남침을 감행한 것이다. 이처럼 6ㆍ25전쟁은 한반도 공산화를 계획하고 끈질긴 승인을 요청한 김일성과 세계 공산혁명을 꿈꾸며 전쟁을 승인한 스탈린, 그리고 중국대륙을 공산화시킨 모택동이 지원한 ‘남침전쟁’이었다. 이는 각종 사료를 통해 명백하게 밝혀진 부정할 수도 돌이킬 수도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6ㆍ25전쟁은 김일성이 남한 내 좌익세력을 믿고 잘못된 판단으로 일으킨 전쟁이다. 1949년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전쟁 승인을 요청하면서 “우리는 남측 내의 강력한 유격대운동(빨치산)으로부터 지원을 받고 있으며, 친미정권을 경멸하는 남쪽 주민들도 분명 우리를 도울 것이다”라고 말했다. 북한 주재 소련대사 스티코프를 설득할 때도 “공격이 개시되면 틀림없이 이승만 정권에 대항하는 대규모 인민봉기가 남반부에서 분출될 것이다”라고 언급했다. 이처럼 김일성은 남침만 하면 남한 내 좌익들이 거국적으로 봉기하여 동조반란을 일으킬 것이라는 기대감에 빠져 있었다. 6ㆍ25전쟁 다음날인 26일 김일성이 “도처에서 반역자들을 처단하고, 인민의 정권기관인 인민위원회를 복구하라”고 선동하는 방송을 내보냈다. 그리고 서울 점령 후인 28일 “전쟁을 조속한 시일 내에 승리로 종결시키기 위해 인민군에 협조할 것과 미 해방지역 인민은 빨치산 활동을 전개하여 후방을 교란하고, 도처에서 폭동을 일으켜 군수물자 수송을 방해하라”고 연설하는 등 남한에서의 대대적인 인민봉기를 부추겼다. 하지만 그의 기대와는 달리 폭동은 일어나지 않았다. 남한 내에서 좌익세력들이 사회혼란을 조성하며 준동하고 있었지만, 다행히 전쟁 전 정치ㆍ사회분야에서의 남로당 제거작업과 함께 국군 내 좌익세력 제거작업을 추진함으로써 전쟁 중 좌익세력의 폭동을 사전 저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4세대 전쟁의 관점에서 본다면, 6ㆍ25전쟁은 남한 내 좌익세력을 믿고 잘못된 판단으로 일으킨 열전(熱戰)인 것이다. 6ㆍ25전쟁은 공산주의 세력의 무력도발에 맞서 싸운 자유수호 전쟁이며, 자유진영이 승리한 전쟁이다. 6ㆍ25전쟁을 흔히 동족상잔의 비극이라고 이야기하지만 6ㆍ25전쟁은 단순히 남과 북이 총을 겨눈 동족상잔의 전쟁이 아니다. 김일성과 스탈린, 모택동 등 공산주의 세력이 사전에 치밀하게 기획한 국제전이었다. 만일 건국의 지도자들과 국민들이 호국(護國)의 결연한 의지가 없었다면 신생 독립국 대한민국은 공산화되었을 것이다. 또한 미국을 비롯한 자유진영이 참전하지 않고 대한민국을 공산주의자들에게 양보했다면 아시아 전 지역이 공산화됨은 물론, 아시아를 석권한 공산세력이 유럽과 전 세계의 공산화에 집중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처럼 6ㆍ25전쟁은 북한의 무력도발에 맞서 이승만 대통령과 같은 위대한 지도자와 대한민국 국민들이 건국의 이념인 자유민주주의를 지켜낸 이념전쟁이었다. 나아가 국제 공산주의 세력에 대항해 미국을 비롯한 유엔 53개국이 지원한 공산주의 확산 봉쇄전쟁이자, 자유진영이 승리를 이끌어낸 자유수호전쟁인 것이다. 자유를 위한 희생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그리고 준비되지 않으면 당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준 전쟁이다. 6ㆍ25 종군 여기자인 미국의 마거리트 히긴스가 ‘자유를 위한 희생’이란 저서에서 “한반도에서 우리는 준비하지 않은 전쟁을 치름으로써 값비싼 대가를 치렀다. 또한 승리를 위해서는 많은 비용이 요구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패배할 때 치러야 할 비용보다는 훨씬 저렴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6ㆍ25전쟁으로 국군 60여만과 유엔군 15만여 명이 전사하거나 부상ㆍ실종ㆍ포로가 되었다. 이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자유진영의 승리를 이끌어 낼 수 있었고, 오늘날 찬란한 대한민국을 건설할 수 있었다. 당시 자유를 위한 고귀한 희생이 없었다면 한반도는 공산화되었을 것이며, 지금 우리는 공산주의 체제하에서 고통받고 있을 것이다. 자유를 위한 희생이 무엇보다 값진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한편 당시 전력면에서 남한은 북한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병력면에서 북한군은 18만2000명으로, 9만4000명에 불과했던 국군의 2배에 달했다. 장비면에서도 북한은 200대가 넘는 전차를 보유했지만, 국군은 단 한 대도 없었으며, 전투기를 포함한 211대의 항공기를 보유한 북한군에 비해 국군은 연락기와 연습기 22대가 전부였다. 특히 6ㆍ25 전쟁 직전 우리 군의 대비태세는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미흡했다. 6월 초 8개 사단장을 비롯한 육군본부의 작전국장과 인사국장 등 군 수뇌부에 대한 대대적인 인사조치로 인해 신임 지휘관들이 부대 상황을 파악하고 작전을 구상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또한 6월 24일 00시를 기해 경계강화 조치를 해제하고 전 장병에게 외출ㆍ외박ㆍ휴가를 허용했다. 전 장병의 3분의 1이 부대를 벗어났던 것이다. 같은 날 저녁 육군회관 준공을 기념하는 연회가 열려 군의 지휘관들이 서울에 모여 밤늦도록 주연을 계속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 결과는 참혹하게 나타났다. 불과 3일 만에 수도 서울을 내주고 1개월여 만에 낙동강 방어선까지 밀려난 것이다. 6ㆍ25전쟁은 우리에게 또다시 철저한 준비가 없다면, 그리고 입으로만 평화를 외친다면 그 결과가 어떻게 나타날 것인가를 분명하게 얘기해 주고 있는 것이다. “평시 훈련에서 우리는 쓸데없는 일에 치중했다. 소총사격술ㆍ정찰ㆍ순찰ㆍ방어진지의 구축에 대한 교육을 소홀히 했다. 나의 연대원들의 배짱은 세계가 알아주는데 그래서 나는 그들의 전투력을 믿었다. 그런데 막상 전투가 시작되니 사격을 못하는 것이다. 누군가 그들에게 소총 사격술과 기관총이 작동하지 않을 경우 응급조치 방법 등을 가르쳐야 했지만 그때 그들은 귀한 대접을 받으면서 운전, 전시채권 구입방법, 편지쓰고 부치는 방법에 대한 얘기를 들은 것이 고작이었다. 그들은 결국 전투 중에야 적과 조우할 때 꼭 알아야만 할 기본사항에 대해서 며칠간 교육을 받았다.” 이 내용은 6ㆍ25전쟁에 참전한 마이캘리스 대령이 6ㆍ25참전 미군 장병들의 문제를 지적한 인터뷰 내용이다. 당시 미군 또한 준비되지 않은 전쟁에 참전했음을 알 수 있다. 당시의 상황은 우리가 평시에 무엇을 준비해야 할 것인지, 그리고 실전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지를 가르쳐 주고 있다. 60여 년 전 우리의 지도자와 선배 전우들이 죽음이 두려워 비겁한 평화를 원했거나 적화통일을 받아들였다면, 지금 우리는 현대판 노예의 삶을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국제사회와 선배 전우들은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라는 사실과 “어떠한 희생이 따르더라도 대한민국을 지키고, 자유를 수호하겠다”는 의지와 행동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보여 주었다. 국제사회와 선배 전우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노력하고 각오를 다져야 한다. 6ㆍ25전쟁의 진실을 외면하는 세력들의 실체를 직시하고, 그들의 거짓된 주장을 꿰뚫어 보아야 한다. 그리고 북한이 또다시 도발해 온다면 즉각적이고 단호하게 응징하겠다는 일전불사의 의지와 싸워 이기는 능력을 구축하는 것이야말로 자유를 지키기 위해 헌신하신 모든 분의 은공에 보답하는 길임을 명심해야 하겠다. <국방부 국방교육정책관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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