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담양군 남면 지곡리 소쇄원. 조선시대 최고의 민간 정원으로 호남권 원림문화의 산실이며 조선 후기 이래 남도 여행의 필수 코스였다. 정유재란 때 왜적들이 침략하여 소실되었는데, 손자인 양천운(梁千運)이 재건하고 5대손 양경지(梁敬之)가 지금의 모습대로 완성하였다. 그런데 소쇄원은 맑고 시원한 회포의 공간만은 아니었다. 김인후가 양산보에게 이런 시를 보낸 적이 있다.‘ 올해 농사는 무척 좋지 않으니, 북쪽 기슭 밭부터 거름 주고 바삐 갈아야 한다오.’이들 역시 농사를 걱정하는 생활인이었던 것이다.
/김영근 기자 kyg21@chosun.com
이때까지는 다만 숲속의 정자 '임정(林亭)'이었다. 그러다가 송순이 찾아와 '소쇄정(瀟灑亭)'이라 이름 짓고 뜻을 풀었다.
"작은 집이 빛나고 맑기도 해라, 앉아보니 절로 숨어살 마음 솟구치네. 연못 고기는 대나무 그림자에 기대고, 산 폭포는 오동나무 그늘에 쏟아지누나."
1534년 김안로에 쫓겨나서 벼슬을 쉬던 참이었다. 그리고 1542년 전라감사 시절 얼마간의 물자와 역부를 지원하여 원림의 규모를 갖추도록 하였다. 소쇄정이 소쇄원이 된 것이다. 양산보의 어머니가 송순의 고모였으니 사촌 간이었다.
지난 상흔이 씻기는 듯하였다. 그러나 이도 잠시, 부친상을 당하였다. 지금 김덕령을 모시는 충장사가 있는 배재[梨峴] 자락에 음택을 잡고 시묘하였는데, 산불이 일어나 묘소까지 번졌다. 마침 소낙비 내려 무사하였지만, 통곡하였다. 장편 '효부(孝賦)'에 풀었다.
"아! 어버이 날 낳으시고 노고도 그지없고 사랑도 한이 없네.…오래도록 어버이 모시자는 소망, 이제는 이룰 수 없게 되었다오. 저 숲속 먹이 물어 제 어미에게 물려주는 까마귀를 마주하니, 차마 부끄러워 어찌 할 바를 모르겠네."
양산보는 조용히 늙어갔다. 간혹 증암천 건너 이웃 환벽정(環碧亭)에 들렀다. 주인 김윤제(金允悌)는 처남이었다. 그러던 늦은 봄 이질로 고생하다가 세상을 떴다. 향년 55세. 다음은 유언이다. "노모를 끝내 모시지 못하고 죽다니, 억울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