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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보… 소쇄원은 맑고 시원… 그속엔 가족사의 아픔

淸山에 2012. 5. 21. 21:40

 

 

 

 

 

양산보… 소쇄원은 맑고 시원… 그속엔 가족사의 아픔

[이종범의 호남인물열전] [30]
이종범 조선대 사학과 교수


 

무등산 북녘 기슭에 숨어 있는 소쇄원(瀟灑園)은 별세계라 할 만하다. 이곳에 들어서면 호젓하기가 그지없다. 양산보(梁山甫·1503∼1557)가 처음 조성하였다. 그런데 당신은 정녕 쓰라렸다.

 

한때는 장래가 촉망되었다. 열다섯에 조광조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익히고 국왕이 근정전에서 주관하였던 유생 친시에서 좋은 성적을 받고 종이를 상품으로 받은 적이 있었다. 열일곱 때였다. 그러나 한 달 후 기묘사화가 일어나고 스승이 세상을 떠나자 출세를 단념하였다. 그리고 무등산 자락에서 소요의 세월을 보냈건만 사화의 트라우마는 좀체 가시지 않았다.

 

한편 가족사에 새겨진 이산의 아픔에 짓눌렀다. 선대는 광주시 광산구 동곡동 일대에 살았다. 재산도 넉넉하고 식구도 많았다. 그런데 남방의 식구 많은 부자를 북방에 강제로 이주시키는 '실변사민(實邊徙民)'정책에 걸렸다. 조부가 중부·숙부를 데리고 평안도 영변으로 옮겼다. 양산보가 태어나기 1년 전인 1502년(연산군 8)이었다. 이때 셋째 아들이던 부친은 사부(師傅)의 칭호를 듣던 매부 조억(曺億)을 따라서 담양 남면 지실마을로 이사하였다. 1511년 조부는 영변에 묻혔지만, 부친은 오래도록 소식을 몰라 아득하였다. 양산보 또한 항상 가슴 조였다.

 

양산보는 숲속 계곡을 배회하며 즐거움을 찾았다. 그러다가 세 칸 초가를 올렸다. 훗날 양산보의 둘째 아들 자징(子�})을 사위 삼았던 김인후가 감탄하였다.

 

"작은 정자 깨끗하고 시원하여 비록 세 칸이지만, 세상에서 가장 한가한 언덕까지 덤으로 얻었구나. 우리 임 산중의 흥취 참으로 부러워라, 더구나 나이 들어 벼슬조차 싫어한다네."


 
 전남 담양군 남면 지곡리 소쇄원. 조선시대 최고의 민간 정원으로 호남권 원림문화의 산실이며 조선 후기 이래 남도 여행의 필수 코스였다. 정유재란 때 왜적들이 침략하여 소실되었는데, 손자인 양천운(梁千運)이 재건하고 5대손 양경지(梁敬之)가 지금의 모습대로 완성하였다. 그런데 소쇄원은 맑고 시원한 회포의 공간만은 아니었다. 김인후가 양산보에게 이런 시를 보낸 적이 있다.‘ 올해 농사는 무척 좋지 않으니, 북쪽 기슭 밭부터 거름 주고 바삐 갈아야 한다오.’이들 역시 농사를 걱정하는 생활인이었던 것이다.

/김영근 기자 kyg21@chosun.com

 

이때까지는 다만 숲속의 정자 '임정(林亭)'이었다. 그러다가 송순이 찾아와 '소쇄정(瀟灑亭)'이라 이름 짓고 뜻을 풀었다.

"작은 집이 빛나고 맑기도 해라, 앉아보니 절로 숨어살 마음 솟구치네. 연못 고기는 대나무 그림자에 기대고, 산 폭포는 오동나무 그늘에 쏟아지누나."

 

1534년 김안로에 쫓겨나서 벼슬을 쉬던 참이었다. 그리고 1542년 전라감사 시절 얼마간의 물자와 역부를 지원하여 원림의 규모를 갖추도록 하였다. 소쇄정이 소쇄원이 된 것이다. 양산보의 어머니가 송순의 고모였으니 사촌 간이었다.

 

지난 상흔이 씻기는 듯하였다. 그러나 이도 잠시, 부친상을 당하였다. 지금 김덕령을 모시는 충장사가 있는 배재[梨峴] 자락에 음택을 잡고 시묘하였는데, 산불이 일어나 묘소까지 번졌다. 마침 소낙비 내려 무사하였지만, 통곡하였다. 장편 '효부(孝賦)'에 풀었다.

 

"아! 어버이 날 낳으시고 노고도 그지없고 사랑도 한이 없네.…오래도록 어버이 모시자는 소망, 이제는 이룰 수 없게 되었다오. 저 숲속 먹이 물어 제 어미에게 물려주는 까마귀를 마주하니, 차마 부끄러워 어찌 할 바를 모르겠네."

 

양산보는 조용히 늙어갔다. 간혹 증암천 건너 이웃 환벽정(環碧亭)에 들렀다. 주인 김윤제(金允悌)는 처남이었다. 그러던 늦은 봄 이질로 고생하다가 세상을 떴다. 향년 55세. 다음은 유언이다. "노모를 끝내 모시지 못하고 죽다니, 억울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