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라린 민족 가슴 위로한 기생들
[조선일보에 비친 '신문화의 탄생' ] [40] 김명환 사료연구실장 이메일wine813@chosun.com
조선일보가 1921년 정월 초승을 맞아 주최한 '독자 위안 척사(擲柶·윷놀이)대회'에는 특별한 '스타'들이 초대됐다. 우리 민요를 공연하기 위해 서울 시내 각 권번(卷番·기생조합)에서 출동한 젊은 기생들이었다. 행사를 알린 당시 기사는 "어엽분 미인들의 아릿다운 곡죠로 지화자 소리를 불을 때에 억깨가 졔절로 읏슥읏슥 하여질 뿐 아니라 지화자 소래에 살이 찌을 것"이라고 썼다.(1921년 2월 15일자) 민요와 창(唱), 전통무용 등을 제대로 배운 예기(藝妓)들은 '유흥업소 종사자'를 넘어서 '전통예술지킴이'였다.
1920년대 초반, 이 땅에서 예술적 기량을 갖춘 기생은 대략 1000여명. 이들은 권번 주최의 정기 공연 무대에 섰다. 1920년 6월에는 한성(漢城)·대정(大正)·경화(京和)·한남(漢南)의 네 권번이 서울 단성사에서 최초로 '련합 연주회'를 열어 "실로 관객의 눈을 황홀케"만들었다.(1920년 6월 20일자 ) 1920년대 초, 전통 연희 공연의 주역은 기생들이었으며 국창급(國唱級) 명창들이 오히려 감초 노릇을 했다.
(유민영 '한국근대연극사') 한국 전통 연희자들의 총집결체라 할 수 있는 '조선성악연구회'가 1938년 창립 5주년을 맞아 서울 시내 동양극장에서 벌인 대대적인 기념 공연에는 송만갑(宋萬甲) 이동백(李東伯) 김창룡(金昌龍) 등 당대의 명창들과 함께 종로권번 기생들이 공연했다.(1938년 5월 14일자)
일제시대 인천권번 소속 기생들이 국악 연주자들의 반주에 맞춰 전통 무용을 공연하는 모습.
일제하 기생들은 특히 빈민, 고아, 장애인 등 어려운 동포들을 돕는 공연에 큰 힘을 쏟았다. 극빈층 어린이들의 학교를 후원하기 위해 서울의 네 권번이 연합하여 연주회를 여는 등(1928년 4월 21일자) 권번들의 사회봉사에 관한 보도가 끊이지 않았다.
갑술년(甲戌年·1934년) 대홍수 때 함흥의 반룡(盤龍) 권번 예기(藝妓) 40여명은 "재민의 참상을 구제키 위하여 구제 연주회를 개최하겠다"고 본보 함흥지국에 자진하여 알려와 조선일보는 "감격에 넘치지 안흘 수 업는" 일이라고 크게 보도했다.(1934년 8월 5일자)
기생들의 노랫가락이 고달픈 식민지 시대를 살아가는 민족을 위안하고 하나로 묶는 쪽으로 힘이 실리는 듯하자, 일제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1931년 10월 경남 진주의 기생들이 열려던 '만주 동포 돕기 자선연주회'는 경찰의 금지로 끝내 무산됐다. "경찰 당국의 무조건한 탄압에 비난"이 높았다.(1931년 11월 12일자) 대중들 천시(賤視)와 일제의 탄압 속에서 이어진 기생들의 연주회는 일제하 우리 전통 연희의 명맥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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