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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 장관에게 털어놓은 李承晩의 놀라운 술회

淸山에 2012. 5. 20. 19:10

 

 

 

 

 

 

친일파 장관에게 털어놓은 李承晩의 놀라운 술회


 
 
 "러시아는 민주주의에 지게 되어 있다. 일본은 다르다. 일본이 장사를 가장하여 다시 몰려올 때

당신네 친일파들이 나서서 나라를 지켜야 해."
趙甲濟   
 
 1951년 초 李承晩 대통령은 日帝 총독부 관료 출신인 任文桓(임문환) 씨를 농림부 장관에 임명하였다. 任씨는 차관엔 일본 고등문관 시험 同期인 李泰鎔씨를 임명하였다. 任씨는 국회에 인사차 갔다. 국회는 그가 親日派라고 인사를 받아주지 않았다. 국회에서 돌아온 그를 李 대통령이 불렀다.
 
 任씨는 회고록에서 가까이서 본 李 대통령을 이렇게 평하였다.
 <老志士라기보다는 百獸(백수)를 호령하는 老獅子(노사자)의 인상이었다. 위엄이 몸에 붙은, 鐵의 의지를 가진 達人이었다. 가까이 가면 나보다 키가 작아 보였는데, 떨어져서 보면 뼈대가 굵어 백발의 몸이 나보다 훨씬 크게 보였다. 악수를 해보니 굵은 손아귀에서 뜨거운 피가 흐르는 듯하였다.>
 
 대통령이 물었다.
 "君은 오늘 국회에 갔다가 인사를 거절당했다면서?"
 "그렇습니다. 친일파라고 거절 당하였습니다."
 "그런 걸 알면서 차관까지 친일파를 임명, 世風을 거스르겠다는 건 신중하지 못해. 다른 사람으로 바꾸세요. 李泰鎔은, 姓名을 보니 우리 집안인 듯한데, 그건 별개 문제요."
 
 그런 말을 하는 대통령의 표정은 손자를 타이르는 자상한 할아버지 같았다. 자존심이 강한 任 장관도 승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엄격한 얼굴로 돌아온 대통령은 이렇게 덧붙였다.
 
 "일본 정부는 하와이에 있는 나의 목에 거액의 현상금을 건 적이 있다. 그래서 내가 일본을 싫어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는 듯해. 그러나 그런 개인문제는 옛날에 잊었어요. 지금 내가 일본과 러시아를 걱정하고 있는 것은, 우리 나라의 장래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러시아는 그러나, 공산당이기 때문에 어떻든 민주주의에 지게 되어 있어요. 그 정도로 알고 주의만 하면 되어요. 일본은 다릅니다. 미국에 밀착하여 민주주의와 함께 번영할 것입니다. 내가 비행기를 타고 가면서 내려다 본 일본은 산 꼭대기까지 저수지를 만들고, 비탈도 논이었습니다. 밤에 지날 때 내려다 보니 전등불이 끊어지지 않고 산과 평야에 이어졌어. 저렇게 좁은 땅에 저렇게 많은 사람이 모여 있으니, 오래는 잘 살 수가 없어. 머지 않아 장사나 무엇이든 이름을 빌려 가장 가까운 우리나라로 몰려오게 될 것입니다. 그때야말로 일본을 잘 알고 있는 당신들 親日派가 나라를 지켜야 합니다. 지금은 일단 自重하시고, 시험대에 오른 君부터 불어오는 바람을 피하는 데 전념하셔야 해요."
 
 任 장관은 '놀라운 술회였다'고 썼다.
 <그때 謹嚴(근엄)하기 짝이 없던 노인의 자세와, 저 멀리 바라보던 노인의 眼光은 지금도 나의 기억속에 그대로 살아 있다. 일본인과의 대결에 親日派의 등장을 기대한다는 것은, 日帝시절 그들이 맡았던 곡예사로서의 努苦를 알아준 부탁이 아닌가? 친일파를 일본의 개(犬)라고 보았다면 일본인이 다시 올 때 그들이 原주인에게 다시 꼬리를 흔들 것이 분명하므로 그런 중요한 일을 맡길 리가 없다.>
 
 滿軍 장교 출신 박정희는 정권을 잡자, 日帝 관료-군인 출신들을 요직에 등용, 경제개발과 국가 근대화 사업을 맡긴다. 이들이 일본을 줏대 있게 잘 다루고 일본도 이들을 믿고 한국을 도왔다. 李 대통령의 예언대로 知日派로 변신한 親日派 출신들이 한국을 일본에 예속시키지 않고 발전시키는 데 중심이 되었다. 앞으로 5년이면 한국의 구매력 기준 1인당 국민소득이 일본을 능가한다고 한다(IMF 예측). 식민지였던 나라가 宗主國을 따라 잡는 것이다.
 
 任文桓 씨처럼 식민지 관료 생활을 하면서 日帝와 동포 사이에서 곡예사 역할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들의 마음고생을 기억함과 동시에 이들이 그때 익힌 기술을 국가 발전에 쓸 수 있도록 도와준 李承晩과 朴正熙의 위대한 안목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여섯 번 國籍을 바꾼 한 엘리트 관료의 回想

 
 농림부 장관을 지낸 任文桓 회고록을 독파중. 
趙甲濟    
 


 李承晩 정부 초기 농림부장관을 지냈던 任文桓(임문환) 선생은 1907년 출생에 1994년 별세이다. 그의 회고록이 작년에 일본어판으로 나왔는데, 제목은 ‘일본제국과 대한민국을 섬긴 관료의 回想’(草思社)이다. 1974년 한국어판으로 쓴 것을 번역했다. 해설을 쓴 鄭大均씨(수도대학 동경인문과학 연구과 교수)는 ‘식민지 시대가 남긴 가장 뛰어난 회상록’이라고 평했다.
 
 任씨는 책에서 자신을 ‘여섯 번 국적을 바꾼 사람’이라고 했다. 대한제국-일본-미군정-대한민국-敵治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다시 대한민국을 거치면서 生死를 오고간 이야기가 파란만장하다.
 
 그는 식민지 엘리트이자 독립한 조국의 건설 엘리트였다. 1907년 충남 錦山 출생, 16세에 일본에 건너가, 同志社 중학, 舊制제6고등학교(오카야마), 동경제대 법학부를 거쳐 1934년에 고등문관 시헙 행정과에 합격하였다. 拓務省(탁무성)에 채용된 그는 조선총독부로 부임, 경기도 학무과, 지방과를 거쳐 1938년 고등관이 된 뒤 용인군수를 역임하고, 총독부 殖産局産金課에서 근무하다가 1944년에 서기관으로 승진, 鑛工局 기계과에서 근무중 해방 될 때는 강원도 광공부장으로 발령된 상태였다.
 
 해방 후엔 美군정 때 한국임시정부행정연구위원을 지냈고, 헌법기초에 참여하였으며, 李承晩 정부 출범 이후 상공부차관, 보건부차관, 농림부장관을 역임하였다. 장관 사임 후엔 조선상선 사장, 한국무역협회 회장 등을 지냈다.
 
 이 책의 後記에서 任文桓씨는 이렇게 썼다.


 <나는 勉學의 全기간을 통하여 힘 있는 일본인의 助力과 學友들의 우정을 받았으며, 이는 나의 인간형성에 귀중한 도움이 되었다. 반면 체제로서의 일본에 대하여 식민지 민족으로서 고통스러운 생각이 많은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조국이 독립한 현재, 지리적 위치상 밀접한 관계를 끊을 수 없는 兩國 민족에 대한 요망사항을 쓰고 싶었다.>


 출판사는 이렇게 소개한다.
 <戰前엔 일본의 체제 안에서 동포의 이익을 지키기 위하여 마음고생을 많이 하였지만 戰後엔 ‘친일반역자’의 레테르가 붙었다. 그럼에도 그는 일본 시절에 습득한 ‘청렴과 양심’의 규범을 잃지 않고 직무를 다하였다. 이 책엔 자신의 체험을 가해자나 피해자의 史觀으로 처리하려는 태도가 일체 보이지 않는다.>
 
 任文桓 씨는 자신의 생애를 이렇게 표현하였다.
 <도전에 대한 그(주: 회고록에서 필자는 자신을 3인칭으로 서술)의 생애에 걸친 應戰은 늘 혼자서였다. 일본체제의 走狗였던 인간으로서, 즉 일본인의 엘리트코스를 올라간 인간으로서의 더렵혀진 이력서와 절개 없는 남자라는 烙印만은 끝내 끊어버릴 수 없어 오늘까지 그의 삶을 점점 더 괴롭히고 있다. 바우덕(어릴 때 별명)의 인생은 잡초인생이었다. 國籍이 여섯 번이나 바뀌는 가운데, 異민족과 동포의 발에 번갈아 가며 짓밟혔다. 그럼에도 살아서 번성한 삶이었다. 제국주의에 의한 弱肉强食이 美德으로 치부되었던 20세기의 지구상에는 이런 인생이 수억인에 이를 것이다. 이 책은 그러한 방대한 불평등 가운데 극히 일부를 기술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1984년 월간조선 8월호에 필자가 썼던 ‘조선총독부 高官들의 그 뒤’라는 기사 중 일부를 소개한다.
 
 <총독부 관료 출신들이 만든 (도표의) 日韓협회 안에는 고등 문관 시험 합격자들의 모임인「십일회」(十日會)가 따로 조직되어 있다. 매달 10일에 만나 점심을 같이한다고 그런 이름이 붙었다. 모두 39명. 敗戰 때는 대부분 총독부 과장이나 도청 부장이었던 70대, 80대 노인들이다. 39명 가운데 약 60%인 24명은 도쿄제국대학 출신, 약 20%인 8명은 경성제대 출신이다. 이 비율은 당시의 조선총독부 관료들의 學脈(학맥) 분포와 비슷할 것이다.
  
   1980년대까지는 일본의 上流사회가 도쿄대학 출신들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다. 역대 수상은 거의가 도쿄帝大 출신이었고 大藏省(대장성)의 과장급 이상 간부 중 도쿄 대학 출신이 62%. 통산성에선 63%, 운수성에선 53%, 건설성에선 58%, 문부성에선 66%나 됐다. 대기업체 사장의 약 26%가 도쿄 대학 출신이란 통계도 있었다.
  
   조선 총독부도 총독(전부 군인출신)밑에서 실무를 장악했던 고급 관료들은 거의가 도쿄제국대학 출신이었다. 「십일회」의 한 사람인 요코야마 고세이(橫山莘生)씨는 경북 경찰부장 출신인데 귀환 후 동북관구 행정감찰국장(한국의 감사원에 해당)을 지냈고 당시는 회사 사장이었다. 이 사람의 세 딸은 모두 도쿄대학 출신에게 시집갔다. 도쿄대학 출신이 같은 대학출신을 사위로 맞는 풍습은 일반화되어 새로운 귀족 사회가 이뤄지고 있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었다.  


   「十日會」의 주요 회원들을 보면 야스다 무네쓰구(총독부 철강과장·前 대장성 동경 재무국 차장·변호사), 야마모토 야노스케(황해도 경찰부장·모리오카 시장·변호사), 미야사카 간코(총독부 사무관·전 참의원 사무총장), 아마기 이사오(전북 경무과장·전문부성 사무차관·방송 교육개발센터 소장), 와카바야시 마사다케(감포항 경비대장·전 임야청 장관), 무라카미 마사니(총독부 지방과 사무관·전 시즈오카縣 경찰본부장·회사 사장) 등등. 이들 十日會 회원의 경력을 살펴 보면 공통점이 있다. 패전 때 총독부 중간 간부, 귀환 후 복직, 관료사회의 頂上部까지 승진, 퇴임 후 유관단체나 기업체로의 轉職이란 공식적인 코스를 밟았던 것이다. 고급 관리들이 퇴임 후 관련기업체나 협회 임원으로 나가는 것은 일본도 한국과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東大 출신 한국인 10명의 운명
  
   「十日會」회원들의 순탄한 人生 역정과 퍽 대조적인 그룹이 있다. 任文桓씨가 쓴「도쿄 제국 대학 법학부 졸업자 10명의 운명」(80년 9월1일치 「友邦」)에 따르면 1932~1935년 사이 任씨와 함께 법학부에서 공부했던 한국인은 모두 10명이었고 전부가 고등문관시험에 합격, 한 사람을 제외하곤 모두 관리가 되었다. 이들 중 가장 먼저 죽은 것은 진염종씨. 신익희는 상해에서 귀국 직후 고등문관시험 합격자 출신들을 끌어 모아 신생 국가의 기본 정책을 입안토록 했다. 진 씨는 추운 사무실에서 과로하다가 40세에 병들어 죽었다.
  
   任文桓씨가 임시수도 부산에서 보사부 차관으로 있을 때 동창생 김희덕의 부인(총독부 학무국장의 딸)을 만났다. 남편이 신장병으로 死境을 헤매고 있다는 것이었다. 찾아가 보니 낡은 상점 건물 2층에 20명의 환자들이 의사도 없이 눕혀져 있었고 그 가운데 과거의 도쿄제국대학 엘리트가 누워 있었다. 『일본에 가서 좋은 약을 써 봤으면…』하고 김희덕은 말했다. 이틀 뒤 그는 숨졌다. 장수철은 고문(高文) 외교관 시험에 합격한 뒤 일본 외교관으로 해외 근무를 했다. 거기서 망명 독립 운동가들로부터 협박을 많이 당했다. 성격이 비뚤어져 친구도 의심하게 되더니 대구 어느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가 병을 얻었다. 입원중 세례를 받았다. 간호원만 혼자서 臨終하는 가운데 죽었다. 未婚이었다.
  
   박성대는 한국 전쟁 중 부산에서 검사장을 지낸 뒤 변호사를 개업, 활동하다가 곧 숨졌다. 강명옥도 비슷한 시기에 죽었다. 장, 박, 강씨는 모두 전쟁 중에 얻은 병으로 不惑의 나이를 넘기지도 못했다. 이충영은 정치가적인 소질이 있는 사람으로 촉망받던 터였다. 해방 전에 이미 사법관을 그만두고 변호사가 되었다. 한국 전쟁 때 서울을 빠져 나오지 못했다. 납북되어 生死를 모른다. 장수길은 한국 전쟁 중 식산은행장이 되었다가 자진 越北했다.
  
   그는 총독부 재무국의 사무관이었는데 총독부 고등경찰도 그의 사상을 알지 못했다. 60세를 넘어 他界한 사람은 장경근과 고병국 둘뿐이다. 장경근은 일본 망명 생활에서 돌아와 곧 죽었다. 지금 살아남아 있는 것은 任文桓씨 뿐이다. 任씨는 『나의 중·고·대학 동창생은 전부 일본인이지만 8할 이상이 지금도 원기왕성하게 유복한 생활을 보내고 있다. 그 원인이 어디 있는지, 오래 사는 게 좋은 건지, 나는 모르겠다』고 했다.
  
   「十日會」와 도쿄대학 출신 한국인 10명의 운명을 비교해보면 총독부 출신들이 패전으로 손해를 보았다고 하지만 同시대의 한국인이 겪은 고난에는 도저히 비교가 안 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한국인 10명, 그것도 가장 우수한 知能을 가진 엘리트들이 겪은 질병, 갈등, 전쟁, 망명은 日帝 식민통치가 남긴 분단과 분열의 유산에서 비롯된 면이 있다.
  
   그런 점에서 「십일회」회원들은 가해자이고 한국인 10명은 피해자이다. 문제는 일본에서 내가 만난 총독부 후예들 중 어느 누구도 총독부의 이 제도적, 역사적 책임을 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개인 책임만 있을 뿐, 총독부의 책임이나 국가의 책임 같은 건 자신들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별개의 문제로 존재하고 있는 듯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