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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광 쑨원, 뭘 좋아하냐는 질문에 “혁명·여자·책”

淸山에 2012. 5. 20. 14:20

 

 

 

 

 

독서광 쑨원, 뭘 좋아하냐는 질문에 “혁명·여자·책”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270>| 제271호 | 20120520 입력 

 

 

신해혁명 2개월 후인 1911년 12월, 임시 대총통 취임을 앞두고 16년 만에 홍콩을 방문한 쑨원(앞줄 오른쪽). 뒷줄 왼쪽 첫째는

혁명 기간 동안 홍콩의 혁명세력들을 보호해준 정례국의원 허치(何啓). 앞줄 왼쪽은 홍콩 총독부 포정사 클라우드 서번(Claude Seven).  [사진 김명호] 


쑨원(孫文·손문)은 죽는 날까지 독서광(讀書狂)이었다. 간암으로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도 통증을 참으며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일본 망명 시절 대(大)정객 이누카이 쓰요시(犬養毅)와 나눈 대화가 여러 문헌에 남아 있다. 하루는 이누카이가 “가장 좋아하는 게 무엇이냐”고 쑨원에게 물었다. 질문이 끝나기가 무섭게 “Revolution”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이누카이는 뭔가 만족스럽지 못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세상 사람이 다 아는 일이다. 혁명 말고 정말 좋아하는 게 무엇이냐.” 쑨원은 옆에서 차 시중을 들던 이누카이의 부인을 힐끗 보며 웃기만 했다.

 

이누카이가 빨리 말하라고 재촉하자 부인이 자리를 피했다. 눈치가 빠른 여인이었다. 쑨원의 입에서 “Woman”이 튀어나오자 이누카이는 손뼉을 쳤다. “하오(好)”를 연발하며 한 개를 더 대라고 했다. “Book.” 쑨원은 머뭇거리지 않았다. 이누카이가 무릎을 치며 말했다. “여자를 좋아하지 않는 남자는 세상천지에 없다. 책보다 여자를 먼저 거론한 것이 절묘하다. 가장 좋아하는 것이 책이라는 것을 전부터 알고 있었다.”

 

쑨원은 원래 외과의사였다. 1892년 5월 홍콩의 영국인 외과의사 집에서 학위증서를 받았다. 1등으로 졸업했다고 하지만 학생이 12명에 불과했고 성적도 다들 비슷비슷했다.


홍콩엔 유명한 서양의사들이 운영하는 병원이 많았다. 개업을 해도 환자들이 올 것 같지 않았다. 마카오로 건너갔다. 당시 마카오 사람들은 서양의술을 믿지 않았다. 친구들에게 빌린 돈으로 ‘中西藥局’이라는 병원을 열었다.

 

인간세상에는 별 생각 없이 한 일이 엉뚱한 명예를 안겨주는 일이 심심치 않게 있다. 쑨원도 세월이 흐르면서 중국의학과 서양의학을 결합시킨 선구자라는 소리를 들었다. 순전히 간판 덕분이다. 쑨원의 전통의학에 관한 지식은 중국인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상식 수준을 넘지 않았다.

 

수술칼 들고 세상에 나와 보니 수입이 그럴 듯했다. 1년에 만(萬)여원을 벌어들였다. 고소득자였던 세관원이나 세무서원들이 한 달에 50원 받고 거들먹거릴 때였다.


쑨원은 의사가 체질에 맞지 않았다. 멀쩡한 사람 놔두고 허구한 날 환자들과 씨름하다 보니 할 짓이 못 됐다. 돈도 돈이지만 책 볼 시간이 없었다. 하루하루 머리가 썩어 들어가는 것 같았다. 1894년 9월,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직례총독(直隷總督) 겸 북양대신(北洋大臣) 리훙장(李鴻章·이홍장)에게 보내는 개혁과 구국에 관한 의견서를 만국공보(萬國公報)에 발표했다.

 

리훙장은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측근 성시안화이(盛宣懷·성선회)가 “단순한 글 장난이 아니다. 독서를 많이 한 사람 같다”며 읽어 볼 것을 권하자 그제야 관심을 보였다. “도대체 뭐 하는 애냐.” 30세가 채 안 된 의사라고 하자 “젊은 의사가 독서는 무슨 놈에 독서, 치국(治國)을 제대로 이해할 리가 없다”며 콧방귀를 내질렀다. “군사문제로 바쁘다. 그런 거 볼 시간 없다. 전쟁 끝나면 보자.”

 

청일전쟁 직전이다 보니 그럴 만도 했지만 리훙장은 형사범들 상대하는, 요즘으로 치면 법관과 의사들을 무시하는 습관이 있었다. “궁지에 몰린 사람들 상대로 큰 소리 치며 등쳐먹는 고약한 놈들”이라는 등 이유가 분명했다.

 

소식을 들은 쑨원은 맞는 말이라며 병원 간판을 내렸다. 개업 2년 만인 28세 때였다. “사람 치료하는 인의(人醫)로 평생을 지내느니 나라의 환부를 도려내는 국의(國醫)를 하겠다.”

 

혁명의 길로 들어선 쑨원은 “혁명은 부단히 진화한다. 현상만 갖고는 성공과 실패를 가늠할 수 없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는 길은 독서밖에 없다”며 온종일 책을 끼고 살았다. 한가할 때는 물론이고 목숨이 경각에 달했을 때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일반인들은 흉내내기 힘들 정도였다.

 

쑨원의 독서벽은 수많은 일화를 남겼다. 신해혁명 2년 전인 1909년, 유럽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화교들에게 혁명을 선전하다 런던에 도착했을 때 돈이 거의 바닥난 상태였다. 하루 세 끼를 싸구려 빵으로 때우는 수밖에 없었다. 형편을 안 유학생들이 쑨원에게 제대로 된 밥을 먹이자며 40파운드를 모금했다.

 

일주일 후 학생들이 쑨원을 방문했다. 여전히 맹물에 딱딱한 빵을 씹으며 “덕분에 루소의 민약론과 프랭클린의 자전, 서구의 부르주아 혁명에 관한 책을 샀다”며 즐거워했다. “생활의 어려움은 조금도 두렵지 않다. 항상 그래왔다. 몇 끼 굶는 것은 별게 아니지만 책이 없으면 불안하다. 내게는 독서가 밥보다 더 중요하다”며 이해를 구했다. 여학생 한 명이 훌쩍거리자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며 허둥대는 모습이 볼만했다. 다들 폭소가 터졌다.

 

해외 망명 시절에도 짐 보따리 속에는 책이 가장 많았다. 비 오는 날 우산은 챙기지 않아도 책은 놓고 나가는 법이 없었다. 전쟁터에서 작전을 지휘할 때도 한 손에 신간 서적이 들려 있었다. 처음 만나는 사람에겐 요즈음 무슨 책을 보느냐고 꼭 물었다.

 

1911년 10월, 쑨원은 혁명군의 우창(武昌) 점령 소식을 뉴욕의 식당에서 아침을 먹다가 접했다. 당일로 귀국을 서둘렀다. 그 와중에도 사회주의 개론 사회주의 이론과 실행 등 서구의 신간 챙기는 것을 잊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