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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111년 전 서울이야기… ‘1901년 서울을 걷다’

淸山에 2012. 5. 18. 08:10

 

 

 

 

 

꼭 111년 전 서울이야기…

‘1901년 서울을 걷다’

 

 

 

 

 

 

1901년 서울을 걷다/버튼 홈스/푸른길

 

“우리가 유일한 도시 서울의 기차역에 도착하여 기차에서 내리자, 길고 헐렁한 흰 겉옷을 입은 젊은이가 영어로 말을 걸어온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긴 카드를 건네준다. ‘스테이션 호텔, 훌륭한 숙박시설, 적절한 가격, 요란한 군대행진 나팔소리에서 멉니다.’”(40쪽) 제국주의 팽창과 더불어 세계 여행이 본격화되기 시작하던 1901년, 미국 시카고대학 사진학 교수인 버튼 홈스는 일행과 함께 중국 치푸 항을 출발, 제물포에 도착한 후 경인선 기차로 갈아타고 서울역에 내린다.

 

 ‘여행기(travelogue)’라는 단어를 만들어낸 장본인이기도 한 그는 프랑스 파리, 중국 베이징, 인도 델리,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 러시아 모스크바, 필리핀 마닐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이스라엘 예루살렘 등 지구상의 모든 대륙과 거의 모든 나라를 방문하고 마침내 1901년 서울에 발을 내디뎠던 것이다.그의 한국 방문 시기를 1899년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인천에서 한강철교를 건너 서울역에 도착했다는 내용으로 미뤄볼 때 경인철도가 완전히 개통된 1900년 7월 이후인 1901년 무렵 한국을 방문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짧은 일정에도 불구하고 서울 곳곳을 적극적으로 탐방한다. 여러 종류의 한복을 직접 입어보기도 하고 한국 사람들과 어울려 사진을 찍었으며, 우연히 왕실의 종친인 이재순을 만나 그와의 인연으로 궁궐로 초대를 받아 고종황제와 황실 인사들 앞에서 영화를 상영하기도 했다. 그 상영이 한국 최초의 영화 상영이라고 알려져 있기도 하다.

 

그가 만난 한국인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인물은 박기호이다. “호텔로 돌아왔을 때, 우리의 가이드이자 통역가 그리고 친구가 될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이후 우리와 함께 하면서 우리를 낯설고 소원하게 만들었던 언어의 장벽을 극복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박기호씨는 내가 이제까지 고용했고 또 앞으로 고용할 사람 중 가장 멋진 안내인임에 틀림없었다. 그는 카메라를 향하면 미소를 짓기까지 하는 옷 잘 입는 가이드였다. 그는 왕의 법률 고문이었던 고(故) 그레이트하우스의 주요 통역관이었기 때문에 영어 실력이 뛰어나, 알기 쉽게 말을 전해주었다.”(61쪽)

 

박기호가 어디서 영어를 배웠는지는 밝히지 않았으나 홈스 일행을 자신의 집에 초대해 식솔들의 사진을 찍도록 배려했다는 점에서 개방적인 중산층 선비였음에 틀림없다. 홈스는 이렇게 적고 있다. “아내를 낯선 사람이나 심지어 자신의 친구에게조차 거의 보여주지 않는 다른 남편들의 편견이나 믿음을 그가 함께 나누고 있었다면 이렇게 공개하려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64쪽)

 

홈스가 찍은 사진 가운데는 박기호가 양산을 쓴 채 인력거를 타고 있는 모습도 있고 나루터에서 배에 올라 천진스런 웃음을 짓고 있는 모습도 있다. 하루 일당 37.5센트를 받고 가이드로 나선 박기호는 홈스 일행을 1895년 민비 시해의 현장인 경복궁으로 안내한다. “황궁의 대문은 한정적으로 닫혀 있다. 궁은 불행한 장소, 비극의 현장이라는 이유로 버려졌다. 황제가 경내로 발을 들여놓지 않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왜냐하면 그가 이 궁에 체류했던 몇 해는 정신적 고통과 폭력과 테러로 점철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대문 앞에는 사납게 이빨을 드러낸 사자(해태)가 큰 불과 영향, 그리고 모든 종류의 불행을 막기 위해 서 있다.”(75쪽)

 

박기호는 홈스 일행을 민비의 사체가 불 태워진 소나무 숲과 그때 수습된 재를 뿌렸던 경복궁 내 연못으로 데려간다. 사실 홈스가 쓴 모든 이야기는 박기호의 입에서 나왔다는 점에서 이 책의 공저자는 박기호에 다름 아니다. “그 유해는 후에 그녀가 살해자들과 다투었던 방의 여닫이창에 걸린 채 발견된 손가락 하나 외에는 완전히 소실되었다. 재는 연못의 표면에 뿌려졌다. 왕비의 실제 무덤은 그 연못의 섬에 있는 탑을 통해 기리고 있다. 반면에 나중에 방문한 왕비의 능은 시해자의 격분으로부터 겨우 탈출한 조그만 손가락 하나를 기리기 위한 것이다.”(94쪽)

 

나중에 방문했다는 무덤은 홍릉(洪陵)을 지칭한다. 하지만 홈스는 황제(고종)를 일컬어 홍릉을 꾸미느라 7만 달러라는 거금을 쓴 인물이자 미신의 최대 피해자라고 적고 있다. 국가는 지관의 예언과 추론의 효력에 대한 황제의 믿음 때문에 흙점의 기술(풍수사상)에 터무니없는 공물을 지불하고 있다는 대목이 그것이다.

 

당시 조선에 거주하던 외국인들 대부분이 선교나 외교, 교육, 의료 등 특정한 직업의식이나 목적의식을 가지고 공적인 임무 수행에서 얻어낸 인상을 주로 글로 표현한 데 비해, 홈스는 순수한 민간인 여행자의 시선으로 ‘서울’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필름과 글에 담아내고 있다. 주관적인 평가보다는 현지에서 보고 들은 것을 중심으로 서울의 모습을 묘사하는 데 치중하고 있기 때문에 짧은 분량에도 불구, 서울의 근대화 과정을 세밀하게 재현한다.

 

홈스의 사진기 프레임에 비친 꼭 111년 전의 서울은 분명 지금 우리가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먼 이방의 도시처럼 느껴진다. 밤마다 들리는 다듬이질 소리나 고운 한복을 차려 입고 전차에 올라타는 사람들, 전신주에 붙은 벽보를 신기한 듯 보고 있는 댕기머리 소년, 제 몸보다 훨씬 큰 짐을 지고 지나가는 지게꾼들의 행렬 등을 보면 정말 우리가 알고 있는 서울이 맞는 걸까 싶기도 하다.

 

한편으로 먹이를 잡아먹기 위해 거미줄을 치는 거미처럼 도시를 잠식해 가는 전깃줄이나 전차 운행 때문에 중단된 전통, 기와집과 초가집의 나지막한 스카이라인 한가운데에 느닷없이 들어선 고딕 양식의 건물에 대한 그의 감상기는 현대 서울의 지나치게 빠른 변화와 개발을 보며 우리들이 느끼는 감상과도 어느 정도 상통한다. 홈스는 비행기가 없던 시절에 무려 여섯 차례나 세계 일주를 했다. 3만 여장에 달하는 생생한 현장 사진과 짤막한 인상기를 총 10권에 담아 ‘Burton Holmes Travelogue’라는 이름으로 출간했다. 이 책은 일본 여행기와 함께 수록된 제10권 가운데 ‘Seoul, the Capital of Korea’라는 제목의 서울 여행기를 번역한 것이다.

 

 

 

이진석 옮김.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