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 당일 서울시민 여론조사 결과
쿠데타에 반대하던 미군측의 조사결과 60%가 지지, 事後 조사 결과 약70%가 지지. 趙甲濟 오늘은 1961년 5월16일 박정희-김종필이 주도한 군사혁명이 성공하여 새로운 시대가 시작된 날이다. 그날 民心은 5.16 쿠데타에 반대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많다. 이는 사실과 다르다. 쿠데타에 반대한 주한미군의 방첩대가 그날 서울시내에서 여론조사를 실시한 결과는 시민들의 쿠데타 지지율이 60%였다. 필자가 쓴 박정희 전기 -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에서 관련 부분을 인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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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방첩대의 여론조사 박정희의 쿠데타가 성공하느냐, 아니면 매그루더의 미8군과 이한림 의 1군에 의해서 진압되느냐. 한국의 운명이 이처럼 기로에 서 있던 5 월17일 매그루더 사령관은 미 합참의장 렘니처 대장에게 전문을 보낸다. <군사쿠데타 배후세력은 아직 불분명하지만 그 세력은 증강되고 있 는 듯하다. 미 8군의 방첩대(CIC)가 거리에 나온 구경꾼들을 상대로 조사해본바 열 명에 네 명꼴로 쿠데타를 지지하고 있었고, 두 명꼴로 지지는 하지만 시기가 빨랐다고 했으며, 네 명꼴로 반대하고 있었다. 장도영 총장은 이 거사를 미리 알고 있었다. 그는 의기소침한 상태라 행동을 분석하기가 쉽지 않다. 윤보선 대통령과 백두진 참의원 의장은 진압군을 끌어들이는 것을 반대하고 있다. 한국 정부의 주요인사들은 쿠데타 계획을 사전에 알고 있었던 것 같은 데 저지하려고 하지 않았다. 쿠데타의 기본 목적은 장면 정부의 제거 또는 내각제를 없애버리자는 것으로 보인다. 反美 또는 親共 성향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이번 쿠데타의 실질적인 지도자는 박정희 장군인데 그는 이승만 정부하에서 공산주의자라는 혐의로 기소되어 유죄를 선고받았다. 그 후에 그는 공산주의자들을 색출하여 제거하는 데 협력했다. 그 이후로는 반공주의자란 평판을 얻었다. 쿠데타 세력 안에서 반미주의자나 공산주의자로 알려진 장교들은 없는 것 같다. 이한림 사령관의 충고에 따라서, 또 1군을 내 지휘권 안에 묶어둠으로써 모든 중립적인 부대들이 반란군 편으로 넘어가버리는 것을 막기 위해서 나는 합헌적으로 선출된 정부를 지지한다고 방송해왔다. 나는 반란군의 지휘부에 대해서 본대로 돌아가라고 압력을 넣고 있다. 이는 반란행위를 저지하기 위해서이다. 해병대는 돌아갈 가능성이 있으나 6 군단 포병단은 원위치시키는 것이 불가능할 것 같다. 장도영은 계엄사령관의 직책을 이용하여 반란군을 서울에서 철수하도록 명령하겠다고 약속했다. 이한림 1군사령관은 4개 사단을 출동준비 태세로 대기시켜놓고 있다. 이부대들을 서울로 끌고들어오면 반란군을 진압할 수 있을 것이다. 이한림은 장면 총리가 명령하면 반란군을 진압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는 아마도 내 명령에도 복종할 것이다. 나는 장면 총리가 간밤에 나타나기를 기다렸으나 오늘 아침까지도 보이지 않는다. 그의 측근들과도 접촉해보았는데 그들도 어디에 있는지 모르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제발 우리한테 연락을 달라고 부탁 했지만 아무응답도 없다. 만약 장면 총리가 1군을 동원하여 반란군을 진압하라고 지시한다면 나는 그의 지시를 지지할 것이다. 그가 그런 지시를 내릴 때까지는 1군을 그런 목적을 위하여 내편으로 묶어둘 작정이다. 나는 언제까지 1군을 우리편으로 묶어둘 수 있을지 알지 못한다. 장면이 숨어 있는 시간이 길어지는 만큼 그가 정권을 회복할 확률은 낮아 진다. 하나의 가능한 방법은 대통령, 참의원 의장, 국방장관, 육군 참모 총장의 반대를 무릅쓰고서라도 내가 이한림에게 명령하여 1군으로써 반란을 진압하는 것이다. 내가 그런 방식으로 성공한다 해도, 그리하여 정권이 회복된다 하더라도 그 정부를 이끌 지도자가 없는 상태, 그리고 이미 국민들의 지지가 없어진 상황에 직면할 것이다. 내 임무는 공산주의자들의 침략으로부터 한국을 방어하는 것이다. 아울러 한국 내부의 공산세력으로부터 한국을 방어하는 것도 나의 한 임무이다. 그런데 쿠데타 세력은 前공산주의자에 의하여 지도되고 있으나 공산당이 조종하고 있지는 않다. 따라서 나는 내 권한만을 이용하여 1군을 동원, 쿠데타군 을 진압한다는 것은 무리라는 판단을 제기하는 바이다.>. 매그루더의 이 電文은 많은 진실을 전해주고 있다. 서울 시민 다수, 즉 약 60%가 쿠데타를 지지하고 있다는 사실, 1군을 붙들어두는 것은 있을지도 모를 장면의 출현과 진압명령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란 사실, 장면의 진압지시만 떨어지면 매그루더도 1군에 작전을 명령할 태세가 되어 있다는 사실, 그리고 작전지휘권을 갖고 있는 그 자신의 권한만으로 진압을 시작하기엔 너무 무리가 따른다는 판단 등이다. 장면 총리의 은신이 쿠데타의 성공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는 것이 이 電文에서도 입증되고 있다. 한편 혁명군의 두뇌 역할을 맡은 김종필은 미리 준비했던 포고령을 차례로 발표하여 군사정권의 힘을 전국으로 확산시키고 있었다. 포고령 제5호는 '금융기관의 인출은 1회에 10만환 이하, 월간 50만환까지로 제 한한다'는 것이었다. 6호는 '물가를 16일 현재선으로 동결하고 매점매 석 행위자는 극형에 처한다'고 했다. 7호는 '외국인의 재산 및 생명을 보호한다'는 것이었고, 8호는 '금융동결령 가운데 군사비는 제외한다' 는 것, 9호는 '통행금지 시간을 완화하여 17일부터는 밤10시부터 다음 날 5시까지로 한다'는 것, 10호는 '혁명완수상 필요하면 법원의 영장 없이 체포, 구금, 수색하고 군사재판소를 설치한다'는 것이었다. 11호는 검찰과 법원에 대한 지시였다. <법원과 검찰에 재직하는 공무원은 구태를 일소하고 혁명정신에 입각하여 새롭고 정기찬 사법운영의 태세를 갖추도록 하라. 모든 민형사 사건은 지체없이 정상적인 법체제 아래에서 신속공정히 처리하라. 대법원장과 법무부 장관은 위의 사항에 관한 실천 계획을 본관에게 제시하라.>. 혁명군 본부가 된 육본 상황실에서 사법 기능을 통제하고 있던 이는 장교 시절 고시준비를 하여 법률에 밝은 이석제 중령이었다. 그는 미국 정보기관이 박정희와 김종필의 사상적 배경을 뒷조사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석제는 '골치아픈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판단을 했다. 박정희의 좌익 前歷이 이런 상황에서 폭로되고 이용당하면 쿠데타는 실패할 가능성도 있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이석제는 이 미묘한 문제로 누구하고 상의도 할 수 없었다. 박정희와 김종필은 여기저기로 뛰어다닌다고 정신이 없었다. 이석제는 자신의 결심으로 해결책을 찾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의심 많은 미국측에 보여줄 결백증명을 생각하다가 '전국에 있는 좌익 사상범들을 체포하자'는 발상에 도달했다. 그는 전국의 군수사기관 헌병, 그리고 경찰, 검찰에 비상을 걸었다. '좌익사상범들을 체포하라'는 명령이 전달되었다. 전국에 검거선풍이 불었다. 장면 정부 시절에 표면에 등장했던 좌익세력뿐 아니라 혁신정당 관련자들, 교원노조 관련자들, 보도연맹원들(전향한 공산주의자 모 임), 노조 지도자들 등 약 4천 명이 영장없이 체포되었다. 진짜 좌익과 억울한 사람들이 뒤섞였다. 역사가 크게 굽이치는 상황에서는 개인은 힘없이 격류에 휘말려드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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