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 예술/옛시조 모음

전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 약비의 「만강홍(滿江紅)」등 여러 작품

淸山에 2011. 8. 9. 12:57

 

 

 
 
 
전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송철규]

1) 못다 핀 충정
소식이 죽은 뒤 26년 만에 금(金)나라가 황하를 건너 변경을 공격해왔다. 송의 흠종(欽宗)과 이미 태상황(太上皇)의 자리에 올라 있던 휘종(徽宗)은 금의 군대
▲ 송철규 교수
에 이끌려 북쪽으로 잡혀가고 북송은 멸망하였다. 한편, 이와 동시에 휘종의 또 다른 아들인 조구(趙構)가 소규모의 정권을 세워 항주에 정착했다. 이 조구가 바로 남송(南宋)의 첫째 황제인 고종(高宗)이다. 

고종과 진회(秦檜)라는 재상은 중원을 잃었지만 소규모이나 자신들의 정권만이라도 유지하기 위해 금나라와의 타협을 주장하였다. 그런데 장군 악비는 결연히 맞서 싸워야 한다는 주전파였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고종 정부에게 악비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악비가 ‘악가군(岳家軍)’이라고 일컫는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주선진(朱仙鎭)을 공격할 때에 조정에서는 하루에도 열두 차례나 금패(金牌)를 내리면서, 즉시 조정으로 회군할 것을 명령하였다. 그리고는 결국 억지 죄명을 씌워 악비를 살해하였다. 

악비(岳飛:1103~1142)의 자는 붕거(鵬擧)이며 상주(相州) 탕음(湯陰:오늘날의 하남성 탕음시?) 사람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악비는 장군이나 그의 사 작품 또한 악비 못지않게 널리 알려져 있다. 바로 그 작품 「만강홍(滿江紅)」을 살펴보자.
 
관을 찌르는 성난 머리칼     怒發冲冠
난간에 기대서니      憑欄處
오던 비도 그친다      瀟瀟雨歇
눈을 쳐들고 멀리 바라보며     擡望眼
하늘 우러러 길게 포효하나니     仰天長嘯
장사의 가슴에 피가 끓누나     壯懷激烈
삼십년 공명이 티끌 같은데     三十功名塵與土
전선 팔 천리 길 구름과 달빛만 스칠 뿐이라   八千里路雲和月
잠시도 한가히 기다릴 수 없나니 검은 머리 어느새 희어졌고  莫等閑白了少年頭
허허로운 슬픔만이 간절하다     空悲切
정강의 피맺힌 치욕이여     靖康恥
아직도 설욕하지 못했나니     猶未雪
신하된 자의 애끓는 한      臣子恨
언제면 없어지려나      何時滅
전차를 몰아몰아      駕長車
하란산의 허점을 돌파해보리라     踏破賀蘭山缺
굳센 이 맘 주리면 오랑캐 살을 씹고    壯志饑餐胡虜肉
담소하다 목마르면 오랑캐 피를 마시리   笑談渴飮匈奴血
진두에 서서 빼앗긴 산하를 모두 수복하고 나면  待從頭收拾舊河山
천자에게 돌아가 조회하리     朝天闕
 
악비는 이 작품을 대략 서른 일고여덟 살 때 지었다. 그러나 당시 그는 이미 10여 년 동안 갖가지 전투를 치루고 수많은 승리를 얻은 백전노장이었다. 그에겐 더 이상 전공을 얻고자하는 욕심은 안중에도 없었다. 오로지 ‘전차를 몰아몰아 하란산의 허점을 돌파하여’ 황제가 잡혀 갔던 ‘정강의 치욕(靖康之恥)’을 씻어보자는 일념뿐이었다. 이는 당시 모든 한족 백성들의 소망이었다. 

악비 같은 무장이 아닌 문신 중에서도 결연한 태도를 보인 주전파 인물들이 있었다. 그 중 호전(胡銓:1102~1180)이라는 사람은 자가 방형(邦衡)이고 호가 담암(澹庵)이며 길주(吉州) 여릉(廬陵:오늘날의 강서성 길안(吉安)시?) 출신이었다. 진사가 된 후 추밀원(樞密院) 편수관(編修官)을 지냈다. 소흥(紹興) 8년(1138)에 진회와 왕륜(王倫) 등 주화파 사람들이 금나라와 굴욕적인 화해를 하자, 호전은 황제에게 상소문을 올려 대담하게 진회의 행위를 비판하였다. 이 글이 바로 유명한 「무오년 고종에게 글을 올려 화친의 중단을 촉구하다(戊午上高宗封事)」이다. 

이 글은 이치가 뚜렷하고 대의명분이 확실하다. 그는 당시 전국의 형세를 분석한 후 고종에게 금의 말을 믿어서는 안되며, 금에게 무릎을 굽혀 금의 신하임을 자청해서는 더더욱 안된다고 호소하였다. 아울러 진회를 대표로 하는 주화파의 속셈을 폭로하면서 ‘같은 하늘 아래에서 진회 등과 더불어 의로움을 나눌 수 없다(義不與檜等共戴天)’라는 의지를 표현하였다. 끝부분에서 호전은 차라리 ‘동해로 뛰어들어 죽을지언정(赴東海而死)’ ‘소규모의 정부에 남아 살려고 급급해 하지(處小朝廷求活)’는 않겠다는 결심을 내보인다. 이 말은 황제의 귀에까지 전해졌다. 그 결과 이 글은 조정에 한바탕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특히 백성들은 글의 내용을 통쾌하게 여겨 전단을 만들어 강남 곳곳에 붙여놓았다고 한다. 아울러 금나라 사람들조차 비싼 돈을 내고 이 글의 사본을 사갔다고 한다.  

물론 진회는 그를 가만두지 않았다. 그래서 진회가 살아있을 때에 호전은 유배지를 전전할 수밖에 없었다. 진회가 죽은 후에야 조정으로 복귀했지만 결국 주화파 관리들과 어울릴 수 없어서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이처럼 호전은 관직을 버리고 목숨의 위험을 느끼면서도 나라와 백성을 위해 할 말을 당당히 하는 용감한 사람이었다. 그 후 호전은 영웅적 기개를 지닌 사나이로서 중국인의 자랑이 되었다. 
 
 
2) 비운의 여류작가
 
소식이 좋아한 사람 중에 또 이격비(李格非)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산문에 뛰어났다. 그가 지은 「낙양의 유명 화원(洛陽名園記)」은 낙양의 개인저택 가운데 유명한 화원들만을 전문적으로 다루었다. 이를 통해 당시의 권문세가에 경각심을 심어주기 위함이었다. 개인의 향락만을 추구하고 국가의 운명을 잊는다면 더 이상 그런 좋은 화원을 가질 수 없다는 논리였다. 그런데 작 이제부터 다루려는 사람은 이격비가 아니라 그의 딸인 이청조이다. 이청조(李淸照:1084~약 1151)는 제남(濟南:오늘날의 산동성 제남시) 사람으로서 스스로를 이안거사(易安居士)라고 불렀다. 묵향(墨香)이 가득한 가정에서 태어난 그녀는 어려서부터 문학을 좋아하였다. 열여덟 살 때에는 당시 태학(太學)의 학생이던 조명성(趙明誠)과 결혼하였다. 둘은 책을 즐겨 읽고 서예 작품과 골동품 감상에 취미를 가졌다. 생활이 그리 넉넉하진 않았으나 행복이 가득한 나날이었다. 후에 조명성이 관리가 되자 문물의 수집에도 열을 올려 서책과 서화, 청동기와 벼루와 붓 등을 모아 십여 칸의 방을 가득 채울 정도였다.   

그러나 바로 그즈음 금의 군대가 쳐들어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 전에 조명성은 새로운 임무를 맡아 타지에 가 있던 상태였다. 이청조는 할 수 없이 혼자서 귀중한 문물을 수습하여 15대의 수레에 나눠 싣고 피난길을 나섰다. 그런데 오래지 않아 조명성은 임지에서 병으로 죽고만다. 홀몸이 된 이청조는 살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그 과정에서 애써 모은 문물 또한 파손되거나 도난을 당하여 열에 한두 개도 남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청조는 어느 날 우연히 남편이 써놓았던 『금석록(金石錄)』을 읽고 한없는 슬픔에 잠겼다. 일찍이 조명성이 살아 있을 때에 30권에 달하는 『금석록(金石錄)』을 편찬한 적이 있었다. 이에 이청조는 「금석록 후서」를 지어, 결혼 초기 행복했던 두 사람의 생활과 많은 문물의 수집에서 분실에 이르는 자초지종을 풀어내었다. 남아 있는 문물을 보며 남편을 그리는 애잔한 모습이 읽는 이의 눈물을 자아낸다.  

이청조의 사는 대강의 윤곽을 제시하였고 전고의 사용을 되도록 자제하였다. 일부 작품은 자연스럽고 활발하여 일상적인 대화를 연상케 한다. 먼저 「여몽음(如夢令)」을 살펴보자.
 
지난 밤 비는 성기고 바람은 급하더니   昨夜雨疏風驟
깊은 잠에도 술기운이 가시지 않았어라   濃睡不消殘酒
발을 걷어 올리는 하녀에게 물으니    試問捲簾人
도리어 해당은 여전하다 하는구나    却道海棠依舊
아는가 아는가       知否知否
마땅히 푸른 잎은 살찌고 붉은 꽃은 야위어 있으리  應是綠肥紅瘦
 
이 작품은 읽는 이로 하여금 ‘한밤 내 비바람 소리에 꽃은 얼마나 떨어졌을까?’라는 맹호연의 시구를 연상케 한다. 그러나 이청조는 완전히 다른 형태로 비 개인 봄날의 정경을 표현하고 있다. 전날 마신 술은 ‘깊은 잠’에도 불구하고 술기운이 아직 가시지 않은 채였다. 그런데 간밤에 비바람 소리를 들었으니 보지 않아도 꽃들이 적지 않게 떨어졌으리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시녀는 관찰력이 예민하지 못해 ‘해당화는 여전한데요, 아씨!’라고 말한다. 그러자 이청조는 이렇게 대답한다. ‘너는 아니? 틀림없이 푸른 꽃잎은 살찌고 붉은 꽃은 야위었을거야.’ 

술에 관해 쓴 작품 중 또 다른 「여몽령」이 있다. 이 작품은 술에 취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잃었던 기억을 적고 있다. 
 
늘 생각나는 것은 강변 정자에 해가 질 무렵   常記溪亭日暮
너무 취해 돌아가는 길 잃었던 일이라   沈醉不知歸路
흥을 가라앉히고 밤늦게 배에 올라 돌아오던 길에  興盡晩回舟
연꽃 가득한 곳으로 잘못 들고 말았지    誤入藕花深處
어떻게 헤쳐 갈까 어떻게 헤쳐 갈까    爭渡爭渡
여울에 있던 갈매기와 백로가 놀라서 날아올랐다네  驚起一灘鷗鷺
 
강변의 정자에서 술을 마시고 취해 배를 저어 집으로 돌아갈 때에 연꽃 가득한 곳으로 길을 잘못 들었다. 어떻게 여기를 빠져 나갈 수 있을까? 초조한 마음에 배를 이리저리 돌리는 중에 여울에 있던 갈매기와 백로가 푸드덕 푸드덕 날아올랐다. 작품 전체가 너무나 생기발랄하다.  

또 「취화음(醉花陰)」이란 작품은 중양절의 느낌을 담은 사이다. ‘넋이 빠지지 않는단 말 하지 마세요, 주렴이 서풍에 말려 올라가니, 사람은 국화보다 더 여위었어요(莫道不消魂, 簾倦西風, 人比黃花瘦)’라는 말로 끝을 맺고 있다. 전하는 바로는 조명성이 이 구절을 읊고 찬탄을 금치 못하면서도 내심 자존심이 상했다고 한다. 그래서 문을 닫아걸고 음식과 잠도 잊은 채 꼬박 사흘 밤낮을 고심하여 50수의 사를 지었다. 그리고는 이청조의 「취화음」 사를 중간에 끼워 친구에게 보였다. 이리저리 꼼꼼히 살펴보던 친구는 “여기 이 세 구절이 가장 뛰어나군!”이라고 말했다. 어떤 구절인지를 묻는 조명성의 다급한 질문에 친구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넋이 빠지지 않는단 말 하지 마세요, 주렴이 서풍에 말려 올라가니, 사람은 국화보다 더 여위었어요!”

이청조의 만년은 처량하였다. 따라서 그녀의 사 역시 비련의 분위기가 가득하다. 「성성만(聲聲慢)」이란 작품을 살펴보자.
 
찾고 찾고 또 찾지만      尋尋覓覓
냉랭함과 스산함 뿐      冷冷淸淸
처량하고 비참하고 외로워라     凄凄慘慘戚戚
잠깐 따뜻하다 금새 추워지니     乍暖還寒時候
몸 편히 보전키 어려우리     最難將息
두 잔 석 잔 맑은 술 마시지만     三杯兩盞淡酒
슬픔 어찌 감당할꼬      怎敵他
저물수록 바람만 매서워라     晩來風急
기러기 날아가네      雁過也
이 내 맘 너무도 아프게 하지만    最傷心
그래도 옛 시절 서로 알았었지     却是舊時相識
온 땅에 국화 꽃잎 쌓이더니     滿地黃花堆積
너무도 초췌히 변했구나     憔悴損
이제 어느 뉘가 너를 딸꼬     如今有誰堪摘
창가를 지켜 앉아      守着窓兒
홀로 어이 저문 날을 보낼까     獨自怎生得黑
오동잎에 가랑비 내리더니     梧桐更兼細雨
황혼이 되어도       到黃昏
후두둑 후두둑       點點滴滴
이 때라        這次第
어찌 근심 이 한 자를 견딜 수 있으리오   怎一個愁字了得
 
처음 세 구절에서는 연이어 첩자를 씀으로써 고독하고 적막한 환경을 부각시켰다. 이전까지는 그녀처럼 이렇게 첩자를 활용한 사인은 없었다. 그녀는 무엇을 찾고 싶었을까? 사실 그녀는 너무나 많은 것을 잃었다. 남편의 따뜻한 사랑, 아름다운 지난날의 추억, 어떻게 하면 이 모든 것을 되돌릴 수 있을까? 갑자기 싸늘해진 가을날, 그녀는 술잔을 기울여보지만 추위를 이길 수 없었으며 서러움과 근심이 더더욱 사무쳤다. 기러기는 예전처럼 하늘을 날아가는데 세상은 너무나 달라져 있었다. 저 기러기 편에 소식을 전하려 해도 이제는 더 이상 보낼 곳이 없었다. 국화는 꽃을 떨어뜨리어 가지에서는 이미 한 송이도 찾아볼 수 없었다. 외롭고 쓸쓸한 밤을 어떻게 견딜 수 있을 런지! 황혼녘까지 가랑비가 내려 오동잎 위로 후두둑 후두둑 떨어지는 광경을 어찌 ‘근심(愁)’이라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는가? 

이청조는 누구나가 인정하는 정통 ‘완약파’ 사인이다. 그녀는 사를 지었을 뿐만 아니라 창작에 관한 이론도 제시하였다. 그녀의 『논사(論詞)』는 사의 발전사를 회고하면서 역대 사인들의 장단점을 지적하였다. 그 과정에서 음악성을 특별히 강조하여 음률에 대한 엄격한 기준을 제시하였다. 『논사』는 완약파 사인의 의견을 대표하지만 여성의 한 사람으로서 자신감 있게 선배작가들을 평가함으로써 빼어난 재능과 호방한 성격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이청조는 여성 지식인으로서 규방에만 갇혀 지내는 일반 여성과는 크게 달랐다. 나랏일에도 관심을 기울여 적지 않은 시를 남겼다. 다음의 「여름날(夏日)」이란 5언 절구는 남쪽으로 내려가서 지은 작품이다.  
 
살아서는 응당 인걸이 되어야 하며    生當作人傑
죽어서는 또한 귀신의 영웅이 되어야 하리   死亦爲鬼雄
지금 항우를 생각하노라니     至今思項羽
강동을 지나고 싶지 않구나     不肯過江東
 
앞서도 말했듯이 그 옛날 초패왕 항우는 유방에게 패한 뒤 강동으로 도피하지 않고 오강(烏江)에서 자결하였다. 이 시에서 이청조는 차라리 죽음을 택할지언정 도망치지 않은 영웅을 찬양하였다. 이는 금나라와의 결사 항전의 길을 택하지 않고 강남으로 피신하여 구차하게 목숨을 부지하려는 남송 정부를 풍자한 것이다.  

혹자는 같은 완약파 사인 가운데 진관(秦觀)의 사에서 여성스러운 분위기가 난다도 말한다. 반면에 이청조는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대장부의 기개가 넘치니 정말 아이러니라 할 수 있다.   

북송 말에서 남송 초에 이르는 시기에 가장 유명한 시인은 진여의이다. 진여의(陳與義:1090~1139)는 낙양 사람으로 자는 현비(玄非)이고 호는 간재(簡齋)였다. 휘종(徽宗)시절에 태학박사를 지냈다. ‘정강의 난’이 일어나 금나라가 변경(개봉)을 침공하였을 때 진여의는 진류(陳留)의 관리로 있었다. 그는 진류를 빠져나와 호남과 광동, 복건을 돌아 마침내 임안(臨安:오늘날의 항주시)에 도착하여 고종(高宗)을 배알하였다. 

진여의는 소식과 황정견을 존경하였다. 그래도 그가 가장 숭상한 사람은 두보였다. 두보가 안·사의 난을 거치면서 천신만고 끝에 조정을 따라갔던 경험이 그의 경험과 겹쳐졌기에, 진여의는 두보 시에 담긴 참뜻을 터득할 수 있었다. 따라서 그의 일부 시 또한 ‘시로 쓴 역사(詩史)’의 맛을 낸다. 「봄을 슬퍼하며(傷春)」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조정은 오랑캐를 멸할 계책 없으니    廟堂無策可平戎
감천의 봉화는 늦은 밤에도 궁을 비추고 있다  坐使甘泉照夕烽
처음 변경에서 싸우는 말 울음소리에 놀랐을 때  初怪上都聞戰馬
어찌 궁벽한 곳에서 황제를 뵐 줄 알았으리   豈知窮海看飛龍
외로운 신하의 흰머리는 삼천 장인데    孤臣霜發三千丈
해마다 안개꽃은 일만 겹이네     每歲煙花一萬重
그래도 기쁜 소식은 장사 태수 향자인이  稍喜長沙向延閣
피폐한 병사 이끌고 적군에게 용감하게 맞섰다 하네 疲兵敢犯犬羊鋒
 
이 시는 건염(建炎) 4년(1130), 고종(高宗)이 금 군대의 침략을 피해 배를 타고 바다로 도망갔던 사실을 다루었다. 앞의 네 구절에서는 금나라 군대의 침입에 무참히 짓밟히는 조정의 상황을 묘사하였다. 시인은 황제의 궁궐 근처에까지 봉화가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모습을 보며 가슴 졸였다. 적의 군대가 어떻게 서울에까지 쳐들어올 수 있었을까? 이런 생각도 잠시, 황제는 황급히 배를 타고 바다로 도망쳤다. 5,6구에서는 자신의 감정을 개입시켰다. 나라와 백성에 대한 한결같은 충정과 걱정으로 머리가 다 세었으며, 꽃이 만발한 봄이 왔건만 풍파에 흔들리는 조정의 모습을 바라보는 신세를 한탄하였다. 마지막 연에서는 억누르고 있던 감정이 폭발하였다. 장사의 태수 향자인(向子諲)이 의병대를 조직하여 금의 군대에 대항한다는 소식에 작자는 크게 고무되었다. 이 시를 두보의 <봄을 슬퍼하며(傷春)>와 <제장(諸將)> 시와 함께 읽으면 많은 공통점을 느낄 수 있다. 결과적으로 진여의는 송대 시인 가운데 두보의 시풍을 가장 잘 이어받은 사람이다. 일각에서는 그가 강서시파의 시인이냐 아니냐를 놓고 말들이 많다. 원대 시인 방회(方回)는 진여의를 강서시파의 ‘3대 인물(三宗)’의 한 사람으로 꼽았다.
 
 
3) 자신의 작품을 불태운 사나이
 
공교롭게도 북송의 멸망(1127)을 전후로 4명의 시인이 태어났다. 그들은 각각 육유, 양만리, 범성대, 우모 등으로 중국인들은 그들은 ‘중흥4대시인(中興四大詩人)’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명실상부한 남송의 시인들이다. 그들 가운데 지명도로 보나 성취도로 보나 육유가 가장 뛰어났다. 그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자세히 다루기로 하겠다. 우모의 시와 산문은 평이하여 대시인의 품격은 갖추지 못하였다. 양만리와 범성대는 나름대로의 특성을 지니고 있었으며 비슷한 성취를 이루었다. 

양만리(楊萬里:1127~1206)의 자는 정수(廷秀)이고 호는 성재(誠齋)로서 길수(吉水:오늘날의 강서성 길수현) 사람이었다. 그의 시는 일가를 이루어 ‘성재체(誠齋體)’라는 호칭을 얻었다. 진사에 합격하여 관리 생활을 하면서 평생 청렴결백하였다. 노년에는 정확한 의견을 고수하다가 재상에게 미움을 샀다. 그래서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15년간 칩거하였다. 죽음을 앞두고는 종이와 붓을 가져다가 ‘(我頭顱如許, 報國無路, 惟有孤憤)!’이라고 써서 억울한 심정을 담아내었다. 

양만리는 처음에 강서시파의 시를 배웠으나 후에 다시 왕안석과 만당의 시를 공부하였다. 그러나 배우면 배울수록 어렵기만 하였다. 어느 날 문득 그는 선배의 시에 매여서는 자신의 길을 찾을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그때까지 지었던 천여 수의 시를 모조리 불태워 버리고, 구속되지 않으며 자유로운 창작을 하게 되었다. 그는 그가 본 경치와 사물을 시에 녹여 내는 작업을, 쉽고 재미있는 일로 여겼다. 「한가로운 초여름에 낮잠 자고 일어나(閒居初夏午睡起)」를 살펴보면 이를 잘 알 수 있다.
 
매실은 신맛을 남기어 이빨이 약해지고   梅子留酸軟齒牙
파초는 푸르름을 나누어 비단 창문을 물들인다  芭蕉分綠與窓紗
해는 길어 낮잠 자고 일어났으되 무료하여   日長睡起無情思
아이들이 버들꽃 잡는 것을 한가로이 바라본다  閑看兒童捉柳花
 
낮잠에서 깨어났는데, 매실의 신맛이 여전히 입안을 맴도는 가운데 이빨이 뻐근하였다. 파초잎은 햇살을 받아 그 푸르름으로 창가를 물들이고 있었다. 긴긴 여름날 낮잠에서 깨어나 나른함에 젖어, 버들 꽃을 잡기 위해 뛰어 다니는 아이들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는 모습이 친근하다. 이처럼 일상적인 신변잡사가 시인의 손을 거치자 시적 정취를 물씬 풍긴다. 마치 담담하게 일상을 담아낸 편지글 같으면서도 ‘남기어(留)’와 ‘나누어(分)’ 같은 시어를 보면 얼마나 정교한지 모른다. 시인이 고심한 흔적이 역력하다. 물론 <새벽에 정자사를 나와 임자방을 전송하다(曉出淨慈寺送林子方)>처럼 순수하게 풍경만 읊은 시도 있다.
 
마침내 서호는 6월이라      畢竟西湖六月中
경치는 사계절과 더불어 사뭇 다르다    風光不與四時同
하늘에 맞닿아 있는 연잎은 끝없이 푸르고   接天蓮葉無窮碧
햇살에 비친 연꽃은 유달리 붉어라    映日荷花別樣紅
 
정자사는 경치가 아름다운 항주의 서호변에 있었다. 유월의 어느 새벽에 시인은 정자사를 나와 친구를 전송하면서, 떠오르는 아침햇살을 받아 아름답게 빛나는 서호의 모습을 보고 영롱한 시구로 승화시켰다. 특히 3,4구는 천하의 절창(絶唱)으로 유명하다. 호수를 가득 메운 연잎은 끝없이 펼쳐져 그 푸르름으로 하늘까지 물들일 기세였다. 반면에 연꽃은 햇빛을 받아 유달리 붉었다. ‘끝없이 푸르고(無窮碧)’와 ‘유달리 붉어라(別樣紅)’란 시어는 시 전체에 생기를 불어넣고 있다.    

자연 풍경은 아름다움을 주지만, 때로는 남다른 감정을 동반하기도 한다. 어느 해인가 양만리는 명령을 받고 금나라의 사신을 접견하러 갔다. 배가 회하(淮河)에 이르렀을 때 그의 마음은 착잡하였다. 이에 <처음으로 회하에 들어가(初入淮河)>라는 시를 지었다.
 
배는 홍택 호안의 모래시장을 떠나고    船離洪澤岸頭沙
사람들은 회하에 이르면 마음이 즐겁지 않다   人到淮河意不佳
하필이면 상건하는 멀리 흐르는가    何必桑乾方是遠
중류 북쪽은 하늘 끝이로구나     中流以北卽天涯
 
회하는 중국의 중심부로서, 중국 대륙을 남북으로 가를 때 그 기준이 되는 강이다. 그런데 당시에는 송나라와 금나라를 가르는 국경의 구실을 하였다. 예전에 송나라가 굳건하였을 때에는 국경이 한참 북쪽인 상건하 부근이었는데, 이제는 그 땅을 금나라에게 빼앗기고 회하 중류에서 하늘 끝을 운운해야 하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이처럼 냉혹한 현실 앞에서 시인은 마음이 착잡할 수밖에 없었다. 

양만리는 생전에 2만 수가 넘는 시를 지었다. 모방 일변도의 강서파 시풍에서 벗어나 분명하고 생동적인 언어로써 눈앞에 펼쳐진 자연의 모습을 담담하게 표현하였다. 그는 스스로 시를 지을 때 ‘활법(活法)’을 쓴다고 하였다. 즉, 시의 원칙을 깨지 않으면서도 변화를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활발하고 자유롭게 시어를 구사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심각하지 않고 평범하게 쓰인듯하면서도 신선하고 생기가 넘치는 시체(詩體)인 ‘성재체’를 이루었다. 이는 중국문학사에 한 획을 긋는 업적이었다.
 
 
4) 전원시의 완성자
 
범성대의 시는 양만리와 달랐다. 양만리가 대자연을 즐긴 반면, 범성대는 사람과 사회에 집중하였다. 범성대(范成大:1126~1193)의 자는 치능(致能)이며 평강(平江) 오군(吳郡:오늘날의 강소성 소주시) 사람이었다. 문인 집안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책을 가깝게 접하였다. 그런데 열일곱 살에 부모님을 여의고, 가장이 되어 두 여동생을 돌봐야 했다. 어렵게 두 여동생을 시집보낸 뒤에야 비로소 본격적인 과거 준비를 할 수 있었다. 그래서 20대 후반에야 진사가 될 수 있었다. 관운은 비교적 평탄하여 참지정사(參知政事)에까지 올랐다. 그런데 강직한 성품의 범성대는, 간신을 중용하려는 황제의 조서 작성을 거절하여 황제의 미움을 사기도 하였다. 

그는 남송의 특사로서 빼앗긴 땅으로 가 금나라 관리들과 담판을 벌였다. 침착하게 응대하고 기회를 보아 실리를 챙기는 방법으로 송 조정의 체면을 살려주었다. 그는 그 과정을 『남비록(攬轡錄)』이라는 1권의 일기와 72수의 기록시를 남겼다. 그 가운데 <주교(州橋)>는 옛 수도 변량(汴梁:오늘날의 하남성 개봉(開封)시)을 보고 느낀 감회를 적은 작품이다.
 
주교의 남북으로는 천자의 길     州橋南北是天街
노인은 해마다 어가(御駕)가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父老年年等駕回
눈물을 참으며 소리 죽여 사자에게 묻는 말   忍淚失聲詢使者
정말로 언제나 천자의 군대가 오는 겁니까?  幾時眞有六軍來
 
주교는 북송의 수도 변량에 있는 변하(汴河)를 가로지르던 천한주교(天漢州橋)를 가리킨다. 황궁으로 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다리였다. 금나라가 중원을 점령한 후에도 그곳의 노인들은 해마다 송의 군대가 다시 옛 땅을 회복시켜주길 학수고대하였다. 황궁 밖에서 만난 유민들은 눈물을 머금고 송의 군대가 언제나 오냐고 사자에게 물었다. 여기서 ‘정말로(眞)’라는 시어를 통해 시인은, 노인들의 간절한 소망과 쓰라린 실망감을 함축시켰다.  

범성대는 만년에 잦은 병으로 시달려 58세 이후에는 석호(石湖)에 은거하였다. 그곳에 석호별장을 짓고 스스로를 석호거사(石湖居士)라 불렀다. 시골 풍경과 농가의 풍습 및 인정과 친근하게 어울렸다. 그는 이 시기에 60수의 7언 절구를 짓고 「사계절 전원의 잡흥(四時田園雜興)」이라 통칭하였다. <늦봄 전원에서의 잡흥(晩春田園雜興)>도 그 중의 하나이다.
 
나비는 쌍쌍이 채소꽃밭 속으로 날아들고   蝴蝶雙雙入菜花
해는 길어도 농가를 찾는 손님이 없다   日長無客到田家
닭은 울타리 넘어 날아가고 개는 개구멍에 짖어대니  鷄飛過籬犬吠竇
행상이 차를 팔러 온 것을 알겠구나    知有行商來賣茶
 
이 시에서는 움직임 속에서의 고요함을 보여주었다. 나비가 쌍쌍이 채소꽃밭 위를 날고, 닭이 홰를 치고 날며 개가 짖어대는 등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해는 길어도 농가를 찾는 손님이 없는’ 고요함을 부각시키기 위함이었다. 봄이 되자 모두들 농사일로 바빠 마을이 텅 비어있었다.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차를 파는 행상이 우연히 들어오자 닭이며 개들이 시끄럽게 반응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시인이 농민들의 어려움을 무시하고 ‘전원생활의 즐거움(田園樂)’만을 노래했던 것은 아니다. <사계절 전원의 잡흥> 중에도 농민의 고통을 동정한 시가 있다. 
 
벼 익을 무렵 농사일은 고달프고 고달파   垂成穡事苦難難
비 걱정 바람 걱정 그리고 냉해 걱정    忌雨嫌風更怯寒
남은 것 빼앗지 말라 하늘에 하소연도 해보지만  牋訴天公休掠剩
그나마 절반은 사채를 갚고 절반은 관아로 보낸다  半償私債半輸官
 
벼가 익어갈 때 농부들은 가장 힘들었다. 비바람에 벼가 쓰러질까 냉해로 피해를 입을까 노심초사하였다. 그래서 나머지나마 끝까지 잘 수확할 수 있도록 보살펴 달라고 하늘에 매달리곤 하였다. 그러나 수확한 뒤에도 절반은 사채를 갚느라 뺏기고, 나머지 절반도 관가의 세금으로 빼앗기는 형편이었다.

예로부터 전원시를 쓴 시인은 많았다. 그러나 먹고 마시며 전원의 경치를 즐기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범성대의 <사계절 전원의 잡흥> 60수는 전원생활의 구석구석을 자세히 묘사하였다. 농부들의 기쁨과 즐거움뿐만 아니라 고통과 비애도 담아내었다. 심지어 관청과 악독 관리를 직접적으로 비판하는 시도 있었다. 따라서 범성대야말로 전원시의 집대성자라 할 수 있다. 중국인들이 전원시를 거론할 때면 언제나 도연명과 함께 범성대의 이름을 언급한다. 

이번 장의 첫머리에서 애국 작가인 악비와 호전에 대해 살펴보았는데, 남송시대에도 이에 못지않은 애국 작가가 있었다. 그는 바로 장효상이다. 장효상(張孝祥:1132~1170)의 자는 안국(安國)이고 호는 우호거사(于湖居士)이며 역양(歷陽) 오강(烏江:오늘날의 안휘성 화(和)현) 사람이었다. 스물두 살에 조정의 시험에 참가하였는데, 때마침 진회(秦檜)의 손자인 진훈(秦塤)과 함께 시험을 보게 되었다. 시험관은 진회에게 잘 보이기 위하여 진훈을 1등으로 뽑았다. 그런데 고종(高宗)이 친히 그들의 글을 살펴본 후 장효상이 더욱 뛰어나다 여기고, 장효상을 1등으로 정하였다. 이에 앙심을 품은 진회는 사람을 보내 장효상의 아버지를 모반죄로 누명을 씌워 잡아들였다. 다행히 다음해에 진회가 죽자 사건은 더 이상 확대되지 않았다. 장효상은 강직한 성품과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악비의 원한을 변호하는 글을 올리기도 하였으며, 항금(抗金) 정책을 적극적으로 주장하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몸이 약하여 스물아홉 살에 병으로 죽었다. 

장효상은 사(詞)로 이름을 날렸다.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시흥이 일면 초고 없이 즉석에서 작품을 완성하였다. 다음 「육주가두(六州歌頭)」의 뒷부분처럼 그의 일부 사는 애국심으로 가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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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원의 노인들 말씀 들어보니     聞道中原遺老
언제나 남쪽 바라보며 제왕의 군대 오기만을   常南望翠葆霓旌
사신으로 와 이 지경에 처하니     使行人到此
충성심과 울분이 가슴을 메워     忠憤氣塡膺
눈물을 퍼붓노라      有淚如傾
 
이 부분은 마치 범성대의 <주교> 같은 느낌을 준다. 제왕의 군대를 애타게 기다리는 중원의 노인들을 보면서 사자는, 그간의 불충을 자책하며 눈물을 비 오듯 쏟아내었다. 전하는 바로는 이 작품을 어느 연회석상에서 지었다고 한다. 함께 자리했던 대장군 장준(張浚)은 이 노래를 듣고 심한 자책감에 더 이상 술을 마시지 못한 채 자리에서 물러나 가버렸다고 한다. 그는 당시에 강회(江淮)의 군사를 총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장효상의 대표작으로는 풍경 묘사와 감정 서술을 잘 조화시킨 <염노교·동정호를 지나며(念奴嬌·過洞庭)>를 들 수 있다.
 
청초호라 동정호      洞庭靑草
한가위가 다가오자      近中秋
바람 한 점 더욱 없네      更無一點風色
옥거울인양 해맑은 광활한 천지    玉鑒琼田三萬頃
나를 실은 한 조각 배      著我扁舟一葉
은백의 달빛 교교히 비추고     素月分輝
은하수 함께 그림자를 드리운다    明河共影
하늘과 땅 한결같이 맑고도 밝아    表裏俱澄澈
마음 느긋해지니      悠然心會
이런 정경 그대에게 뭐라 말할 수 있을지   妙處難與君說
오령(五嶺)의 남쪽에서 지내던 때 떠올리는데   應念嶺表經年
달빛 절로 비추어      孤光自照
간담이 다 서늘해지누나     肝膽皆氷雪
훵해진 머리칼에 옷자락도 서늘하나     短髮蕭騷襟袖冷
도도한 물결 위를 시원스레 흘러간다    穩泛滄溟空闊
서강물 모두어 술을 담그고     盡挹西江
북두성을 국자 삼아 술따른 다음    細斟北斗
삼라만상을 손님으로 맞이하리라   萬象爲賓客
뱃전 두드리며 홀로 노래 흥얼대니     釦舷獨嘯
이 밤이 어느 밤인가 알 수가 없구나    不知今夕何夕
 
시인을 실은 배는 달빛을 받아 수정처럼 빛나는 세계로 들어섰다. 간담이 다 시리도록 맑은 세상이었다. 이처럼 광활한 천지를 앞에 두고 시인은 무한한 상상력을 발휘하였다. 서쪽 강물을 술로 삼고, 북두칠성을 술 퍼내는 국자로 삼았으며, 하늘의 별들과 삼라만상을 손님으로 맞이하였단다. 이 얼마나 호방한 기상인가? 장효상 스스로도 다른 사람들에게 “제 사가 소동파의 사와 비교해 어떻습니까?”라고 묻곤 하였다. 어쨌든 남송의 사인들 가운데 장효상의 사가 소식의 풍격에 가장 근접해 있었다. 
 
 
■ 송철규(宋澈奎) 
문학박사.  한중대 교수
[계간 《아시아문예》2010년 봄호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