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 50주년을 맞아
터키 국부 케말파샤와 박정희를 생각하며
5.16
내일(5월 16일)이 벌써 50주년입니다.
그것이 혁명인지 쿠데타인지, 논란이 분분할거 같아 언급 하지 않을 랍니다. 걍 5.16으로만 표기합니다.
“반공을 국시의 제 1로 삼고~~”로 시작하는 혁명 공약을 달달 외며 국민학교 다니던 때가 엊그젠데 그게 벌써 50년 전의 일이 돼 버렸습니다.
여기 저기 많은 5.16 50주년 특집 기사가 나왔습니다. 대체로 자세히 읽어 봤습니다만 그 중 특히 눈길을 끈 것이 한겨레 신문의 도널드 그레그 전 한국대사 (재임 1989~1993) 인터뷰였습니다. 그는 70년대 유신 정권 때 美 중앙정보국(CIA) 한국지부 총책임자로 있던 사람입니다. (이하 그레그)
이 기사에서 그레그가 박정희 대통령(이하 박정희)에게 했다는 말 중
‘각하께서 터키의 케말파샤와 비교된다는 걸 아십니까?’ 라는 부분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레그 또는 미국이 박정희를 그 정도로까지 평가했나? 이런 저의 의문에 대한 설명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레그의 말에 대한 박정희의 답
‘이 친구가 지금 뭘 말하려는거야? 나는 케말파샤에 대해 잘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가 터키를 경제적으로 강하고, 군사적으로 안전하게 만든 것처럼 나도 한국에서 그렇게 하길 원한다. 그러나 나는 (케말파샤처럼) 죽을 때까지 대통령직에 영원히 있진 않겠다. 어쩌면 나는 이미 너무 오랫동안 이 자리에 있는지도 모른다. 만일 지난번(1972년)에 대통령에 나서지 않았다면, 내 처는 아직도 살아있었을텐데’
관련기사 보기
“박정희 1972년 핵개발 착수…1977년 포기했다” http://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477753.html
박정희의 답에서 자신을 케말파샤에 비견될 만한 인물로 생각했는지 안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높이 평가했던 건 사실인 듯하고요.
박정희와 케말파샤!
과연 박정희가 케말파샤와 함께 거론되고 비교될 수 있는 사람인가?
저는 케말파샤에 대해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배운 지식, 케말파샤 전기를 한 권 읽은 것, 90년대 초 터키를 여행하면서 열흘 내내 가이드로 부터 들은 케말파샤에 대한 터키 국민들의 사랑과 존경 등이 전부일 뿐 전문지식은 전혀 없습니다.
박정희에 대해서는 국민학교 때 부터 군 전역 무렵까지 어린시절, 청년시절 동 시대를 살았던 사람으로서 상식적으로 아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러니 무슨 학술적인 비교는 불가능하고요. 5.16 50주년을 맞아 친구들끼리 술집에 앉아 잡담을 나누는 정도의 비교는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먼저 간단하게 케말파샤의 생애를 살펴 보도록하겠습니다.
1. 케말파샤의 생애
그는 1881년 오스만 터키의 변두리 지역이던 지금의 그리스 땅에서 서민가정에서 태어나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편모슬하에서 자라다 중등군사학교를 거쳐 사관학교에 입학, 군인의 길을 걷습니다. 사관생도 시절및 초급장교 시절에 이미 이슬람 칼리프 왕정에 저항하는 운동에 참여 하고 있었던 그는 1908년 청년 투르크 당 군대의 일원으로 왕정에 반대하는 군사 반란에 참여하였고, 이듬해 다시 한번 군사반란에 참여해 28살의 나이로 이스탄불 진공 작전을 맡아 성공 시킬 만큼 군에서의 입지를 키웠습니다.
1908년, 이스탄불 시가를 행진하는 청년투르크 당. <출처: Wikipedia>
그가 오스만 터키의 국민적 영웅으로 떠오른 것은 1차 세계대전 때문이었습니다. 1차 대전 초기 당시 세계 최강 영국 프랑스 연합군의 함대를 격파하고, 상륙군 7만을 거의 전멸시켰습니다. 1915년 2월부터 10월까지 계속된 이 갈리폴리(이스탄불 서남쪽 200km) 전투에서 연합군은 25만의 사상자를 내고 퇴각했습니다. 그가 지도자라는 의미의 ‘파샤’라는 이름을 얻은 것도 이 전투의 승리 덕분이었습니다. 1981년에 상영된 멜 깁슨 주연의 영화 갈리폴리가 바로 이 전투를 무대로 한 것입니다.
갈리폴리 전투에서의 케말 파샤. <출처: Wikipedia>
이후에도 그는 동북전선에서 러시아군을 대파하는 등 거의 모든 전투에서 적과 싸워 이겼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위대한 장군이라도 한 사람의 힘으로 밀리는 전세를 뒤집을 수는 없는 일. 1918년 10월 오스만터키는 연합군에 항복하고 그는 패전국의 장수로 살아 남았습니다.
그의 놀라운 힘은 이때부터 발휘되기 시작합니다. 점령군에 무력으로, 그리고 비정하고도 처절한 ‘전략’으로 저항해 오스만 터키의 전 영토(남부 유럽일대와 중동 전역)를 분할하려는 연합국의 조약체결 기도를 무력화 시켜 (이과정에서 그리스계 주민 밀집지역을 점령해 조약 체결 기도를 포기할 때까지 유럽계 주민들을 하루 몇 명씩 공개처형 하는 방식으로 연합국을 굴복 시켰다는 글을 읽은 기억인데 지금은 검색되지 않음) 이스탄불 일대의 유럽 지역과 아나톨리아 고원지역을 아우르는 지금의 터키 영토를 지켜냈습니다.
그러나 연합국은 허울뿐인 오스만 터키 정부를 마음대로 좌지 우지 하고 있었고 서쪽의 그리스와 동쪽의 아르메니아는 터키 영토를 엿보다 군사행동을 시작합니다. 당시의 오스만 터키 정부는 더 이상 나라를 지킬 의지도 힘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케말 파샤는 1919년 5월 19일 혁명을 선언하고 스스로 나라를 지키고 나라를 새로 세울 것을 선업합니다.
그는 기존의 휘하 군대와 그를 지지하던 군인들, 그리고 새로운 지원병등을 규합해 오스만 터키의 군대가 아닌 케말파샤의 군을 지휘해 아르메니아와 그리스 군을 격파하고 그들을 터키 영토에서 완전히 몰아 냈습니다. 이쯤 되면 국민들의 지지는 보나 마나한 것. 1923년 터키 공화국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했습니다.
패전국의 장수가 승전국들의 군대를 모두 격파하고 허수아비 정부를 폐하고 새로운 나라를 세웠다. 이런 전례는 역사적으로 찾을 수 없습니다.
이런 비유는 지나칠까요?
조선이 명-왜 연합군과 전쟁을 했다. 이순신장군은 연전연승 백전백승했으나 육군과 다른 수군이 전멸하자 조선 정부는 명-왜 연합군에 항복했다. 명-왜가 38선을 경계로 나라를 나눠 가지고 선조는 명나라 귀족질이나 해 먹으려 든다. 장군이 남은 배와 병사들 그리고 의병을 규합해 명과 왜를 전멸시키고 입헌 군주국을 선포, 선조는 조선 왕실 제사를 모시게 해 주고 자신은 의회 선출로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에 취임한다.
제가 이해하고 있는 케말파샤는, 이건 좀 많이 오버한거 지만 말하자면 이런 사람이었습니다.
2. 오스만터키를 폐하고 터키 공화국 초대 대통령에 취임한 케말파샤.
그는 1200년대에 건국된 중세 왕정국가를 근대국가로 거듭하게 하기위해 엄청난 개혁을 단행하고 이를 밀어 붙이고 거의 정착시켰습니다.
1) 神-政 분리: 이슬람이 모든 것인 나라를 이슬람은 종교일 뿐인 나라로 바꿔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구 오스만터키는 종교지도자 칼리프가 정치 지도자 술탄을 겸하는 나라. 종교가 나라의 모든 것을 지배하는 나라였으나 그는 종교는 칼리프가 주도하되 정치에는 개입할 수 없게 하고 정치는 종교에 개입할 수 없게 했습니다. 당시 이슬람 사회에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조치였던 것으로 읽었습니다.
2) 종교와 생활의 분리 :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이슬람권은 종교가 생활이고 생활이 종교였던 모양입니다. 그는 그래서는 제대로 된 나라, 국민 개개인의 권익이 존중되고 경제 규모가 커지고 스스로 조국을 지킬 수 있고 국민이 제대로 국민의 권리를 행사하고 의무를 다하는 나라가 되기 어렵다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남성의 터번을 폐지하고 여성의 히잡 차도르 등등을 금지했습니다. (용어가 맞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전통 이슬람 복장은 종교행사 때만 착용하고 일상 생활에서는 그런 복장을 금지 했다는 글을 읽은 듯 한데요. 일부 독실한 또는 보수적인 사람들이 따르지 않자 강압적으로 그런 복장을 금지한 걸로 알고 있는데 역시 검색을 통해 확인하지는 못했습니다.
3) 기독교 인정, 종교차별 금지. 이슬람 사회에서는 꿈도 꿀 수 없었던 대 혁명이었습니다.
4) 남녀 차별 금지. 역시 당시로서는 꿈도 못꿀 대 혁명이었습니다.
5) 국가 주도 경제개발.
6) 문자 창제(?) : 저는 이를 케말파샤 최대 업적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오스만 터키는 왜 서방에 졌나? 백성이 무식하기 때문이다.
오스만 터키 백성은 왜 무식하냐? 문자가 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너무 어렵기 때문이다.
1928년, 새로 도입한 로마자를 써 보이는 케말 대통령.
터키는 터키어를 아랍문자로 표기했었는데 이 아랍문자가 보기에는 아주 멋있어 보여도 너무 어려워 일반인들이 제대로 배우려면 엄청난 노력을 해야 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지금도 아랍문자를 쓰는 나라들 문맹률이 대단히 높은 편입니다.
케말파샤는 아랍문자로는 온 국민이 글을 깨우쳐 진정한 민주시민으로 거듭나기 어렵다는 판단아래 아랍문자를 폐지하고 독일어를 기본으로하는 로마자를 채택, 영문 알파벳으로 터키어를 표기하는 지금의 터키 글을 도입했습니다. 실로 선견지명. 지금 터키의 문맹률은 다른 이슬람권 국가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게 낮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아랍문자는 종교와 관련한 연구, 학술, 수련, 행사 등등에서만 사용하고 나머지 일상생활에서는 독일어를 기본으로한 로마자를 도입한 지금의 터키 글을 사용토록했습니다.
이 일이 있은 뒤 문자가 없는 많은 나라들이 로마자를 도입해 자국어를 표기하고 있습니다. 최근 인도네시아의 한 부족은 한글을 차용해 부족어를 표기하고 있다지요. 그 시초가 케말파샤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아랍권에서 일어 나고 있는 이른바 자스민 혁명, 그건 이미 약 100년전 터키에서 일어났던 일입니다. 다른 점은 약 100년전 터키에서는 케말파샤 개인의 통찰력과 그가 지휘하는 군대의 힘이 상황을 주도했다면 지금은 SNS라는 커뮤니케이션이 주도하고 있는 정도라고 할까요. 그러나 지금의 자스민 혁명이 1920년대 당시 터키 처럼 세상을 일거에 바꿔 놓을 정도로 강력할지 그건 좀더 지켜 봐야 할 문제인 것 같습니다.
암튼 그는 백년 뒤 이슬람 권 사람이 꿈꾸기 시작한 것을 백년 전에 이미 이룩했던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과 박정희가 비교 될 수 있을까요.
케말파샤가 숨을 거둔 이스탄불의 돌마바체 궁. <출처: Wikipedia>
그는 1938년 11월 57세의 나이로 죽었습니다. 사망원인은 과로와 간경화였던 걸로 기록에 나와 있습니다. 일생을 혁명과 전쟁과 개혁에 투신했던 사람이 그렇게 죽었습니다.
정치의 스트레스와 격무로 인한 피로, 등등을 여가 시간에 술과 담배로 풀었다고 합니다.
격무로 인한 만성피로와 과음으로 인한 간경화.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지?
저는 그를 너무나 엄청났던 영웅으로 기억하고 있으니까 모든 것이 대단해 보입니다만, 57세 지금의 저와 동갑인 나이 때의 그의 죽음.
비교적 젊은 나이의 그의 죽음, 그 당시 그리고 지금도 터키 국민들의 슬픔이겠지만 오히려 그게 혹시는 지금의 민주 터키를 있게 하는 거름이 되지는 않았으지? 구국영웅들이 너무 오래 살아 망령이 들어 나라를 망치는 경우도 수 없이 많았습니다.
박정희와 케말파샤의 비교,
밤이 너무 깊어 다음 기회로 미루겠습니다.
양해들 해 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