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정치.사회/朴正熙 照明

“혁명 같은 건 대중 공감대 확보해야…그래서 첫날 새벽 방송국 장악했지”

淸山에 2011. 5. 14. 13:58

 

 

 

 

“혁명 같은 건 대중 공감대 확보해야…그래서 첫날 새벽 방송국 장악했지”

[중앙일보] 입력 2011.05.14 01:02 / 수정 2011.05.14 01:46

JP가 말하는 5·16 선전·홍보의 기획

 

13일 오전 서울 남산공원을 찾은 김종필 전 총리. 외손자며느리 품에 안긴 증손자를 대견한 듯 가리키고 있다. 50년 전 5·16이 일어나던 그날 새벽에도 그는 방송국이 있던 남산에 왔었다. 거사의 취지를 국민에게 알리기 위해서였다. [김태성 기자]

 

5월의 남산은 화사했다. 13일 오전 11시, 그랜드 하얏트 호텔 건너편 남산공원을 돌며 JP(김종필 전 총리)가 산책을 하고 있다. 남산 일대를 수놓은 보라·주홍·하얀 빛깔의 꽃들 사이를 걷는 김 전 총리 옆엔 외손자며느리가 동행했다. 외손자며느리는 JP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라고 부르는 증손자를 안고 있었다. 기자는 ‘5·16 50년…JP 3700명의 레볼루션을 말하다’(본지 5월 13일자 1, 4, 5면) 인터뷰 기사가 나간 뒤 독자들의 추가적인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그가 운동하는 현장을 찾아갔다. 거사의 그날, JP가 혁명 공약과 취지문을 인쇄한 뒤 가장 먼저 한 일은 남산에 있는 KBS 방송국(당시 중앙방송국) 접수였다. 혁명은 선전을 통해 완성된다는 것을 JP는 꿰뚫고 있었다.

-거사는 무력을 장악하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닌 것 같습니다.

 “혁명 같은 걸 해서 제일 먼저 확보해야 하는 것은 방송국이야. 방송하는 것뿐 아니라 송신소도 장악해야 해, 그래야 왜 혁명했는지를 알릴 수 있지. 별도로 송신소 장악팀도 있었어. 대중의 공감대를 확보하는 게 일의 성패를 좌우하는 거야.”

 -주도면밀하네요.

 “항공기로도 혁명 공약을 뿌렸어. 이원엽 장군이 5기생인데, 그때 대령이야, 육군 항공대장이거든 육군 항공대장이 L-19를 직접 조종하면서 혁명 공약, 취지문을 서울·대구·부산 상공에 마구 뿌렸어.”

 -KBS에 진입하니 어떻던가요.

 “그날 새벽 박정희 소장과 함께 갔는데, 군복 입은 사람들이 들어오니까 다들 북한 공비가 쳐들어오는 줄 알았다고 하드만.”

 -박종세 아나운서가 혁명 공약을 읽었죠. 거사군 쪽에서 직접 발표하지 않은 이유가 있나요.

 “처음에 박정희 소장이 읽으면 어떻겠느냐 생각도 했는데…그가 목소리가 좀 딱딱하잖아. 그래서 아나운서에게 시키는 게 듣는 사람이 안심할 수 있겠다 생각한 거지. 애청자들이 목소리만 들어도 누구나 알 정도로 박종세가 유명했잖아, 국민들이 편안하게 듣고 안심을 시키는 게 중요하다고 본 거지. 본래 전날 밤부터 어디 못 가게 하려 했는데 마침 당번이라 방송국에서 자드만. 박종세 아나운서 요즘 뭐하나 궁금하네. 처음엔 조심스럽더니 읽어 내려가면서 점차 흥분을 하는 거 같더라고. 허허.”

 -방송사를 거사의 목표로 삼은 거군요.

 “목표는 무슨, 그게 시작이지. 국민에게 널리 알리는 게 시작이야.”

 -혁명 공약과 취지문을 총리(JP)께서 만드셨죠.

 “그랬지.”

 -그 안에 4·19 정신을 계승한다는 얘기가 들어 있는데 좀 이상합니다.

 

김종필 전 총리와 전영기 중앙일보 편집국장이 남산공원 벤치에 앉아 이야기하고 있다. [김태성 기자]
 “부패하고 무능한 정권은 나라를 망친다. 이런 정권은 뒤집어 엎어야 한다. 그러면서 일어난 게 4·19 아닌가. 많은 시민이 환호했지. 5·16도 그런 부패·무능 정권을 확 부숴버리는 정신으로 일으킨 거야.”

 -반공을 국시로 한다는 건 왜 넣었습니까.

 “우리 자신이 확립할 자세를 명백히 한 거 지. 그전엔 반공이고 용공이고 없어, 뭐가 뭔지 몰라. 학생들이 전부 어깨동무하고 판문점 가서 북쪽하고 협상하자 뭐 하자 하고, 국회에 들어가선 ‘너희들이 무슨 국회의원이냐고’ 막 그래. 국회도 열지 못했어…그게 뭐 나라여.”

 독자들이 궁금해 하는 또 다른 의문을 이어갔다.

 -5·16 성공 뒤 군사혁명위원회 의장을 왜 박정희 소장이 아닌 장도영 참모총장이 맡게 했습니까.

 “박정희 대통령이 그렇게 하라고 그랬어. 나는 반대했지만. ‘아니 장도영 장군이 무슨 관계가 있는데 그가 혁명위원회 의장을 맡느냐’고 하니까 박 소장이 눈을 감고 한참 있더니 ‘임자도 알잖아. 육군 참모총장 아닌가’ 그러는 거야. 그 한마디 속에 깊은 한이 섞여 있는 걸 알았어. 박 대통령이 마치 ‘나를 빨갱이로 모는 놈들이 있으니까 내가 지도자가 되면 혁명이 안 될지도 모른다. 현역 참모총장이면 국민이 믿어줄 것 아니가’… 그런 소리는 안 했지만, 그렇게 알아들었지. 차 한잔 마시고 ‘네 알겠습니다’ 그랬어.”

 -장도영 총장이 나중에 문제가 되면 어떻게 하려고요.

 “그래서 내가 7월 2일 제거했잖아. 박 대통령에겐 얘기도 하지 않고…엄청난 일을 한 거지.”

 JP는 1995년 김영삼 정부가 전두환·노태우 신군부 세력의 ‘성공한 쿠데타’를 처벌하는 법을 만들 때 찬성했다. 그때 기자가 ‘본인은 쿠데타를 했으면서 왜 다른 사람의 쿠데타를 처벌하려 하느냐’고 묻자 JP는 웃으며 “내가 해봤으니까 나쁜 줄 알지”라고 묘한 답을 한 적이 있다.

 -다시 혁명하라면 하겠습니까.

 “이젠 못해.”

 -혁명은 30대(당시 JP 35세)에 하는 건가요

 "30대고 20대고 50대고 간에, 뭣 모르고 한 거지. 지금 생각하면 무서워, 아찔해. 5월 15일 일이 제대로 안 풀렸으면 그냥 총살당했어.”

 -총리에겐 풍운아라는 말이 따라다니는데요.

 “풍운아는 무슨…. 풍운이 바람과 구름이라는 뜻인데. 얼마 전까지 일본에선 ‘천의 바람’(千の風)이란 노래가 유행했는데 이런 구절이 있어요. 죽은 다음에 묘비를 세우지 마라/묘비에서 내 혼은 빠져 나왔다/나는 천 개의 영혼으로 우주를 날아다닐 뿐이다…. 인생이든 혁명이든 열심히 살아 남에게 다 주고 빈 껍데기로 가버리는 거지.”

 

 

대담=전영기 편집국장, 정리=배영대 기자
사진=김태성 기자

 

 

 

    

 

1961년 5월 16일 새벽 5시 … 남산 KBS에서 5·16 공약문 방송한 박종세

[중앙일보] 입력 2011.05.14 01:03 / 수정 2011.05.14 01:46

“검정 양복, 흰 와이셔츠, 오른팔에 카빈 소총 걸친 JP
한쪽 머리칼이 축 처져 … 레지스탕스 부대장 같았다”

 

13일 박종세씨가 5·16 당시 첫 방송 상황을 회고하고 있다. [김도훈 기자]

 

 

KBS 7호 스튜디오에서의 박종세 아나운서. 이 방에서 5·16 첫 방송을 했다.
운명의 기묘한 얽힘이다. 5월 16일 새벽 KBS 아나운서 박종세는 타의(他意)에 의해 역사의 현장에 선다. 그 시절 KBS는 남산에 있었다. TV 방영은 하지 않던 때다. 그는 야간 당직 책임자였다. 박종세(당시 26세)씨는 13일 50년 전을 선명하게 기억했다.

 “그날 새벽을 생각하면 감회가 새롭습니다. 라일락 꽃 향기가 유난히 진하던 늦봄··· 나는 역사 전개의 한복판에 잠시 있었어요.”

 새벽 4시쯤이었다. 정문 수위가 숙직실에 들어와 소리를 질러대며 그를 깨웠다. 1층 현관으로 내려갔다. 헌병들이 방송국 안에 깔려 있었다. 헌병 책임자가 그에게 다가와서 설명했다. “정체불명의 군인들이 서울로 진격하고 있다. 북괴군 같기도 하고, 여순반란사건 같기도 한데…방송국이 중요해서 지켜주러 왔다”며 부하들을 경계 배치했다.

 상황은 새롭게 전개된다. 10분쯤 후 헌병들은 도망치듯 철수했다. 그리고 5분쯤 뒤 이번에는 얼룩무늬 군복의 군인들이 들이닥쳤다. 주로 공수부대 장병들이었다. 일제히 총을 쏘아댔다. KBS 접수의 돌격명령이었다.

 “귀를 찢는 총성, 군인들의 난입으로 아수라장이었지요. 총구(銃口)가 하늘을 향했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지만 그때는 온몸이 벌집이 되는 것 같은 공포에 휩싸였습니다. 텔레타이프실로 피해 웅크린 채 숨었지요. 밖에서 문을 두드리며 ‘박종세 아나운서 있습니까’ 하는 소리가 들렸어요.”

 -놀라고 긴장하셨겠네요.

 “그런데 그 목소리에 위해(危害)감보다 정중함이 느껴졌어요. 살벌함 속에서도 순간 묘한 기분이었습니다. 밖으로 나갔더니 따라오라고 하더군요. 대위 한 명이 기관단총으로 내 등을 쿡쿡 찌르기도 했지요.”

 -바로 박정희 소장을 만나셨다면서요.

 “2층 계단 앞에서 한 장성이 대뜸 ‘박종세 아나운서입니까. 나 박정희라고 하오’ 하며 악수를 청하더군요. 모자의 별 두 개가 유난히 선명히 보였어요.”

 -어떤 기분이었습니까?

 “그 와중에 나를 차분하게 설득하더군요. 위압적이지 않았습니다. ‘지금 나라가 어지럽소…누란의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기 위해 우리 군이 일어섰소. 5시 정각에 방송해줘야겠소’ 하면서 전단 한 장을 내밀더군요.”

 전단에 혁명공약이 적혀 있었다. 박종세는 극도의 긴장 속에 난감했다. 기계 조작을 하는 엔지니어가 없었다. 그래서 “엔지니어가 필요합니다. 저 혼자서 방송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엔지니어 색출 명령이 떨어졌다. “군인들이 거칠어지기 시작하더군요. 누군가가 내게 ‘방송 못 하면 당신 죽을 줄 알아’ 하더니 철커덕 권총을 장전합디다.” 박종세는 현기증이 일어나 쓰러질 것 같았다. 그런데 4시55분쯤 도망쳤던 엔지니어 2명이 돌아왔다. 애국가가 나가고 5시 정각. 행진곡과 함께 박종세는 거사를 알리는 첫 라디오 방송을 시작했다.

 “친애하는 애국동포 여러분 은인자중(隱忍自重)하던 군부는 드디어 금조미명(今朝未明)을 기해서 일제히 행동을 개시하여 국가의 행정·입법·사법의 3권을 완전히 장악하고…대한민국 만세! 궐기군 만세!”

 “내 앞에서 박정희 소장이 라디오 방송 장면을 바라보고 있었지요. 장교 2명은 내 뒤에 앉아 권총을 빼든 채 나를 감시했고요.”

 박종세의 목소리는 역사 궤도의 전환을알리는 굉음(轟音)이었다. 그 방송은 대한민국 전체를 격렬하게 엄습했다. 5·16 주체세력은 환호했다. 장면 정권엔 좌절과 절망을 주는 쿠데타였다.

 -공약문을 썼던 JP도 그 현장에 있었지요.

 “검은색 양복, 넥타이를 매지 않은 흰 와이셔츠 차림이었어요. 한쪽 머리칼이 축 처졌고 오른쪽 팔에 카빈 소총을 걸치고 군인들을 지시하는 모습이었어요. 프랑스의 레지스탕스 부대장 같은 느낌을 주었어요.”

 -‘은인자중하던…’으로 시작하는 선언문은 문장과 언어 사용의 성향에서 어떻습니까.

 “내가 아나운서인데 쭉 훑어보니 대중에게 쉽게 전달할 수 있는 격문이었습니다. 과거 정치인들이 쓰던 담론, 관념적 용어를 피하고 주로 실용적·실사구시적 표현이었습니다. 국가 지도층의 언어 구사 측면에서도 대전환이 시작된 겁니다.”

 
글=배영대 기자
사진=김도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