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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5월16일의 朴正熙, 張俊河

淸山에 2011. 5. 14. 13:54

 

 

 

 

1961년 5월16일의 朴正熙, 張俊河

<민족적 활로(活路)를 타개하기 위하여 최후 수단으로 일어난 것이 다름 아닌 5·16군사혁명이다>(사상계 권두언)

趙甲濟   

 

 

 

    
 
 
<1년 전 우리나라의 젊은 학도들은 그 꿈 많은 청춘을 바쳐, 부패와 탐욕과 수탈과 부정에 도취한 이승만(李承晩) 독재정권을 타도하고 민주주의를 사경(死境)에서 회생(回生)시켰다.
 
  그러나 정치생리와 정치적 행상과 사고방식에 있어서 자유당 정권과 본질적으로 다를 것이 없는 민주당 정부는 혁명 직후의 정치적 공백기를 기화로 지나치게 비대해진 나머지 스스로 오만과 독선에 사로잡혀 정권을 마치 전리품(戰利品)처럼 착각하고, 혁명과업의 수행은커녕 추잡하고 비열한 파쟁(派爭)과 이권(利權)운동에 몰두하여 그 바쁘고 귀중한 시간을 부질없이 낭비해 왔음은 우리들이 바로 며칠 전까지 목격해 온 바이다.
 
  그러는 동안 국민경제는 황폐화하고 대중의 물질생활은 더 한층 악화되고 사회적 부(富)는 소수자(少數者)의 수중으로만 집중하였다. 그 결과로 절망, 사치, 퇴폐, 패배주의의 풍조가 이 강산을 풍미하고 있었으며 이를 틈타서 북한의 공산도당들은 내부적 혼란의 조성과 붕괴를 백방으로 획책하여 왔다.
 
  절정에 달한 국정(國政)의 문란, 고질화한 부패, 마비 상태에 빠진 사회적 기강 등 누란의 위기에서 민족적 활로(活路)를 타개하기 위하여 최후 수단으로 일어난 것이 다름 아닌 5·16군사혁명이다.
 
  4·19혁명이 입헌(立憲)정치와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민주주의 혁명이었다면, 5·16혁명은 부패와 무능과 무질서와 공산주의의 책동을 타파하고 국가의 진로를 바로잡으려는 민족주의적 군사혁명이다.
 
  따라서 5·16혁명은 우리들이 육성하고 개화(開花)시켜야 할 민주주의의 이념에 비추어 볼 때는 불행한 일이요,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으나, 위급한 민족적 현실에서 볼 때는 불가피한 일이다.
 
  그러나 이번의 군사혁명은 정치권력이 단지 국민의 한 집단에서 다른 집단으로 넘어갔다는 데서 그친다면 무의미한 것이다.
 
  혁명공약이 암암리에 천명하고 있듯이, 무능하고 고식적(姑息的)인 집권당과 정치가 수행하지 못한 4·19혁명의 과업을 새로운 혁명세력이 수행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5·16혁명의 적극적 의의를 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이러한 의미에서는 5·16혁명은 4·19혁명의 부정이 아니라, 그의 계승, 연장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후략)>
 
  이 글이 실린 것은 한국의 지식인 사회 여론을 주도하던 월간지 <思想界> 1961년 6월호 권두언이다. 당시 이 잡지사 기자였던 손세일(孫世一) 전 의원에 의하면, 이 글을 발행인 장준하(張俊河)가 썼다고 한다.
 
  ‘1년 전 우리나라의 젊은 학도들은’ 운운하는 대목만 아니라면, 이 글은 ‘박정희(朴正熙) 전도사’의 글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4·19 이후 들어선 장면(張勉) 민주당 정권의 무능을 통렬하게 비판하면서 5·16군사혁명의 당위성을 역설하고 있다.
 
  여기서 또 하나 눈길을 끄는 대목은 5·16을 4·19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4·19와 5·16, 불과 1년 사이에 일어난 이 두 사건은 이후 민주화(民主化)와 산업화(産業化)라는, 대한민국을 이끈 두 갈래 물줄기의 원류(源流)가 됐다.
 (월간조선 2011년 5월호 기사중 일부, 裵振榮 기자)
 
 
 위의 張俊河의 글과 아래 朴正熙의 글(혁명공약)을 읽어보면 문제의식이 거의 같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장도영 육군참모총장 이름으로 발표된 5.16 혁명공약
 
 1. 반공(反共)을 국시의 第1義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친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한다.
 
 2. 유엔헌장을 준수하고 국제협력을 충실히 이행할 것이며 미국을 위시한 자유 우방과의 유대를 더욱 공고히 한다.
 
 3. 이 나라 사회의 모든 부패와 舊惡을 일소하고 퇴폐한 국민도의와 민족정기를 바로잡기 위해 청신한 기풍을 진작시킨다.
 
 4.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民生苦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 자주경제재건에 총력을 경주한다.
 
 5. 민족의 숙원인 국토통일을 위해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배양에 전력을 집중한다.
 
 6. 이와 같은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들은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준비를 갖춘다.
 
 
 장준하와 박정희는 다 같이 張勉 민주당 정권에 절망하고 있다. 두 사람은 민주당 정권이, 부패하고 무능하여 4.19 혁명으로 표출된 국민들의 열망을 배신하였다고 생각하였다. 그런 혼란속에서 공산주의 세력이 암약하기 시작하였다는 위기감도 공유하였다. 장준하는 <이를 틈타서 북한의 공산도당들은 내부적 혼란의 조성과 붕괴를 백방으로 획책하여 왔다>고 걱정하는데, 5.16 혁명공약의 제1조는 反共강화이다.
 
 反共강화, 민생고 해결, 부패척결이 박정희-김종필 세력의 對국민 약속이었다. 장준하는 이를 정확히 간파하고 권두언에서 <절정에 달한 국정(國政)의 문란, 고질화한 부패, 마비 상태에 빠진 사회적 기강 등 누란의 위기에서 민족적 활로(活路)를 타개하기 위하여 최후 수단으로 일어난 것이 다름 아닌 5·16군사혁명이다>고 설명한다.
 
 장준하는 나중에 국회의원이 된 뒤엔 박정희를 가장 강력하게 비판하게 되지만 1961년 5월16일 시점에선 두 사람이 비슷한 時局觀을 갖고 있었다. 좌편향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는 이런 5.16에 대하여 '평화통일 운동을 탄압하기 위하여 군대가 쿠데타를 일으켜 독재를 시작하였다'는 요지로 설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