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이성계(太祖 李成桂)의 행차와 관련된 두 가지 유래 洞名紀行(2) 서울시 중랑구 忘憂洞: “이제 오랫동안 근심(憂)을 잊을 수 있게(忘) 되었노라” 李知映(조갑제닷컴) 서울시 중랑구에 있는 망우동(忘憂洞)의 동명(洞名)에는 두 가지 유래가 있다.
하나는 경기도 구리시와 서울특별시의 경계가 되는 곳에 있는 망우리(忘憂里) 고개에서 유래되었다는 설(說)이다. 조선 태조 이성계(太祖 李成桂)가 사후(死後) 거처할 명당(明堂)을 찾으러 중신과 지관(地官)들과 함께 지금의 동구릉(東九陵) 내 건원릉(健元陵) 자리에 신후지지(身後之地: 사후에 자신이 묻힐 명당)를 정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환궁하는 길에 한 고개 위에 이르러 잠시 쉬면서 “이제 오랫동안 근심(憂)을 잊을 수 있게(忘) 되었노라(於斯吾忘憂矣)”하여, 그 이후부터 이 고개를 망우리 고개라 부르고 이로부터 망우동이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망우동에는 예부터 자연부락이 많았는데, 그 중 양원리(養源里 또는 良源里)라는 마을은 망우리 명칭의 첫 번째 유래와 관련이 있다. 자신의 묏자리를 정한 태조 이성계가 돌아오는 길에 망우리 고개를 넘다가 목이 말라 우물물을 마셨는데 물맛이 어찌나 좋은지 이 우물을 양원수(養源水), 마을 이름을 양원리라 했다고 한다.
주택이 늘어나면서 수질이 나빠져 식수로 사용할 수 없게 된 양원리 우물은 마을 가운데 자취만 남아 있다고 한다. 중앙선 양원역 북쪽 송곡여중·고 뒤에 있는 양원리 마을은 20대를 내려오는 동래 정씨(東萊 鄭氏)가 600여 년 전부터 살고 있는 집성촌으로 유명하다.
다른 하나는 태조 이성계가 불망기(不忘記: 사실을 적은 서찰)를 써주었다는 데서 유래했다는 설이다. 조선 태조가 개국(開國)한 뒤 사후에 묻힐 곳을 찾기 위해 개국공신 남재(南在) 등을 대동하고 명당을 찾던 중 현재의 건원릉(健元陵) 부근에 세 혈(穴)을 얻었는데, 이곳은 이미 남재가 묘 자리로 잡아 놓은 터였다. 이에 태조가 남재에게 다른 곳의 명당 터와 바꿀 것을 제의했다. 남재는 “왕릉예정지였던 곳에 어찌 후일에 제가 묻힐 수 있습니까? 이것은 불경(不敬)일 뿐 아니라 후손에게도 중죄가 되는 것이니 불가합니다”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태조는 “내가 불망기를 써줄 터이니 이것으로 증빙을 삼으라”하였다. 불망기로서 ‘근심(憂)을 잊으라(忘)’는 뜻에서 ‘망우(忘憂)’가 되었다는 설이다.
옛날 태조가 넘던 고개가 있는 망우산에는 공동묘지인 망우리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망우리 공동묘지는 1933년 개설되어 1973년에 이르기까지 약 4만3000여 기(基)에 이르렀으나(1973년 매장 포화) 화장(火葬)과 이장(移葬) 등으로 1만6000여 기가 현존하고 있다. 현재는 공동묘지로서의 기능보다는 산책과 조깅을 즐길 수 있는 휴식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산중턱을 깎아 만든 5.2km의 산책로와 운동시설이 조성되어 있고 월평균 50여만 명이 찾는다. 망우리 공원을 관리하고 있는 중랑구는 공원개발을 요구하는 민원이 잦고 묘지훼손도 많아 고구려보루군 유적지, 용마자연공원과 연계한 역사테마공원으로 개발하기위해 남아있는 묘지도 이장을 장려하고 있다. 망우리 공원에는 우리나라 어린이 운동의 효시인 방정환(方定煥), 독립 운동가이며 민족대표 33인의 오세창(吳世昌)·한용운(韓龍雲), 우두(牛痘)보급의 선구자로 의학자이며 국어학자인 지석영(池錫永), 임시정부 내무부 서기를 역임한 독립운동가 문명훤(文明煊), 동일일보 주필이었고 한국민주당 창당을 주도했던 장덕수(張德秀), 제헌국회의원이며 진보당 당수였던 조봉암(曺奉岩) 등의 묘소가 있다. 이들 일곱 분의 애국지사 및 유명인사 연보비(年譜碑)가 공원 내 산책로 조성과 함께 1997년 2월에 설치되어 역사 교육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소(牛) 그림으로 유명한 화가 이중섭(李仲燮), 시(詩) ‘목마와 숙녀’의 작가인 시인 박인환(朴寅煥)도 이곳에 묻혀 있다. 안창호(安昌浩) 선생의 묘도 이장(移葬)되기 전에는 이곳에 있었다.
묘지 서쪽의 작은 산은 평산 신씨(平山 申氏) 종중 땅인데, 신씨 문중의 묘소 25기가 있다. 문화재는 중랑구 망우동 산 69-1번지에 서울특별시지정 유형문화재 제95호인 조선 인조 때 무신 신경진(申景眞)의 신도비(神道碑: 왕이나 고관의 무덤 앞 또는 무덤으로 가는 길목에 세워 죽은 이의 事蹟을 기리는 비석)가 있다.
신경진은 평산 신씨로 선조 8년(1575년) 신립(申砬)장군의 아들로 태어나 선전관(宣傳官)을 지냈다. 무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쳤으며, 인조반정(仁祖反正) 때의 공로로 점차 벼슬에 오르기 시작하였다. 인조 2년(1624년)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훈련대장이 되어 어가(御駕)를 호위하였으며, 정묘호란(丁卯胡亂) 때는 강화도로 왕을 모시고 가 이듬해 평성부원군에 봉해졌다.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적을 막아 왕이 남한산성으로 피신하기 위한 여유를 주는 등 커다란 공을 세워 마침내 영의정에 오르기도 했다.
비(碑)의 주인공이 밝혀지기 전에는 커다란 거북받침돌 탓에 ‘거북비’라 불리기도 했다. 우암 송시열(尤菴 宋時烈)이 비문을 짓고, 박태유(朴泰維)가 글씨를 썼다. 평산 신씨 충장공파 종중 소유로, 비 건너편에는 신경진의 묘역이 자리하고 있다.
망우동(忘憂洞)은 조선시대에는 경기 양주군 망우리면(忘憂里面)지역이었다. 갑오개혁 때는 경기도 양주군 망우리면 양원리(養源里)가 되었다가 일제시대인 1914년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 망우리(忘憂里)가 되었다. 1963년 1월1일 서울특별시로 편입되어 동대문구 망우동(忘憂洞)이 되고, 1988년 1월1일 동대문구 일부가 분구(分區)되어 현재의 중랑구 망우동(忘憂洞)이 되었다.
망우동의 면적은 3.87㎢, 인구는 5만4522명(2008년)이다. 동쪽은 망우산 능선을 경계로 경기도 구리시와 인접하고 서쪽은 상봉동(上鳳洞), 남쪽은 면목동(面牧洞), 북서쪽은 신내동(新內洞)과 접해있다. 망우동은 경기도·강원도 방면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관문으로 망우리 고개와 공동묘지가 있는 험준한 지형 때문에 예부터 수도방어의 요충지였다. 공동묘지와 고개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도로확장 및 구획정리사업 후 교통이 편리해져 신흥주택가와 교육지구로 변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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