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 비린내를 덮은 재(灰)에서 유래 洞名紀行(3) 서울시 종로구 齊洞: ‘재를 덮은 마을’이라 하여 ‘잿골’을 한자로 音譯(음역)한 것. 李知映(조갑제닷컴) 서울시 종로구에 있는 齊洞(재동)이라는 동명은 조선시대의 어두운 역사에서 起因(기인)한다.
世宗(세종)의 뒤를 이은 文宗(문종)은 자신의 短命(단명)을 예견하고 顧命大臣(고명대신: 왕의 유지를 받드는 대신) 김종서, 황보인 등을 불러 자기가 죽은 뒤 어린 왕세자가 등극했을 때 그를 잘 보필할 것을 부탁했다. 문종 승하 후 金宗瑞(김종서), 皇甫仁(황보인) 등은 자신의 권력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세종의 셋째 아들인 安平大君(안평대군)과 손을 잡았다.
조선의 6대 임금이 된 端宗(단종)은 후에 7대 임금이 된 숙부 首陽大君(수양대군)의 야심에 걱정이 끊이질 않아, 누님인 惠敬公主(혜경공주)와 함께하는 시간이 많았다. 癸酉靖難(계유정난)이 일어난 단종1년(1943년) 10월10일에도 단종은 혜경공주의 집에 행차해 위로를 받고 있었다. 왕위 찬탈의 뜻을 품은 수양대군은 이 틈을 타 문종의 遺託(유탁)을 받은 김종서의 집을 불시에 습격해 그와 그의 아들을 죽였다. 곧이어 왕명을 빙자해 황보인을 비롯한 조정의 대신들을 입궐하게 하고는 대궐문에서 들어오는 중신들을 참살한 뒤 시신을 길거리에 매달았다고 한다.
이때의 대학살로 선혈이 낭자하고 비린내가 천지를 진동하자 사람들이 집안에 있던 재(灰)를 가지고 나와 길을 덮었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이곳을 ‘재를 덮은 마을’이라 하여 ‘잿골’이라 불렀고 한자로는 灰洞(회동)이라 했다. 현재의 齊洞(재동)은 그 유래가 齊(재) 자의 訓(훈)에 있는 것이 아니라 音(음)인 ‘재’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잿골을 한자로 音譯(음역)한 것이다.
재동을 이룬 옛부락은 잿골 또는 灰洞(회동)으로 부르는 재동과 東谷(동곡), 紅峴(홍현)이 있다. 동곡은 가회동, 재동, 花洞(화동)에 걸쳐있는 마을로 홍현 동쪽이 되므로 이름이 붙여졌고 동골이라고도 불렀다. 홍현은 붉은 재라고도 하는데 붉은 흙이 많이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옛 경기고등학교 자리인 정독도서관 남쪽 부근이다.
재동은 북쪽으로는 嘉會洞(가회동), 동쪽으로는 桂洞(계동), 남쪽으로는 慶雲洞(경운동), 서쪽으로는 安國洞(안국동)과 접해있다. 조선 초기에는 한성부 북부 嘉會洞(가회방) 지역이었다. 1751년(영조27)에 반포된 ‘都城三軍門分界總錄(도성삼군문분계총록)’에 보면 가회방 밑에 嘉會洞契(가회방계)지역으로 나타나고 있으나 1789년(정조13)에 간행된 ‘戶口總數(호구총수)’를 보면 가회방 밑에 齊洞契(재동계)로 되어있다.
1914년 경기도고시 제7호에 의해 북부 재동·東谷(동곡)·紅峴(홍현)의 각 일부를 합하여 재동이라 했다. 1936년 경기도고시 제32호에 의해 일제식 명칭으로 변경함에 따라 齋洞町(재동정)이 되었다. 1943년 조선총독부령 제163호에 의해 區制(구제)가 실시됨에 따라 鐘路區(종로구)가 설치되어 이에 속하였으며, 광복 후 1946년 일제식 동명을 모두 없앨 때 재동으로 되어 오늘에 이른다. 현재 법정동인 재동은 행정동인 가회동 관할 하에 있다. 행정동인 가회동(嘉會洞)사무소는 가회동·재동·계동·苑西洞(원서동)의 4개 법정동을 관리하고 있다. 면적은 0.54㎢로 종로구의 2.25%를 차지하고 있으며, 2008년 7월현재 인구는 5835명이다.
다리인 沈橋(침교), 廣惠院(광혜원)의 후신인 濟衆院(제중원) 등이 있었다. 침교는 종로구 재동 96번지 부근 운현궁 북쪽에 놓여 있던 다리로 고종 때 토사에 묻혔고, 제중원은 최초의 근대식 병원으로 옛 창덕여자고등학교 기숙사 자리에 있었다.
문화재로는 서울 종로구 재동 35번지 헌법 재판소 내의 白松(천연기념물 제8호)이 있다. 나이는 흔히 600년으로 알려져 있으나 확실하지 않으며 서울 通義洞(통의동)의 백송이 1990년에 枯死(고사)한 뒤 대한민국 최고령 백송이 되었다.
재동 83번지 일대는 조선 후기의 세도가문인 豊壤 趙氏(풍양 조씨)가 대대로 살던 곳이라고 한다. 조선시대 이래 전형적인 양반 마을의 특성을 지니고 있어 한옥보존지구로 지정되었으나 1991년 완전히 해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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