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慕華峴(모화현) 아랫동네 마을', 峴底洞 중국사신이 머물던 慕華館(모화관)이 있어 慕華峴이라 불린
'무악재 고개 일대 아랫 마을'에서 유래된 이름 李知映(조갑제닷컴)
慕華館(모화관)
서울시 서대문구 峴底洞(현저동)의 동이름은 인왕산과 안산(무악)이 이어지는 무악현의 아래에 있던 데서 유래되었다. 무악재 고개는 조선시대에 중국사신이 머물렀던 慕華館(모화관)이 있었으므로 고개이름을 慕華峴(모화현)이라 하기도 했다. 그 고개 밑에 마을이 형성되면서 ‘모화현 아랫동네 마을’이라고 하여 한자명으로 峴底洞(현저동)이라고 불렸다. 조선시대 중국 사신에게 영접연과 전송연을 베풀던 ‘慕華館’은 1894년 갑오경장 뒤에는 사용되지 않고 있다가 1897년 5월에 독립협회가 改修(개수)해 협회 회관 겸 집회소로 사용했다. ‘독립관‘ 현판은 순종이 황태자 시절 한글로 쓴 것이다. 독립협회가 해산된 뒤에도 강연회장 등으로 사용하다가 일제에 의해 강제철거 되었다. 일제 때 峴底町으로 바뀌었다가 1946년 10월 일제 잔재 청산의 일환으로 町(정)을 洞(동)으로 고칠 때 현저동이 되었으며, 1975년 4월 현저동 일부가 종로구 무악동에 편입되었다. 1998년 10월 현저동 주민센터가 폐소되었고, 현재 서대문구 天然洞(천연동) 주민센터에서 관할하고 있다. 현저동 101번지는 舊(구) 西大門刑務所(서대문형무소)가 있던 곳으로 현재는 서대문 독립공원의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 정문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일제는 1908년 10월21일 문을 연 京城監獄(경성감옥)에 수많은 애국지사들을 체포한 뒤 투옥했는데 수용할 공간이 부족하자 1912년에 현재의 서울 마포구 공덕동 자리에 다른 감옥을 짓고 ‘경성감옥’이라 이름을 붙였다. 이에 9월3일 舊경성감옥을 ‘서대문감옥’으로, 1923년 5월5일에 다시 ‘西大門刑務所(서대문형무소)’로
개칭했다. 1919년 3·1운동 때에는 민족대표 33인을 비롯하여 수많은 애국시민과 학생들이 이곳에 투옥되었다. 서대문형무소는 일제 때 여느 감옥과 달리 우리나라 18세 미만의 少女囚(소녀수)를 모두 수감하고 있었는데, 3·1운동 때 유관순 열사도 구금되어 惡刑(악형)에 시달린 끝에 순국하였다. 광복 이후 형무소를 대한민국 정부가 쓰게 되면서 1945년 11월21일 ‘서울형무소’로 바뀌었는데, 이 시기에는 반민족행위자(反民族行爲者)와 친일세력들이 대거 수용되었다. 1961년 12월23일에 ‘서울교도소’로 개칭되었다가 1967년 7월7일 ‘서울구치소’로 바뀌는 기간 동안에는 4·19혁명과 5·16군사정변 같은 정치적 변동에 따라 시국사범들이 수감되기도 했다. 도시가 발달함에 따라 서울구치소가 도심에 있는 것이 부적합하다고 하여, 1986년에 移轉(이전) 계획을 수립하고 1987년 11월15일에 경기도 의왕시로 옮겼다. 당시 獄舍(옥사)는 모두 15개동이 있었으나 역사성과 보존 가치를 고려하여 제9ㆍ10ㆍ11ㆍ12ㆍ13옥사와 중앙사, 癩病舍(나병사)를 보존하였다. 1988년 2월20일, 그 중에서 金九(김구), 姜宇奎(강우규), 유관순 등이 옥고를 치른 제10ㆍ11ㆍ12사의 감옥건물과 사형장이 사적 제324호로 지정되었다. 1988년 공원조성공사를 시작, 1992년 광복절 47주년을 맞아 ‘서대문독립공원’으로 개원했다. 1995년에는 정부수립 50주년 기념으로 망루와 시구문 등을 원형대로 복원하고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의 공사를 진행, 1998년 11월5일에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이 개관했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을 관람하기 위해서는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 5번 출구로 나오면 된다. 매주 월요일과 신정(1월1일), 설날, 추석을 제외하곤 상시 개방하는데, 여름철(3월~10월)에는 오전 9시30분부터 저녁 6시까지, 겨울철(11월~2월)에는 오전 9시30분부터 저녁 5시까지 개방하고 있다. 입장료는 성인 1,500원, 청소년 1,000원, 어린이 500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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