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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구 孝子洞 - 壬亂때 孝子(효자)형제의 효성 기린 곳

淸山에 2011. 4. 7. 15:51
 

 

 
 
 
壬亂때 孝子(효자)형제의 효성 기린 곳
 
 
 洞名紀行(1) 서울 종로구 孝子洞: 환관인 火者(화자·내시의 별칭)가 많이 산다고 해 붙은 火者洞에서 변했다는 說도.
李知映(조갑제닷컴)    
 
 

雙旌門이 있었다는 서울 종로구 효자동 100번지(효곡1길 3). 현재는 가정집이 위치해있다.
 
  서울 종로구의 孝子洞(효자동)이란 지명은 선조 때 학자였던 趙瑗(조원)의 두 아들 趙希正(조희정)과 趙希哲(조희철)의 효성을 기리기 위해 이들 형제가 살았던 곳을 쌍효잣골 또는 한자명으로 孝谷(효곡)이라 불렀던 데서 비롯된다.
 
  趙希正·希哲 형제는 임진왜란 때 왜적이 어머니를 해치려 하자 몸으로 막다가 죽었다. 나라에서 이 일을 기려 趙瑗의 집 옆에 雙旌門(쌍정문: 정문이란 충신·효자·열녀에게 왕이 하사하는 문)을 세웠다. 이 쌍정문이 지금의 효자동 100번지(효곡1길 3)에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孝子洞’이라는 동명이 지어졌다고 한다.
 
  조선 초기에는 한성부 북부 順化坊(순화방)에 속해 있다가 1894년(고종 31년) 갑오개혁 때 한성부 순화방 밑의 新橋(신교)·溫井洞(온정동)·東谷(동곡)·白拘洞(백구동)·壯洞(장동) 등과 묶여 하나의 행정구역이 되었다. 일제치하이던 1936년에는 경성부 孝子町(효자정)으로 불리다가 1943년 종로구 효자정에 편입되었고, 1946년 우리 이름 개정 원칙에 따라 일제식 동명을 종로구 효자동으로 변경해 오늘에 이르렀다.
 
  또 다른 說(설)도 있다. 조선 시대 한성부 북부 俊秀坊(준수방)에 내시부가 위치해 있었는데, 경복궁 가까이에 있던 효자동은 宦官(환관: 내시)들의 집단 거주지였다. 환관인 火者(화자: 내시의 별칭)가 많이 산다고 하여 火者洞(화자동)이라 불리다가 후에 이 音(음)과 비슷한 효자동으로 되었다고 한다.
 
  경복궁 서쪽에 위치한 효자동은 조선시대부터 마을이 형성되어 번성했고, 일제시대에는 조선총독부 관사가 들어서고 일본인 집단 거류지인 서울 용산구 원효로와 이어지는 전차노선이 효자로에 개설됐었다. 전차의 종착역이 되어 1968년 전차 궤도가 철거되기까지 이 지명이 널리 알려졌다.
 
  현재의 효자동은 동쪽으로 효자로를 사이에 두고 경복궁과 접하고, 북쪽으로 宮井洞(궁정동), 서쪽으로는 玉仁洞(옥인동), 남으로 昌成洞(창성동)과 이웃하고 있으며 종로구의 북부지역에 위치해 있다.  효자동은 청와대와 맞붙어있다. 1968년 김신조 등 무장공비가 쳐들어온 1·21사태 이후 청와대 경호를 위해 청와대 앞길과 인왕산 등산로가 통행금지 된 후 효자로를 통행하는 사람도 줄었다. 1993년 2월25일 청와대 주변 개방 이후부터 많은 시민들이 이 길을 이용하고 있다.  청와대 앞이라는 지리적 위치 때문에 개발 규제가 있어 대형·고층 건물보다는 녹지와 주택가가 대부분이다.
 
 

  法定洞(법정동)은 조례에 규정된 지역명으로서 공식 문서상에 표기되거나 주소로 쓰이고, 行政洞(행정동)은 주민자치센터가 있는 지역명이다. 따라서 행정동이 여러 개의 법정동을 관리한다.
  효자동 주민자치센터는 효자동·창성동·通仁洞(통인동)·樓上洞(누상동)·樓下洞(누하동)·옥인동의 6개 법정동을 관리하고 있다.
 
 
  2008년 현재 법정동인 효자동의 인구는 853명이다. 효자동은 서울시의 洞 통폐합 사업으로 淸雲洞(청운동)과 합쳐져 청운효자동으로 명칭이 변경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