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15일: 2군 사령부가 있는 대구에서는 이주일 참모장 중심으로 혁명 계획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날 밤 참모장 관사에 공병참모 朴基錫(박기석) 대령, 통신참모 朴升圭(박승규) 대령이 불려왔다. 세 사람은 4·19 혁명 1주년 기념일 시위로 인해 전국에 계엄령이 펴질 때 2군이 취할 조치를 확정했다. 대구에 있는 3개 공병대대와 3개 통신중대를 동원하여 경북도청, 경찰국, KBS 대구 방송국, 도지사 관사, 대구역을 점령하기로 했다. 동시에 대구 전신전화국의 전화선을 절단하여 외부와의 통신을 두절시키기로 했다. ▲4월16일: 박정희의 쿠데타 계획에 반대하는 이한림 1군 사령관 예하의 참모 부서에선 작전처의 육사 8기 장교들을 중심으로 혁명 주체 조직이 형성되었다. 11명의 장교들은 이날 朴龍琪(박용기) 중령 집에 모였다. 이들은 서울에서 거사가 이루어지면 군사첩보대와 235수송중대 병력을 동원하여 이한림 장군의 숙소와 사무실을 포위하고 특공대를 편성, 그를 체포한다는 계획을 확정했다. ▲4월17일: 월요일인 이날 박정희는 군용기편으로 서울로 올라왔다. 오후 명동 입구 아스토리아호텔 객실에서 박정희는 행정반과 작전반의 대표들인 김종필, 오치성, 이석제, 박원빈, 강상욱을 만나 이틀 뒤로 다가온 거사 준비 계획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 박정희는 “복잡한 계획보다는 간단하면서도 실천이 가능한 방법을 선택하라”고 강조했다. 박정희는 명동 강상욱 중령 집으로 옮겨 출동 부대 대표들을 접견했다. 박정희는 한 사람, 한 사람씩 불러내 악수를 하면서 “잘 해 봅시다”고 말했다. 다음날 박정희는 대구로 내려갔다. ▲4월18일: 박정희는 대구에서 광주 육군항공학교 교장인 李元燁(이원엽) 대령을 불렀다. 이 대령은 강풍이 불어 다음날 가기로 했다. ▲4월19일: 박정희는 2군 부사령관실에서, 서울의 주체 세력 장교들은 종로 부근 은성이란 음식점을 통째로 빌려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들은 4·19 혁명 1주년 기념식이 대규모 유혈 폭동으로 발전하여 장면 정부가 계엄령을 선포하면 출동하게 되어 있는 폭동 진압 부대를 그대로 쿠데타 부대로 전환시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모든 시나리오는 이날 대규모 시위가 벌어진다는 전제에서 출발하고 있었다. 그들은 또 김종필, 박종규가 공작한 비밀 학생 조직원들이 시위를 선동해 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이날 아침에 배달된 조간신문엔 ‘경찰은 民統系(민통계) 학생들이 4·19 기념 행진 때 反정부 시위를 선동할 것이란 정보를 입수, 특별 경비 태세에 들어갔다’고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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