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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23) 쿠데타 첩보 입수에도 “朴正熙 일당 잡아넣어라” 지시 없어

淸山에 2011. 2. 16. 11:55

 

 

쿠데타 첩보 입수에도 “朴正熙 일당 잡아넣어라” 지시 없어…
 
 
 5·16 군사혁명 50주년 기념 연재(23)/ ‘장도영 총장이 비호하고 박정희 소장이 지휘하는 쿠데타 모의’란 정보로 해서 방첩대는 과감한 수사를 할 수 없었고 혁명 주체 장교들은 안심하고 모의에 참여했다.
趙甲濟    
 

 

 
 
 혁명계획서와 張都暎 총장
 
 1961년 봄 강원도 화천 북방 사창리에 있던 15사단장 柳陽洙(유양수·駐越 대사 및 동자부 장관 역임) 소장은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났다가 깜짝 놀랐다. 사단 작전 지역 내 산기슭 여기저기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헌병부장을 시켜서 알아보게 했다.
 
 “민주당 정권과 결탁한 업자가 도청으로부터 벌목 허가를 받아 숯을 굽고 있습니다.”
 
 이런 보고를 받은 유 소장은 “세상에, 작전 지역 안에서 무슨 짓이냐”고 호통을 치고는 업자들을 쫓아내 버렸다. 부대 매점의 납품 가격을 조사해 보았더니 시중의 시세보다 비쌌다. 불쌍한 군인들을 상대로 이런 폭리를 취하는 납품 업자가 누군지 알아보았더니 양조장 업자 출신 민주당 국회의원이었다. 유양수 소장은 납품 가격을
내리지 않으려면 철수하라고 했다. 민주당 의원이 말을 듣지 않자 납품을 금지시켰다.
 
주미 한국 대사관에서 무관으로 3년간 근무하고 돌아와서 사단장이 되었던 유양수 소장은 군내에선 온건하고 합리적인 사람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그도 민주화가 몰고 온 자유라는 것이 ‘부패의 자유’이자 ‘자유의 부패’가 아닌가 하는 懷疑(회의)가 들었다고 한다. 정치적이지 않은 일선 사단장들조차도 사석에서 모이면
“이런 정권을 뒤엎어야 해”라고 울분을 터트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4월 중순 유양수 소장은 장도영 참모총장에 의하여 육본 작전참모부 차장 및 전쟁계획통제관으로 발탁되어 서울로 갔다. 당시 미 8군은 우리 육군에 대해서 ‘전쟁계획(War Plan)’을 만들도록 강력하게 요구하여 유 소장이 그 책임자로 뽑힌 것이다. 그는 육군회관 앞마당에 천막을 쳐놓고 작업을 하던 중 5·16을 맞아 다른 일을 맡게 된다.
 
 당시 육본의 副官監(부관감)은 유양수와 동기(육사 특7기)인 方熙(방희) 장군이었다. 부관감은 영관급까지의 육군 인사를 관장하는 요직이었다. 방희 장군은 박정희가 육사 중대장일 때 생도로서 교육을 받았다.
그는 박정희에 대한 강렬한 기억을 한 토막 갖고 있었다.
 
 

 

 

 1949년 박정희가 군복을 벗고 육본 정보국에서 민간인 신분으로 일하고 있을 때였다. 방희 대위는 동기 김홍식과 함께 수표동의 방 두 개짜리 요릿집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옆방에선 박정희가 만군 시절 친구인 이주일,
윤태일과 함께 술을 마시고 있다가 방희 쪽으로 옮겨 합석했다.
 
한참 술을 마시고 있는데 순찰 중이던 용산 헌병대장(소령)이 들어왔다. 헌병대장은 박정희와는 평소 무슨 유감이 있었던지 기분 나쁜 이야기만 털어놓았다. 묵묵부답하던 박정희는 꿀이 담긴 접시를 말없이 손으로 받쳐 들더니 헌병 대장의 얼굴을 향해서 던졌다.
 
 헌병대장의 얼굴에선 꿀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접시는 산산조각이 났다. 낭패를 당한 헌병소령은 권총을
뽑아 장전했다. “죽여 버리겠다”고 소리치면서 박정희를 향해 조준했다. 박정희는 泰然自若(태연자약)에
묵묵부답 그대로였다. 방희 대위가 상을 넘어 가서 권총을 빼앗고 운전병을 불러 헌병대장을 태워 보냈다.
 
그래도 박정희는 말없이 술만 마시고 있었다. 방희 장군은 최근
《老兵(노병)의 追憶(추억)》(육사 7기 특별동기생회)이란 책에서 이렇게 썼다.
 
 <만약 그때 그 헌병소령이 취중에 방아쇠를 당겼더라면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궁정동에서의 최후 때도 같은 광경이 재연되었을 것이라고 확신하기에 무엇인지 운명적인 終生(종생)의 길이 아닌가 느끼게 된다>
 
 

 

   
 
 박정희 장군에 대한 이런 체험을 가진 방희 장군은 사회가 혼란해지자 그가 생각났다. 방희는 박정희를 단독으로 찾아가서 ‘혁명의 불가피함’을 역설했다. 이때도 박정희는 묵묵부답이었다. 5·16 새벽에 육본으로 달려간 방희는 용변을 보고 나오던 박정희 소장과 맞닥뜨렸다. 두 사람은 어색한 웃음을 짓고 헤어졌다고 한다. 박정희는
좀처럼 속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의 침묵은 상대를 긴장시키고 상대를 자신의 磁場(자장) 안으로
끌어들이는 힘이 있었다.
 
 박정희가 거사일로 정한 4월19일은 다가오고 있었다. 박정희의 증언을 듣는다.
 
 <4월10일경이라고 생각되는데 그때는 상당히 계획이 진전된 때인데 우리가 논의하여 기록해 놓은
혁명위원회의 구성, 정부 기구의 개편, 임시헌법 등을 녹취 기재한 서류를 장도영 장군에게 보이며 4·19가
무사히 넘어가겠느냐, 무슨 일이 있지 않겠느냐 등의 이야기를 한 끝에 그 서류를 장 장군에게 교부하고
돌아왔다. 그런데도 장 장군이 군사혁명이 있으리라는 것을
전연 알지 못했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말이다>
 
 이상의 진술은 5·16 거사 뒤에 장도영과 그 측근들이 反혁명 재판을 받고 있을 때 박정희가 증인 자격으로
한 내용이다. <신동아> 1984년 8월호에 실린 장도영의 회고는 다르다.
 
 <4·19 혁명 1주년을 4, 5일 앞둔 일요일 아침 내가 총장 공관에서 정장으로 단장하고 육군본부 교회에 나가려고 현관에 나서자 박정희 장군이 불쑥 나타났다. 그는 “2군 상황과 4·19 혁명 1주년 기념일에 대비할 계획에 대해
보고할 일이 있어서 잠깐 들렀습니다. 시간을 좀 내주십시오”라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당신 보다시피
지금 예배당으로 가는데 시간이 다 됐다”고 하였더니,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습니다.
속히 간략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하므로 할 수 없이 현관에서
다시 응접실로 들어와 둘이 마주 앉았다.
 
 당시 육군은 이미 3월에 서울 지구 주둔 부대와 일선 제5사단의 출동을 포함한 폭동 진압과 질서 유지를 위한
‘비둘기작전 계획’의 지휘부 연습을 끝내고 이번에 무슨 시위 난동이 있어서 계엄이 선포되면 계엄 업무를
한번 본격적으로 철저히 수행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박정희는 4·19에는 무엇이 꼭 일어날 것이라면서 “지금 군 사령관(최경록 2군 사령관은 도미 시찰 여행 중)도
부재 중이고 해서 제가 대략 계엄 시행 계획을 작성하여 놓았습니다” 하며 접은 원고지 몇 장을 내놓았다.
 
나는 “잘 했소”하면서 “시간이 있을 때 읽어 보지요”하고 표지에 ‘서울 지구 계엄 실시 계획안’이라고 쓰인
원고를 옆에 서 있는 부관에게 주며 “저 책상에 갖다 두라”고 하고 일어나서 예배당으로 향했다. 
  

 

 

 

  
 
 그날 저녁 책상에 있는 그 계획서를 잠깐 들여다보니 계엄이 선포되면 그 해당 지역에
군정을 실시하게 되는 것이며, 전국 또는 서울 지역의 계엄일 경우에는 현행 헌법에 의해서 육군 참모총장이
계엄사령관이 되며 계엄 업무를 육군의 일상 업무와 분리하기 위해서 별도로 계엄사령부를 설치하고 별개의 참모진으로 그 업무를 수행케 한다는 내용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부대 배치 약도가 첨부되어 있었다. 아무 특이한
것도 없었고 또 그 내용이 이미 비둘기작전 계획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어서 박 장군 자신이
제6관구 사령관과 긴밀한 연락을 해야 할 따름이라고 생각했다>
 
 
 逆情報
 
 박정희 소장이 장도영 총장에게 혁명 계획서를 건네주었느냐의 여부에 대해서 두 사람의 증언은 타협이 불가능할 정도로 상반된다.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거짓말을 한 것이다. 김종필 전 총리의 최근 증언은 이렇다.
 
 4월 중순에 처삼촌인 박 소장이 부르더니 “혁명 계획서 좀 가져와”라고 하더란 것이다.
 
 “뭐 하시게요.”
 
 “장도영 총장에게 이것 좀 보여야겠어. 여러 가지 이유로 장 총장이 선두에 서 주었으면 좋겠는데 설득을
좀 했으면 해.”
 
 “뭘 믿으시고 이걸 내보여줍니까. 재고하실 수 없겠습니까.”
 
 “장도영 총장하고 나는 이야기할 수 있는 사이야. 나한테 맡겨. 날 믿고 줘.”
 
 김종필은 내키지 않았지만 부대 동원 계획, 혁명 공약, 취지문 등 서류를 꺼내드렸다고 한다.
 
 “되받아 오시는 겁니다. 그냥 놓고 오시는 게 아니라 보고 달라고 하셔서 갖고 오셔야 합니다.
 원본인데 사본은 없습니다.”
 
 김종필은 혁명 계획서를 건네주면서 원본은 천장 위에 숨겨 놓고 사본을 박정희에게 넘겨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분이 ‘염려 마’ 하시면서 가져가셨는데 나중에 올 때는 이걸 놓고 오신 겁니다. 가슴이 덜컥 했지요. ‘대체 뭘 믿고 그걸 놓고 오셨습니까’ 하고 따졌어요. ‘그걸 좀 보고 충분히 생각한 뒤에 답할 테니까 내일까지 좀 달라는데 안 줄 수 있나. 그리고 그렇게 믿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이야기할 필요가 없지 않나’라고 하셔요. 박 장군께선 ‘장도영 총장이 그걸 읽어 보고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서 우리 계획을 변경할 수도 있지 않나’는 취지로 말씀하시더군요. 하지만 나는 그날 저녁에 잠을 못 잤어요. 그 계획서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김종필 전 총리는 이렇게 덧붙였다.
 
 “장도영 총장은 그때 박정희 장군이 추진하는 혁명 계획 이외에 미국 측이 추진하던 정권전복 계획에도 관심을 두고 있었습니다. 미국 측은 그때 공작원들을 불러와서 장도영 총장을 내세워 장면 정부를 쓰러뜨리는 공작을 하고 있었어요. 장도영 총장은 우리와 미국 측 양쪽에 다리를 걸치고 있었으니 마음을 정하지 못한 것이지요. 미국 측의 공작 사실은 혁명이 성공한 뒤에야 정보부에서 밝혀낸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미국 공작원들을
추방해 버리고는 없었던 일로 하기로 당시 미국 대사와 합의했어요.”
 
 당시 육사 8기 그룹의 핵심인 오치성 대령은 김종필에게 ‘박정희 장군에게 녹음기를 드려 장도영 총장과의 대화를 녹음해 오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말한 적도 있다고 한다. 박정희는 김재춘(6관구 사령부 참모장) 대령 등 측근들에게도 장도영 총장에게 혁명 계획서를 갖다 주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따라서 박정희의 측근들은
장도영이 ‘그 문건을 받아 보지 않았다’고 한 해명을 믿지 않고 있다.
 
 장도영은 1988년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필치로 보니 내가 받은 것은 박정희가 쓴 ‘비둘기작전 계획서’였지 김종필 씨의 글씨가 아니었다”고 말했다. 물론 미국이 자신을 미는 쿠데타 공작을 하고 있었다는 주장도 부인했다. 장도영의 해명 중 납득이 잘 가지 않는 부분이 있다. 장도영의 설명이 사실이라면 ‘통상적인 비둘기작전 계획을 왜 박정희가 직접 가져와 교회로 나가는 총장을 굳이 붙들어 두고 보고했을까’ 하는 의문이 남는 것이다.
 
 이 쟁점은 장도영이 박정희의 모의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는가를 판단하게 해주는 문제다. 혁명 전후의 흐름 속에서 사실 관계를 종합적으로 판단할 때 장도영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힘든 부분이 너무 많다.
 
 당시 서울 지구 방첩대장은 이희영 대령이었다. 그는 2군 사령부 방첩대장으로 있을 때 박정희로부터 “버마식 쿠데타를 하자”는 제의를 받은 적도 있었으니 서울로 올라온 뒤에는 박정희 소장을 더욱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그는 군내의 족청계 장교들도 쿠데타를 모의하고 있다는 첩보, 족청계로 지목된 박병권 소장[본인은 李範奭(이범석) 국방장관의 부관이었지 이범석이 만든 족청, 즉 민족청년단에 가입한 적은 없다고 한다]과 박정희가 비밀 회동했다는 첩보도 들어와 이를 확인한다고 바빴다. 이희영은 “4월 중순부터는 박정희 소장과 김종필을 중심으로
한 쿠데타 계획에 대한 확실한 정보를 수집하여 李哲熙(이철희) 방첩부대장에게 보고했다”고 말했다.
 
 장면 총리와 친한 韓昌愚(한창우) 경향신문 사장이 선물한 독일제 녹음기로 육사 8기 장교들의 모의를 녹음한 적도 있다고 했다. 이들이 무교동의 한 호텔에서 비밀리에 만나는 것을 주체 세력 내에 박아 둔 프락치로부터 미리 통보받아 그 방에 녹음 장치를 했다고 한다. 이희영 대령도 리시버를 끼고 녹음 내용을 들어본 적이 있었다.
 
모의에 관한 정보를 방첩대에 제공해 준 장교는 5·16 거사 뒤에 고위직으로 출세했다고 하는데 이희영은 그의
 이름을 밝히길 거부했다. 이희영의 서울 지구 방첩대는 박정희가 4월19일을 거사일로 잡고 있다는
첩보까지 입수했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보고를 상부로 올려도 “박정희 일당을 잡아넣어라”는 지시가 내려오지 않았다는 점이다. 자연히 장도영 총장이 박정희 소장 그룹과 짜고 쿠데타를 추진하고 있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총장이 비호하고 박정희
소장이 지휘하는 쿠데타 모의’란 정보로 해서 방첩대는 과감한 수사를 할 수 없었고
혁명 주체 장교들은 안심하고 모의에 참여했다.
 
 정보를 활용할 줄 아는 박정희는 이때 張太和(장태화·서울신문 사장 역임)를 통해서 장면 정부 측에 대한 정보 공작을 하고 있었다. 장태화는 1949년에 박정희와 함께 육본 정보국 이용문 국장 아래서 문관으로 근무한 적이 있었다. 장태화의 형은 박정희와는 대구사범 동기였다. 장태화는 정치 정보 수집이 전문이었고 정계에 발이 넓었으며 뛰어난 時局(시국) 감각을 갖고 있었다. 1952년 부산 정치 파동 때는 이용문─박정희가 이종찬 당시 육군 참모총장을 업고서 추진하던 이승만 정권 전복 계획에도 깊숙이 관여했다. 박정희는 5·16 혁명을 준비하면서
장태화로부터 시국 관련 정보를 정기적으로 보고받고 있었다.
 
 비공개 <혁명실기>에 따르면 1961년 3월 박정희는 장태화에게 두 가지 임무를 부여했다고 한다. 이쪽의 활동이 정보기관에 노출되지 않도록 역정보를 흘리는 일과 정보기관이 어느 정도로 이쪽 사정을 파악하고
있는가를 알아서 보고해 달라는 것이었다.
 
 장태화는 평소 친하게 지내던 치안국 特情課(특정과) 정보분실장 崔蘭洙(최난수)를 만나 족청계 쿠데타설을 흘렸다. 장면 총리와 가까운 신부와 국회의원을 만나서도 같은 역정보를 띄웠다. 당시 장면 총리, 경찰, 군 정보기관에 들어간 족청계 쿠데타 첩보는 많았지만 실체가 없는 과장된 것이었다. 역정보로 띄운 족청계
쿠데타설로 박정희 측에 대한 당국의 정보 수집 활동 노력은 분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