白雲鶴의 예언 행정반장으로서 혁명 성공 후의 국정 방향을 짰던 이석제(총무처장관, 감사원장 역임)는 ‘육군 중령이 신문 기사와 도서관에서 수집한 짧은 지식을 바탕으로 혁명 정부의 전략과 계획을 수립했으니 그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는 짐작이 갈 것이다’고 고백했다. 행정반에서 연구된 사안들은 보고서로 작성하여 박정희 장군에게 보고하고 한 부는 이석제 중령이 보관했다. 참고 자료는 즉시 불태웠다. 이석제는 혁명이 성공하면 헌법의 기능을 정지시키고 임시 헌법을 공포하기로 마음먹었다. 임시 헌법안을 검토하는 자리에서 김종필이 차관직에 군인을 임명하여 민간인 장관을 끌고 국정을 개혁하는 발상을 제안했다. 차관은 국무위원이 아니기 때문에 강력한 국정 운영이 어렵지 않을까 하는 반론이 많았다. 김종필이 제시한 국가재건최고회의란 명칭에 대해서도 “최고회의라고 하니까 공산 국가에서나 즐겨 쓰는 용어 같네”란 반응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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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제는 민주당에서 수립하고 있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안을 구해보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이석제의 기억에 따르면 박정희는 혁명 준비 단계에서부터 외자 도입에 의한 경제 개발과 일본의 역할에 대해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석제는 박정희와의 이런 대화를 소개하고 있다. <박정희: “국가를 지도하려고 마음먹은 사람들은 우선 두 가지 문제에 근본적인 대안을 가져야 합니다. 우선 국민들이 배고프지 않게 밥을 먹이고, 그 다음에 나라를 자기네 힘으로 지키게 하는 것이 통치의 근본입니다.” 이석제: “각하, 국가 근대화란 뭐를 어떻게 한단 말입니까?” 박정희: “이론상으로는 복잡하고 나도 잘 모릅니다. 하지만 쉽게 해석하자면 농업 사회를 뜯어고쳐서 공업화를 추진한다는 정도로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거요. 우리나라 인구가 3000만인데 언제 농사를 지어서 국민들의 배를 불리겠소. 농토에 매달리는 농민들을 공장으로 끌어내어서 소득을 높여 주는 국가 시스템을 잘 연구해 봅시다.” 이석제: “공장 지을 돈은 어디서 조달합니까?” 박정희: “가진 게 없다고 굶어 죽을 수는 없으니까 우선 급한 대로 돈 있는 집에 가서 돈을 좀 빌려다가 장사를
해서 갚으면 될 게 아니오.”> 그때 혁명 주체들은 자신들이 미군 몰래 병력을 동원하여 혁명을 일으키면 미국이 원조를 끊을 것이라고 걱정했다. 박정희는 “너무 걱정하지 맙시다. 미국 문제도 잘 해결될 거요. 앞으로는 일본이 있잖소”라고 했다고 한다.
이석제가 5·16 거사일까지 검토하여 보고서로 작성한 혁명정부 정책안의 제목은 대강 이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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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 헌법 제정, 국가재건최고회의 구성, 반공 태세의 실질적 정비 및 강화, 민족 자주 외교의 정비 강화, 재건 국민운동 전개, 정치 활동 금지와 정당 사회단체 해산, 폭력배 단속과 사회 정화, 교통질서 확립과 공중도덕 앙양, 병역 기피자 처리, 밀수 근절과 稅吏(세리) 부패 방지, 공무원 인사 제도 개혁, 행정 관리 제도 개혁, 공무원 처우 개선, 금융 민주화, 부정 축재자 처리, 원조 효율의 제고, 稅制(세제) 개혁, 언론계 정비, 증권 시장 육성,
중소기업 육성, 수출 진흥과 수입 시책, 산림녹화 및 조림 사업 강화, 농협의 운영 쇄신과 확대,
광산 개발 촉진, 민족 예술 문화의 진흥, 水利(수리) 사업의 혁신…> 4월19일로 거사일이 결정되자 주체 세력 장교들은 자신들에게 부여된 임무에 따라 구체적인 행동 계획에
들어갔다. 김종필은 서울 중구 정동에 있던 KBS 점령 계획을 세운다, 장면 총리 체포 계획을
세운다 해서 바쁘게 돌아다녔다. 공주중학교 후배인 金石野(김석야)는 그때 방송작가로 근무하고 있었다. 어느 날 김종필이 김석야를 찾아왔다. 근처 다방으로 후배를 불러낸 김종필은 “나는 요사이 따라다니는 사람이 많아”라면서 벽을 등지고 앉았다. 그는 “우리 아이를 어린이 합창단에 넣으려고 하는데 무슨 방법이 없을까” 하고 말을 꺼내더니 “나라가 이러다간 안 되겠어. 토치카 공사비까지 중간에서 다 떼먹으니 전쟁 나면 우리 사병들이 다 죽게 생겼어”라고 했다.
며칠 뒤 김종필은 또 방송국에 와서 이번엔 좀 이상한 질문을 했다. “방송국에서 방송을 내보낼 때 키 같은 게 있는 거요?” “주조정실이란 데서 합니다. 거기서 연희송신소로 전파를 보내면 방송이 됩니다.” “숙직은 어디서 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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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야는 김종필을 데리고 당직실을 구경시켜 주었다. 그는 ‘방송국을 견학하러 와서 당직실을 보자는 사람은 처음인데…’ 하는 생각만 했다. 김종필은 방송국의 구조를 확인한 뒤엔 총리 체포조의 팀장인 박종규(대통령 경호실장 역임) 소령을 데리고 반도호텔에 들어가서 “이것이 총리실이다”고 가르쳐 주었다. 鄭一亨(정일형) 외무장관의 체포를 책임진 오치성 대령은 공수단 1개 분대를 배정받아 놓고 있었다. 그는 잡지에 난 정일형의 얼굴 사진을
오려서 갖고 다녔다. 전화번호부에서 정일형의 주소를 알아내 지형 정찰을 해두었다. 김종필 중령과 함께 정군 운동을 주동했다가 함께 강제 예편당했던 석정선은 혁명 모의에선 빠져 있었다.
그는 트럭을 두 대 가지고 업자에게 빌려 주는 운송 사업을 하고 있었는데 교통 사고를 자주 일으켜 골치를 썩이고 있었다. 석정선이 하루는 김종필을 찾아오더니 점을 보러 가자고 했다.
두 사람은 정동의 한 여관 안채를 빌려 손님을 맞던 白雲鶴(백운학)을 찾아갔다. 먼저 온 여자 대여섯 명이
기다리고 있다가 안에서 부르면 들어가곤 했다. 석정선이 불려 들어가고 김종필은 문 밖에서 기다리게 되었다.
백운학은 석정선의 관상을 보다 말고 힐끗 김종필을 쳐다보더니 한마디했다. “혁명하시누만.” 김종필은 거의 반사적으로 이렇게 말했다. “아니, 누굴 죽이려고 그러시오?” “다 됐어요. 걱정 마시오. 혁명하겠다고 얼굴에 다 씌어 있는데 뭘 그러시오.” “내 관상은 볼 필요가 없어요. 그 친구나 잘 봐주시오.” 백운학은 석정선을 쳐다보더니 대뜸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어허, 그거 파쇼. 네 발 달린 거 가지고 다니누만. 그게 사람 죽여요. 빨리 파시오. 옷은 이렇게 입고 왔지만 당신네들 중령, 아니면 대령인데 아직 官祿(관록)을 먹고 살 사람이니까 자동차 같은 거 손대지 마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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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우려 1961년 봄 미국 정부도 장면 정부의 지도력에 회의를 갖기 시작한다. 서울에 와 있던 미국 원조 기관 유솜(USOM)의 부원장 휴 D. 팔리는 한국의 부패와 유솜의 정책에 대해 환멸을 느끼고 사표를 제출한 뒤 워싱턴으로 돌아갔다. 유솜의 상급기관인 국제협력처(ICA=International Cooperation Agency)는 팔리의 사표 수리를
보류하고 ‘당신의 의견을 보고서로 만들어 국무부 관리들과 토의해 보자’고 했다. 팔리는 ‘1961년 2월 현재 한국의 상황’이란 제목의 보고서를 제출했다. 이 보고서는 3월6일 케네디 대통령의 안보 담당 특별보좌관 대리인 로스토 박사에게 전달되었다. 보고서는 ‘장면 정부의 瀆職(독직), 부패, 무능이 한국을 위기로 몰고 가고 있는데도 미국 정부는 수수방관하고 있다’면서 ‘오는 4월19일 혁명기념일에 대중의 불만이 폭발할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했다. 팔리 부원장은 또 ‘대통령의 특사를 한국에 급파하고 친서를 전달하는 등
긴급 대책이 필요하다’고 건의했다. 팔리의 이 보고서는 워싱턴 관가에 경보를 울렸다. 3월15일 대통령 직속인 국가안보회의 요원 로버트 W. 코머는 로스토 박사 앞으로 이런 요지의 메모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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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제의 본질은 다음과 같다. a. 자원과 기술이 부족한 빈곤한 나라 b. 견뎌 내기 힘들 정도의 군사비 지출 c. 민주 정부의 경험 부족에 기인한 부패의 확산 d. 민족주의적 열정의 浮上(부상)과 좌절감 한국 문제의 본질은 경제난이다. 다음 10년간 미국 정부가 취해야 할 조치로서 한국군의 상당한 감축도
검토해 볼 만하다. 減軍(감군)으로 남은 미국 예산을 한국 경제 발전에 투입할 수 있을 것이다> 이날 로스토 박사는 케네디 대통령 앞으로 짤막한 보고서를 올려 한국 문제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켰다.
이 보고서의 결론 부분에서 로스토는 이런 건의를 했다. <한국에 대한 우리의 많은 원조는 한국이 세 번째로 추락하는 것을 막는 데 쓰여야 할 뿐 아니라 한국을 전진시키도록 하는 데 쓰여야 한다. 이승만 정권이 퇴진한 다음 한국 사회에는 이런 전진에 우리와 함께 동참할 만한 세력이 생겨났다. 이 세력은 그러나 우리의 반대 세력으로 변할 수도 있다. 각하께서는 이 문제로 러스크
국무장관과 한번 대화를 나눠보는 것이 좋을 것으로 판단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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