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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보물 창고의 흔적은 흉노가 서쪽으로 이동한 길가와 그 후예인 훈이 활동한 유럽 전역에서 고스란히 찾아볼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유물로는 옥으로 장식한 검과 뼈 활고자를 부착한 활, 각종 청동 거울과 비단 등 진한대의 유물과 더불어 흉노 특유의 구리솥을 꼽을 수 있다. 이러한 유물들의 서전은 대부분이 3~5세기에 이루어졌으나 일찍이 1~2세기의 것도 있다. 이것은 흉노가 동방 문물의 서방 전파에서 선구자적 역할을 했음을 말해준다.
노인울라 고분군을 비롯한 여러 흉노 유적과 이렇게 서전한 호한문화의 유물이 발견됨에 따라 베일에 가렸던 흉노의 모습이 차츰 드러나고 있다. 목축 경제를 근간으로 하는 유목사회는 농경사회와는 달리 계급(신분) 분화가 명확하지 않은 반면에 구성원들의 혈연이나 지연 의식은 강하다. ‘보드’라 불리는 혈연 공동체가 ‘보둔’이라고 하는 부족 공동체로 확대되고, 나아가 그것이 정치적 연합체인 흉노 사회를 구성함으로써 흉노 사회는 부족 연합체적인 유목국가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정치나 사회 조직은 좌우, 동서, 흑백으로 나눠 상호 견제적인 균형을 기하려는 이원화(二元化) 제도를 채택하고, 군사 조직은 십진법에 따라 십, 백, 천, 만 단위로 편성한다. 이러한 이원화 제도나 십진법은 후일 돌궐이나 위구르를 비롯한 투르크계 국가들로 전승되어 투르크 사회의 한 특징으로 정착되었으며 몽골이나 동아시아 국가의 정치, 군사 체제에도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
노인울라 고분군 제25호분에서 출토된 청동제 한나라 거울 조각
흉노 사회의 경제 구조에서 특기할 것은 목축이나 수렵을 근간으로 하면서도 농경도 더불어 경영했다는 사실이다. 고분에서 돌절구와 농작물 종자 및 농경과 관련된 도기(낟알 저장용)가 발견된다. <한서> ‘흉노전’에는 기원전 88년 가을 흉노 지역에 몇 달 동안 비와 눈이 내려서 ‘곡식이 영글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어 농사를 짓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기원전 2세기 이후에는 흉노의 창고에 식량의 여분이 비축될 정도로 농경이 발달했다고 한다. 흉노가 철제 농기구를 제작ㆍ사용하고 한으로부터 농경 기술과 농기구를 수입함으로써 그것이 가능했던 것이다. 이처럼 유목민이라고 해서 무턱대고 농경을 무시한다든가, 농산품 결핍 때문에 농경민과의 약탈전이 불가피하다는 식의 교조적 통념은 재고되어야 할 것이다. 농경에 따라 도시가 건설되어 정주 생활을 한 흔적도 발견된다.
노인울라 고분군 제6호분에서 출토된 비단 방한모
흉노인들이 창조하고 향유한 문화에 관해서도 전승된 예술이나 남겨놓은 유품을 통해 그 모습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 다들 흉노에게는 문자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있었을 개연성을 시사하는 사실 몇 가지가 있어 주목된다. 사적에는 흉노 사신들이 선우의 서신을 휴대하고 다녔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렇다면 그 서신은 필경 무슨 문자로 씌어졌을 터이므로 문자가 있었을 법하다. 노인울라 고분군 16호분을 비롯한 여러 유적에서 칠기나 도기 밑바닥에 영어 자모 ‘M’이나 ‘Y’ ‘P’ ‘S’, 한자 ‘人’자와 비슷한 부호가 새겨져 있다. 이것들이 어떤 문자 부호가 아닌지 의문시된다. 비록 문자는 없었지만, 무용담이나 전패의 아픔, 권력의 흥망 등을 주제로 한 민요는 전승되어 왔다. <사기> ‘흉노전 색은(索隱)’조에는 ‘서하구사(西河舊事)’란 흉노 민요 한 수가 실려 있다. 내용은 기원전 121년 한에 격파되어 기련산(祁連山)과 연지산(燕支山, 지금의 감숙성 하서주랑)을 잃은 슬픔을 노래한 것이다.
기련산 잃으니 육축이 번식할 수 없게 되고
失我祁連山 使我六畜不蕃息
연지산 잃으니 부녀들 얼굴 기색 없게 되었네
失我燕支山 使我嫁婦無顔色
노인울라 고분군 제6호분에서 출토된 모직 카펫의 동식물 자수 문양
여기서 육축(六畜)은 유목기마민족인 흉노인들에게 중요한 여섯 가지 가축, 즉 말ㆍ소ㆍ양ㆍ닭ㆍ개ㆍ돼지를 말한다. 그리고 ‘연지(燕支)’는 여인들의 얼굴 치장용 ‘연지(?脂)’나 흉노어에서 아내를 이르는 ‘연지(閼氏)’와는 동음이의어이다. 흉노는 이러한 차음우의(借音寓意)를 교묘하게 이용해 땅 잃은 아픔과 슬픔을 민요화하는 지혜를 발휘했다.
흉노인들의 예술은 주제나 기법에서 그들의 생활 모습을 사실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도안이 정교하고 색채가 화려하며 색색의 실로 수놓은 카펫 유품은 보기에도 진귀하다. 특히 펠트 위에 다양한 색깔의 털실을 사용해 아플리케 기법으로 장식한 수예품은 흉노의 특징적인 예술품으로 평가 받고 있다. 흉노의 신앙 체계는 농경 사회의 지신(地神)이나 유목민들의 토템 신앙보다는 천신(天神) 사상이 강한 것이 특징이다. 선우는 최고 통치자일 뿐만 아니라 천신의 아들로서 그 뜻을 지상에 펴는 사제장이며 대리자이기도 하다. 선우들이 한나라 황제에 보내는 문서에는 늘 자신을 ‘하늘이 세운 흉노 대선우(天所立匈奴大單于)’이니, ‘천지가 낳고 일월이 설한 흉노 대선우(天地所生日月所置匈奴大單于)’라고 자칭한다. 그들은 천지 신령의 화신으로서의 우상이나 무당(胡巫)도 믿는다. 고분에서 출토된 금인상(金人像)이나 목용(木俑)이 바로 그러한 우상이다. <한서> ‘소무전(蘇武傳)’에 보면 흉노에서 칼로 자살한 소무가 한 무의(巫醫)의 구급 치료로 반나절 만에 회생되었다는 기사가 있는데, 이것은 신과 인간 간의 영적 매체로서의 무당은 주술과 의술을 겸행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흉노가 역사 무대에 등장한 시기는 원시 씨족사회의 유습이 적잖게 남아 있던 시기다. 그런 전형적 유습을 혼인 풍습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씨족 관계의 틀을 유지하기 위해 계모를 아내로 삼는 수계혼(收繼婚)과 형수나 제수를 아내로 삼는 수혼(嫂婚)이 바로 그 일례이다.
일행이 머물었던 도간 캠프 전경
이러한 이질 문화를 지니고 있는 흉노가 신라의 김씨 ‘조상’이라니, 신라인에게 흉노의 ‘피가 흐른다’느니 하는 의아스러운 화제가 요즘 장안에 자자하다. 몇 마디로 해명이 가능한 주제가 아니라서 상론은 따로 미루고, 근간의 설왕설래에서 불급된 부분 하나만을 지적코자 한다. 기왕 신라 김씨의 조상을 중국에서 찾으려 한다면 제대로 찾아봐야 한다는 것이다. 중국 김씨에는 황제의 아들 소호(少昊, 金天氏)를 시조로 하고 팽성(彭城, 현 徐州)을 본향으로 하는 김씨와 흉노의 휴도(休屠) 왕자 김일제(金日?)를 시조로 하고 경조(京兆, 현 西安)를 본향으로 하는 김씨의 2대 계보가 있어 엄연히 구별된다. 그럼에도 소호와 김일제를 하나의 혈통으로 혼동한 ‘대당고김씨부인묘명(大唐故金氏夫人墓銘)’과 소호 언급(?) 없는 ‘문무대왕릉비’를 근거로 서로가 별족인 화하족(華夏族)의 소호를 시조로, 흉노족의 김일제를 중시조로 엮는 이른바 신라 김씨의 ‘뿌리 인식’ 운운은 그것이 관념상이건 실제상이건 간에 일견해 자가당착적임을 갈파하게 된다. 이 한 점만 파고들어도 무슨 실마리가 잡힐 듯하다. 아울러 아리송한 비문 몇 글자에만 매달리지 말고 시야를 세계로 넓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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