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정치.사회/파헤친 歷史

둔황 석굴

淸山에 2011. 1. 27. 16:35
 

 

 
 
둔황 석굴
  
 
[아래의 지도와 글과 사진은 내셔널 지오그래픽 2010년 6월호에 실린 특집 일부를 발췌한 것입니다. 둔황(敦煌) 석굴은 중국 간쑤성 둔황현 밍샤산(鳴沙山) 절벽에 남북 2킬로미터에 걸쳐 만들어진 486개의 석굴로 이루어져 있으며, 일명 막고굴(莫高窟) 또는 천불동(千佛洞)이라고도 합니다. 기록에 따르면 석굴의 개착은 전진(前秦) 366년부터라고 합니다. 그 후 북위ㆍ서위ㆍ북주ㆍ수ㆍ당ㆍ송ㆍ원에 이르기까지 여러 왕조에 걸쳐 완성되었습니다. 일본의 저명한 역사소설가 이노우에 야스시(井上靖)의 <둔황(敦煌)>은 11세기 중국사를 배경으로 훗날 발견된 불교 서적들이 막고굴에 숨겨지게 된 경위를 애절한 사랑을 줄거리로 엮은 소설인데요 오래전 읽었던 감동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함 읽어보시도록 권하고 싶은데 책이 절판된 것 같습니다. 정음사판 세계문학전집 중 1권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저두 책을 잃어버려서... 아쉽네요... 도서관에서나...]
 
 
 
 
 
 
사막에는 해골들이 마치 경고 표지판처럼 모래 속에 무더기로 쌓여 있었다. AD 629년 실크로드를 지나던 불승 현장은 빛바랜 뼈들을 보고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교역로이자 정복로이며 사상의 전파로인 이 길에 도사리고 있던 위험을 감지했을 것이다. 현장은 당나라 서쪽 변방의 사막에서 휘몰아치는 모래 폭풍에 갇혀 방향을 잃고 쓰러질 지경에 이르렀다. 후끈후끈 달아오르는 열기로 시야가 흐려지면서 환각에 빠진 현장은 눈앞 멀리 모래 언덕 위에서 무장 병사들이 떼로 달려오는 모습이 보여 공포에 떨었다. 그러나 이보다 더 그를 두려움에 떨게 만든 것은 대상을 터는 칼 든 도적들이었다. 이들은 지중해와 페르시아 궁정을 향해 서쪽으로 가는 대상들에게서 실크와 차, 도자기를 빼앗았고 세계 최대 규모의 도시에 속하던 당나라 수도 장안을 향해 동쪽으로 가는 대상들에게서는 금은보석과 말들을 강탈했다.
 
 
 
현장이 이런 위험 속에서도 순례를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불교 덕이었다고 나중에 자신의 여행기에서 회고했다. 불교는 실크로드를 따라 전파된 또 하나의 귀중한 사상이었다. 이 길을 따라 마니교, 기독교, 조로아스터교, 후에 이슬람교까지 유입되었으나 AD 1~3세기에 인도에서 전파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이는 불교만큼 중국에 깊은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현장은 귀국 후 20년 동안 인도에서 가져온 불교 경전을 연구하고 번역했다. 이 불경들이 나중에 중국불교의 토대가 되었고 불교가 세계 전역으로 확산되는 데 윤활유 역할을 했을 것이다.
 
 
장장 16년에 이르는 여정의 막바지에 현장이 도착한 곳은 실크로드의 오아시스 도시 둔황이었다. 이곳에선 사람들과 문명이 교차하면서 불교계의 가장 위대한 경이에 속하는 막고굴이 조성되고 있었다.
 
(기사 본문 중에서)
 
 
 
 
당 중기(781~847)에 제작된 15m 길이의 부처가 고요히 열반에 들기 위해 옆으로 누워있다. 석굴 벽에는 번민에 찬 추종자들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중국 고비 사막의 모래 언덕 아래 미루나무가 줄지어 자라고 있다. 이를 통해서 이곳에 계절에 따라 강물이 흘렀고 이 강물에 침식되어 길이 1.5km의 절벽이 생겨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AD 4세기경에 불교도들은 이 절벽 바위 표면을 파서 석굴을 만들고 불화와 불상으로 어두운 내부를 장식하기 시작했다.
 
 
 
 
 
 
 
금박과 보석으로 장식한 덕에 입체감이 살아 있어 더욱 사실적으로 보이는 7세기 관음보살 상. 인도 불교에서는 남성으로 묘사됐던 관음보살이 중국으로 넘어가면서 차츰 여성으로 변모하는데 중국 고대 신앙에서 자비의 신은 여신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제320호굴의 벽화에 희뿌옇게 비어 있는 공간들은 하버드대학교의 역사학자 랭든 워너가 벽에서 직접 그림을 뜯어내면서 생긴 흉터이다. 워너를 비롯해 많은 이들이 20세기 초 둔황 석굴에서 수많은 유물을 가져갔다. 이렇게 해서 사라진 일부 조각들이 세계 각국 박물관에서 전시되고 있다는 사실에 중국인들은 분노하고 있다.
 
 
 

 

 
 
 
제249호굴 안의 벽과 천장에는 힌두교와 도교 및 중국의 전통신들이 모두 망라되어 있어 다양한 전통 문화가 뒤섞여 존재하는 막고굴의 특성을 여실히 드러내준다.
 
 
 
 
제465호굴을 장식하고 있는 13세기 탄트라 풍의 벽화들은 거의 마지막에 막고굴에 그려진 것으로 성적 묘사가 매우 노골적이다.
 
 
 
 
 
 
실크로드의 또 다른 변경 도시인 둔황 동부의 숴양 근처에는 약 19m 높이의 담이 둘러쳐진 인도 양식의 탑이 남아 있다. 원래 실크로드를 따라 이동하는 무역상들을 감독할 목적으로 건설한 이 변경 도시에 과거에는 수천 명이 거주하기도 했다.
 
 
 
 
무려 900년 동안이나 숨겨져 있다가 모습을 드러낸 그 유명한 장경동은 현재 해외 유수의 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막고굴 유물의 대다수가 출토된 곳이다. 석굴 안에는 약 5만 점의 두루마리 문서와 불화가 보관되어 있었다. 안쪽 깊은 곳에서 명상에 잠긴 채 앉아 있는 인물은 9세기 중반 둔황 지역의 고승이었던 홍변대사이다.
 
 
 
 
갑옷을 입은 사천왕 중 하나가 외계 악귀를 발로 누른 채 눈을 부릅뜨고 있다. 8세기의 이 불화는 불교의 거친 우주관을 보여준다. 둔황문물연구원의 연구원들 역시 석굴 수호를 위해 눈을 부릅뜨고 있다. “석굴이 중국에 있다 해도 전 세계인의 유물이죠.” 환진시 원장은 말한다.
 
 
 
 
 Dun Huang Fresco in China